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목 집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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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법정치학 연구회 작성일13-06-22 19:11 조회6,87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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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목 1 하천관리절목
한성에 동관왕묘 설치(1601. 9)
한성 화재로 민가 1,000호와 남별궁 소실 (1619. 11)
경희궁 중건(1620)
북한산성 수축시작(1711∼1712)
도성 금표 개정(1727)
한성의 하천관리절목과 하천정리계획도
작성하고 공사착수, 준천절목을 상정(1759)
한성 개천의 둑을 돌로 쌓기 시작(1773)
도성내 하천준설(1.842. 5)
한성부 청사 화재(1.852. 1)
광통교지전∼종각사이 상가 화재(1.864.4)
경복궁 중건시작(1.865. 4)
절목 2 표정절목(여강서원 관리절목)
보물 906호
고문서(古文書)에는 학봉(鶴峰)의 교지(敎旨) ·교서(敎書) ·유서(諭書) ·소지(所志) ·분재기(分財記) 등 10,000여 점이 소장(所藏)되어 있다. 그 중에 간찰(簡札) ·제문(祭文) 등은 제외하고 특히 정치(政治) ·경제(經濟) ·사회(社會) ·문화(文化) 등의 연구(硏究)에 필요한 문서류(文書類)만 선별(選別)하여 17종(種) 242점(點)이 지정(指定)되었다.
1. 교서(敎書): 선조(宣祖)가 1592년(선조25)에 경상도관찰사인 김성일(金誠一)에게 내린 교서임.
2. 유서(諭書): 선조(宣祖)가 1592년(선조25)에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김성일(金誠一)에게 내린 유서임.
3. 유지(有旨): 1578년(선조11)과 1592(선조25)에 선조(宣祖)가 승지(承旨)를 통해 학봉(鶴峰)이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와 초유병사(招諭兵使) 때에 보낸 것과, 1.834년(순조34)에 순조(純祖)가 승지를 통해 김진화(金鎭華)가 아산현감(牙山縣監) 때에 보낸 유지임.
4. 교첩(敎牒) 및 교지(敎旨): 학봉(鶴峰)의 백패(白牌)·홍패교지(紅牌敎旨) 및 사령교지(辭令敎旨)를 비롯하여 학봉 자손(子孫)의 교지임.
5. 첩(차정)(帖(差定)): 학봉(鶴峰)의 자손(子孫) 김시추(金是樞) 1630년(인조8), 1638년(인조15) 차정(差定)과 1678년(숙종4)의 김규의 차정 등임.
6. 시권(試券): 학봉(鶴峰)의 문과급제(文科及第) 답안지(答案紙) 및 증손(曾孫) 김규의 시지(試紙) 등임.
7. 시호서경(諡號署經): 학봉(鶴峰)의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으로 개정(改定)하는 데 대한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서경문서(署經文書)임.
8. 표정절목(票定節目): 안동소재(安東所在) 여강서원(廬江書院)의 운영(運營)에 관한 절목(節目)
9. 입안문(立案文) 선조년간(宣祖年間)의 가옥(家屋)·노비(奴婢)·전답(田畓) 소유를 인증(認證)하는 산라목(新羅牧) 입안(立案)과, 1722년의 안동부입안(安東府立案)임.
10. 등장(等狀): 투장(偸葬)을 금단(禁斷)해 달라는 문서(文書), 사역(使役)에 관한 청원등장(請願等狀), 학봉(鶴峰)의 후손(後孫) 김진화(金鎭華)등의 선정(善政)을 찬양하고 그의 유임(留任)을 청원(請願)한 등장(等狀) 등임.
11. 호적단자(戶籍單子): 학봉(鶴峰)의 선조(先祖) 천의 호구단자(백문)(戶口單子(白文))와 현손(玄孫) 김규 등의 호구단자(戶口單子)임.
12. 분재기(分財記): 학봉(鶴峰)의 부친(중종대)(中宗代) 김진(金璡), 학봉(鶴峰)이 부친(父親)에게 받은 분재기(1565)(分財記), 학봉 자손(鶴峰 子孫)등의 분재기(分財記).
13. 명문(明文): 토지(土地), 노비(奴婢), 가옥(家屋) 등(等)의 매매문기(賣買文記)임.
14. 완의(完議): 의성김씨(義城金氏) 문충공파(文忠公派) 문족대표(門族代表)들이 작성(作成)한 완의(完議)로 신곡전장(申谷田莊)등을 종가(宗家)에 영속(永屬)시켜 대대(代代)로 전수(傳守)하게 할 것과 가수천(佳樹川)에 별묘(別廟)를 세워 제향(祭享)할 것 등.
15. 통문(通文): 학봉(鶴峰)의 시호(諡號)를 청원(請願)하는 사림(士林)의 진정통문(陳情通文)과, 학봉(鶴峰) 을 제향(祭享)하는 서원(書院)으로서 철폐된 서원(書院)을 복향(復享)토록 청원(請願)하는 통문 (通文), 열부(烈婦)에 대한 포상을 요청(要請)하는 통문 (通文) 기타 통문들로 서원(書院)관계 자료임.
16. 치제문(致祭文): 1609년(광무1)에 국왕(國王)이 예조좌랑(禮曺左郞)인 이천추(李天樞)를 보내어 학봉(鶴峰)에게 사제(賜祭)한 치제문(致祭文).
17. 설계도(設計圖): 여사간도(여사간 학봉의 현손 김세기의 호)(如斯간圖(如斯간 鶴峰의 玄孫 金世基의 號))와 학봉구종택(鶴峰舊宗宅) 가옥설계도(家屋設計圖)임.
출 처 : [인터넷] http://www.ocp.go.kr
절목 3 사가독서
조선시대에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말한다.
세종대에 학자를 양성하고 유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여, 1424년(세종 6) 집현전 학사 중에서 젊고 재주가 있는 자를 골라 관청의 공무에 종사하는 대신 집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세종 말엽에 신숙주ㆍ성삼문 등 6인에게 휴가를 주어 절에서 글을 읽게 하는 등 여러 차례 시행되다가, 1456년(세조 2) 집현전의 혁파와 함께 폐지되었다.
1476년(성종 7) 채수 등 6인에게 다시 독서를 위한 휴가를 주었고, 1483년에는 용산의 빈 사찰을 수리하여 국왕이 독서당이라는 편액을 내려 사가독서하는 장소로 쓰도록 하였다. 이곳을 남호당 또는 용호당이라고 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 이후 이 제도와 함께 독서당도 폐지되었다. 중종이 즉위한 뒤 사가독서에 관한 절목을 마련하도록 지시하면서 다시 시행되었다. 1517년(중종 12) 두모포(옥수동)에 다시 독서당을 지었는데, 이곳을 동호당이라 하였다.
선발된 학자는 집현전이나 홍문관 관원 못지않게 국왕의 총애를 받아, 국왕이. 직접 술잔을 내려주며 술 마시는 것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명맥만 이어오다가 1709년(숙종 35) 이후 폐쇄되었다. 동호당이 있던 지금의 옥수동 일원을 얼마 전까지도 독서당 마을이란 뜻으로 '한림말'이라 불렀고, 약수동에서 옥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독서당고개', 그 길을 지금도 '독서당길'이라 부른다. 이 제도는 오늘의 석좌제도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절목 4 임고서원 관리절목
보물 1109호
임고서원(臨皐書院)은 고려말(高麗末)의 충신(忠臣)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주향(主享)으로 한 서원(書院)으로서, 조선명종(朝鮮明宗)8년(年)(1553)에 창건(創建), 명종(明宗)9년(年)(1554)에 사액(賜額)된 서원(書院)이다. 임란(壬亂)때 소실(燒失)되어 선조(宣祖)36년(年)(1603)에 중건(重建)되었다.
임고서원(臨皐書院)에는 전적(典籍)이 약(約) 200책(冊) 소장(所藏)되어 있는데 조사(調査)된 전적(典籍)은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新編音點性理群書句解) 등(等) 42종(種) 186책(冊)이다. 그 중에서 전적문화재(典籍文化財)로서 가치(價値)가 있다고 평가되는 10종(種)만을 선별지정(選別指定)하였다.
간본(刊本)은 정충록(精忠錄) 등(等) 임고서원(臨皐書院) 내사본(內賜本)과 임란이전본(壬亂以前本)으로 3종(種) 12책(冊)이다. 그리고 필사본(筆寫本)은 심원록(尋院錄), 임고서원고왕록(臨皐書院考往錄), 장학계안(奬學 案) 등(等) 선조조(宣祖朝)에서 조선조(朝鮮朝) 말기(末期)에 이르는 임고서원(臨皐書院)과 관련된 자료(資料)들로서 7종(種) 13책(冊)이다.
이들 간본(刊本)은 낙질(落帙)이 있기는 하지만 조선전기(朝鮮前期) 간본(刊本)으로 서지학연구(書誌學硏究)에 도움이 되는 자료이며, 필사본(筆寫本)은 비록 창건(創建) 당시(當時)부터의 것이 완벽하게 보존(保存) 되어온 것은 아니나 임고서원(臨皐書院)의 운영(運營) 족적(足蹟) 및 이에 관련된 그 시대의 사회(社會) ·경제적(經濟的)인 일면(一面)을 살필 수 있으며 또한 조선조(朝鮮朝) 유교문화(儒敎文化)와 관련된 학술자료의 하나로서, 서원제도(書院制度) 연구(硏究)에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新編音點性理群書句解)는 주돈신(周敦 ), 정호(程顥), 정신(程 ) 등 송대(宋代) 제유(諸儒) 18인(人)의 시문(詩文)을 유별(類別)로 분류(分類)하여 편찬한 것이다.
이 책(冊)은 명종(明宗)8년(年)(1553)에 국왕(國王)이 이황(李滉)에게 내린 선사본(宣賜本)이다. 표지(表紙) 이면(裏面)에 내사기(內賜記)가 있고 첫장 상단(上端)「선사지기(宣賜之記)」란 선사인(宣賜印)이 있으며 동(同) 하단(下端)에는「임고서원(臨皐書院)」이란 소장인(所藏印)이 찍혀있다. 뒤 표지(表紙) 이면(裏面)에는 가정갑인(嘉靖甲寅) 즉 명종(明宗)9년(年)(1554)에 이황(李滉)이 내사(內賜)받은 성리군서(性理群書) 1질(帙)을 후학(後學)을 위하여 임고서원(臨皐書院)에 증정(贈呈)한다는 식기(識記)가 있다.
낙질(落帙)이지만 보존상태(保存狀態)는 양호(良好)하며 내사기(內賜記)의 연대(年代)를 간년(刊年)으로 정(定)하였다.
회찬송악악무목왕정충록(會纂宋岳鄂武穆王精忠錄)은 송대(宋代)의 충신(忠臣)인 악비(岳飛)의 정충기사(精忠紀事)와 수전(褒典), 유사(遺事) 등을 수록(收錄)한 것이다.
이 책(冊)은 선조(宣祖)1.8년(年)(1585)에 국왕(國王)이 임고서원(臨皐書院)에 내린 선사본(宣賜本)이다. 표지이면(表紙裏面)에 내사기(內賜記)가 있고 첫장 상단(上端)에「선사지기(宣賜之記)」란 인(印)이 있으며 하단(下端)에는「임고서원상(臨皐書院上)」이란 난외식기(欄外識記)가 있다.
이산해(李山海)의 만력십삼년(萬曆十三年)(1585) 서문(序文)과 내사기(內賜記) 연대(年代)와 일치되고 있어 간행(刊行)한 해에 내사(內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권수제(卷首題) 말미(末尾)가 훼손되었으나 보존상태(保存狀態)는 양호(良好)하다.
논어언해(論語諺解)는 표지(表紙)가 가표지(假表紙)로 되어 있어 내사본(內賜本)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첫 장 상단(上端)에「선사지기(宣賜之記)」란 선사인(宣賜印)이 있다. 동(同) 하단(下端)에는「임고서원상(臨皐書院)」이란 소장인(所藏印)과 「임고서원상(臨皐書院上)」이란 난외식기(欄外識記)가 있다. 낙질(落帙)이지만 권수(卷首) 하단좌측(下端左側)이 약간 닳아졌을 뿐 보존상태(保存狀態)는 양호(良好)하다.
이 언해본(諺解本)은 한글에 방점(傍點)이 있으며, 드물게 보는 희구본(稀 本)으로 서지학연구(書誌學硏究)에 도움이 되는 자료(資料)이다
「이조서원문고목록(李朝書院文庫目錄)」도산서원(陶山書院) 소장본(所藏本) 내사기(內賜記)에“만력십팔년(萬曆十八年)(1590) 칠월(七月) 일내사(日內賜) 예안도산서원(禮安陶山書院) 논어언해일건(論語諺解一件) 좌승지신이(左承旨臣李)(수결(手決))”이므로 간행년대(刊行年代)를 내사기년대(內賜記年代)로 하였다.
「심원록(尋院錄)」은 임고서원(臨皐書院) 창건이후(創建以後)부터 조선조(朝鮮朝) 후기(後期)까지 이 서원(書院)을 내방(來訪)한 인사(人士)들의 명부(名簿)이다.
임고서원고왕록(臨皐書院考往錄)은 임고서원(臨皐書院)의 연혁(沿革)과 당시의 원장(院長) 유사(有司) 등 서원(書院)과 관련된 중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임고서원전곡집물범례등록(臨皐書院錢穀什物凡例謄錄)은 조선후기(朝鮮後期)에 임고서원(臨皐書院)에서 소유(所有)하고 있었던 자산(資産) 관계를 기록한 것이다.
이 등록(謄錄)에는 먼저 임고서원(臨皐書院)의 전곡(錢穀), 예물(例物), 집물(什物) 등을 차례로 기록하고 그리고 각관어염복정등록(各官魚鹽卜定謄錄), 각사지지복정등록(各寺紙地卜定謄錄), 각처복재위전등록(各處伏在位田謄錄) 등도 수록(收錄)하였다. 각사지지복정등록(各寺紙地卜定謄錄)에는 하양(河陽) 환성사(環城寺), 공산(公山) 운부사(雲浮寺), 의흥(義興) 인각사(麟角寺), 영천(永川) 성혈사(聖穴寺), 정각사(鼎脚寺) 등 5개(個) 사찰(寺刹)의 지(紙)와 지세(地稅)를 기록하였고, 각처복재위전등록(各處伏在位田謄錄)에는 개령전답(開寧田沓), 인각사위전답(麟角寺位田沓), 하양(河陽) 환성사(環城寺) 위전답(位田沓) 등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임고서원장학계안(臨皐書院奬學 案) 부(附) 절목(節目)을 살펴보면 이 장학계안(奬學 案)은 임고서원(臨皐書院) 유생(儒生)과 향리(鄕里) 자제(子弟)의 교육(敎育)을 위해 각(各) 문중(門中)들과 결성(結成)한 것이다.
내용은 장학계안(奬學 案) 결성(結成)에 대한 서윤보(徐綸輔)의 서문(序文)과 정하원(鄭夏源)의 후서(後序)가 있으며 오천정씨(烏川鄭氏) 등(等) 56문중(門中)의 수곡기(收穀記)와 절목(節目)이 기재되어 있다.
환성사결입안(環城寺決立案)은 임고서원(臨皐書院)과 5개사찰(個寺刹)인 하양(河陽) 환성사(環城寺), 공산(公山) 운부사(雲浮寺) 의흥(義興) 인각사(麟角寺), 영천(永川) 성혈사(聖穴寺), 정각사(鼎脚寺)와의 분쟁(分爭)에 대한 입안문(立案文)이다.
임고서원범규(臨皐書院凡規)는 임고서원(臨皐書院)의 제향(祭享) 원규(院規)와 사례(事例)를 기록한 것이다. 내용(內容)을 보면 임고서원범규식(臨皐書院凡規式), 춘추대향도(春秋大享圖) 의도제용잡물식(依圖祭用雜物式), 제식(祭式), 제문(祭文), 금사후유연(禁射侯遊宴)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말미(末尾)에 가정사십일년(嘉靖四十一年)(1562) 삼월십오일행(三月十五日行) 군수(郡守)(수결(手決))이 있다.
서원규범(書院規範)은 임고서원(臨皐書院)의 원규(院規)와 제향(祭享) 때 소요(所要)되는 각종(各種) 제수품(祭需品)인 제물식(祭物式), 그리고 임고서원신증원규(臨皐書院新增院規) 등(等)에 관한 기록이며 끝에 숭정사년(崇禎四年)(1631)삼월이십오일원중유안수정시완의(三月二十五日院中儒案修正時完議)가 있다.
절목 5 정유절목/ 서얼소통법
정조가 서얼들에게 정게에 진출할수있는 기회를 준것은 꾸준한 서얼들의 건의에 여러 선대왕들의 실행이 미흡한것을 알고 실행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서얼차별이 있었는지 또 왜그것이 철폐되야 하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서얼 차별법인 서얼 금고법은 조선 시대 양반의 자손이라도 첩의 소생은 관직에 나아갈 수 없게 한 제도 입니다.
서얼금고법 제정 동기와 과정
이 제도는 1415년(태종 15) 우대언.서선이 태종의 특정한 인물에 대한 경계심을 살펴 종친 및 각품의 서얼 자손은 현관의 직사를 맡기지 말자고 건의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해 몇 가지 형태의 차별이 가해지던 끝에 ≪경국대전≫ 편찬 이후로 금고의 제재가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서얼에 대한 차별의 규정은 경국대전에 다음과 같이 두 가지가 명시되어 있다. 예전 제과조에 죄를 범해 영구히 임용할 수 없게 된 자, 장리의 아들, 재가하거나 실행한 부녀의 아들 및 손자 등과 함께 문과, 생원·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 이전 한품서용조에 문·무 2품 이상의 양첩 자손은 정3품, 천첩 자손은 정5품에 한하고, 6품 이상의 양첩 자손은 정4품, 천첩 자손은 정6품에 한하며, 7품 이하 관직이 없는 사람까지의 양첩 자손은 정5품, 천첩 자손은 정7품에, 양첩자의 천첩 자손은 정8품에 각각 한정해 서용한다고 한 것 등이다. 이 두 규정은 같은 차별 의식의 소산이나 성립의 내력은 서로 다르다. 그리고 제정된 시기는 전자보다 후자가 앞섰다.
서얼에 대한 한품 규정의 동기는 기술관에 대한 것과 거의 비슷하였다. 그러나 그 내력과 경위는 훨씬 더 복잡하였다. 고려시대는 상급 신분층 사이에 대체로 일부 일처제가 준행되었으나, 말기에 접어들면서 처를 여러 명 거느리는 풍습이 유행하였다. 이 변화의 원인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몽고 풍습의 영향을 받으면서 인구 증식 정책이 강구되는 가운데 다산이 미덕으로 치부되는 분위기에서 풍습이 달라진 것 같다. 어떻든 이러한 풍조는 조선왕조 성립 후 사회질서가 전반적으로 갱신되는 가운데 여러 처의 소생간의 상속 문제를 둘러싼 분쟁이 심각한 문제로 부수되어 유교적인 일처주의 기준 아래 제재를 받았다.
일처주의는 한 사람의 처 외는 모두 첩으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다처간의 적·첩 구별의 분쟁은 대단히 심각했으며, 그 분쟁의 치열함 속에서 첩에 대한 적대 관념이 이미 필요 이상으로 강조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더해 처음부터 첩으로 맞아들여진 자 가운데 신분이 천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 첩 및 그 소생에 대한 차별 의식 조장을 결정짓게 하였다.
고려 말 이래 다처 풍조 아래서 처음부터 첩으로 맞아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 경우 신분이 양인인 양첩도 있었지만, 신분이 천인인 천첩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자기 소유의 비(婢)를 첩으로 들이는 경우가 태반으로, 첩과 그 소생에 대한 천시 관념은 여기에서 비롯됨이 가장 컸다.
천첩 소생에 대한 처우는 양천제의 신분 규정의 적용상으로도 문제가 되었다. 고려 시대의 관행에 따르면, 아버지가 양반이라도 어머니가 노비신분이면 그 소생의 신분은 종모법의 원칙에 따라 노비, 곧 천인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서는 국가의 역을 담당할 인력의 확대를 목적으로 공사비 신분으로 양인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소생은 아버지 신분을 따라 양인이 되게 하는 이른바 종부법이 여러 차례의 논의 끝에 1414년(태종 14)에 채택되었다.
이 법의 제정으로 양반의 천첩 소생이 양인이 되는 것은 확실해졌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차별적 처우는 여기서부터 구체적으로 강구되기 시작하였다. 종부법의 적용으로 양인신분을 허용하더라도 천인 소생에 대한 차별 관념은 그대로 남아 양인으로서의 활동에 일정한 제재가 가해졌다. 즉, 양인 남자면 누구나 담당해야 하는 군역의 의무가 보충군이라는 특별한 병종에 일정한 기간 복무할 것이 요구되고, 한품 서용의 규정을 마련해 이 군역을 치른 뒤에 밟게 되는 벼슬길에 제한을 두었다.
과거 응시자격의 박탈에 대한 규정의 제정 시기는 기록상 확실하지 않다. 단지, 같은 제재의 대상인 재가실행 부녀의 자손에 대한 차별의 논의가 1477년(성종 8)에 있었으므로 대개 이 전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전부터 있어 온 한품 서용의 규정도 그 대상직을 잡직으로 한정해 서얼이 좋은 관직에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렇지만, 이 응시자격의 박탈에 대한 구체적인 입법으로 차별은 더 심해질 수 밖에 없었다.
서얼 출신인 어숙권은 ≪패관잡기≫에서 서얼에게 아예 벼슬에 나가지 못하게 한 것은 ≪경국대전≫ 편찬 후라고 지적하였다. 어숙권이 살던 시대에 만들어진 ≪경국대전주해≫에도 그러한 강화된 차별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서얼 자손에 대한 법의 적용이 자자손손으로 해석되고, 서얼 자체에 대한 해석도 양첩산은 서, 천첩산은 얼이라고 구분하는 설명을 제시하였다. 특히, 얼은 죄를 범해 몰패된 여자가 요행히 고귀한 남자를 만나 자식을 낳으면 나무를 베낸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나는 것과 같다는 뜻이라고 하여 차별 의식이 당시 대단히 경색화된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허통 논의의 대두와 전개과정
≪경국대전주해≫가 만들어진 시기를 전후해서 서얼 출신의 명사는 적지 않았다. 어숙권을 비롯해 조신·송익필·양사언·양대박 등 도학·행의·문장·충의 등에 뛰어난 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인재 활용이라는 면에서 서얼에 대한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조정에서도 일찍부터 제시되었다. 중종대에 조광조가 이미 통용을 제안했다는 것이 후대의 허통론자들의 통설로 인식되었다. 명종대에는 서얼들 스스로 양첩손에게 문무과의 응시를 허용하라는 소를 올렸다.
1567년(선조 즉위년)에도 서얼 1,600여명이 허통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583년(선조 16) 이탕개(尼蕩介)의 난이 일어났을 때 병조판서 이이는 난을 평정할 인력확보책의 하나로, 서얼로서 6진 일대의 근무를 지원하는 자는 3년만에 허통해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직접 채택되지 않았지만, 임진왜란 중에 전시 재정난 타개의 한 방법으로 쌀을 받고 허통해 주거나 전공에 대한 포상으로 허통해 주는 예를 낳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차별은 여전히 심해 광해군 때 ‘칠서지옥’이라 하여 박응서 등 서얼 출신 7인이 관련된 역모 혐의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하였다.
서얼허통에 관한 조정의 논의는 인조·현종·숙종 연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허통의 실적은 1597년(선조 30)부터 1735년(영조 11)까지 138년간 문과 급제자가 42인에 불과한 정도였다.
숙종대 이후로는 서얼들의 집단상소가 자주 있었다. 1695년(숙종 21) 영남 지방 서얼 988명, 1724년(영조 즉위년) 정진교 등 5,000인이 각각 상소한 것이 유명하다. 영조는 1772년 서얼을 청요직에도 등용한다는 통청윤음을 내리는 한편, 서얼도 아버지와 형을 아버지와 형이라 부를 수 있게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역률로 다스린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학교에서 서얼들의 서열을 따로 두지 못하게 하는 서치법을 적용하고, 서얼도 일반 양반과 마찬가지로 향안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하는 문제 등에 부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청요직 가운데 서얼을 위해 가장령(假掌令)·가지평(假持平) 각 한 자리를 더 마련하는 성과를 올리는데 그쳤다.
서얼허통 문제는 정조대에 큰 진전을 보았다. 정조는 영조대 조정의 노력에 비해 성과가 적었던 것을 직시하였다. 그리하여 1777년(정조 1) 3월에 이른바 정유절목을 통해 서얼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다음과 같이 넓혔다. 즉, 문반의 분관이나 무반의 첫 천거는 이전과 같이 교서관에서 관장하는 부천으로 하되, 요직 허용은 문반 가운데 호조·형조·공조의 참상, 음직으로는 판관 이하로 한정하였다.
외직에서는 문무 당하관으로 부사, 당상관으로 목사를 허용하고, 음직으로 생원·진사 출신자는 군수를 허용해 치적이 있는 자는 부사로 승진시키며, 생원·진사 출신이 아닌 자는 현령으로 허용해 군수까지 승진할 수 있게 하였다. 문신 분관은 예문관에 한정해 직강 이하 직은 제한 없이 처리하며, 무신은 중추부·오위장 등을 제한 없이 하도록 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문·무의 여러 관직에 대한 진출의 허용이 실제로 어느 정도 실행될 수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정조는 1779년 내각, 곧 규장각에 검서관 제도를 두어 학식있는 서얼들을 다수 이에 등용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유득공·이덕무·박제가·서이수 등은 4검서로 유명하다. 정조의 문치를 도운 이른바 초계 문신 가운데도 서얼 출신들이 다수였다.
.1.823년(순조 23) 9,996명에 달하는 서얼 유생들이 집단적으로 허통 요청을 상소하였다. 이를 계기로 계미절목이 마련되어 좌윤·우윤, 호조·형조의 참의, 병사·수사 등의 직도 허용한다는 것이 규정상으로 첨가되어 보완되었다. 그리고 승정원에도 가주서(假注書)를 두어 서얼의 자리로 삼게 하였다.
이 무렵 서얼허통의 당위성이 사회적으로 크게 고조되었던 듯, 1.827년 대리정청에 나선 효명세자가 일체의 소통을 명령하는 영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앙 조정의 정책적 배려가 사회적 관습을 일신하기에는 아직도 많은 한계가 있었다. 집단적인 상소는 .1.848년(헌종 14)과 1.851년(철종 2)에 각각 9,000인이 동원되는 규모로 계속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에서 적·첩 양쪽에 모두 아들이 없을 경우에 양자를 허용하고, 과녀의 재가도 허용하는 한편, 공·사 노비 제도를 혁파함으로써 서얼 차별대우의 깊은 뿌리가 잘려 나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출 처 : [인터넷]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536&no=1969
절목 6 혜상공국 절목
1. 부보상은 이성계 태조가 하사한 고유명사이다.
부보상(負褓商)이 보부상(褓負商)으로 뒤틀리게 표기되어진 것은 1925년 대한민족의 역사를 왜곡 날조하는데 혈안이 된 조선총독부에서 어용학자들을 앞세워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도모하려는 의도적 책략에 기인된 것이다.
조선왕조의 이성계(李成桂) 태조가 고조선 때부터 존속해 오던 등짐장수(負商)들을 추스려서 중상주의정책(重商主義政策)을 실현하기 위하여 행상(行商)들의 대표자인 백달원(白達元)에게 하사한 옥도장(玉圖章)에 유아부보상지인장(唯我負褓商之印章)이라고 분명히 새겨져 있는 점을 비롯하여통상아문진정서(通商衙門陳情書 1.883) 통상아문대민행정처리문(通商衙門對民行政處理文 1.883) 군국아문행정처리문(軍國衙門行政處理文 1.883) 혜상공국관문등서책(惠商公局關文謄書冊 1.883) 혜상공국감결(惠商公局甘結 1.883) 혜상공국절목(惠商公局節目 1.883) 판하상리국서문(判下商理局序文 1.885) 판하상리국절목(判下商理局節目 1.885) 상무사장정(商務社章程 1.899) 등에 부상보상(負商褓商) 부보양사(負褓兩社) 부보휼보(負褓恤保) 좌우상(左右商) 부보양상(負褓兩商) 부보상(負褓商) 좌우사(左右社) 등의 분명한 용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보상의 사무소인 임방(任房)이 상무사(商務社)로 개칭된 이후에도 부상(負商)을 좌사(左社)라 부르고 보상(褓商)을 우사(右社)라고 불렀으며 특히 이 둘을 합한 좌우양상(左右兩商)을 좌우사(左右社)라고 명칭함으로써 부보상(負褓商)과 좌우사(左右社)를 일치시켰던 점을 들 수 있다.
2. 부보상의 명칭이 하사된 사연
1) 李成桂 將軍의 受惠
고려왕조 이성계(1335~1408) 장군이 30세인 1364년에 여진족(女眞族)과 교전할 때 위급한 상황을 지나가던 행상(行商)인 백달원(白達元) (白兎將軍達元先生神位 : 충남 덕산면 사무소에 설치된 부보상유품 보관소 백달원의 위패)이 구출해 주었다.
고려왕조 이성계 장군이 46세인 1380년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읍의 황산대첩(荒山大捷)에서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 : 阿其拔都)와의 격전 후 왼쪽 다리의 화살흔적으로 낭자한 유혈을 백달원(白達元)의 부하가 목화(木花) 솜으로 지혈 응급 치료하여 주었다.
1392년 7월 17일 공양왕(恭讓王)의 선양(禪讓)으로 개성(開城)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이성계 태조가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 세력의 추대를 받아 고려왕(高麗王)으로 즉위하였다.
1393년 2월 15일 고려의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개정(改定)하였다.
1392년 즉위 직후 조고(祖考)에 제사를 지내고 선대(先代)의 명복을 기원하는 동시에 스승인 무학국사(無學國師:朴自超)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함경남도 안변군 문산면 설봉산에 석왕사(釋王寺)를 중건할 때 백달원(白達元)이 이태조의 효성심(孝誠心)과 사은심(師恩心)에 크게 감복한 나머지 청년부상(靑年負商) 80명을 인솔하여 강원도의 삼척에서 함경남도 안변까지 오백나한(五百羅漢)의 불체를 운반해 주었다.
2) 李成桂 太祖의 報恩 : 人間的 情感 이태조가 석왕사 건립을 완공한 후 그 동안 입은 은혜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백달원(白達元)을 초치하고 간절한 소원(所願) 한 가지를 하문하였다.
백달원은 자신의 부귀영화 보다 부평초 행상(行商)들의 보호 지원을 주청하였다.
이에 이성계 태조는
① 개성의 발가산(發佳山)에 부보상 본부인 임방(任房)을 설치 제공하고
② 木器 土器 水鐵 소금(鹽) 어물(魚)의 5종을 전매특허(專賣特許)하였으며
③ 임방의 공사(公事)를 증빙하고 관아의 포달을 물리칠 수 있도록 유아부보상지인장(唯我負褓商之印章)이라고 새겨진 직인용(職印用) 옥도장(玉圖章)을 하사하였다.
따라서 부보상(負褓商)은 이성계 태조가 하사한 고유명사(固有名詞)이다.
3) 李成桂 太祖의 重商主義政策 이성계 태조가 부보상을 보호 육성한 정책은 중상주의정책(重商主義政策)이다.
이 정책은 이태조를 보좌한 최측근 정책참모인 정도전(鄭道傳)이 경제통(經濟通)이라는 점에 기인된다.
정도전은 경제문감(經濟文鑑)을 저술하여 임금에게 올려 바친 일이 있다.이태조가 중국의 역대 왕조역사에서 중상주의정책을 실시한 왕조는 흥성장구(興盛長久)하였고 억상주의정책(抑商主義政策) 경상주의정책(輕商主義政策)을 실시한 왕조는 쇠락단명(衰落短命)한 역사적 사실을 통찰한 것이다.부보상의 정책적 지원 육성은 군수품보급 전쟁비용조달 등의 국가안보(國家安保)에 직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3. 부보상이 보부상으로 둔갑된 곡절
1) 일본의 앙큼한 식민정책
부보상(負褓商)의 용어가 보부상(褓負商)으로 왜곡 둔갑된 연유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사농공상의 일본식 서열개념으로 조선왕조의 중상정책을 폄하(貶下)하기 위한 역사왜곡과 식민정책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일제에 최후까지 반항한 부보상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술책에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910년 일한병탄(日韓倂呑) 이후 일제의 식민통치가 극성을 부리던 시기인 1925년 조선총독부 총독관방(總督官房) 문서과(文書課)에서 발행한 <朝鮮人의 商業, 善生永助 著>이라는 저서의 제2장 제3절 제2항인 78쪽에서 처음으로 보부상(褓負商)이라는 용어가 대두(擡頭)되었기 때문이다.문장의 내용에서는 이성계 태조가 부보상(負褓商)이라는 명칭을 부여(附與)했다면서 항목의 제목에는 보부상(褓負商)으로 기록하였던 것이다.
또한 1929년 간특한 조선총독부 총무과(總務課)에서 발행한 <朝鮮의 市場經濟, 善生永助 著>라는 저서의 제5장 제2절 시장행상(市場行商 : 목차)을 본문에서는 지방행상(地方行商 280쪽)으로 변경하고 민간(民間)에서는 부보상(負褓商)으로 부른다고 기록하면서 소제목으로 보부상(褓負商)을 달았다.이처럼 일본제국의 어용학자를 이용한 조선총독부에서 처음으로 <보부상(褓負商)>이라고 슬쩍 표기한 것을 시발점으로 삼아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때까지 굳이 보부상(褓負商)으로 표기된 논저들이 간혹 나타나기 시작했던 점을 각별히 주목해야 한다.
조선총독부가 우리 나라와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식민정책을 악독하게 추진한 총본부(總本部)이었음을 우리는 절대로 망각할 수 없다.이러한 조선총독부에서 발행된 책자가 우리 나라와 민족정신을 긍정적으로 예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민간출판사인 대등각(大 閣)에서 1928년에 발행한 <조선경제사(朝鮮經濟史, 猪谷善一 著, 178쪽>와 계명사(鷄鳴社)에서 1931년에 발행한 <조선잡기(朝鮮雜記, 菊池謙讓 著, 147쪽>에는 양심적인 학자들에 의하여 부보상(負褓商)으로 명백히 등재되어 있다.
한편 일본제국주의자들은 1.895년 조선왕조의 고종황제 때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살(弑殺 1.895)하였고 알파벳의 국제적 표기순서가 Japan보다 앞섰다는 이유로 Corea를 Korea로 변경시켰다.
또한 그들은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정붙여 살던 지명(地名)을 뒤틀어 놓았고 창씨개명(創氏改名 1940)으로 우리 선조들의 성씨(姓氏)조차 바꾸었으며 우리 한국의 지맥(地脈)을 끊으려고 전국 곳곳의 명산(名山)에 쇠말뚝을 박아 놓았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왜정 때 지어진 경무대의 집모양이 大의 글자모형이고 한 동안 우리의 중앙청으로 사용되었던 지금은 헐린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선총독부 건물이 日의 글자모형이며 현재 서울시청의 건물이 本의 글자모형으로서 大日本(대일본)의 글자모형이다.
지금도 일본은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왜곡 변조하는데 골몰하고 동해의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등 간교한 철면피 행동을 서슴치 않고 있다.
2) 일제의 이성계태조 重商政策에 대한 모멸
일제는 이태조의 부보상 육성에 의한 중상주의정책을 왜곡 폄하시키고 일본의 고정관념인 서열적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의식에 입각하여 이태조와 부보상의 밀착관계를 저속화시켜서 조선왕조의 권위(權威)를 날조 실추시키려는 흉계를 견지하고 있었다.일제가 말하는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의 사(士)는 선비(文士)가 아니고 무사(武士)를 의미한다.
3) 이태조의 부보상 명칭하사에 대한 고의적 폄하 왜곡
부보상은 부상(負商:男)과 보상(褓商:女)의 합성어(合成語)이다.본래 사람의 초기생활 수준에서는 식생활(食生活)에 관련된 용품을 판매하는 부상(負商)의 활동이 먼저 발생되었고 그 다음 단계로 점차 생활수준이 향상되면 의생활(衣生活)에 관련된 문화용품을 판매하는 보상(褓商)의 활동이 순차적으로 요구되게 마련이다.
부상(負商)은 물건을 지게(支械)에 지고 팔러 다니던 남자행상(男子行商 : 등 짐장수)이고 보상(褓商)은 물건을 보자기(褓: 布)에 싸서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팔러 다니던 여자행상(女子行商 : 봇짐장수)을 말한다.조선총독부는 부보상의 용어를 남존여비(男尊女卑)의 관념으로 왜곡시켜서 은연중 가족이간(家族離間) 여성해방(女性解放)으로 연결지어서 우리 민족자체의 내부분란을 부채질한 것이다.이에 조선총독부는 어용학자를 동원하여 부보상(負褓商)을 보부상(褓負商)의 명칭으로 둔갑시켜서 멀쩡한 생선에 가시를 박고 독(毒)을 묻힌 것이다.
4. 역사왜곡에 따른 식민사관 잔재의 소탕
1.877년에 설립된 동경제국대학에서 1.887년에 개설한 동양역사학과의 교수들이 사사건건 한반도의 역사를 왜곡시킨 날조공들이다.사농공상(士農工商)의 용어가 신분의 서열개념인 양 착각하고 상업과 상인이 까닭없이 폄하되는 일도 마찬가지로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잔재이다. 일본의 한반도침략을 합리화시키려는 앙큼한 식민통치사관(植民統治史觀)의 소산이다.
옛날 우리 조선왕조에서 사용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용어는 신분이나 직업의 서열 개념이 아니었고 사민주의사상(四民主義思想 : 士農工商)에서 발효된 등권적 생업개념(生業槪念)으로서 임금과 노비를 제외한 모든 백성(百姓)의 대명사이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중상주의정책(重商主義政策)을 실시한 국가는 오래 번성하였음을 상기해야 하겠다.
5. 負褓商의 誡命
특히 부상(負商)들은 동가식(東家食) 서가숙(西家宿)하는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부평초 신세이면서도 동병상련(同病相憐) 유무상통(有無相通) 간담상조(肝膽相照) 환란상구(患難相救)하고 국민의 생활필수품인 5가지 물품(목기 토기 수철 소금 건어물)을 유통시켜서 생활수준을 배달하면서 이성계 태조가 내려주신 팔자칙교(八字勅敎 : 病則救療 死則埋葬)를 준수했던 것이다.
그들이 품속에 지니고 다니던 채장(신분증)의 앞면에는 소속임방과 성명이 기재되어 있고 뒷면에는 ① 물망언(勿妄言) ② 물패행(勿悖行) ③ 물음란(勿淫亂) ④ 물도적(勿盜賊)의 4대 계명(誡命)이 적혀 있어 행실의 도덕적 기틀로 삼고 있었다.
특히 물망언(勿妄言)은 재물을 들이지 않고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일곱가지 보시(布施 : 無財七施) 중의 하나인 언시(言施)에 입각하여 불신(不信)과 거리감(距離感)을 좁히는 첩경(捷徑:지름길)이었다.
이러한 부보상의 계명은 향약(鄕約)의 4대 강령(綱領)인 ① 덕업상권(德業相勸) ② 과실상규(過失相規) ③ 예속상교(禮俗相交) ④ 환난상휼(患難相恤)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한국상인의 전통의식 속에 살아 있는 부보상(負褓商)의 행실(行實)은 참으로 숭고한 상인정신을 갖추고 있었던 본보기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판단된다.
6. 부보상의 정신구조
1) 충의정신(忠義精神) : 임진왜란(1592∼1598) 병자호란(1636∼1637)
2) 신의정신(信義精神) : 형제정의(兄弟情誼) 환난상구(患難相救)
3) 도의정신(道義精神) : 물망언 물패행 물음란 물도적 <예의>
4) 단결정신(團結精神) : 자치율법 사발통문
7. 부보상의 광역활동
1) 국권수호활동 : 국역전역 상병(商兵) 암행어사보조 황국협회
2) 동향파악활동 : 민심동향 치안동향 적진동향 시장동향
3) 세무활동 : 장세징수(場稅徵收) 납세의무
4) 통신활동 : 국가통신 사설통신(私設通信) 소식전달
출 처 負褓商關聯史料譯解-1988(http://www.bubosang.net/html/bubosang/bubosang01.htm)
절목 7 경외학교절목
조선시대의 교육법규 및 교육규범
1) 경국대전 : 성균관, 사학 및 향교에 관한 제도가 규정되어 있다. (예조조, 성균관조, 사학조)
2) 학령 : 성균관에 관한 규정 규칙으로, 학생들의 일과, 성적 평가, 벌칙 등을 규정하고 있다.
3) 권학사목 : 권근이 지은 것으로 소학에 교육적 의의를 밝힘, 생원시의 입시과목으로 할 것을 주장
4) 구재학규 : 세조9년 예조에서 성균관의 학규로 지은 것으로 사서오경을 9계단으로 나누고 있음.
대학, 논어, 맹자, 중요, 시경, 서경, 춘추, 예기, 주역을 9재라 하고, 과목의 진급과
과목순을 정해 놓음.
5) 진학절목 : 성종1년 예조에서 지은 것으로 교사의 취임, 전직과 학생의 근면, 결석에 관한 보충교재이다.
6) 경외학교절목 : 명종 1년(1546)에 반포한 전국학교에 적용한 것으로, 교원채용, 학과목, 입학,
교육평가 및 상벌에 관한 상세한 규정이다.
7) 학교사목 : 선조 때 이율곡이 왕명으로 제정, 교원의 선택, 임용, 승급 및 대우에 관한 규정과
학생의 입학, 정원, 선발, 거제, 대우와 자격 및 시학에 관한 규정으로 모두 인사문제를
상세하게 규정
8) 학교모범 : 선조16년 이율곡이 왕명을 받아 택사와 양사를 목적으로 하는 내용으로 학령에 미비한
점을 보충하고 있다.
특히, 선비들로 하여금 몸가짐과 일해 나가는 법규를 16조로 설명하고 있다.
절목 8 군포균역절목
국방과 군역에 대한 정책들도 많이 시행되었는데, 먼저 대흥산성·황룡산성 등 변경지역에 성을 쌓고 도성을 크게 수리하였다. 그리고 1712년(숙종 38)에는 북한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남한산성과 함께 한양에 대한 수비의 거점으로 삼게 하였으며, 훈련별대와 정초청을 통합하여 금위영을 신설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에 문제가 되고 있던 양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호포제 실시를 추진하다 양반들의 반대로 좌절되자, 양역이정청을 설치하여 양역변통의 방안을 강구하게 하고 이듬해 군포균역절목을 마련하여 양정 1인의 군포부담을 2필로 통일시키기도 하였다.
자료제공: 대한법정치학 연구회
원전】 10 집 211 면
《 성종 129 12/05/02(병자) / 주강에 나아가 참찬관 이맹헌과 정사를 논하다 》
주강(晝講)에 나아가니, 참찬관(參贊官) 이맹현(李孟賢)이 아뢰기를,
“단송 도감(斷訟都監)에서 진고(陳告)하는 것이 상당히 많아서 지극히 소요(騷擾)스럽습니다. 많은 경우에는 진고하는 것이 70여 구(口)에 이르니, 쟁송(爭訟)하는 것이 더욱 번잡스럽습니다. 대개 천인(賤人)이 적고 양인(良人)이 많으니, 곧 나라에 유익한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써는 연한(年限)을 정해서 진고(陳告)하게 하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도다. 그것을 정승들에게 의논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이맹현이 또 말하기를, “신이 《세종실록(世宗實錄)》을 보건대, 윤봉(尹鳳)이 8년 동안 연달아 사신으로 나와서 토표피(土豹皮)를 가혹하게 구하였습니다. 지난해에 정동(鄭同)이 왔을때 이것을 파는 것을 허락하고 금지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공가(公家)나 사가(私家)에 토표피가 거의 다 없어졌습니다. 금년에는 이를 금지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도다.” 하였다.
이맹현이 또 말하기를, “황해도에서 군사를 내어 사신을 맞이하고 보내는 데 노고가 너무 심한데, 또 사재감(司宰監)·선공감(繕工監) 등의 기인(其人)의 구실[役]도 있으니, 청컨대 평안도의 예(例)에 의하여 하삼도(下三道)에 옮겨서 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장차 이를 의논하겠다.” 하였다.
【원전】 10 집 216 면
《 성종 129 12/05/20(갑오) / 경연에서 진고의 폐단에 대하여 논하다 》
이보다 앞서 부제학(副提學) 이맹현(李孟賢)이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진고(陳告)의 법은 햇수를 한정하여 정지시키소서.”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명하여 여러 원상(院相)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정창손(鄭昌孫)·홍응(洪應)·윤호(尹壕)가 의논하기를, “진고(陳告)하는 법이 비록 중하다고 하지만 또한 큰 폐단이 있습니다. 가령 노비(奴婢) 8구(口)를 진고한다면, 진고자(陳告者)가 좋은 놈을 골라서 2구(口)를 길이 집거(執據)하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중한 벌을 피하여 가벼운 벌을 받으려는 자와 진고인(陳告人)이 서로 내응(內應)하여 고의로 상(賞)으로 충당되므로, 공천(公賤) 가운데 실(實)한 자는 날로 줄어드니, 첫번째 폐단입니다. 양인(良人)인지 천인(賤人)인지 분변(分辨)할 수 없는 경우에는 다만 문적(文籍)이 없다고 하여 일일이 종천(從賤)시키니, 온당치 아니한 듯합니다. 나라를 위하는 방도로써는 양인이 많으면 군액(軍額)이 늘어나는데, 이것은 염려하지 아니할 수가 없으니, 두번째 폐단입니다. 보충군(補充軍)은 본래 천인(賤人)으로서 양인(良人)이 되고자 하는데, 지금 무식한 무리들이 혹은 숨어서 빠져 그 구실[役]을 끝마치지 아니하면, 단지 가장(家長)한 사람이 천인(賤人)이 되는 데에 연좌되어 그 나머지 동생(同生)과 그 자손(子孫)들이 다시 그 구실[役]을 끝마치게 하는 것은 좋습니다만, 지금 일체 모두 종천(從賤)시키니, 세 번째 폐단입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안의 진고조(陳告者)에, ‘4구(口)에 1구(口)를 지급한다.’고 하였으나, 길이 지급한다는 명문(明文)이 없으니, 자기 몸 당대로써 그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한다고 진고자(陳告者)가 넘치지 아니할 것이요, 또한 《경국대전》의 법을 허물어뜨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고, 윤필상(尹弼商)이 의논하기를,
“공처(公處)에서 도망하여 빠져 나간 노비(奴婢)를 진고(陳告)하는 법은 추쇄 도감(推刷都監)과 장례원(掌隸院)에서 수교(受敎)한 것이 상세하므로, 반드시 다시 신법(新法)을 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또 진고(陳告)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한다면 추쇄(推刷)하여 찾아낼 길이 없어 공천(公賤)이 날로 줄어들 것입니다. 진고의 법을 폐지할 수가 없으니, 옛날 그대로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끝>
한성에 동관왕묘 설치(1601. 9)
한성 화재로 민가 1,000호와 남별궁 소실 (1619. 11)
경희궁 중건(1620)
북한산성 수축시작(1711∼1712)
도성 금표 개정(1727)
한성의 하천관리절목과 하천정리계획도
작성하고 공사착수, 준천절목을 상정(1759)
한성 개천의 둑을 돌로 쌓기 시작(1773)
도성내 하천준설(1.842. 5)
한성부 청사 화재(1.852. 1)
광통교지전∼종각사이 상가 화재(1.864.4)
경복궁 중건시작(1.865. 4)
절목 2 표정절목(여강서원 관리절목)
보물 906호
고문서(古文書)에는 학봉(鶴峰)의 교지(敎旨) ·교서(敎書) ·유서(諭書) ·소지(所志) ·분재기(分財記) 등 10,000여 점이 소장(所藏)되어 있다. 그 중에 간찰(簡札) ·제문(祭文) 등은 제외하고 특히 정치(政治) ·경제(經濟) ·사회(社會) ·문화(文化) 등의 연구(硏究)에 필요한 문서류(文書類)만 선별(選別)하여 17종(種) 242점(點)이 지정(指定)되었다.
1. 교서(敎書): 선조(宣祖)가 1592년(선조25)에 경상도관찰사인 김성일(金誠一)에게 내린 교서임.
2. 유서(諭書): 선조(宣祖)가 1592년(선조25)에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김성일(金誠一)에게 내린 유서임.
3. 유지(有旨): 1578년(선조11)과 1592(선조25)에 선조(宣祖)가 승지(承旨)를 통해 학봉(鶴峰)이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와 초유병사(招諭兵使) 때에 보낸 것과, 1.834년(순조34)에 순조(純祖)가 승지를 통해 김진화(金鎭華)가 아산현감(牙山縣監) 때에 보낸 유지임.
4. 교첩(敎牒) 및 교지(敎旨): 학봉(鶴峰)의 백패(白牌)·홍패교지(紅牌敎旨) 및 사령교지(辭令敎旨)를 비롯하여 학봉 자손(子孫)의 교지임.
5. 첩(차정)(帖(差定)): 학봉(鶴峰)의 자손(子孫) 김시추(金是樞) 1630년(인조8), 1638년(인조15) 차정(差定)과 1678년(숙종4)의 김규의 차정 등임.
6. 시권(試券): 학봉(鶴峰)의 문과급제(文科及第) 답안지(答案紙) 및 증손(曾孫) 김규의 시지(試紙) 등임.
7. 시호서경(諡號署經): 학봉(鶴峰)의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으로 개정(改定)하는 데 대한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서경문서(署經文書)임.
8. 표정절목(票定節目): 안동소재(安東所在) 여강서원(廬江書院)의 운영(運營)에 관한 절목(節目)
9. 입안문(立案文) 선조년간(宣祖年間)의 가옥(家屋)·노비(奴婢)·전답(田畓) 소유를 인증(認證)하는 산라목(新羅牧) 입안(立案)과, 1722년의 안동부입안(安東府立案)임.
10. 등장(等狀): 투장(偸葬)을 금단(禁斷)해 달라는 문서(文書), 사역(使役)에 관한 청원등장(請願等狀), 학봉(鶴峰)의 후손(後孫) 김진화(金鎭華)등의 선정(善政)을 찬양하고 그의 유임(留任)을 청원(請願)한 등장(等狀) 등임.
11. 호적단자(戶籍單子): 학봉(鶴峰)의 선조(先祖) 천의 호구단자(백문)(戶口單子(白文))와 현손(玄孫) 김규 등의 호구단자(戶口單子)임.
12. 분재기(分財記): 학봉(鶴峰)의 부친(중종대)(中宗代) 김진(金璡), 학봉(鶴峰)이 부친(父親)에게 받은 분재기(1565)(分財記), 학봉 자손(鶴峰 子孫)등의 분재기(分財記).
13. 명문(明文): 토지(土地), 노비(奴婢), 가옥(家屋) 등(等)의 매매문기(賣買文記)임.
14. 완의(完議): 의성김씨(義城金氏) 문충공파(文忠公派) 문족대표(門族代表)들이 작성(作成)한 완의(完議)로 신곡전장(申谷田莊)등을 종가(宗家)에 영속(永屬)시켜 대대(代代)로 전수(傳守)하게 할 것과 가수천(佳樹川)에 별묘(別廟)를 세워 제향(祭享)할 것 등.
15. 통문(通文): 학봉(鶴峰)의 시호(諡號)를 청원(請願)하는 사림(士林)의 진정통문(陳情通文)과, 학봉(鶴峰) 을 제향(祭享)하는 서원(書院)으로서 철폐된 서원(書院)을 복향(復享)토록 청원(請願)하는 통문 (通文), 열부(烈婦)에 대한 포상을 요청(要請)하는 통문 (通文) 기타 통문들로 서원(書院)관계 자료임.
16. 치제문(致祭文): 1609년(광무1)에 국왕(國王)이 예조좌랑(禮曺左郞)인 이천추(李天樞)를 보내어 학봉(鶴峰)에게 사제(賜祭)한 치제문(致祭文).
17. 설계도(設計圖): 여사간도(여사간 학봉의 현손 김세기의 호)(如斯간圖(如斯간 鶴峰의 玄孫 金世基의 號))와 학봉구종택(鶴峰舊宗宅) 가옥설계도(家屋設計圖)임.
출 처 : [인터넷] http://www.ocp.go.kr
절목 3 사가독서
조선시대에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말한다.
세종대에 학자를 양성하고 유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여, 1424년(세종 6) 집현전 학사 중에서 젊고 재주가 있는 자를 골라 관청의 공무에 종사하는 대신 집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세종 말엽에 신숙주ㆍ성삼문 등 6인에게 휴가를 주어 절에서 글을 읽게 하는 등 여러 차례 시행되다가, 1456년(세조 2) 집현전의 혁파와 함께 폐지되었다.
1476년(성종 7) 채수 등 6인에게 다시 독서를 위한 휴가를 주었고, 1483년에는 용산의 빈 사찰을 수리하여 국왕이 독서당이라는 편액을 내려 사가독서하는 장소로 쓰도록 하였다. 이곳을 남호당 또는 용호당이라고 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 이후 이 제도와 함께 독서당도 폐지되었다. 중종이 즉위한 뒤 사가독서에 관한 절목을 마련하도록 지시하면서 다시 시행되었다. 1517년(중종 12) 두모포(옥수동)에 다시 독서당을 지었는데, 이곳을 동호당이라 하였다.
선발된 학자는 집현전이나 홍문관 관원 못지않게 국왕의 총애를 받아, 국왕이. 직접 술잔을 내려주며 술 마시는 것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명맥만 이어오다가 1709년(숙종 35) 이후 폐쇄되었다. 동호당이 있던 지금의 옥수동 일원을 얼마 전까지도 독서당 마을이란 뜻으로 '한림말'이라 불렀고, 약수동에서 옥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독서당고개', 그 길을 지금도 '독서당길'이라 부른다. 이 제도는 오늘의 석좌제도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절목 4 임고서원 관리절목
보물 1109호
임고서원(臨皐書院)은 고려말(高麗末)의 충신(忠臣)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주향(主享)으로 한 서원(書院)으로서, 조선명종(朝鮮明宗)8년(年)(1553)에 창건(創建), 명종(明宗)9년(年)(1554)에 사액(賜額)된 서원(書院)이다. 임란(壬亂)때 소실(燒失)되어 선조(宣祖)36년(年)(1603)에 중건(重建)되었다.
임고서원(臨皐書院)에는 전적(典籍)이 약(約) 200책(冊) 소장(所藏)되어 있는데 조사(調査)된 전적(典籍)은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新編音點性理群書句解) 등(等) 42종(種) 186책(冊)이다. 그 중에서 전적문화재(典籍文化財)로서 가치(價値)가 있다고 평가되는 10종(種)만을 선별지정(選別指定)하였다.
간본(刊本)은 정충록(精忠錄) 등(等) 임고서원(臨皐書院) 내사본(內賜本)과 임란이전본(壬亂以前本)으로 3종(種) 12책(冊)이다. 그리고 필사본(筆寫本)은 심원록(尋院錄), 임고서원고왕록(臨皐書院考往錄), 장학계안(奬學 案) 등(等) 선조조(宣祖朝)에서 조선조(朝鮮朝) 말기(末期)에 이르는 임고서원(臨皐書院)과 관련된 자료(資料)들로서 7종(種) 13책(冊)이다.
이들 간본(刊本)은 낙질(落帙)이 있기는 하지만 조선전기(朝鮮前期) 간본(刊本)으로 서지학연구(書誌學硏究)에 도움이 되는 자료이며, 필사본(筆寫本)은 비록 창건(創建) 당시(當時)부터의 것이 완벽하게 보존(保存) 되어온 것은 아니나 임고서원(臨皐書院)의 운영(運營) 족적(足蹟) 및 이에 관련된 그 시대의 사회(社會) ·경제적(經濟的)인 일면(一面)을 살필 수 있으며 또한 조선조(朝鮮朝) 유교문화(儒敎文化)와 관련된 학술자료의 하나로서, 서원제도(書院制度) 연구(硏究)에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新編音點性理群書句解)는 주돈신(周敦 ), 정호(程顥), 정신(程 ) 등 송대(宋代) 제유(諸儒) 18인(人)의 시문(詩文)을 유별(類別)로 분류(分類)하여 편찬한 것이다.
이 책(冊)은 명종(明宗)8년(年)(1553)에 국왕(國王)이 이황(李滉)에게 내린 선사본(宣賜本)이다. 표지(表紙) 이면(裏面)에 내사기(內賜記)가 있고 첫장 상단(上端)「선사지기(宣賜之記)」란 선사인(宣賜印)이 있으며 동(同) 하단(下端)에는「임고서원(臨皐書院)」이란 소장인(所藏印)이 찍혀있다. 뒤 표지(表紙) 이면(裏面)에는 가정갑인(嘉靖甲寅) 즉 명종(明宗)9년(年)(1554)에 이황(李滉)이 내사(內賜)받은 성리군서(性理群書) 1질(帙)을 후학(後學)을 위하여 임고서원(臨皐書院)에 증정(贈呈)한다는 식기(識記)가 있다.
낙질(落帙)이지만 보존상태(保存狀態)는 양호(良好)하며 내사기(內賜記)의 연대(年代)를 간년(刊年)으로 정(定)하였다.
회찬송악악무목왕정충록(會纂宋岳鄂武穆王精忠錄)은 송대(宋代)의 충신(忠臣)인 악비(岳飛)의 정충기사(精忠紀事)와 수전(褒典), 유사(遺事) 등을 수록(收錄)한 것이다.
이 책(冊)은 선조(宣祖)1.8년(年)(1585)에 국왕(國王)이 임고서원(臨皐書院)에 내린 선사본(宣賜本)이다. 표지이면(表紙裏面)에 내사기(內賜記)가 있고 첫장 상단(上端)에「선사지기(宣賜之記)」란 인(印)이 있으며 하단(下端)에는「임고서원상(臨皐書院上)」이란 난외식기(欄外識記)가 있다.
이산해(李山海)의 만력십삼년(萬曆十三年)(1585) 서문(序文)과 내사기(內賜記) 연대(年代)와 일치되고 있어 간행(刊行)한 해에 내사(內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권수제(卷首題) 말미(末尾)가 훼손되었으나 보존상태(保存狀態)는 양호(良好)하다.
논어언해(論語諺解)는 표지(表紙)가 가표지(假表紙)로 되어 있어 내사본(內賜本)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첫 장 상단(上端)에「선사지기(宣賜之記)」란 선사인(宣賜印)이 있다. 동(同) 하단(下端)에는「임고서원상(臨皐書院)」이란 소장인(所藏印)과 「임고서원상(臨皐書院上)」이란 난외식기(欄外識記)가 있다. 낙질(落帙)이지만 권수(卷首) 하단좌측(下端左側)이 약간 닳아졌을 뿐 보존상태(保存狀態)는 양호(良好)하다.
이 언해본(諺解本)은 한글에 방점(傍點)이 있으며, 드물게 보는 희구본(稀 本)으로 서지학연구(書誌學硏究)에 도움이 되는 자료(資料)이다
「이조서원문고목록(李朝書院文庫目錄)」도산서원(陶山書院) 소장본(所藏本) 내사기(內賜記)에“만력십팔년(萬曆十八年)(1590) 칠월(七月) 일내사(日內賜) 예안도산서원(禮安陶山書院) 논어언해일건(論語諺解一件) 좌승지신이(左承旨臣李)(수결(手決))”이므로 간행년대(刊行年代)를 내사기년대(內賜記年代)로 하였다.
「심원록(尋院錄)」은 임고서원(臨皐書院) 창건이후(創建以後)부터 조선조(朝鮮朝) 후기(後期)까지 이 서원(書院)을 내방(來訪)한 인사(人士)들의 명부(名簿)이다.
임고서원고왕록(臨皐書院考往錄)은 임고서원(臨皐書院)의 연혁(沿革)과 당시의 원장(院長) 유사(有司) 등 서원(書院)과 관련된 중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임고서원전곡집물범례등록(臨皐書院錢穀什物凡例謄錄)은 조선후기(朝鮮後期)에 임고서원(臨皐書院)에서 소유(所有)하고 있었던 자산(資産) 관계를 기록한 것이다.
이 등록(謄錄)에는 먼저 임고서원(臨皐書院)의 전곡(錢穀), 예물(例物), 집물(什物) 등을 차례로 기록하고 그리고 각관어염복정등록(各官魚鹽卜定謄錄), 각사지지복정등록(各寺紙地卜定謄錄), 각처복재위전등록(各處伏在位田謄錄) 등도 수록(收錄)하였다. 각사지지복정등록(各寺紙地卜定謄錄)에는 하양(河陽) 환성사(環城寺), 공산(公山) 운부사(雲浮寺), 의흥(義興) 인각사(麟角寺), 영천(永川) 성혈사(聖穴寺), 정각사(鼎脚寺) 등 5개(個) 사찰(寺刹)의 지(紙)와 지세(地稅)를 기록하였고, 각처복재위전등록(各處伏在位田謄錄)에는 개령전답(開寧田沓), 인각사위전답(麟角寺位田沓), 하양(河陽) 환성사(環城寺) 위전답(位田沓) 등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임고서원장학계안(臨皐書院奬學 案) 부(附) 절목(節目)을 살펴보면 이 장학계안(奬學 案)은 임고서원(臨皐書院) 유생(儒生)과 향리(鄕里) 자제(子弟)의 교육(敎育)을 위해 각(各) 문중(門中)들과 결성(結成)한 것이다.
내용은 장학계안(奬學 案) 결성(結成)에 대한 서윤보(徐綸輔)의 서문(序文)과 정하원(鄭夏源)의 후서(後序)가 있으며 오천정씨(烏川鄭氏) 등(等) 56문중(門中)의 수곡기(收穀記)와 절목(節目)이 기재되어 있다.
환성사결입안(環城寺決立案)은 임고서원(臨皐書院)과 5개사찰(個寺刹)인 하양(河陽) 환성사(環城寺), 공산(公山) 운부사(雲浮寺) 의흥(義興) 인각사(麟角寺), 영천(永川) 성혈사(聖穴寺), 정각사(鼎脚寺)와의 분쟁(分爭)에 대한 입안문(立案文)이다.
임고서원범규(臨皐書院凡規)는 임고서원(臨皐書院)의 제향(祭享) 원규(院規)와 사례(事例)를 기록한 것이다. 내용(內容)을 보면 임고서원범규식(臨皐書院凡規式), 춘추대향도(春秋大享圖) 의도제용잡물식(依圖祭用雜物式), 제식(祭式), 제문(祭文), 금사후유연(禁射侯遊宴)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말미(末尾)에 가정사십일년(嘉靖四十一年)(1562) 삼월십오일행(三月十五日行) 군수(郡守)(수결(手決))이 있다.
서원규범(書院規範)은 임고서원(臨皐書院)의 원규(院規)와 제향(祭享) 때 소요(所要)되는 각종(各種) 제수품(祭需品)인 제물식(祭物式), 그리고 임고서원신증원규(臨皐書院新增院規) 등(等)에 관한 기록이며 끝에 숭정사년(崇禎四年)(1631)삼월이십오일원중유안수정시완의(三月二十五日院中儒案修正時完議)가 있다.
절목 5 정유절목/ 서얼소통법
정조가 서얼들에게 정게에 진출할수있는 기회를 준것은 꾸준한 서얼들의 건의에 여러 선대왕들의 실행이 미흡한것을 알고 실행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서얼차별이 있었는지 또 왜그것이 철폐되야 하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서얼 차별법인 서얼 금고법은 조선 시대 양반의 자손이라도 첩의 소생은 관직에 나아갈 수 없게 한 제도 입니다.
서얼금고법 제정 동기와 과정
이 제도는 1415년(태종 15) 우대언.서선이 태종의 특정한 인물에 대한 경계심을 살펴 종친 및 각품의 서얼 자손은 현관의 직사를 맡기지 말자고 건의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해 몇 가지 형태의 차별이 가해지던 끝에 ≪경국대전≫ 편찬 이후로 금고의 제재가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서얼에 대한 차별의 규정은 경국대전에 다음과 같이 두 가지가 명시되어 있다. 예전 제과조에 죄를 범해 영구히 임용할 수 없게 된 자, 장리의 아들, 재가하거나 실행한 부녀의 아들 및 손자 등과 함께 문과, 생원·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 이전 한품서용조에 문·무 2품 이상의 양첩 자손은 정3품, 천첩 자손은 정5품에 한하고, 6품 이상의 양첩 자손은 정4품, 천첩 자손은 정6품에 한하며, 7품 이하 관직이 없는 사람까지의 양첩 자손은 정5품, 천첩 자손은 정7품에, 양첩자의 천첩 자손은 정8품에 각각 한정해 서용한다고 한 것 등이다. 이 두 규정은 같은 차별 의식의 소산이나 성립의 내력은 서로 다르다. 그리고 제정된 시기는 전자보다 후자가 앞섰다.
서얼에 대한 한품 규정의 동기는 기술관에 대한 것과 거의 비슷하였다. 그러나 그 내력과 경위는 훨씬 더 복잡하였다. 고려시대는 상급 신분층 사이에 대체로 일부 일처제가 준행되었으나, 말기에 접어들면서 처를 여러 명 거느리는 풍습이 유행하였다. 이 변화의 원인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몽고 풍습의 영향을 받으면서 인구 증식 정책이 강구되는 가운데 다산이 미덕으로 치부되는 분위기에서 풍습이 달라진 것 같다. 어떻든 이러한 풍조는 조선왕조 성립 후 사회질서가 전반적으로 갱신되는 가운데 여러 처의 소생간의 상속 문제를 둘러싼 분쟁이 심각한 문제로 부수되어 유교적인 일처주의 기준 아래 제재를 받았다.
일처주의는 한 사람의 처 외는 모두 첩으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다처간의 적·첩 구별의 분쟁은 대단히 심각했으며, 그 분쟁의 치열함 속에서 첩에 대한 적대 관념이 이미 필요 이상으로 강조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더해 처음부터 첩으로 맞아들여진 자 가운데 신분이 천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 첩 및 그 소생에 대한 차별 의식 조장을 결정짓게 하였다.
고려 말 이래 다처 풍조 아래서 처음부터 첩으로 맞아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 경우 신분이 양인인 양첩도 있었지만, 신분이 천인인 천첩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자기 소유의 비(婢)를 첩으로 들이는 경우가 태반으로, 첩과 그 소생에 대한 천시 관념은 여기에서 비롯됨이 가장 컸다.
천첩 소생에 대한 처우는 양천제의 신분 규정의 적용상으로도 문제가 되었다. 고려 시대의 관행에 따르면, 아버지가 양반이라도 어머니가 노비신분이면 그 소생의 신분은 종모법의 원칙에 따라 노비, 곧 천인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서는 국가의 역을 담당할 인력의 확대를 목적으로 공사비 신분으로 양인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소생은 아버지 신분을 따라 양인이 되게 하는 이른바 종부법이 여러 차례의 논의 끝에 1414년(태종 14)에 채택되었다.
이 법의 제정으로 양반의 천첩 소생이 양인이 되는 것은 확실해졌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차별적 처우는 여기서부터 구체적으로 강구되기 시작하였다. 종부법의 적용으로 양인신분을 허용하더라도 천인 소생에 대한 차별 관념은 그대로 남아 양인으로서의 활동에 일정한 제재가 가해졌다. 즉, 양인 남자면 누구나 담당해야 하는 군역의 의무가 보충군이라는 특별한 병종에 일정한 기간 복무할 것이 요구되고, 한품 서용의 규정을 마련해 이 군역을 치른 뒤에 밟게 되는 벼슬길에 제한을 두었다.
과거 응시자격의 박탈에 대한 규정의 제정 시기는 기록상 확실하지 않다. 단지, 같은 제재의 대상인 재가실행 부녀의 자손에 대한 차별의 논의가 1477년(성종 8)에 있었으므로 대개 이 전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전부터 있어 온 한품 서용의 규정도 그 대상직을 잡직으로 한정해 서얼이 좋은 관직에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렇지만, 이 응시자격의 박탈에 대한 구체적인 입법으로 차별은 더 심해질 수 밖에 없었다.
서얼 출신인 어숙권은 ≪패관잡기≫에서 서얼에게 아예 벼슬에 나가지 못하게 한 것은 ≪경국대전≫ 편찬 후라고 지적하였다. 어숙권이 살던 시대에 만들어진 ≪경국대전주해≫에도 그러한 강화된 차별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서얼 자손에 대한 법의 적용이 자자손손으로 해석되고, 서얼 자체에 대한 해석도 양첩산은 서, 천첩산은 얼이라고 구분하는 설명을 제시하였다. 특히, 얼은 죄를 범해 몰패된 여자가 요행히 고귀한 남자를 만나 자식을 낳으면 나무를 베낸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나는 것과 같다는 뜻이라고 하여 차별 의식이 당시 대단히 경색화된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허통 논의의 대두와 전개과정
≪경국대전주해≫가 만들어진 시기를 전후해서 서얼 출신의 명사는 적지 않았다. 어숙권을 비롯해 조신·송익필·양사언·양대박 등 도학·행의·문장·충의 등에 뛰어난 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인재 활용이라는 면에서 서얼에 대한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조정에서도 일찍부터 제시되었다. 중종대에 조광조가 이미 통용을 제안했다는 것이 후대의 허통론자들의 통설로 인식되었다. 명종대에는 서얼들 스스로 양첩손에게 문무과의 응시를 허용하라는 소를 올렸다.
1567년(선조 즉위년)에도 서얼 1,600여명이 허통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583년(선조 16) 이탕개(尼蕩介)의 난이 일어났을 때 병조판서 이이는 난을 평정할 인력확보책의 하나로, 서얼로서 6진 일대의 근무를 지원하는 자는 3년만에 허통해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직접 채택되지 않았지만, 임진왜란 중에 전시 재정난 타개의 한 방법으로 쌀을 받고 허통해 주거나 전공에 대한 포상으로 허통해 주는 예를 낳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차별은 여전히 심해 광해군 때 ‘칠서지옥’이라 하여 박응서 등 서얼 출신 7인이 관련된 역모 혐의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하였다.
서얼허통에 관한 조정의 논의는 인조·현종·숙종 연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허통의 실적은 1597년(선조 30)부터 1735년(영조 11)까지 138년간 문과 급제자가 42인에 불과한 정도였다.
숙종대 이후로는 서얼들의 집단상소가 자주 있었다. 1695년(숙종 21) 영남 지방 서얼 988명, 1724년(영조 즉위년) 정진교 등 5,000인이 각각 상소한 것이 유명하다. 영조는 1772년 서얼을 청요직에도 등용한다는 통청윤음을 내리는 한편, 서얼도 아버지와 형을 아버지와 형이라 부를 수 있게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역률로 다스린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학교에서 서얼들의 서열을 따로 두지 못하게 하는 서치법을 적용하고, 서얼도 일반 양반과 마찬가지로 향안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하는 문제 등에 부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청요직 가운데 서얼을 위해 가장령(假掌令)·가지평(假持平) 각 한 자리를 더 마련하는 성과를 올리는데 그쳤다.
서얼허통 문제는 정조대에 큰 진전을 보았다. 정조는 영조대 조정의 노력에 비해 성과가 적었던 것을 직시하였다. 그리하여 1777년(정조 1) 3월에 이른바 정유절목을 통해 서얼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다음과 같이 넓혔다. 즉, 문반의 분관이나 무반의 첫 천거는 이전과 같이 교서관에서 관장하는 부천으로 하되, 요직 허용은 문반 가운데 호조·형조·공조의 참상, 음직으로는 판관 이하로 한정하였다.
외직에서는 문무 당하관으로 부사, 당상관으로 목사를 허용하고, 음직으로 생원·진사 출신자는 군수를 허용해 치적이 있는 자는 부사로 승진시키며, 생원·진사 출신이 아닌 자는 현령으로 허용해 군수까지 승진할 수 있게 하였다. 문신 분관은 예문관에 한정해 직강 이하 직은 제한 없이 처리하며, 무신은 중추부·오위장 등을 제한 없이 하도록 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문·무의 여러 관직에 대한 진출의 허용이 실제로 어느 정도 실행될 수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정조는 1779년 내각, 곧 규장각에 검서관 제도를 두어 학식있는 서얼들을 다수 이에 등용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유득공·이덕무·박제가·서이수 등은 4검서로 유명하다. 정조의 문치를 도운 이른바 초계 문신 가운데도 서얼 출신들이 다수였다.
.1.823년(순조 23) 9,996명에 달하는 서얼 유생들이 집단적으로 허통 요청을 상소하였다. 이를 계기로 계미절목이 마련되어 좌윤·우윤, 호조·형조의 참의, 병사·수사 등의 직도 허용한다는 것이 규정상으로 첨가되어 보완되었다. 그리고 승정원에도 가주서(假注書)를 두어 서얼의 자리로 삼게 하였다.
이 무렵 서얼허통의 당위성이 사회적으로 크게 고조되었던 듯, 1.827년 대리정청에 나선 효명세자가 일체의 소통을 명령하는 영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앙 조정의 정책적 배려가 사회적 관습을 일신하기에는 아직도 많은 한계가 있었다. 집단적인 상소는 .1.848년(헌종 14)과 1.851년(철종 2)에 각각 9,000인이 동원되는 규모로 계속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에서 적·첩 양쪽에 모두 아들이 없을 경우에 양자를 허용하고, 과녀의 재가도 허용하는 한편, 공·사 노비 제도를 혁파함으로써 서얼 차별대우의 깊은 뿌리가 잘려 나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출 처 : [인터넷]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536&no=1969
절목 6 혜상공국 절목
1. 부보상은 이성계 태조가 하사한 고유명사이다.
부보상(負褓商)이 보부상(褓負商)으로 뒤틀리게 표기되어진 것은 1925년 대한민족의 역사를 왜곡 날조하는데 혈안이 된 조선총독부에서 어용학자들을 앞세워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도모하려는 의도적 책략에 기인된 것이다.
조선왕조의 이성계(李成桂) 태조가 고조선 때부터 존속해 오던 등짐장수(負商)들을 추스려서 중상주의정책(重商主義政策)을 실현하기 위하여 행상(行商)들의 대표자인 백달원(白達元)에게 하사한 옥도장(玉圖章)에 유아부보상지인장(唯我負褓商之印章)이라고 분명히 새겨져 있는 점을 비롯하여통상아문진정서(通商衙門陳情書 1.883) 통상아문대민행정처리문(通商衙門對民行政處理文 1.883) 군국아문행정처리문(軍國衙門行政處理文 1.883) 혜상공국관문등서책(惠商公局關文謄書冊 1.883) 혜상공국감결(惠商公局甘結 1.883) 혜상공국절목(惠商公局節目 1.883) 판하상리국서문(判下商理局序文 1.885) 판하상리국절목(判下商理局節目 1.885) 상무사장정(商務社章程 1.899) 등에 부상보상(負商褓商) 부보양사(負褓兩社) 부보휼보(負褓恤保) 좌우상(左右商) 부보양상(負褓兩商) 부보상(負褓商) 좌우사(左右社) 등의 분명한 용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보상의 사무소인 임방(任房)이 상무사(商務社)로 개칭된 이후에도 부상(負商)을 좌사(左社)라 부르고 보상(褓商)을 우사(右社)라고 불렀으며 특히 이 둘을 합한 좌우양상(左右兩商)을 좌우사(左右社)라고 명칭함으로써 부보상(負褓商)과 좌우사(左右社)를 일치시켰던 점을 들 수 있다.
2. 부보상의 명칭이 하사된 사연
1) 李成桂 將軍의 受惠
고려왕조 이성계(1335~1408) 장군이 30세인 1364년에 여진족(女眞族)과 교전할 때 위급한 상황을 지나가던 행상(行商)인 백달원(白達元) (白兎將軍達元先生神位 : 충남 덕산면 사무소에 설치된 부보상유품 보관소 백달원의 위패)이 구출해 주었다.
고려왕조 이성계 장군이 46세인 1380년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읍의 황산대첩(荒山大捷)에서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 : 阿其拔都)와의 격전 후 왼쪽 다리의 화살흔적으로 낭자한 유혈을 백달원(白達元)의 부하가 목화(木花) 솜으로 지혈 응급 치료하여 주었다.
1392년 7월 17일 공양왕(恭讓王)의 선양(禪讓)으로 개성(開城)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이성계 태조가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 세력의 추대를 받아 고려왕(高麗王)으로 즉위하였다.
1393년 2월 15일 고려의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개정(改定)하였다.
1392년 즉위 직후 조고(祖考)에 제사를 지내고 선대(先代)의 명복을 기원하는 동시에 스승인 무학국사(無學國師:朴自超)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함경남도 안변군 문산면 설봉산에 석왕사(釋王寺)를 중건할 때 백달원(白達元)이 이태조의 효성심(孝誠心)과 사은심(師恩心)에 크게 감복한 나머지 청년부상(靑年負商) 80명을 인솔하여 강원도의 삼척에서 함경남도 안변까지 오백나한(五百羅漢)의 불체를 운반해 주었다.
2) 李成桂 太祖의 報恩 : 人間的 情感 이태조가 석왕사 건립을 완공한 후 그 동안 입은 은혜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백달원(白達元)을 초치하고 간절한 소원(所願) 한 가지를 하문하였다.
백달원은 자신의 부귀영화 보다 부평초 행상(行商)들의 보호 지원을 주청하였다.
이에 이성계 태조는
① 개성의 발가산(發佳山)에 부보상 본부인 임방(任房)을 설치 제공하고
② 木器 土器 水鐵 소금(鹽) 어물(魚)의 5종을 전매특허(專賣特許)하였으며
③ 임방의 공사(公事)를 증빙하고 관아의 포달을 물리칠 수 있도록 유아부보상지인장(唯我負褓商之印章)이라고 새겨진 직인용(職印用) 옥도장(玉圖章)을 하사하였다.
따라서 부보상(負褓商)은 이성계 태조가 하사한 고유명사(固有名詞)이다.
3) 李成桂 太祖의 重商主義政策 이성계 태조가 부보상을 보호 육성한 정책은 중상주의정책(重商主義政策)이다.
이 정책은 이태조를 보좌한 최측근 정책참모인 정도전(鄭道傳)이 경제통(經濟通)이라는 점에 기인된다.
정도전은 경제문감(經濟文鑑)을 저술하여 임금에게 올려 바친 일이 있다.이태조가 중국의 역대 왕조역사에서 중상주의정책을 실시한 왕조는 흥성장구(興盛長久)하였고 억상주의정책(抑商主義政策) 경상주의정책(輕商主義政策)을 실시한 왕조는 쇠락단명(衰落短命)한 역사적 사실을 통찰한 것이다.부보상의 정책적 지원 육성은 군수품보급 전쟁비용조달 등의 국가안보(國家安保)에 직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3. 부보상이 보부상으로 둔갑된 곡절
1) 일본의 앙큼한 식민정책
부보상(負褓商)의 용어가 보부상(褓負商)으로 왜곡 둔갑된 연유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사농공상의 일본식 서열개념으로 조선왕조의 중상정책을 폄하(貶下)하기 위한 역사왜곡과 식민정책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일제에 최후까지 반항한 부보상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술책에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910년 일한병탄(日韓倂呑) 이후 일제의 식민통치가 극성을 부리던 시기인 1925년 조선총독부 총독관방(總督官房) 문서과(文書課)에서 발행한 <朝鮮人의 商業, 善生永助 著>이라는 저서의 제2장 제3절 제2항인 78쪽에서 처음으로 보부상(褓負商)이라는 용어가 대두(擡頭)되었기 때문이다.문장의 내용에서는 이성계 태조가 부보상(負褓商)이라는 명칭을 부여(附與)했다면서 항목의 제목에는 보부상(褓負商)으로 기록하였던 것이다.
또한 1929년 간특한 조선총독부 총무과(總務課)에서 발행한 <朝鮮의 市場經濟, 善生永助 著>라는 저서의 제5장 제2절 시장행상(市場行商 : 목차)을 본문에서는 지방행상(地方行商 280쪽)으로 변경하고 민간(民間)에서는 부보상(負褓商)으로 부른다고 기록하면서 소제목으로 보부상(褓負商)을 달았다.이처럼 일본제국의 어용학자를 이용한 조선총독부에서 처음으로 <보부상(褓負商)>이라고 슬쩍 표기한 것을 시발점으로 삼아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때까지 굳이 보부상(褓負商)으로 표기된 논저들이 간혹 나타나기 시작했던 점을 각별히 주목해야 한다.
조선총독부가 우리 나라와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식민정책을 악독하게 추진한 총본부(總本部)이었음을 우리는 절대로 망각할 수 없다.이러한 조선총독부에서 발행된 책자가 우리 나라와 민족정신을 긍정적으로 예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민간출판사인 대등각(大 閣)에서 1928년에 발행한 <조선경제사(朝鮮經濟史, 猪谷善一 著, 178쪽>와 계명사(鷄鳴社)에서 1931년에 발행한 <조선잡기(朝鮮雜記, 菊池謙讓 著, 147쪽>에는 양심적인 학자들에 의하여 부보상(負褓商)으로 명백히 등재되어 있다.
한편 일본제국주의자들은 1.895년 조선왕조의 고종황제 때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살(弑殺 1.895)하였고 알파벳의 국제적 표기순서가 Japan보다 앞섰다는 이유로 Corea를 Korea로 변경시켰다.
또한 그들은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정붙여 살던 지명(地名)을 뒤틀어 놓았고 창씨개명(創氏改名 1940)으로 우리 선조들의 성씨(姓氏)조차 바꾸었으며 우리 한국의 지맥(地脈)을 끊으려고 전국 곳곳의 명산(名山)에 쇠말뚝을 박아 놓았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왜정 때 지어진 경무대의 집모양이 大의 글자모형이고 한 동안 우리의 중앙청으로 사용되었던 지금은 헐린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선총독부 건물이 日의 글자모형이며 현재 서울시청의 건물이 本의 글자모형으로서 大日本(대일본)의 글자모형이다.
지금도 일본은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왜곡 변조하는데 골몰하고 동해의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등 간교한 철면피 행동을 서슴치 않고 있다.
2) 일제의 이성계태조 重商政策에 대한 모멸
일제는 이태조의 부보상 육성에 의한 중상주의정책을 왜곡 폄하시키고 일본의 고정관념인 서열적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의식에 입각하여 이태조와 부보상의 밀착관계를 저속화시켜서 조선왕조의 권위(權威)를 날조 실추시키려는 흉계를 견지하고 있었다.일제가 말하는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의 사(士)는 선비(文士)가 아니고 무사(武士)를 의미한다.
3) 이태조의 부보상 명칭하사에 대한 고의적 폄하 왜곡
부보상은 부상(負商:男)과 보상(褓商:女)의 합성어(合成語)이다.본래 사람의 초기생활 수준에서는 식생활(食生活)에 관련된 용품을 판매하는 부상(負商)의 활동이 먼저 발생되었고 그 다음 단계로 점차 생활수준이 향상되면 의생활(衣生活)에 관련된 문화용품을 판매하는 보상(褓商)의 활동이 순차적으로 요구되게 마련이다.
부상(負商)은 물건을 지게(支械)에 지고 팔러 다니던 남자행상(男子行商 : 등 짐장수)이고 보상(褓商)은 물건을 보자기(褓: 布)에 싸서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팔러 다니던 여자행상(女子行商 : 봇짐장수)을 말한다.조선총독부는 부보상의 용어를 남존여비(男尊女卑)의 관념으로 왜곡시켜서 은연중 가족이간(家族離間) 여성해방(女性解放)으로 연결지어서 우리 민족자체의 내부분란을 부채질한 것이다.이에 조선총독부는 어용학자를 동원하여 부보상(負褓商)을 보부상(褓負商)의 명칭으로 둔갑시켜서 멀쩡한 생선에 가시를 박고 독(毒)을 묻힌 것이다.
4. 역사왜곡에 따른 식민사관 잔재의 소탕
1.877년에 설립된 동경제국대학에서 1.887년에 개설한 동양역사학과의 교수들이 사사건건 한반도의 역사를 왜곡시킨 날조공들이다.사농공상(士農工商)의 용어가 신분의 서열개념인 양 착각하고 상업과 상인이 까닭없이 폄하되는 일도 마찬가지로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잔재이다. 일본의 한반도침략을 합리화시키려는 앙큼한 식민통치사관(植民統治史觀)의 소산이다.
옛날 우리 조선왕조에서 사용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용어는 신분이나 직업의 서열 개념이 아니었고 사민주의사상(四民主義思想 : 士農工商)에서 발효된 등권적 생업개념(生業槪念)으로서 임금과 노비를 제외한 모든 백성(百姓)의 대명사이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중상주의정책(重商主義政策)을 실시한 국가는 오래 번성하였음을 상기해야 하겠다.
5. 負褓商의 誡命
특히 부상(負商)들은 동가식(東家食) 서가숙(西家宿)하는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부평초 신세이면서도 동병상련(同病相憐) 유무상통(有無相通) 간담상조(肝膽相照) 환란상구(患難相救)하고 국민의 생활필수품인 5가지 물품(목기 토기 수철 소금 건어물)을 유통시켜서 생활수준을 배달하면서 이성계 태조가 내려주신 팔자칙교(八字勅敎 : 病則救療 死則埋葬)를 준수했던 것이다.
그들이 품속에 지니고 다니던 채장(신분증)의 앞면에는 소속임방과 성명이 기재되어 있고 뒷면에는 ① 물망언(勿妄言) ② 물패행(勿悖行) ③ 물음란(勿淫亂) ④ 물도적(勿盜賊)의 4대 계명(誡命)이 적혀 있어 행실의 도덕적 기틀로 삼고 있었다.
특히 물망언(勿妄言)은 재물을 들이지 않고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일곱가지 보시(布施 : 無財七施) 중의 하나인 언시(言施)에 입각하여 불신(不信)과 거리감(距離感)을 좁히는 첩경(捷徑:지름길)이었다.
이러한 부보상의 계명은 향약(鄕約)의 4대 강령(綱領)인 ① 덕업상권(德業相勸) ② 과실상규(過失相規) ③ 예속상교(禮俗相交) ④ 환난상휼(患難相恤)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한국상인의 전통의식 속에 살아 있는 부보상(負褓商)의 행실(行實)은 참으로 숭고한 상인정신을 갖추고 있었던 본보기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판단된다.
6. 부보상의 정신구조
1) 충의정신(忠義精神) : 임진왜란(1592∼1598) 병자호란(1636∼1637)
2) 신의정신(信義精神) : 형제정의(兄弟情誼) 환난상구(患難相救)
3) 도의정신(道義精神) : 물망언 물패행 물음란 물도적 <예의>
4) 단결정신(團結精神) : 자치율법 사발통문
7. 부보상의 광역활동
1) 국권수호활동 : 국역전역 상병(商兵) 암행어사보조 황국협회
2) 동향파악활동 : 민심동향 치안동향 적진동향 시장동향
3) 세무활동 : 장세징수(場稅徵收) 납세의무
4) 통신활동 : 국가통신 사설통신(私設通信) 소식전달
출 처 負褓商關聯史料譯解-1988(http://www.bubosang.net/html/bubosang/bubosang01.htm)
절목 7 경외학교절목
조선시대의 교육법규 및 교육규범
1) 경국대전 : 성균관, 사학 및 향교에 관한 제도가 규정되어 있다. (예조조, 성균관조, 사학조)
2) 학령 : 성균관에 관한 규정 규칙으로, 학생들의 일과, 성적 평가, 벌칙 등을 규정하고 있다.
3) 권학사목 : 권근이 지은 것으로 소학에 교육적 의의를 밝힘, 생원시의 입시과목으로 할 것을 주장
4) 구재학규 : 세조9년 예조에서 성균관의 학규로 지은 것으로 사서오경을 9계단으로 나누고 있음.
대학, 논어, 맹자, 중요, 시경, 서경, 춘추, 예기, 주역을 9재라 하고, 과목의 진급과
과목순을 정해 놓음.
5) 진학절목 : 성종1년 예조에서 지은 것으로 교사의 취임, 전직과 학생의 근면, 결석에 관한 보충교재이다.
6) 경외학교절목 : 명종 1년(1546)에 반포한 전국학교에 적용한 것으로, 교원채용, 학과목, 입학,
교육평가 및 상벌에 관한 상세한 규정이다.
7) 학교사목 : 선조 때 이율곡이 왕명으로 제정, 교원의 선택, 임용, 승급 및 대우에 관한 규정과
학생의 입학, 정원, 선발, 거제, 대우와 자격 및 시학에 관한 규정으로 모두 인사문제를
상세하게 규정
8) 학교모범 : 선조16년 이율곡이 왕명을 받아 택사와 양사를 목적으로 하는 내용으로 학령에 미비한
점을 보충하고 있다.
특히, 선비들로 하여금 몸가짐과 일해 나가는 법규를 16조로 설명하고 있다.
절목 8 군포균역절목
국방과 군역에 대한 정책들도 많이 시행되었는데, 먼저 대흥산성·황룡산성 등 변경지역에 성을 쌓고 도성을 크게 수리하였다. 그리고 1712년(숙종 38)에는 북한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남한산성과 함께 한양에 대한 수비의 거점으로 삼게 하였으며, 훈련별대와 정초청을 통합하여 금위영을 신설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에 문제가 되고 있던 양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호포제 실시를 추진하다 양반들의 반대로 좌절되자, 양역이정청을 설치하여 양역변통의 방안을 강구하게 하고 이듬해 군포균역절목을 마련하여 양정 1인의 군포부담을 2필로 통일시키기도 하였다.
자료제공: 대한법정치학 연구회
원전】 10 집 211 면
《 성종 129 12/05/02(병자) / 주강에 나아가 참찬관 이맹헌과 정사를 논하다 》
주강(晝講)에 나아가니, 참찬관(參贊官) 이맹현(李孟賢)이 아뢰기를,
“단송 도감(斷訟都監)에서 진고(陳告)하는 것이 상당히 많아서 지극히 소요(騷擾)스럽습니다. 많은 경우에는 진고하는 것이 70여 구(口)에 이르니, 쟁송(爭訟)하는 것이 더욱 번잡스럽습니다. 대개 천인(賤人)이 적고 양인(良人)이 많으니, 곧 나라에 유익한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써는 연한(年限)을 정해서 진고(陳告)하게 하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도다. 그것을 정승들에게 의논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이맹현이 또 말하기를, “신이 《세종실록(世宗實錄)》을 보건대, 윤봉(尹鳳)이 8년 동안 연달아 사신으로 나와서 토표피(土豹皮)를 가혹하게 구하였습니다. 지난해에 정동(鄭同)이 왔을때 이것을 파는 것을 허락하고 금지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공가(公家)나 사가(私家)에 토표피가 거의 다 없어졌습니다. 금년에는 이를 금지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도다.” 하였다.
이맹현이 또 말하기를, “황해도에서 군사를 내어 사신을 맞이하고 보내는 데 노고가 너무 심한데, 또 사재감(司宰監)·선공감(繕工監) 등의 기인(其人)의 구실[役]도 있으니, 청컨대 평안도의 예(例)에 의하여 하삼도(下三道)에 옮겨서 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장차 이를 의논하겠다.” 하였다.
【원전】 10 집 216 면
《 성종 129 12/05/20(갑오) / 경연에서 진고의 폐단에 대하여 논하다 》
이보다 앞서 부제학(副提學) 이맹현(李孟賢)이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진고(陳告)의 법은 햇수를 한정하여 정지시키소서.”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명하여 여러 원상(院相)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정창손(鄭昌孫)·홍응(洪應)·윤호(尹壕)가 의논하기를, “진고(陳告)하는 법이 비록 중하다고 하지만 또한 큰 폐단이 있습니다. 가령 노비(奴婢) 8구(口)를 진고한다면, 진고자(陳告者)가 좋은 놈을 골라서 2구(口)를 길이 집거(執據)하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중한 벌을 피하여 가벼운 벌을 받으려는 자와 진고인(陳告人)이 서로 내응(內應)하여 고의로 상(賞)으로 충당되므로, 공천(公賤) 가운데 실(實)한 자는 날로 줄어드니, 첫번째 폐단입니다. 양인(良人)인지 천인(賤人)인지 분변(分辨)할 수 없는 경우에는 다만 문적(文籍)이 없다고 하여 일일이 종천(從賤)시키니, 온당치 아니한 듯합니다. 나라를 위하는 방도로써는 양인이 많으면 군액(軍額)이 늘어나는데, 이것은 염려하지 아니할 수가 없으니, 두번째 폐단입니다. 보충군(補充軍)은 본래 천인(賤人)으로서 양인(良人)이 되고자 하는데, 지금 무식한 무리들이 혹은 숨어서 빠져 그 구실[役]을 끝마치지 아니하면, 단지 가장(家長)한 사람이 천인(賤人)이 되는 데에 연좌되어 그 나머지 동생(同生)과 그 자손(子孫)들이 다시 그 구실[役]을 끝마치게 하는 것은 좋습니다만, 지금 일체 모두 종천(從賤)시키니, 세 번째 폐단입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안의 진고조(陳告者)에, ‘4구(口)에 1구(口)를 지급한다.’고 하였으나, 길이 지급한다는 명문(明文)이 없으니, 자기 몸 당대로써 그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한다고 진고자(陳告者)가 넘치지 아니할 것이요, 또한 《경국대전》의 법을 허물어뜨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고, 윤필상(尹弼商)이 의논하기를,
“공처(公處)에서 도망하여 빠져 나간 노비(奴婢)를 진고(陳告)하는 법은 추쇄 도감(推刷都監)과 장례원(掌隸院)에서 수교(受敎)한 것이 상세하므로, 반드시 다시 신법(新法)을 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또 진고(陳告)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한다면 추쇄(推刷)하여 찾아낼 길이 없어 공천(公賤)이 날로 줄어들 것입니다. 진고의 법을 폐지할 수가 없으니, 옛날 그대로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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