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구만의 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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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법정치학연구회 작성일13-06-21 12:26 조회6,48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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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조하(奉朝賀) 남구만(南九萬)이 졸(卒)하였다. 처음에 남구만의 병이 위독(危篤)함을 듣고 임금이 특별히 두 어의(御醫)를 보내어 간병(看病)하게 하고, 자주 내국(內局)의 약(藥)을 내려 주었다. 이에 이르러 임금이 예조(禮曹)의 계청에 답하기를,
“이제 원로(元老)를 잃었으니, 진도(震悼)함을 어디에 비유하겠는가? 동원비기(東園秘器)를 골라서 보내고, 3년간의 녹봉(祿俸)을 주도록 하라.”
하였다. 남구만(南九萬)은 고 상(故相) 남재(南在)·남지(南智)의 후손이다. 성품이 강개(剛介)하고 독실(篤實)하여 백련금(百鍊金)과 같았으며, 체구는 침소(寢小)하였으나 정기(精氣)는 철석(鐵石)을 꿰뚫을 만하였다. 삼조(三朝)를 내리 섬기면서 큰 절의가 탁연(卓然)하였고, 대성(臺省)에 있으면서부터 직언(直言)으로 명성이 높았다. 처지(處地)가 매우 고단(孤單)하고 가난하였으나 사환(仕宦)과 논의(論議)는 항상 남들의 뜻밖에 뛰어났으며, 남에게 의지하거나 아부하지 않았다.
갑인년에 임금이 어린 나이로 왕위(王位)를 이어받으매 소인(小人)들의 무리가 궁안의 후원을 끼고 주장(張)하는 것을 남구만이 상소하여 환수(宦竪)들이 정사에 간여하는 형상을 발설(發說)하였는데, 그 말이 절직(切直)함이 많아서 사람들이 모두 그의 과감한 말을 칭찬하였다. 기미년에 경조(京兆)의 1소(疏)로 또 역적(逆賊) 윤휴(尹)·허견(許堅)의 흉악한 모략을 내리 꺾다가 자신이 비록 찬척(竄斥)되었으나 종사(宗社)가 힘입음이 있었다. 경신년에 개기(改紀)한 뒤에는, 남구만이 청의(淸議)를 도와 훈척(勳戚)을 내쫓으니, 더욱 사류(士流)들의 우러르는 바가 되었다.
무진년에 유현(儒賢)이 궁금(宮禁)을 논하여 종사(宗事)를 가까이 하다가 엄지(嚴旨)를 입으니, 남구만이 청대(請對)를 구하여 읍간(泣諫)하고 통렬하게 말하여 은휘(隱諱)하지 않다가, 임금의 위엄[雷威]을 거슬려 북방 변경(邊境)에 천극(棘)되었고, 기사년에 왕후[長秋]가 손위(遜位)하게 되매 많은 흉역(凶逆)의 무리가 권병(權柄)을 절취(竊取)하니 남구만은 또 동해(東海)로 찬배(竄配)되었으며, 갑술년에 경화(更化)하여서는 다시 영의정(領議政)에 제배(除拜)되어 제일 먼저 곤궁(坤宮)을 복위(復位)할 때에 회의(會議)한 의논을 물리쳤다. 당시에 한둘의 흉악한 소인[凶竪]들이 은화(銀貨)를 모아서 은밀히 결탁(結托)하고 툭하면 요화(瑤華)의 회복을 구실로 하였으나 실지는 그 사사로운 일을 구제하였는데, 기사년 사람들이 그 상황을 정탐해 내고는 옥사(獄事)를 이루어 크게 벌이려 하였으나 끝을 맺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남구만이 끝내 그들을 다스려서 방무(邦誣)를 씻고 국체(國體)를 높이어 우리 조정(朝廷)을 일월(日月)처럼 광명 정대하게 하기를 청하니, 그 무리들이 터무니없는 말로 위협 공동(恐動)하였으나, 걱정하지 않았다. 기사년에 화(禍)를 입은 사람은 권력이 있는 대가(大家)가 많았는지라, 그의 자제(子弟)로서 조론(朝論)을 주장하는 자들이 시기를 타서 시원스럽게 형벌을 남용(濫用)하려고 하였는데, 남구만이 그들의 뜻을 억제하고 되도록 관대하게 처리하도록 힘쓰니, 이로 인하여 거듭 당인(黨人)들의 미움을 샀다.
역적 장희재(張希載)는 곧 동궁(東宮)의 사친(私親)의 동기(同氣)로서 국모(國母)를 위해(危害)할 모의를 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주륙(誅戮)의 죄를 당하게 되었는데, 남구만이 경법(經法)과 권도(權道)를 참작하여 부생(傅生)의 의논을 하였다. 그때를 당하여 동궁(東宮)이 바야흐로 옷이 약간척[衣若干尺]이어서 처지(處地)가 지극히 외롭고 위태하였는데, 넓은 초원(草原)에 복융(伏戎)한 것 같아서 일로 보아 물리치고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었으므로, 남구만은 의연히 자신이 역적(逆賊)을 두호한다는 비방을 당하면서도 삼척(三尺)을 굽히고 사은(私恩)을 펴서 동궁을 위하여 죽기를 원하는 뜻을 보이어, 임금의 마음을 굳히고 역절(逆節)을 막음으로써 난국(亂局)을 미연(未然)에 없애려고 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의 원망이 약연(躍然)히 다투어 일어났으나 언제나 명의(名義)로써 이를 지키니, 비록 사류(士流) 중에서 그의 고심(苦心)을 살피는 자까지도 간혹 그가 토죄(討罪)를 완만하게 하고 경법(經法)을 지키는 것에서 피하는 것으로 의심하였으나, 남구만은 끝내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세도(世道)가 흔들리고 이단(異端)의 말이 준답(沓)한 것이 거의 30여 년이나 계속되었다.
신축년·임인년 이후에 흉역(凶逆)이 낭자(狼藉)하고 당화(黨禍)가 한층 더 격화되자, 세상이 비로소 남구만의 선견(先見)에 탄복하였다. 그러나 남구만이 갑술년에 승출(陞黜)을 죄준 논의와 병자년에 업동(業同)을 구원한 논의는 너무 간섭해 말하는 병통과 너무 깊이 생각하는 미혹(迷惑)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식자(識者)들이 또 혹은 단점으로 여기었다. 대개 남구만의 학술(學術)은 비록 순정(純正)하지는 못하였더라도 지조와 행동은 정확(貞確)하였으며, 기량(器量)은 비록 크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견식(見識)과 사려(思慮)는 정심(精深)하였다. 시행하고 조처한 것이 혹은 뇌락(磊落)하지 못하고, 심중(心中)이 혹은 활달하지 못하였으나, 그 강직하고 방정한 기절(氣節)과 결백한 조행(操行)은 비록 취향을 달리하는 자라 할지라도 의당 다른 말을 두지 않을 것이다. 흡연(翕然)히 태산 북두(泰山北斗)를 우러러보듯 여러 사람의 존경을 받아 온 것이 거의 반평생[半世]이나 되었다. 그러나 갑술년에 이르러서는 음사(陰邪)를 물리치고, 평반(平反)을 주장하여 당인(黨人)들의 마음을 크게 거슬리어, 골수(骨髓)에 맺힌 원수처럼 보았다. 벼슬을 하던 날에 이미 여러 번 독해(毒害)를 당했었는데, 처음 초사(初史)를 편수한 사람이 심지어 평일의 한 마디의 말로 공경하고 복종하였다고 하였는데, 기미년의 당언(言) 같은 것을 차마 척신(戚臣)이 종용(慫慂)하였던 바라고 이르니, 특히 이 밖의 을묘년의 소어(疏語)와 무진년의 연주(筵奏)와 같은 그 늠름()한 직언(直言)은 또 장차 어떤 풍지(風旨)로 될지 알지 못하나, 전연 형영(形影)조차 없는 말을 창출(出)하여 멋대로 죽고 없는 그를 더럽히고 아울러 그 청렴하고 간결(簡潔)한 절개까지도 일체 마구 욕을 하여 백세(百世)토록 현란(眩亂)시키려는 계책으로 삼으려고 하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마음 아파하였다.
남구만은 처음에 한미(寒微)하고 소원(疎遠)한 집에서 출세하여 재학(才學)과 풍절(風節)로써 임금의 특별한 지우(知愚)를 입어 화려한 관직을 역임하고, 숭질(崇秩)과 현작(顯爵)을 취하였는데, 내외를 통해 모두 능력있는 명성이 나타나서 문무(文武)를 겸전한 인재로 추중(推重)되었으며, 삼사(三事)의 지위에 거의 40년이나 있었다. 만년(晩年)에는 제우(際遇)가 더욱 높았고 울연(蔚然)히 중흥(中興)의 현명한 보좌가 되어 임금의 서찰(書札)과 시장(詩章)에 기여한 뜻이 정중하므로 물고기와 물[魚水]의 만남처럼 서로 친밀한 계합(契合)이었음을 담자(談者)는 지금까지도 일컫는 것이다. 세상에서 남구만을 논하는 자가 본조(本朝)의 선배(先輩)에 비유하기를,
“곧고 굳은 절조(節操)와 미륜(彌綸)하는 재능은, 이 완평(李完平)·최 완성(崔完城)과 백중(伯仲)이 될 만하다.”
고 하였다. 남구만의 호(號)는 약천(藥泉)이요, 뒤에 문충(文忠)으로 사시(賜諡)하였으며, 태묘(太廟)의 묘정에 배향(配享)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남구만은 사람됨이 단아하고 정연하여 언소(言笑)가 망령되지 않았고, 일어나고 앉는 몸가짐에도 절도(節度)가 있었다. 문사(文辭)가 법도 있고 아름다웠으며, 필획(筆) 또한 옛스럽고도 힘찼다. 집에 있거나 조정에 나가거나 모두 굳게 절개를 지켜 변하지 않았고, 평생토록 남에게 주는 서독(書牘)에 일찍이 구걸(求乞)하는 글자를 쓰지 않았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청주(淸州)의 수령(守令)으로 나갔을 때나 북방(北方)에 안절(按節)하여서도 모두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세상이 바야흐로 붕비(朋比)하여 서로가 모함과 알력을 일삼았는 데도 남구만은 마음가짐과 주장하는 의논이 항상 공평하고 윤당(允當)하였기 때문에 원망하고 미워하는 말이 일어나지 않았다. ‘만일 남구만으로 하여금 그의 죽음[卒]이 갑술년 이전에 있게 하였다면, 그의 청명(淸名)과 망중(望重)은 옛사람에게서 구해야 할 것이니, 누가 감히 흠잡아 논의할 사람이 있겠는가?’고 하였다. 이것은 곧 남구만과는 취향이 다른 자의 말이었는데, 그 칭찬하는 정도가 이와 같았다면 남구만을 가히 알아볼 만할 것이다.】
법정치학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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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원로(元老)를 잃었으니, 진도(震悼)함을 어디에 비유하겠는가? 동원비기(東園秘器)를 골라서 보내고, 3년간의 녹봉(祿俸)을 주도록 하라.”
하였다. 남구만(南九萬)은 고 상(故相) 남재(南在)·남지(南智)의 후손이다. 성품이 강개(剛介)하고 독실(篤實)하여 백련금(百鍊金)과 같았으며, 체구는 침소(寢小)하였으나 정기(精氣)는 철석(鐵石)을 꿰뚫을 만하였다. 삼조(三朝)를 내리 섬기면서 큰 절의가 탁연(卓然)하였고, 대성(臺省)에 있으면서부터 직언(直言)으로 명성이 높았다. 처지(處地)가 매우 고단(孤單)하고 가난하였으나 사환(仕宦)과 논의(論議)는 항상 남들의 뜻밖에 뛰어났으며, 남에게 의지하거나 아부하지 않았다.
갑인년에 임금이 어린 나이로 왕위(王位)를 이어받으매 소인(小人)들의 무리가 궁안의 후원을 끼고 주장(張)하는 것을 남구만이 상소하여 환수(宦竪)들이 정사에 간여하는 형상을 발설(發說)하였는데, 그 말이 절직(切直)함이 많아서 사람들이 모두 그의 과감한 말을 칭찬하였다. 기미년에 경조(京兆)의 1소(疏)로 또 역적(逆賊) 윤휴(尹)·허견(許堅)의 흉악한 모략을 내리 꺾다가 자신이 비록 찬척(竄斥)되었으나 종사(宗社)가 힘입음이 있었다. 경신년에 개기(改紀)한 뒤에는, 남구만이 청의(淸議)를 도와 훈척(勳戚)을 내쫓으니, 더욱 사류(士流)들의 우러르는 바가 되었다.
무진년에 유현(儒賢)이 궁금(宮禁)을 논하여 종사(宗事)를 가까이 하다가 엄지(嚴旨)를 입으니, 남구만이 청대(請對)를 구하여 읍간(泣諫)하고 통렬하게 말하여 은휘(隱諱)하지 않다가, 임금의 위엄[雷威]을 거슬려 북방 변경(邊境)에 천극(棘)되었고, 기사년에 왕후[長秋]가 손위(遜位)하게 되매 많은 흉역(凶逆)의 무리가 권병(權柄)을 절취(竊取)하니 남구만은 또 동해(東海)로 찬배(竄配)되었으며, 갑술년에 경화(更化)하여서는 다시 영의정(領議政)에 제배(除拜)되어 제일 먼저 곤궁(坤宮)을 복위(復位)할 때에 회의(會議)한 의논을 물리쳤다. 당시에 한둘의 흉악한 소인[凶竪]들이 은화(銀貨)를 모아서 은밀히 결탁(結托)하고 툭하면 요화(瑤華)의 회복을 구실로 하였으나 실지는 그 사사로운 일을 구제하였는데, 기사년 사람들이 그 상황을 정탐해 내고는 옥사(獄事)를 이루어 크게 벌이려 하였으나 끝을 맺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남구만이 끝내 그들을 다스려서 방무(邦誣)를 씻고 국체(國體)를 높이어 우리 조정(朝廷)을 일월(日月)처럼 광명 정대하게 하기를 청하니, 그 무리들이 터무니없는 말로 위협 공동(恐動)하였으나, 걱정하지 않았다. 기사년에 화(禍)를 입은 사람은 권력이 있는 대가(大家)가 많았는지라, 그의 자제(子弟)로서 조론(朝論)을 주장하는 자들이 시기를 타서 시원스럽게 형벌을 남용(濫用)하려고 하였는데, 남구만이 그들의 뜻을 억제하고 되도록 관대하게 처리하도록 힘쓰니, 이로 인하여 거듭 당인(黨人)들의 미움을 샀다.
역적 장희재(張希載)는 곧 동궁(東宮)의 사친(私親)의 동기(同氣)로서 국모(國母)를 위해(危害)할 모의를 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주륙(誅戮)의 죄를 당하게 되었는데, 남구만이 경법(經法)과 권도(權道)를 참작하여 부생(傅生)의 의논을 하였다. 그때를 당하여 동궁(東宮)이 바야흐로 옷이 약간척[衣若干尺]이어서 처지(處地)가 지극히 외롭고 위태하였는데, 넓은 초원(草原)에 복융(伏戎)한 것 같아서 일로 보아 물리치고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었으므로, 남구만은 의연히 자신이 역적(逆賊)을 두호한다는 비방을 당하면서도 삼척(三尺)을 굽히고 사은(私恩)을 펴서 동궁을 위하여 죽기를 원하는 뜻을 보이어, 임금의 마음을 굳히고 역절(逆節)을 막음으로써 난국(亂局)을 미연(未然)에 없애려고 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의 원망이 약연(躍然)히 다투어 일어났으나 언제나 명의(名義)로써 이를 지키니, 비록 사류(士流) 중에서 그의 고심(苦心)을 살피는 자까지도 간혹 그가 토죄(討罪)를 완만하게 하고 경법(經法)을 지키는 것에서 피하는 것으로 의심하였으나, 남구만은 끝내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세도(世道)가 흔들리고 이단(異端)의 말이 준답(沓)한 것이 거의 30여 년이나 계속되었다.
신축년·임인년 이후에 흉역(凶逆)이 낭자(狼藉)하고 당화(黨禍)가 한층 더 격화되자, 세상이 비로소 남구만의 선견(先見)에 탄복하였다. 그러나 남구만이 갑술년에 승출(陞黜)을 죄준 논의와 병자년에 업동(業同)을 구원한 논의는 너무 간섭해 말하는 병통과 너무 깊이 생각하는 미혹(迷惑)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식자(識者)들이 또 혹은 단점으로 여기었다. 대개 남구만의 학술(學術)은 비록 순정(純正)하지는 못하였더라도 지조와 행동은 정확(貞確)하였으며, 기량(器量)은 비록 크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견식(見識)과 사려(思慮)는 정심(精深)하였다. 시행하고 조처한 것이 혹은 뇌락(磊落)하지 못하고, 심중(心中)이 혹은 활달하지 못하였으나, 그 강직하고 방정한 기절(氣節)과 결백한 조행(操行)은 비록 취향을 달리하는 자라 할지라도 의당 다른 말을 두지 않을 것이다. 흡연(翕然)히 태산 북두(泰山北斗)를 우러러보듯 여러 사람의 존경을 받아 온 것이 거의 반평생[半世]이나 되었다. 그러나 갑술년에 이르러서는 음사(陰邪)를 물리치고, 평반(平反)을 주장하여 당인(黨人)들의 마음을 크게 거슬리어, 골수(骨髓)에 맺힌 원수처럼 보았다. 벼슬을 하던 날에 이미 여러 번 독해(毒害)를 당했었는데, 처음 초사(初史)를 편수한 사람이 심지어 평일의 한 마디의 말로 공경하고 복종하였다고 하였는데, 기미년의 당언(言) 같은 것을 차마 척신(戚臣)이 종용(慫慂)하였던 바라고 이르니, 특히 이 밖의 을묘년의 소어(疏語)와 무진년의 연주(筵奏)와 같은 그 늠름()한 직언(直言)은 또 장차 어떤 풍지(風旨)로 될지 알지 못하나, 전연 형영(形影)조차 없는 말을 창출(出)하여 멋대로 죽고 없는 그를 더럽히고 아울러 그 청렴하고 간결(簡潔)한 절개까지도 일체 마구 욕을 하여 백세(百世)토록 현란(眩亂)시키려는 계책으로 삼으려고 하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마음 아파하였다.
남구만은 처음에 한미(寒微)하고 소원(疎遠)한 집에서 출세하여 재학(才學)과 풍절(風節)로써 임금의 특별한 지우(知愚)를 입어 화려한 관직을 역임하고, 숭질(崇秩)과 현작(顯爵)을 취하였는데, 내외를 통해 모두 능력있는 명성이 나타나서 문무(文武)를 겸전한 인재로 추중(推重)되었으며, 삼사(三事)의 지위에 거의 40년이나 있었다. 만년(晩年)에는 제우(際遇)가 더욱 높았고 울연(蔚然)히 중흥(中興)의 현명한 보좌가 되어 임금의 서찰(書札)과 시장(詩章)에 기여한 뜻이 정중하므로 물고기와 물[魚水]의 만남처럼 서로 친밀한 계합(契合)이었음을 담자(談者)는 지금까지도 일컫는 것이다. 세상에서 남구만을 논하는 자가 본조(本朝)의 선배(先輩)에 비유하기를,
“곧고 굳은 절조(節操)와 미륜(彌綸)하는 재능은, 이 완평(李完平)·최 완성(崔完城)과 백중(伯仲)이 될 만하다.”
고 하였다. 남구만의 호(號)는 약천(藥泉)이요, 뒤에 문충(文忠)으로 사시(賜諡)하였으며, 태묘(太廟)의 묘정에 배향(配享)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남구만은 사람됨이 단아하고 정연하여 언소(言笑)가 망령되지 않았고, 일어나고 앉는 몸가짐에도 절도(節度)가 있었다. 문사(文辭)가 법도 있고 아름다웠으며, 필획(筆) 또한 옛스럽고도 힘찼다. 집에 있거나 조정에 나가거나 모두 굳게 절개를 지켜 변하지 않았고, 평생토록 남에게 주는 서독(書牘)에 일찍이 구걸(求乞)하는 글자를 쓰지 않았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청주(淸州)의 수령(守令)으로 나갔을 때나 북방(北方)에 안절(按節)하여서도 모두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세상이 바야흐로 붕비(朋比)하여 서로가 모함과 알력을 일삼았는 데도 남구만은 마음가짐과 주장하는 의논이 항상 공평하고 윤당(允當)하였기 때문에 원망하고 미워하는 말이 일어나지 않았다. ‘만일 남구만으로 하여금 그의 죽음[卒]이 갑술년 이전에 있게 하였다면, 그의 청명(淸名)과 망중(望重)은 옛사람에게서 구해야 할 것이니, 누가 감히 흠잡아 논의할 사람이 있겠는가?’고 하였다. 이것은 곧 남구만과는 취향이 다른 자의 말이었는데, 그 칭찬하는 정도가 이와 같았다면 남구만을 가히 알아볼 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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