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jm1

청계천과 어제준천제명첩(御製濬川題名帖)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성수 작성일13-06-24 09:46 조회6,335회 댓글0건

본문

청계천과 어제준천제명첩

諸臣製進

御製濬川題名帖


준천이란 하천에 쌓인 오물과 토사의 준설을 이르는 말이다. 이 어제준천제명첩의 내용은 영조 36년(1760) 도성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이 민가로부터 흘러 들어온 오물과 토사 등으로 인해 수로가 막히고 악취가 심해지자 물의 흐름을 원활히 하고 위생을 깨끗이 하고 궁극적으로는 홍수 등  수해를 예방하기 위해 국책사업으로 청계천을 준설한 사실을 그 역사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이 役事가 준공되자 이를 기념하여 동년 4월 16일 영조는 春塘臺에서
입시한 신하들에게 試射를 행하고 力과 國을 韻으로 四言詩를 짓게 하였다.
그 준설장면의 그림과 시들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 바로 이 帖인 것이다.
이 첩에는 춘당대의 연회장면의 그림만을 싣고 있지만 , 부산광역시 시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똑 같은 작품에는 (五間水門;흥인문 근처) 위에서 차일을 치고 왕이 친림하여 개천치는 일을 바라보는 장면을 상단 중앙으로 배치하고 하단부분 개천에서 많은 노동력이 동원되어 사람들이 직접 오늘날의 청계천을 치는 모습과 소를 이용하여 개천바닥을 파내는 장면을 그린 보다 상세한 그림으로 되어있다. (서울시립박물관, 한성판윤전)


조선시대 준천에 관한 기록은 태종 11년(1411)부터 나타난다.
본래 서울은 산간분지인 까닭에 백악·인왕 등의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민가의 하수구에서 배출되는 물의 처리에 곤란을 겪고 있었다. 이에 태종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성 한가운데 인공으로 큰 배수로를 팔 것을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開川都監이 설치되어 이를 전담하고 이듬해 착수한지 1개월만에 준공을 보게 되었다..
그 뒤 약 300여년간 개천의 관리가 소홀하여 오물과 퇴적물로 水口가 막히고 河床이 높아져
평소에도 악취가 심하였으며, 비가 많이 오게되면 개천이 범람하여 가옥의 침수가 잦고 또 우물마져 더럽혀져 토질병을 발생하는 등 민가에 큰 고통을 주었다..
이에 영조 35년(1759) 좌의정 신만의 발의에 따라 홍봉한, 이창의, 홍계희를 준천당상(濬川堂上)에 임명하고 이듬해인 1760년 2월 18일 준설에 착수하여 57일만인 4월 15일 완공을 해 물의 흐름이 원활하게 되었다. 이때의 준천사업은 비용의 낭비가 많다는 비난과 공사가 부실하여 한번 비가 오면 허사가 되고 말것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지만, 왕의 적극적인
후원과 준천당상겸 한성판윤 홍계희의 열성으로 완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준천의 효과를 지속하고 또다시 오물이나 모래가 쌓여 수로가 막히는 피해를 없애기 위해 상설기구로서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고 서울의 4산의 보호를  아울러 책임지게 하였다..
그런데 적어도 100년을 가리라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순조 32년(1832)개천이 다시 막힘에 준천사의 주관하에 약 7만 5천냥이라는 막대한 예산으로 대대적인 준천사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인력과 물력을 투입한 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철종 때에는 준천을 주관한 준천사의 提調가 문책당하고 또 그 공정을 분담하였던 어영청 관할의 준천이 부실함을 어영대장이 파면되기도 했다. 


오늘날 청계천의 복개공사는 1832년 준천사업을 한 이래로 273년이 흘렀다.. 지금의 청계천 인근 건물의 고도 제한 완화를 빌미로 한 부패스캔들과  을지로 삼각동, 수하동 등지의 재개발로 인한 서민들의 고충은 이루헤아릴수 없는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영조36년 우상 민백상이 준천을 기념하여 대신들과 사언시를 지었다. 요순시대 이래로 치산치수는 임금의 은택으로 삼았다.

지금에야 준천공사가 완성되니(于今濬成) 
신민의 효력이었네(臣民效力)
반드시 이 정성으로(須將比誠)
한번 강한 나라를 세워보자(一施軍國) 


 




--------------------------------------------------------------------------
영조 35년(1759년) 준천당상(홍봉한, 이창의, 홍계희)

제신제진 사언율시 진언한 사람은 민백상(우상), 김한구(영돈녕부사), 이창의. 정희량, 이창수, 홍계희(한성판윤), 김상복, 구선행, 정여직, 김선행, 채제공(부총관), 구선복, 구윤옥, 정상순, 홍인한, 홍양한, 이사관, 홍낙성, 임준, 임희효, 강지환, 윤사국, 윤득명, 이동태, 이석구로 모두 25명의 대신들이다.


참고문헌: 데라우찌(寺內)문고 궁중관계자료,1998 



법정치학 연구회
http://cafe.daum.net/krolp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