外知部 小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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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법정치학연구회 작성일13-06-22 19:15 조회6,66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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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는 민속호송(民俗好訟)이라는 말처럼 소송이 많았는 데
번잡한 이들 소송을 도와주가 있었으니 이들을 外知部라 했다.
외지부는 법조문에 대해 지식도 없고 문서작성이 불가능한 양민이나
왕자 부마 권세가들의 소송을 도와주는 사람들이었다고 보여진다.
숙종 27년 양반을 상대로 송사를 벌여 승소한 외지부들도 발견된다.
이들 外知部는 노비들의 송사를 다룬 장예원을 도관지부(都官知部)라 한데서
관료는 아니지만 법률적 소양이 있는 오늘날 법률 브로커의 성격도 짙다.
이들은 敎誘人爭訟爲業하는 자들로 소송을 자주 일으키는 자들로
이들을 조정 관료들이 경계하게 되었다.
선조 년간에 사헌부는 부장(部將) 조정립(曺廷立)이 사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송사하기를 좋아하는 외지부(外知部)로 일생의 사업을 삼았다고
하였다.
중종 12년에 정원이 아뢰기를 이성군 이관용(利城君李慣容)과 외지부(外知部) 허의(許義) 등은 쟁송(爭訟)을 좋아하여, 형조(刑曹)·장례원(掌院)·한성부(漢城府) 등 어디나 서로 송사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중종 14년에 정언 김광복은 경명군이 외지부를 모으고 송사를 좋아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친애한다면 의당 가르쳐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중종 14년 현량과를 폐지해야 한다는 조정의 논의에서
권탁은 용렬한 사람일 뿐 아니라 장성해서는 외지부(外知部) 노릇을 하고 또 폐조(廢朝) 때에 장녹수(張綠水)의 집에서 글을 代筆 하던 자라고
하여 그 일족들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가 되었다고 하여 그 폐해를 밝혔다.
중종 20년에 의금부는 죄수(罪囚) 권형(權亨)이 공술한 말에, 전교(傳敎)한 말을 들어 말을 했으니, 더욱 놀랍기만 하다. 유벽(柳壁)이 먼저 임금의 말을 탐지하여 죄인에게 내통해 주고 또한 답변할 말을 가르쳐 주었으니, 외지부(外知部) 사람들 중에 특히 심한 자라고 보고하고 있다.
대사헌 김근사(金謹思), 집의 윤안인(尹安仁), 장령 황헌(黃憲)과 정만종(鄭萬鍾), 지평 김치운(金致雲)은 전자에 이조 서리 20여 명이 국상(國喪)을 돌보지 않고 현수 기생(絃手妓生)을 불러놓고 소를 잡고 풍악을 울리면서 연회를 벌인 일은 듣기에 경악스럽고 해괴하기에 추문한 것인데, 형신(刑訊)하기에 이르러서는 1차 형신에 5인이 물고(物故)되었고, 2차 형신에 4인이 물고되었습니다. 그리고 외지부(外知部)도 1차 형신했는데 물고되었습니다. 이렇게 한두 달 안에 물고된 자가 수다하니 신들은 미안하여 대죄한다고 한 점은 지도자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느끼게 한다.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고, 헌부가 아뢰기를사천수 호원(泗川守浩源)은 성질이 본시 탐오하고 간사하고 독살스러운데, 오로지 결탁하기만을 일삼다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바로 중상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해마다의 수교(受敎)를 능히 꿰뚫어 외고 있으므로 비리(非理)로 송사(訟事)하기를 좋아하여 외지부(外知部) 노릇을 한다고 하였다.
예조참판 강현이 경상도에 있을 때 최필심(崔必心)이란 백성이 일찍이 남의 머슴이 되어 있으면서 누구와 더불러 대송(代訟)한 일이 있었다. 그후 병조(兵曹)에서 공문을 보내 그 사람을 군역(軍役)에 보충하도록 하였는데 강현이 전일 대송해 준 보답으로 최필심을 외지부(外知部)로 삼고 마침내 그의 전 가족을 자기 집으로 불러들여 살게 하였다. 헌부가 입적(入籍)된 머슴으로서 주인을 위하여 대송하였으니 이는 남의 일에 끼어 들어 결탁하여 옥사를 꾸민 것이거나 아니면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고 하고 추고하니, 체직당하였다
사헌부는 근래 인심이 야박하고 사악하여 공교로운 속임수가 함부로 발생합니다. 본주인을 배반하고 내수사(內需司)에 투탁(投託)하려고 꾀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외지부(外知部)와 인연을 맺고 본사(本司)의 관원이나 하인배에게 후한 뇌물을 주어 혹 죄인의 고발을 핑계하거나 혹은 도망하였음을 핑계하기도 하는 등, 온갖 방법으로 계획을 꾸며 간사한 술수를 이루고야 맙니다. 이 때문에 청명(淸明)한 다스림에 누가 되는 일이 파다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귀척(貴戚)의 집안에서 남의 전민(田民)을 빼앗으려고 꾀하는 자도 역시 내수사로써 계제(階梯)를 삼아 혹 공사(公事)를 꾸며 속여서 결재를 받아 각도의 각 고을에 공문을 보내어 공공연하게 문서를 꾸며 사람을 보내어 빼앗아 옵니다. 외롭고 세력이 없는 자는 속수 무책으로 빼앗기면서도 위세에 질려서 원통함을 안고 펴지 못하니, 사람마다 통분해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왕자 부마들의 집사나 외지부가 되어 양민들의 재산을
수탈한 원흉의 혐의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여러가지 사례로 보아 외지부가 조선조의 법률 시장에서 일정 역활을
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이들이 지금의 변호사와 같은 전문적인
소송 대리인은 아니었다고 할수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의 여러 기사에서
외지부들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다수라고 하여 폄하하는 것 또한
옳은 일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의 법률 브로커라고 여기는 것도 조선조의
법률 구조 제도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마인드라고 보여지지 않는다.
외지부의 역활에 대한 긍정적인 조명을 통해서 전통법 학계의 연구 성과가
확대될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법정치학 연구회
http://cafe.daum.net/krolp
민주행동연맹
http://cafe.daum.net/kdal
固城 참여자치 군민연대
http://www.freechal.com/ngogngs
2004.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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