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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청에는 외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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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법정치학연구회 작성일13-06-21 13:32 조회6,4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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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청에서 혐의자를 심문하는 것을 국문(鞫問)이라 했는데 때로 국문은 국청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혐의자를 심문한다는 심문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국청제도를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청문회 제도의 장점과 미비점을 점검해본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사법기관이 있었다. 의금부·사헌부·형조·한성부·포도청 등이 그것이다. 이중 사헌부와 의금부가 중요한 기관이었는데 사헌부는 오늘로 따지면 검찰·감사원·언론의 기능을 행사했고 의금부는 검찰과 안기부의 복합기능을 지닌 부서이니 그 막강한 힘을 짐작할 수 있다. 관리들의 비위 감찰을 맡은 사헌부에서 탄핵하면 의금부에서 사건을 이첩받아 수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건 처리경로인데 복잡하고 중요한 사건은 잡치(雜治)라 하여 위의 여러 사법기관이 합동으로 심문했다.

그러나 역모나 강상(綱常·3綱과 5常, 즉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에 관계되는 중대한 국기(國基)사건은 사헌부나 의금부 차원에서도 단독으로 처리하기 곤란하므로 이들 부서는 대신들과 국왕까지 참여해 국문할 것을 주청하게 된다. 사헌부나 사간원 또는 의금부의 주청이 있게 되고 국왕이 이를 윤허하면 국청(鞫廳)이 설치돼 움직이게 된다.

국청에는 어떤 외압도 없었다

국왕의 명령으로 국청이 설치되면 수사위원장격인 위관(委官)이 임명되는데 대개는 조정의 최고위직인 영중추부사나 영의정이 임명되게 마련이었다. 그외에 나머지 정승과 판의금부사, 사헌부 대사헌, 사간원 대사간, 승정원 승지 같은 인물들도 국청에 참여했다. 여기에 별문사(別問事)라 하여 세자시강원 문학이나 홍문관 교리·수찬, 병조 정랑·좌랑 등이 국청을 돕게 되고 별형방(別刑房)이라 하여 수사전문가들인 도사(都事)들과 국청 기록을 담당하는 문서색(文書色)이 따로 두어진다. 그야말로 조정의 모든 기능이 사건의 진실을 캐기 위한 국청에 동원되는 것이다. 현재의 청문회 제도가 국회의원만이 위원으로 구성되어 전문성의 한계를 보이는 데 비해 수사전문가가 참여했던 조선시대의 국청은 청문회의 이런 단점을 어떻게 보완해야 할지에 대한 시사를 준다. 실제로 조선의 국청이 전문성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국청은 사안의 중요성에 따라 국왕이 직접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흐지부지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했고 오로지 국왕이 명령한 것만을 다루기 때문에 어떤 외압도 있을 수 없었다.

만약 국청에 참여하는 인물의 이름이 죄인이나 혐의자의 입에서 어떤 형태로든 거론되면 즉각 사직하고 대죄하는 것이 관례이자 법칙이었기 때문에 현재의 청문회처럼 위원이 증인을 돕는다거나 오히려 사태의 진실을 가리려는 기도 따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위원의 신분에서 당장 죄인의 신분으로 전락해 국청 뜰에 내려앉아 엄한 심문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엄한 규율들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국청이 열리면 대개의 경우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었다.

국청은 지금의 사법부와 마찬가지로 증거주의로 진행됐는데 다른 증거가 명백한데도 자백을 거부할 경우 고문이 행해졌고 서로 말이 틀릴 경우에는 대질심문도 했다. 기존의 청문회에서 우리는 증인들 사이에서 말이 달랐던 무수한 사례를 봐왔는데 이런 대질심문도 우리의 청문회가 따라야 하는 제도적 장점일 것이다.

국청의 가장 중요한 판단근거는 ‘상식’

전근대시대인 만큼 고문에 의한 자백도 증거로 인정됐으나 상식적으로 판단해 말 같지 않은 경우는 자백했어도 무죄로 석방되는 경우가 있었으니 상식이 가장 중요한 판단근거인 셈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국청이 사감이나 당파적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이 될 때도 있었는데 이 경우 국청이 재판기능까지 가졌다는 점에서 그 폐해는 작지 않았다. 특히 국왕이 특정인에 대한 사감을 가지고 국문을 이끌 경우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란 호탕한 시를 남긴 남이(南怡)는 국왕 예종의 사감에 의한 국청으로 화를 입은 사람이다. 남이는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의 아들이었고 아버지는 의산위 남휘(南暉)였으니 태종의 외손자이자 예종의 이종 삼촌뻘인 인물이었다.

세종 25년(1443) 태어났으므로 세종 32년(1450)생인 예종보다 일곱살이 위였다. 남이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재주가 있어서 이시애(李施愛)의 난과 건주위(建州衛)의 여진족을 정벌할 때 공을 세워 일등공신이 되었고 이런 경로로 세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아 불과 스물 중반의 나이로 공조판서와 병조판서에 제수됐는데 이런 남이를 세자인 예종은 몹시 꺼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종은 즉위하자마자 병조판서 남이를 의산군 겸 사복장(兼司僕將)으로 삼았는데 사복시는 임금의 말 등을 관리하는 한직이란 점에서 그를 꺼리는 예종의 의도가 엿보이는 인사였다. 남이에 대한 예종의 이런 의중을 알아차리고 남이를 역모로 고변한 인물은 병조참지(兵曹參知) 유자광(柳子光)이었다. 등용이 금지된 서얼 출신이었으나 이시애의 난에서 공을 세워 출사한 그는 남이가 자신을 찾아와 은하수 가운데 나타난 혜성의 빛이 희기 때문에 쉽게 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는 등과 같은 남이의 말을 역모의 증거로 삼았다.
유자광은 “강목”(綱目)에서 혜성이 나타난 곳을 찾아보니 ‘빛이 희면 장군(將軍)이 반역(叛逆)한다’는 주(注)가 달려있다면서 남이의 강성한 세력을 두려워하는 예종의 공포심에 불을 붙였다. 그러잖아도 남이를 껄끄럽게 생각하던 판에 고변까지 있자 예종은 즉각 1백여명의 위사를 보내 체포한 다음 자정 무렵인 삼경(三更)에 부랴부랴 국청을 열었다.

여러 재상들이 국문하였으나 남이가 계속 부인하자 예종은 유자광과 면질(面質·대질)시켰다. 그제서야 고변자가 유자광임을 안 남이는 머리로 땅을 치면서 유자광의 ‘무고’(誣告)라고 주장했으나 이미 심증을 지닌 국청의 그물을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남이·정여립 사건은 국청의 부정적 측면

3일동안 혹독한 심문을 받던 남이는 드디어 삶을 포기하고 예종에게 포승의 끈을 느슨하게 해주고 술을 한잔 내려주면 사실대로 말하겠다고 말한다. 예종이 요구를 들어주자 삶을 포기한 남이는 유자광이 고변한 내용이 사실임을 시인하면서 정승 강순(康純)을 같은 당류로 지목했다. 국문의 당사자였던 강순은 곧 묶여 국청 뜰에 끌려내려와 심문을 받았고 매를 견디지 못한 그가 남이의 당류라고 시인하자 예종은 다른 동조자를 대라고 다그쳤다. 강순이 “좌우의 신하를 모두 동조자라고 하여도 믿겠습니까”라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예종은 듣지 않고 남이에게 당여를 물으니 이번에는 홍윤성(洪允成)을 끌어들였다.

예종은 강순이 당류라는 말은 믿었으나 홍윤성이 같은 패라는 말은 믿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미 예단을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예종은 이 말 후에도 홍윤성에게 “남이의 당류는 씨도 남길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의 동의를 구했다. 강순이 남이를 돌아보며 “내가 언제 너와 모의했느냐”며 따지자 남이는 “당신은 나와 같이 죽는 것이 옳다. 당신은 이미 정승이 되었고 나이도 늙었지만 나는 나이가 겨우 스물여섯이니 진실로 애석하다”는 유명한 말을 한다.

예종은 남이와 그 당류로 인정된 강순·조경치·변영수 등 아홉명을 환열( 裂·수레에 찢어 죽임)하고 그 머리를 7일동안 효수했는데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남이의 계모도 참형에 처하고 효수했다. 남이와 증(蒸·상피붙는 것)했다는 혐의였으니 국청이 사감에 의해 남용될 때의 문제를 보여주는 한 전형이 아닐 수 없다.

남이의 당여로 몰린 조숙(趙淑)이 엄한 형벌에 불복하면서 “한 충신(忠臣)이 죽는다”고 부르짖은 것이 이 사건의 본질을 말해줄 뿐이다. 예종은 고변자 유자광을 일등공신으로 삼고 남이의 집을 내려주었다.

이덕일/역사평론가



추안급국안 (推案及鞫案)의 개요는 조선 후기 중죄인의 공초(供招)를 기록한 책으로 필사본, 공초집으로 서울대 규장각이 보관하고 있다.


필사본. 331책. 규장각 도서. 변란(變亂)·역모(逆謀)·사학(邪學)·당쟁(黨爭)·괘서(掛書) 등에 관련된 중죄인은 추국(推鞫)을 거쳐 국왕의 최종적인 판결을 받았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1∼6책은 선조 때 임해군(臨海君) 모역(謀逆) 사건, 7∼11책은 광해군 때, 12∼65책은 인조 때 이유림(李有林)의 옥사(獄事)·이괄의 난·정인홍(鄭仁弘) 관련 사건·임경업(林慶業) 사건, 66∼73책은 효종 때 김자점(金自點) 사건, 74∼75책은 현종 때, 76∼128책은 숙종 때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미륵신앙사건·기사환국(己巳換局)·갑술환국(甲戌換局)·장길산(張吉山) 사건, 그리고 희빈 장씨 옥사, 129∼133책은 경종 때, 134∼223책은 영조 때 이인좌의 난·괘서 사건·탕평책(蕩平策) 관련 사건, 224∼243책은 정조때 정감록(鄭鑑錄) 관련 모역 사건·거사(居士)의 난, 244∼286책은 순조 때 신유사옥(辛酉邪獄)·홍경래(洪景來)의 난 관련 소론(少論) 모역 사건, 287∼294책은 헌종 때, 295∼299책은 철종 때 고변(告變) 사건, 300∼331책은 고종 때 이필제(李弼濟)의 난·최익현(崔益鉉) 사건·임오군란(壬午軍亂)·갑신정변(甲申政變) 등이 수록되어 있다.

관찬기록(官撰記錄)이기는 하지만 체제에 대항한 자들에 대한 기록이므로, 밑으로부터의 움직임을 공정하게 반영하고 있어서 사회사·민중운동사 연구에 참고되는 자료이다.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影印)·출간하였다.


      법정치학연구회(018-582-4889)
      http://cafe.daum.net/krolp



                  2003. 11. 28. 금요일 새벽 1시 10분..

                      金 成 守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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