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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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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법정치학연구회 작성일13-06-22 19:17 조회6,7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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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양목 호패 찬 것만 보아도 "에구, 진사양반이구나"하고
쌍놈들은 얼른 납작하게 엎드려 있어야 탈이 없었다.

이 용 선 | 작가·근세자료연구소장


호패제도와 이를 원망한 조선시대 국민들
조선시대 국민은 16살 이상만 되면 허리띠에 호패를 매달고 다녀야 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주민등록증인 셈인데, 16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이나, 앉아서 오줌 싸는 여자는 호패를 차지 않는다. 아녀자 취급을 받아 온전한 백성 대접을 못 받은 것이다.
이래서 사람은 가르쟁이 사이에 공알을 달고 호패를 차야 '남자' 구실을 하는데, 백성들은 이 호패를 안 차려고 무척이나 저항하였다.
그래서 고려 공민왕 3년에 처음 실시하였다가 실패한 후 조선시대에 들어 와서도 무려 다섯 차례나 시행과 폐지를 거듭하다가 숙종 1년에 자리를 잡았으니, 3백 21년 만에야 온전하게 시행된 셈이다.
그만큼 몸살을 치른 것이 호패법인데 이것은 백성들이 호패차기를 싫어했던 이유다.

정묘호란에 나라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호패가 병화를 초래했다' 했고 평양의 백성들은 호패를 성첩에 걸어놓고 달아났다. 이때 무리들이 소란을 일으키며 차고 있던 호패를 모두 풀어서 땅에 던지며 말하기를 '이것으로 적을 막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에 문학(文學) 김육(金堉)이 호패를 폐지하여 인심을 안정시키자고 아뢰어 그대로 시행했다.

이렇게 호패는 백성의 원망을 산 제도였다. 그런데도 호패는 왜 실시해야 했는가.
호구를 명확히 하여 민정(民丁)의 숫자를 파악하고, 직업과 계급을 명확히 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한다는 것이지만, 이렇게 되면 백성들은 부역이나 군역 등에서 옴싹달싹도 못하고 걸려들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거나 숨는 자들을 막기 위해 나라에서는 16살 이상 남자들에게는 반드시 호패를 차게 했는데, 만약 호패를 차지 않고 통행하다가 적발되면 제서유위률(制書有違律)에 걸려 개 패듯이 얻어맞고 호패를 위조하거나 도둑질하면 사형, 빌려 차고 다니면 누적률(漏籍律)에 걸렸고, 빌려준 사람은 곤장 1백 대 맞고 3년 동안 죄수생활을 해야했다.

신분과 계급, 직업에 따라 차별을 둬 제작한 호패
이렇게 호패법이 엄중한데, 그러면 그 호패라는 것은 어떻게 생겼는가.
지금처럼 모든 국민이 똑같은 모양의 주민등록증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신분과 계급, 직업에 따라 호패를 만드는 재료부터 달랐다.
2품(대신, 관찰사) 이상의 관원은 나무가 아니라 상아나 사슴뿔로 만든 아패(牙牌)를 찬다. 4품 이상은 황양목, 양반과 5품 이하 9품까지는 자작나무로 만든 호패를 차고, 일반 백성이나 공사천 노예들은 그냥 잡목을 깎아 호패를 만들었다.
"그럼 호패를 나라에서 만들어 발급했던 게 아니오?"
"2품 이상의 아패는 관청에서 만들어 지급했지만, 그 밖의 호패는 각자가 만들었오."
각자가 황양목(黃陽木)이나 자작나무를 잘라 길이가 3치 7푼, 폭이 1치 3푼, 두께 2푼짜리 어린아이 손바닥만한 판자조각을 만들었는데, 황양목은 지금도 정원수로 많이 심는 회양목이다.
이 회양목으로 도장도 파고 지팡이도 만드는데 재질이 단단하고 나무색깔이 누렇기 때문에 옆구리에 회양목 호패 찬 것만 보아도 "에구, 진사양반이구나"하고 쌍놈들은 얼른 납작하게 엎드려 있어야 탈이 없었다.
이렇게 각자가 나무를 깎아 호패를 만들고 자기의 나이나 성명을 쓴 호패단자(單子)와 대조한 뒤, 관청에서는 뒷면에 낙인(낙인, 불도장) 찍어 주는 것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호패의 재료나 종류는 신분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그 호패를 만들었던 '나무'에도 양반 쌍놈이 있었던 셈이다.
뿔 호패는 아예 논외로 치더라도 황양목은 높은 양반(4품 이상)이고, 자작나무만 해도 9품 이상의 양반나무다. 양반이라야 그 나무로 호패를 깎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 서민이나 쌍놈들은 그 흔한 자작나무를 두고도 참나무나 소나무 같은 잡목을 베어다가 호패를 깎아야 했다.
그러나 호패를 만든 나무들은 다르지만 모양(크기)은 모두 똑같았다. 다만, 똑같은 크기의 호패지만 기재하는 내용은 쌍놈이나 노예일수록 더 자세하게 기록했었다. 가령 2품이나 3사(사)의 관원들이 차는 호폐는 '호조판서 김개똥'하고 관직과 성명 두 가지만 기록했다.
그러나 3품 이하는 관직과 성명에다 거주지가 하나 더 들어갔고, 일반 백성들이 차는 호패는 관직은 아예 없으니까 안 쓰고 그 대신 성명, 거주지, 얼굴빛 수염이 나고 안 나고의 모양을 기록했으며, 노비일 경우는 일반 서민의 기록 사항 외에 또 주인, 나이, 신장까지 덧붙여졌다.
그런데 이런 호패에 자꾸 사고가 났다. 호패를 깎아 가지고 관청에서 낙인을 받으려고 할 때 백성들은 2치 두께 규정보다 조금이라도 더 두껍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야 글씨를 깎아 내고 다시 써 가짜 호패를 만들어 차고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쌍놈들의 진정한 평등권을 상징했던 종이호패
이런 나무호패 위조를 방지한다고 숙종 때는 종이로 호패를 만들었던 일이 있다.
이것이 이른바 지패(紙牌)였는데,

종이로 하면 천장 만장이라도 인쇄할 수 있지만, 나무로 하면 둥글고 모진 것의 규격이 있고, 길고 두터운 것의 치수가 있어서 하나라도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번번이 고치도록 하니 여염의 하호(下戶)로서 사람마다 스스로 만들어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다가 나무호패를 차고 다니게 되면 남이 쉽게 볼 수 있지만 종이 호패는 주머니 속에 넣어 가지고 다니니까 신분을 숨길 수 있어 매우 좋아한다고 했다.
이래서 종이호패를 만들어 썼는데, 나무 호패처럼 오래 가지 못하니까 3년마다 다시 발급하는 규정을 두었다.
이렇게 되자 황양목 호패를 차고 "이것 보이느냐?"하고 뽐내던 양반들이 재미가 없다. 여기다가 쌍놈들은 "나는 쌍놈이오", "나는 아무개네 종이오" 하고 쓴 나무호패를 옆구리에 차는 대신 종이호패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도 술잔간 먹고 취해 뒹굴거나 물에 젖으면 종이호패 글씨가 범벅으로 닳아 버리니까 길바닥에서 일부러 비를 맞으며 종이호패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닌가.
이래서 다시 나무호패로 제도를 바꾸었지만, 그 시대의 종이호패야말로 쌍놈들의 진정한 평등권을 상징한 셈이다.


자료 출처/  이 용 선 소장

http://www.ksic.co.kr/paper/02_year/7.html   


자료제공/
http://cafe.daum.net/kro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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