조선시대 지방자치제도사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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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수 작성일13-06-19 11:52 조회6,27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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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지방자치제도
지방자치의 원형으로서 향청연구는 아직 미개척의 새로운 분야이다.
1941년 일본학자의 <선초에 있어서의 경재소와 유향소에 대하여>가 있고, 진단학보에
실린 이태진선생의 <사림파의 유향소복립운동>이 수작이나 시기적으로 선초에 한정된 것이대부분이다. 본 논문의 기초는 <전통적 권력구조와 지방통치>라는 주제의 하와이대학
한국학대회에서 부터 시작된 것이다....
유향소. 경재소란 무엇인가? 그것은 고려때의 사심관에서 그 연혁을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혁명에 따르는 결과 경재소, 유향소로서 유지, 정착되기에 이른 것이다.
유향소복립에 대하여는 그 진상은 고려시대와 같이 지방세력이 강하고, 중앙정부의 힘이
약하였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사심관과 비슷한 경재소, 유향소의 제도가 필요하였던 것이고
필요하였기 때문에 존속되었던 것이나 따라서 경재소의 혁파는 그것을 존속시켰던 여건이
사라졌다는것,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은 지방력의 현저한 약화를 반영하는 사회사적으로
획기적인 史實의 표현인 것이다.
1. 지방력의 성장
조선왕조는 지방세력통제에 부심하였다. 전형품관들에 대한 태조때의 <부경시위령> 이나 태종때의 <향원추해지법>도 별 효과는 없었던 모양이다.
군현정비도 벽에 부딪치고 있었다. 태종때부터 속현 향소부곡에 대한 정리가
진행되었으나 제한 된 것이었다. 전라감사 윤상이 말하는 대로 12호장이 좌우하고
있는 관내 속현에 관원을 보낼것을 각도에 하령했으나 감사들은 이 영에 따르지
않고 관리들의 작폐가 여전했다는 것도 각도감사의 고의적인 직무유기가 아니라
정부의 힘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다. 조선왕조 초창기에 수령에 대립하는 지방력이
너무커서 수령이 수령으로서의 위엄을 세우기 어려운 곳도 있어 탄압의 한 방편으로
유향소를 혁파하기도 하고 토호들인 원악향리에 대한 엄한 자세도 보였고 세종때에는
수령, 감사들이 잘못이 있더라도 반역이나 비법살인이 아니면 고소를 못하며 고소한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관권옹호에 편중된 수령고소금지법이 제정실시된 것도
정부가 강력해서라기 보다도 그러한 비상수단이 아니고서는 정부로서의 체통을
유지하기 어려운 약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곧 그와같은 수령고소금지법은
얼마안가서 수령의 탐학을 배가시키고 백성의 폭발적 반항을 야기시켜 새로운
대책이 요청되었다. 토착세력분할책인 동시에 품관들을 민정에 참여시키는 길을
제도화함으로써 원악향리들의 협력을 끓어낼수 있었던 것이고, 품관세력은 정부에
협력함으로써 왕조의 지지를 얻어 전통적인 지역사회지배를 유지강화할수
있었던 것이다. 周制를 따른다던가 주자학적 예속을 운위하는 것은 주자학적교화를
통해 자기들의 세력기반을 강화하고 왕조에 대해서는 상고주의에 입각하여
보다 높은 지방자치를 요구하는 것이다...
사심관의 부활이라고 할 경재소, 유향소의 출현은 왕조의 혁명, 여말선초에 있어서의
많은 변동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저변을 이루는 향촌생활 지방실정에는 큰 변동이
없었다는 것, 사회적 성격에 있어서의 고려사회와 조선사회의 공통성의 소산이며
반영이라고 할 것이다.
2. 향청 일명 유향소의 역할및 역무
유향소의 최고책임자인 좌수의 주요한 권한은 풍헌, 별감, 관감등 향임을 사실상
임명하는 인사권에 있었다.
풍헌은 면내의 수세 차역 권농 교화 등 모든 일선행정실무를 주관하는 만큼 그 인사의
공정여부는 일면의 민정을 좌우하는 문제였다.
좌수는 읍무를 총괄하되 군무에 관계되는 일이며 대동미, 군포전의 징수, 환곡, 진정,
전정, 관아회계 등을 별감과 함께 감독지휘하였으니 남원에서는 향청도통인이
이방이 되었고 구례에서는 향집강이 이, 호방을 추천하였고, 영산현에서는
좌수궐위시에 별감이 이방이 되었다. 수령이 갈릴 때 재임시의 전곡, 물품의
수납지출부인 <해유중기>를 작성하는 데 향소의 서명이 필요하였으며 대동미, 환상미
군포에 관한 공문ㅁ서작성에는 색리, 공형, 향소의 공동서명이 필요하였다....
심지어 수령의 私用(오늘날의 업무추진비)을 포함하여 관아의 모든 용도지출을 매월
삭망마다 회계치부하는 일도 좌수, 이방이 주관하였던 것이다....
3. 향청의 외부통제
향청의 부정에 대해서는 향집강, 향계에서도 감시, 적발에 임하였지만, 수령은 향교제생 에 기대했고 향청, 향교양자는 가끔 대립관계에 있었던 모양이다.
수령은 매맹월삭에 공문을 향교에 보내서 민폐를 묻고 각자의 의견을 진술케하는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
4. 결어
한나라당 임인배(경북 김천)의원 등 41인이 기초자치단체장 임명제전환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지방자치법중 개정안발의로 헌법 제 117조, 118조에 제도적
보장으로 확립된 지방자치제도를 훼손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한국적 지방자치제도의 원형을 조선시대에서 찾으려는 학문적 연찬을
해온 김용덕 박사의 저술을 인용하면서 그 정신적, 이념적 연혁을 찾아볼려고 하였다.
자치실현 군민연대 김 성수상임의장은 12월 4일 오전 11: 15경 마산문화방송
라디오프로그램(이원열 아나운서 진행)의 주선으로 서울에 체재중인 이갑영 고성군수와
전화통화를 통해 고성군청 홈페이지 <나도 한마디>에 올린 5개항의 질의사항 (항공전문 학교,판공비 공개등...)에 대해 답변을 들을 기회를 가졌으나 시원한 답변이 되지 못하였다.
한국의 행정은 본질상 원스톱 서비스, 찾아가는 서비스가 아닌 탁상공론, 법규따지기로
앞서가는 농어촌, 선진 지방자치단체로 만들 지 못하고 있다.
<기초자치단체장 임명제전환 입법발의>라는 위기는 기실 자치단체의 방만한 경영으로
인해 직원들 월급도 주지 못할 지경에 이르는 가 하면, 예산의 4/4분기 막판다쓰기 ,
판공비 미공개라는 투명행정, 윈도우 행정과 큰 거리감이 있다.
사실이 이러하고, 자성의 목소리를 내기는 커녕 자치단체장출신 전국정당을 구체화하겠다든가, 임명제반대 전국민 서명운동을 벌이겠다는 이갑영고성군수의 발언은 사회통합을
현저히 해할 위험이 다분하다.
조선시대 암행어사가 출도하고 봉고파직을 당하는 것과 같은 단체장월급압류를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겠다는 것인지... 임명제찬성의 논리도 일견 타당한 구석이 있는 것
아닌가? 선거때마다 사회분열이 심화되고, 종친회. 동창회 뿐만 아니라 공직자들도 줄서기를 하는 실정이다. 한국의 망국적인 줄서기문화를 청산할 수는 없을 지...
조선시대 지방자치제도가 오늘날로 보면 전면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없다. 그러나
오늘날 지방자치제도의 원형으로, 향청은 그 정신적 기반으로 선비들 중심의 자존심있고, 기량이 있는 향촌문화, 주자학 또는 주자가례를 통해 입신양명의 기초가 내부의 수양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 일고의 가치는 있다고 본다.
성내리 휘경당에서
金 成守
조선시대 지방자치제도
지방자치의 원형으로서 향청연구는 아직 미개척의 새로운 분야이다.
1941년 일본학자의 <선초에 있어서의 경재소와 유향소에 대하여>가 있고, 진단학보에
실린 이태진선생의 <사림파의 유향소복립운동>이 수작이나 시기적으로 선초에 한정된 것이대부분이다. 본 논문의 기초는 <전통적 권력구조와 지방통치>라는 주제의 하와이대학
한국학대회에서 부터 시작된 것이다....
유향소. 경재소란 무엇인가? 그것은 고려때의 사심관에서 그 연혁을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혁명에 따르는 결과 경재소, 유향소로서 유지, 정착되기에 이른 것이다.
유향소복립에 대하여는 그 진상은 고려시대와 같이 지방세력이 강하고, 중앙정부의 힘이
약하였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사심관과 비슷한 경재소, 유향소의 제도가 필요하였던 것이고
필요하였기 때문에 존속되었던 것이나 따라서 경재소의 혁파는 그것을 존속시켰던 여건이
사라졌다는것,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은 지방력의 현저한 약화를 반영하는 사회사적으로
획기적인 史實의 표현인 것이다.
1. 지방력의 성장
조선왕조는 지방세력통제에 부심하였다. 전형품관들에 대한 태조때의 <부경시위령> 이나 태종때의 <향원추해지법>도 별 효과는 없었던 모양이다.
군현정비도 벽에 부딪치고 있었다. 태종때부터 속현 향소부곡에 대한 정리가
진행되었으나 제한 된 것이었다. 전라감사 윤상이 말하는 대로 12호장이 좌우하고
있는 관내 속현에 관원을 보낼것을 각도에 하령했으나 감사들은 이 영에 따르지
않고 관리들의 작폐가 여전했다는 것도 각도감사의 고의적인 직무유기가 아니라
정부의 힘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다. 조선왕조 초창기에 수령에 대립하는 지방력이
너무커서 수령이 수령으로서의 위엄을 세우기 어려운 곳도 있어 탄압의 한 방편으로
유향소를 혁파하기도 하고 토호들인 원악향리에 대한 엄한 자세도 보였고 세종때에는
수령, 감사들이 잘못이 있더라도 반역이나 비법살인이 아니면 고소를 못하며 고소한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관권옹호에 편중된 수령고소금지법이 제정실시된 것도
정부가 강력해서라기 보다도 그러한 비상수단이 아니고서는 정부로서의 체통을
유지하기 어려운 약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곧 그와같은 수령고소금지법은
얼마안가서 수령의 탐학을 배가시키고 백성의 폭발적 반항을 야기시켜 새로운
대책이 요청되었다. 토착세력분할책인 동시에 품관들을 민정에 참여시키는 길을
제도화함으로써 원악향리들의 협력을 끓어낼수 있었던 것이고, 품관세력은 정부에
협력함으로써 왕조의 지지를 얻어 전통적인 지역사회지배를 유지강화할수
있었던 것이다. 周制를 따른다던가 주자학적 예속을 운위하는 것은 주자학적교화를
통해 자기들의 세력기반을 강화하고 왕조에 대해서는 상고주의에 입각하여
보다 높은 지방자치를 요구하는 것이다...
사심관의 부활이라고 할 경재소, 유향소의 출현은 왕조의 혁명, 여말선초에 있어서의
많은 변동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저변을 이루는 향촌생활 지방실정에는 큰 변동이
없었다는 것, 사회적 성격에 있어서의 고려사회와 조선사회의 공통성의 소산이며
반영이라고 할 것이다.
2. 향청 일명 유향소의 역할및 역무
유향소의 최고책임자인 좌수의 주요한 권한은 풍헌, 별감, 관감등 향임을 사실상
임명하는 인사권에 있었다.
풍헌은 면내의 수세 차역 권농 교화 등 모든 일선행정실무를 주관하는 만큼 그 인사의
공정여부는 일면의 민정을 좌우하는 문제였다.
좌수는 읍무를 총괄하되 군무에 관계되는 일이며 대동미, 군포전의 징수, 환곡, 진정,
전정, 관아회계 등을 별감과 함께 감독지휘하였으니 남원에서는 향청도통인이
이방이 되었고 구례에서는 향집강이 이, 호방을 추천하였고, 영산현에서는
좌수궐위시에 별감이 이방이 되었다. 수령이 갈릴 때 재임시의 전곡, 물품의
수납지출부인 <해유중기>를 작성하는 데 향소의 서명이 필요하였으며 대동미, 환상미
군포에 관한 공문ㅁ서작성에는 색리, 공형, 향소의 공동서명이 필요하였다....
심지어 수령의 私用(오늘날의 업무추진비)을 포함하여 관아의 모든 용도지출을 매월
삭망마다 회계치부하는 일도 좌수, 이방이 주관하였던 것이다....
3. 향청의 외부통제
향청의 부정에 대해서는 향집강, 향계에서도 감시, 적발에 임하였지만, 수령은 향교제생 에 기대했고 향청, 향교양자는 가끔 대립관계에 있었던 모양이다.
수령은 매맹월삭에 공문을 향교에 보내서 민폐를 묻고 각자의 의견을 진술케하는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
4. 결어
한나라당 임인배(경북 김천)의원 등 41인이 기초자치단체장 임명제전환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지방자치법중 개정안발의로 헌법 제 117조, 118조에 제도적
보장으로 확립된 지방자치제도를 훼손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한국적 지방자치제도의 원형을 조선시대에서 찾으려는 학문적 연찬을
해온 김용덕 박사의 저술을 인용하면서 그 정신적, 이념적 연혁을 찾아볼려고 하였다.
자치실현 군민연대 김 성수상임의장은 12월 4일 오전 11: 15경 마산문화방송
라디오프로그램(이원열 아나운서 진행)의 주선으로 서울에 체재중인 이갑영 고성군수와
전화통화를 통해 고성군청 홈페이지 <나도 한마디>에 올린 5개항의 질의사항 (항공전문 학교,판공비 공개등...)에 대해 답변을 들을 기회를 가졌으나 시원한 답변이 되지 못하였다.
한국의 행정은 본질상 원스톱 서비스, 찾아가는 서비스가 아닌 탁상공론, 법규따지기로
앞서가는 농어촌, 선진 지방자치단체로 만들 지 못하고 있다.
<기초자치단체장 임명제전환 입법발의>라는 위기는 기실 자치단체의 방만한 경영으로
인해 직원들 월급도 주지 못할 지경에 이르는 가 하면, 예산의 4/4분기 막판다쓰기 ,
판공비 미공개라는 투명행정, 윈도우 행정과 큰 거리감이 있다.
사실이 이러하고, 자성의 목소리를 내기는 커녕 자치단체장출신 전국정당을 구체화하겠다든가, 임명제반대 전국민 서명운동을 벌이겠다는 이갑영고성군수의 발언은 사회통합을
현저히 해할 위험이 다분하다.
조선시대 암행어사가 출도하고 봉고파직을 당하는 것과 같은 단체장월급압류를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겠다는 것인지... 임명제찬성의 논리도 일견 타당한 구석이 있는 것
아닌가? 선거때마다 사회분열이 심화되고, 종친회. 동창회 뿐만 아니라 공직자들도 줄서기를 하는 실정이다. 한국의 망국적인 줄서기문화를 청산할 수는 없을 지...
조선시대 지방자치제도가 오늘날로 보면 전면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없다. 그러나
오늘날 지방자치제도의 원형으로, 향청은 그 정신적 기반으로 선비들 중심의 자존심있고, 기량이 있는 향촌문화, 주자학 또는 주자가례를 통해 입신양명의 기초가 내부의 수양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 일고의 가치는 있다고 본다.
성내리 휘경당에서
金 成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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