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폰 플로리안 콜마스 교수의 일본비판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성수 작성일13-06-24 09:23 조회7,434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 이 글은 독도 관련문제등 일본의 억지주장에 대해 일본을
비판한 독일 학자의 글입니다.
'독도 또는 다케시마'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은 “대국민 서한”에서 최근 다시 불거진 바위섬을 둘러싼 오래된 싸움의 마지막 단계로서 일본과의 “외교전쟁” 가능성에 대해 경고했다. 이 섬의 크기는 운동장 네 개를 합친 정도이다. 최근 외교관으로서 자신의 직무에 매우 중요한 자질인 예의를 갖추지 못한 한 서울 주재 일본 외교관은 다케시마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나 일본 영토라고 주장했다. 한국에서는 독도라고 불리는 그 돌섬은 절대적으로 한국의 섬이지, 그 반대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거리 시위자들과 몹시 성난 자들이 일본 대사관 앞에서 자신들의 손가락을 절단했다. 이것은 피로 조국을 수호하겠다는 의지의 표시이다. 일본 외무성은 일본 정부가 이웃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힘쓰고 있으며, 더욱이 다케시마/독도 문제를 헤이그의 국제재판소로 가져갈 수도 있다는 주장으로 시위의 진화에 나섰다.
국제법정에서 공정한 판결을 받자는 것, 이것이 공평하고 의미 있는 제안일까? 만일 양국이 합의한다면, 영토분쟁의 해결을 위해 국제재판소가 소집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한국은 헤이그 국제재판소에서 이 문제를 처리하는 것을 반대해 왔으며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때 패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은 이 문제의 역사적 차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만일 강대국의 권리가 바로 국제법이라는 점을 믿을 만한 이유가 있는 나라가 있다면, 한국이 바로 그런 나라이다. 왜냐하면 이전에 국제법은 한국의 온전한 존재를 없애버리고 한일합방을 성사시킨 도구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정치가들은 오늘날에도 일본의 한국 식민지 지배가 합법적이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한국에게 헤이그는 매우 고통스러운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백년 전 러일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테오도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중재를 통해 체결된 포트머스(Portsmouth) 강화조약 때문에 한국은 일본의 피보호국이 되었다. 이 덕에 루즈벨트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한국은 외교적 이해관계를 대표할 수 있는 주권을 상실했다. 한국의 고종 황제는 피보호국 조약에 대한 항의를 표시하기 위해 1907년 헤이그의 제2차 국제 평화회의에 3명의 특사를 파견하면서 이를 막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43개의 회의 참가국들은 단지 주권국가에게만 참가자격을 인정했고 그러한 국가만이 회의에 초대받았기 때문에, 고종의 특사들은 발언할 기회를 전혀 얻지 못했다.
국가 없는 지역은 19세기의 국제법에 따르면 “강대국”에 의해 점유될 수 있었다. 그런 지역의 법적 지위는 본질적으로 강대국이 점유하는 데 근거하고 있다. 일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이들 열강대열에 올라섰다. 미국이 19세기 중반 함포를 앞세워 일본에게 국제 무역에 문호를 개방할 것을 강요한 이후, 일본 정치가들은 식민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스스로 식민지 지배국가가 되고 팽창하는 것이라는 점을 일찍 깨달았다.
한반도는 오키나와와 훗카이도 다음에 일본의 팽창정책의 목표였다. 수백년 이래로 왕조가 한반도을 다스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쿄 정부는 1870년대 이후 이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체계적으로 작업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이제까지 강대국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으로만 간주되어 온 국제법을 매우 노련하게 이용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국제법의 보증 아래 인정을 받았으며 동시에 한국에 대한 권리를 공고히 하였다. 이 전개과정의 당사국은 서로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일본은 한국의 주권을 빼앗음으로써 자신의 독립을 유지하였다. 헤이그의 평화회의에서 일본은 국제공동체의 동의하에 한국을 대표하였다. 한국의 주권 박탈은 이러한 방식으로 국제법에 의해 적법한 것으로 각인되었다. 1905년 7월 비밀협약에서 미국과 일본은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우선권을 일본이 인정하는 대신 일본의 한국 지배를 미국이 묵인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한달 후 영일 동맹에서는 인도와 미얀마에 대해 영국의 지배를 일본이 보장하고 한반도가 거래되었다. 따라서 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일본은 한국에 대한 자신의 권리주장이 반박될 것이라고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1905년 1월 일본정부는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섬을 일본영토라고 선언했다. 같은 해 2월 한국 건너편에 있는 시마네 현은 다케시마를 관할구역의 일부로 삼았다. 백 년이 지난 현재, 시마네 현은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이라고 선포했다. 이 사건뿐만 아니라 일본 외부성이 한국의 독도 통제를 국제법 위반이라고 규정한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한다는 사실 때문에 한국인들은 분노하였다.
일본정부는 1905년의 선언이 한일합방과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한국정부는 이와는 반대로 이 선언이 일본의 식민지정책의 일부라고 간주하고 있으며 이러한 생각을 국민이 항상 명심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따라서 독도/다케시마라는 돌섬 주위에 다시 파도가 높게 일고 있다. 이 섬을 지키기 위한 싸움은 사실 물질적으로는 별 소득이 없다. 비록 풍부한 어획량을 이유로 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역사적 심층이 훨씬 더 중요하다.
http://www.nzz.ch/2005/04/02/fe/articleCP2BS.html
von Florian Coulmas
Dokdo oder Takeshima
Recht und Geschichte in der Strasse von Korea
In einem «Brief an das Volk» warnt der südkoreanische Präsident Roh Moo Hyun vor einem «diplomatischen Krieg» mit Japan - letzte Etappe in einem jüngst wieder hochgekochten alten Streit um zwei Felsen im Meer, zusammen so gross wie vier Sportplätze. Takeshima, erklärte kürzlich in Seoul ein japanischer Diplomat, dem der für sein Metier so wichtige Takt nicht eben zweite Natur ist, sei historisch und nach internationalem Recht japanisches Territorium. Dokdo, wie die Koreaner die unbewohnten Riffe nennen, sei unverbrüchlich koreanisch, entgegnen diese. Proteste auf der Strasse, ganz Aufgeregte schneiden sich vor der japanischen Botschaft Finger ab: Mit ihrem Blut wollen sie das Heimatland verteidigen. Das japanische Aussenministerium wiegelt ab. Japan arbeite an guten Beziehungen mit dem Nachbarn, und im Übrigen könne man mit dem Takeshima/Dokdo-Problem zum Internationalen Gerichtshof nach Den Haag gehen.
Unparteiische entscheiden zu lassen, ist das kein fairer und sinnvoller Vorschlag? Zur Lösung von Territorialkonflikten kann der Internationale Gerichtshof nur angerufen werden, wenn beide Parteien einverstanden sind. Seoul hat den Gang nach Den Haag bisher abgelehnt und wird ihn auch jetzt nicht beschreiten. Darin die Angst zu unterliegen zu sehen, hiesse freilich, die historische Dimension des Problems zu verkennen. Wenn ein Land Grund hat, daran zu zweifeln, dass das Völkerrecht etwas anderes ist als das Recht des Stärkeren, dann ist es Korea. Denn das Völkerrecht war das Instrument, mit dem die schiere Existenz des koreanischen Staates eliminiert und seine Annexion durch Japan ins Werk gesetzt wurde. Japans Kolonialherrschaft über Korea, betonen japanische Politiker noch heute, war rechtmässig. Für Korea ist Den Haag mit besonders schlechten und schmerzhaften Erinnerungen verbunden. - Der vor hundert Jahren geschlossene, vom amerikanischen Präsidenten Theodore Roosevelt vermittelte Vertrag von Portsmouth zur Beendigung des Russisch-Japanischen Kriegs machte Korea zum japanischen Protektorat. Roosevelt bekam den Friedensnobelpreis. Korea verlor das Recht, seine aussenpolitischen Belange selbst wahrzunehmen. Der koreanische Kaiser Kojong versuchte, das zu verhindern, indem er 1907 drei Abgesandte zur zweiten internationalen Friedenskonferenz nach Den Haag schickte, um gegen den Protektoratsvertrag Protest einzulegen. Sie hatten jedoch keinen Erfolg, ja sie wurden nicht einmal angehört, denn die 43 versammelten Staaten akzeptierten als Teilnehmer in zirkulärer Logik nur souveräne Staaten, eben die, die zur Konferenz eingeladen waren.
Staatenlose Gebiete konnten sich «die Mächte» nach den Vorstellungen des Völkerrechts des 19. Jahrhunderts aneignen, ja ihr Status als solche bestand wesentlich darin, dass sie das taten. Japan war erst vor kurzem in diesen erlauchten Kreis aufgestiegen. Nachdem die Amerikaner die Japaner Mitte des Jahrhunderts mit vorgehaltenen Kanonen dazu gezwungen hatten, ihr Land dem internationalen Verkehr zu öffnen, hatten ihre Politiker früh erkannt, dass die einzige Möglichkeit, der Kolonialisierung zu entgehen, darin bestand, selbst zur Kolonialmacht zu werden - und zu expandieren.
Die koreanische Halbinsel war nach Okinawa und Hokkaido das nächstliegende Ziel der Expansion. Obwohl sich das Königreich seit Jahrhunderten selbst regiert hatte, arbeitete Tokio seit den 1870er Jahren systematisch daran, seine Eigenstaatlichkeit zu unterminieren, zu welchem Zwecke es sich sehr geschickt des bis dahin nur als Diktat der Mächte über sogenannte Vertragshäfen geltenden internationalen Rechts bediente. Auf diese Weise gelang es Japan, sich als Garant des internationalen Rechts in Ostasien zu profilieren und gleichzeitig seinen Anspruch auf Korea zu zementieren. Beide Seiten dieses Prozesses waren unauflösbar miteinander verknüpft. Japan erhielt sich seine Unabhängigkeit dadurch, dass es Korea die seine nahm. Auf der Friedenskonferenz in Den Haag wurde Korea mit Einverständnis der Staatengemeinschaft durch Japan vertreten. Der Eliminierung seiner Existenz wurde auf diese Weise durch das internationale Recht der Stempel der Legalität aufgedrückt. In einem Geheimabkommen vom Juli 1905 tauschten Washington und Tokio die Vorherrschaft der USA in den Philippinen gegen die Japans in Korea. In der anglo-japanischen Allianz einen Monat später wurden Indien und Burma gegen Korea aufgerechnet. Bei der Haager Friedenskonferenz 1907 brauchte Tokio nicht mehr zu fürchten, dass sein Anspruch auf Korea angefochten würde.
Just in dieser Zeit, im Januar 1905, erklärte Tokio die heute umstrittenen Inseln zu japanischem Staatsgebiet. Im Februar desselben Jahres machte die Korea gegenüberliegende Präfektur Shimane Takeshima zum Teil eines Verwaltungsdistrikts. Jetzt, hundert Jahre später, hat die Präfektur den 22. Februar zum «Tag Takeshimas» erklärt, was die Koreaner mindestens ebenso verbittert, wie dass das japanische Aussenministerium eine Website unterhält, in der die heutige koreanische Kontrolle über die Inseln als Verstoss gegen internationales Recht bezeichnet wird.
Die japanische Regierung behauptet, die Erklärung von 1905 habe nichts mit der Annexion der koreanischen Halbinsel zu tun. Die koreanische Regierung hingegen betrachtet diese Erklärung als Teil von Japans Kolonialpolitik und tut alles, damit dieser Gedanke in der Bevölkerung wach bleibt. Deshalb schlagen die Wellen wieder einmal hoch um die Felsen von Dokdo/Takeshima, um die zu streiten sich aus materiellen Gründen gewiss nicht lohnt. Zwar spricht man von reichen Fischgründen; weitaus bedeutender aber sind die historischen Abgründe.
<끝>
자료제공:
법정치학연구회(http://cafe.daum.net/krolp)
비판한 독일 학자의 글입니다.
'독도 또는 다케시마'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은 “대국민 서한”에서 최근 다시 불거진 바위섬을 둘러싼 오래된 싸움의 마지막 단계로서 일본과의 “외교전쟁” 가능성에 대해 경고했다. 이 섬의 크기는 운동장 네 개를 합친 정도이다. 최근 외교관으로서 자신의 직무에 매우 중요한 자질인 예의를 갖추지 못한 한 서울 주재 일본 외교관은 다케시마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나 일본 영토라고 주장했다. 한국에서는 독도라고 불리는 그 돌섬은 절대적으로 한국의 섬이지, 그 반대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거리 시위자들과 몹시 성난 자들이 일본 대사관 앞에서 자신들의 손가락을 절단했다. 이것은 피로 조국을 수호하겠다는 의지의 표시이다. 일본 외무성은 일본 정부가 이웃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힘쓰고 있으며, 더욱이 다케시마/독도 문제를 헤이그의 국제재판소로 가져갈 수도 있다는 주장으로 시위의 진화에 나섰다.
국제법정에서 공정한 판결을 받자는 것, 이것이 공평하고 의미 있는 제안일까? 만일 양국이 합의한다면, 영토분쟁의 해결을 위해 국제재판소가 소집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한국은 헤이그 국제재판소에서 이 문제를 처리하는 것을 반대해 왔으며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때 패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은 이 문제의 역사적 차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만일 강대국의 권리가 바로 국제법이라는 점을 믿을 만한 이유가 있는 나라가 있다면, 한국이 바로 그런 나라이다. 왜냐하면 이전에 국제법은 한국의 온전한 존재를 없애버리고 한일합방을 성사시킨 도구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정치가들은 오늘날에도 일본의 한국 식민지 지배가 합법적이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한국에게 헤이그는 매우 고통스러운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백년 전 러일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테오도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중재를 통해 체결된 포트머스(Portsmouth) 강화조약 때문에 한국은 일본의 피보호국이 되었다. 이 덕에 루즈벨트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한국은 외교적 이해관계를 대표할 수 있는 주권을 상실했다. 한국의 고종 황제는 피보호국 조약에 대한 항의를 표시하기 위해 1907년 헤이그의 제2차 국제 평화회의에 3명의 특사를 파견하면서 이를 막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43개의 회의 참가국들은 단지 주권국가에게만 참가자격을 인정했고 그러한 국가만이 회의에 초대받았기 때문에, 고종의 특사들은 발언할 기회를 전혀 얻지 못했다.
국가 없는 지역은 19세기의 국제법에 따르면 “강대국”에 의해 점유될 수 있었다. 그런 지역의 법적 지위는 본질적으로 강대국이 점유하는 데 근거하고 있다. 일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이들 열강대열에 올라섰다. 미국이 19세기 중반 함포를 앞세워 일본에게 국제 무역에 문호를 개방할 것을 강요한 이후, 일본 정치가들은 식민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스스로 식민지 지배국가가 되고 팽창하는 것이라는 점을 일찍 깨달았다.
한반도는 오키나와와 훗카이도 다음에 일본의 팽창정책의 목표였다. 수백년 이래로 왕조가 한반도을 다스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쿄 정부는 1870년대 이후 이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체계적으로 작업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이제까지 강대국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으로만 간주되어 온 국제법을 매우 노련하게 이용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국제법의 보증 아래 인정을 받았으며 동시에 한국에 대한 권리를 공고히 하였다. 이 전개과정의 당사국은 서로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일본은 한국의 주권을 빼앗음으로써 자신의 독립을 유지하였다. 헤이그의 평화회의에서 일본은 국제공동체의 동의하에 한국을 대표하였다. 한국의 주권 박탈은 이러한 방식으로 국제법에 의해 적법한 것으로 각인되었다. 1905년 7월 비밀협약에서 미국과 일본은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우선권을 일본이 인정하는 대신 일본의 한국 지배를 미국이 묵인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한달 후 영일 동맹에서는 인도와 미얀마에 대해 영국의 지배를 일본이 보장하고 한반도가 거래되었다. 따라서 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일본은 한국에 대한 자신의 권리주장이 반박될 것이라고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1905년 1월 일본정부는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섬을 일본영토라고 선언했다. 같은 해 2월 한국 건너편에 있는 시마네 현은 다케시마를 관할구역의 일부로 삼았다. 백 년이 지난 현재, 시마네 현은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이라고 선포했다. 이 사건뿐만 아니라 일본 외부성이 한국의 독도 통제를 국제법 위반이라고 규정한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한다는 사실 때문에 한국인들은 분노하였다.
일본정부는 1905년의 선언이 한일합방과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한국정부는 이와는 반대로 이 선언이 일본의 식민지정책의 일부라고 간주하고 있으며 이러한 생각을 국민이 항상 명심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따라서 독도/다케시마라는 돌섬 주위에 다시 파도가 높게 일고 있다. 이 섬을 지키기 위한 싸움은 사실 물질적으로는 별 소득이 없다. 비록 풍부한 어획량을 이유로 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역사적 심층이 훨씬 더 중요하다.
http://www.nzz.ch/2005/04/02/fe/articleCP2BS.html
von Florian Coulmas
Dokdo oder Takeshima
Recht und Geschichte in der Strasse von Korea
In einem «Brief an das Volk» warnt der südkoreanische Präsident Roh Moo Hyun vor einem «diplomatischen Krieg» mit Japan - letzte Etappe in einem jüngst wieder hochgekochten alten Streit um zwei Felsen im Meer, zusammen so gross wie vier Sportplätze. Takeshima, erklärte kürzlich in Seoul ein japanischer Diplomat, dem der für sein Metier so wichtige Takt nicht eben zweite Natur ist, sei historisch und nach internationalem Recht japanisches Territorium. Dokdo, wie die Koreaner die unbewohnten Riffe nennen, sei unverbrüchlich koreanisch, entgegnen diese. Proteste auf der Strasse, ganz Aufgeregte schneiden sich vor der japanischen Botschaft Finger ab: Mit ihrem Blut wollen sie das Heimatland verteidigen. Das japanische Aussenministerium wiegelt ab. Japan arbeite an guten Beziehungen mit dem Nachbarn, und im Übrigen könne man mit dem Takeshima/Dokdo-Problem zum Internationalen Gerichtshof nach Den Haag gehen.
Unparteiische entscheiden zu lassen, ist das kein fairer und sinnvoller Vorschlag? Zur Lösung von Territorialkonflikten kann der Internationale Gerichtshof nur angerufen werden, wenn beide Parteien einverstanden sind. Seoul hat den Gang nach Den Haag bisher abgelehnt und wird ihn auch jetzt nicht beschreiten. Darin die Angst zu unterliegen zu sehen, hiesse freilich, die historische Dimension des Problems zu verkennen. Wenn ein Land Grund hat, daran zu zweifeln, dass das Völkerrecht etwas anderes ist als das Recht des Stärkeren, dann ist es Korea. Denn das Völkerrecht war das Instrument, mit dem die schiere Existenz des koreanischen Staates eliminiert und seine Annexion durch Japan ins Werk gesetzt wurde. Japans Kolonialherrschaft über Korea, betonen japanische Politiker noch heute, war rechtmässig. Für Korea ist Den Haag mit besonders schlechten und schmerzhaften Erinnerungen verbunden. - Der vor hundert Jahren geschlossene, vom amerikanischen Präsidenten Theodore Roosevelt vermittelte Vertrag von Portsmouth zur Beendigung des Russisch-Japanischen Kriegs machte Korea zum japanischen Protektorat. Roosevelt bekam den Friedensnobelpreis. Korea verlor das Recht, seine aussenpolitischen Belange selbst wahrzunehmen. Der koreanische Kaiser Kojong versuchte, das zu verhindern, indem er 1907 drei Abgesandte zur zweiten internationalen Friedenskonferenz nach Den Haag schickte, um gegen den Protektoratsvertrag Protest einzulegen. Sie hatten jedoch keinen Erfolg, ja sie wurden nicht einmal angehört, denn die 43 versammelten Staaten akzeptierten als Teilnehmer in zirkulärer Logik nur souveräne Staaten, eben die, die zur Konferenz eingeladen waren.
Staatenlose Gebiete konnten sich «die Mächte» nach den Vorstellungen des Völkerrechts des 19. Jahrhunderts aneignen, ja ihr Status als solche bestand wesentlich darin, dass sie das taten. Japan war erst vor kurzem in diesen erlauchten Kreis aufgestiegen. Nachdem die Amerikaner die Japaner Mitte des Jahrhunderts mit vorgehaltenen Kanonen dazu gezwungen hatten, ihr Land dem internationalen Verkehr zu öffnen, hatten ihre Politiker früh erkannt, dass die einzige Möglichkeit, der Kolonialisierung zu entgehen, darin bestand, selbst zur Kolonialmacht zu werden - und zu expandieren.
Die koreanische Halbinsel war nach Okinawa und Hokkaido das nächstliegende Ziel der Expansion. Obwohl sich das Königreich seit Jahrhunderten selbst regiert hatte, arbeitete Tokio seit den 1870er Jahren systematisch daran, seine Eigenstaatlichkeit zu unterminieren, zu welchem Zwecke es sich sehr geschickt des bis dahin nur als Diktat der Mächte über sogenannte Vertragshäfen geltenden internationalen Rechts bediente. Auf diese Weise gelang es Japan, sich als Garant des internationalen Rechts in Ostasien zu profilieren und gleichzeitig seinen Anspruch auf Korea zu zementieren. Beide Seiten dieses Prozesses waren unauflösbar miteinander verknüpft. Japan erhielt sich seine Unabhängigkeit dadurch, dass es Korea die seine nahm. Auf der Friedenskonferenz in Den Haag wurde Korea mit Einverständnis der Staatengemeinschaft durch Japan vertreten. Der Eliminierung seiner Existenz wurde auf diese Weise durch das internationale Recht der Stempel der Legalität aufgedrückt. In einem Geheimabkommen vom Juli 1905 tauschten Washington und Tokio die Vorherrschaft der USA in den Philippinen gegen die Japans in Korea. In der anglo-japanischen Allianz einen Monat später wurden Indien und Burma gegen Korea aufgerechnet. Bei der Haager Friedenskonferenz 1907 brauchte Tokio nicht mehr zu fürchten, dass sein Anspruch auf Korea angefochten würde.
Just in dieser Zeit, im Januar 1905, erklärte Tokio die heute umstrittenen Inseln zu japanischem Staatsgebiet. Im Februar desselben Jahres machte die Korea gegenüberliegende Präfektur Shimane Takeshima zum Teil eines Verwaltungsdistrikts. Jetzt, hundert Jahre später, hat die Präfektur den 22. Februar zum «Tag Takeshimas» erklärt, was die Koreaner mindestens ebenso verbittert, wie dass das japanische Aussenministerium eine Website unterhält, in der die heutige koreanische Kontrolle über die Inseln als Verstoss gegen internationales Recht bezeichnet wird.
Die japanische Regierung behauptet, die Erklärung von 1905 habe nichts mit der Annexion der koreanischen Halbinsel zu tun. Die koreanische Regierung hingegen betrachtet diese Erklärung als Teil von Japans Kolonialpolitik und tut alles, damit dieser Gedanke in der Bevölkerung wach bleibt. Deshalb schlagen die Wellen wieder einmal hoch um die Felsen von Dokdo/Takeshima, um die zu streiten sich aus materiellen Gründen gewiss nicht lohnt. Zwar spricht man von reichen Fischgründen; weitaus bedeutender aber sind die historischen Abgründe.
<끝>
자료제공:
법정치학연구회(http://cafe.daum.net/krolp)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