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jm1

제 양심을 속일 방법이 없었습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경란 작성일13-06-21 09:50 조회4,551회 댓글0건

본문

제가 제 양심을 속일 방법이 없었습니다.

교학사 사장 양철우의 위증죄는,
김재구 검사가 이미 조사를 완료했던
범죄사건입니다.
(서울지방검찰청 서부지청 1995형제43268호)

저는 1994. 8. 29. 무고죄로 구속 기소되어
1995. 2. 10.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석방됐었습니다.
그리고 1996. 1. 26.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습니다.

저의 무고죄는,
제가 고소장을 제출하는 짓(?)을
검찰과 법원이 이구동성으로
범죄로 단정하여, 처벌한 것입니다.

그리고 집행유예형은,
만약 석방된 후, 재범(?)을 저지르면,
가차없이 엄벌에 처하겠다는
협박이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검찰과 법원이
자신들의 협박을 실행할 만한
배짱이 있는 지부터,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비겁함을 스스로 확인해두는 방법으로
분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보다 더 멋진 복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기도 전에
가차없이 재범(?)을 저지르고 나섰던 것입니다.
95형제43268호라는 사건번호야말로
검찰의 비겁함을 여지없이 증명하는 것입니다.

무고죄 재판이 대법원에 계류되어 있는 인물이
검찰측 증인의 위증죄를 고소했건만,
저의 집행유예형을 그대로 확정을 하면서,
저를 감옥으로 되돌려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검찰과 법원이 동시에,
스스로 범행을 자백한 것에 불과합니다.
교학사 사장 양철우가 위증을 한 일이 없었다면,
저는 가차없이 감옥으로 되돌아갔을 것입니다.





양철우 사장을 위증죄로 고소한 후,
참여연대 회의실을 빌려서
단식투쟁을 시작하려고 했었습니다.
검찰과 싸우는 일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는,
죽든 살든,
결판을 내버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박원순 사무처장은
"김경란씨가 회의실을 쓰겠다고 하면,
반대할 명분이 없다!"
라는 말로,
저의 회의실 사용을 사실상 허락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작 회의실을 점거(?) 하자,
사법피해자 동지(?) 몇 사람이 
참으로 극성스럽게
호통을 치고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참여연대가 
적(?)으로 적(?)을 제어하도록 만드는,
이이제이의 전략을
구사하고 나섰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이제이가 먹혀들지 않자,
그 다음에는 사무국장이라는 사람이
저를 불법체류자로 규정하면서
"꺼져!"라고 성화를 받히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사법감시센터를 운영하고 있고,
방금 "사법 제자리 놓기 시민 모임"을 발족시킨
참여연대가
아군이 아니라, 적군에 불과했었습니다. 

본의가 아니게
참으로 기막힌 사실을 확인하고도
저는 그 고립무원의 적진(?)에서
두 주일 이상 버텼습니다.

참으로 괴상한(?) 체험을 하면서
저는,
검찰이 "40년 철옹성"을 구가할 수 있는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지고있는 짐들을 훌훌 털어 버리기 위해
단식투쟁을 시작했던 것인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엄청날 정도로 무거운 짐을 더하게 되는,
참으로 기막힌 결과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참여연대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하고자 했기 때문에
저는
대한민국의 참으로 괴상하기 짝이 없는
야합구조에 눈을 뜨게 됐던 것입니다.





참여연대에서 불법체류자로 몰려서
쫓겨난 지, 만 6년 이상 경과됐습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일단 관심을 갖게되면,
그것만 보게 되는 법입니다.

때문에 지난 6년의 세월은,   
사법피해자에게는 언론과 사회단체가
아군을 가장한 적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시시때때로 확인하게 되는
세월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후로 저는,
이 끔찍한 현실을 덮어버리고,
대한민국이 개혁에 성공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됐었습니다.

법조계는 물론, 언론과 사회단체까지
적(?)으로 규정하고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끔찍했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생각을 거듭 해도
제(?) 정신을 갖고서는
그처럼 무모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모르는 척
입을 다물고 있다고 해도
저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입을 열어서 말을 할 때
저에게 온갖 비난이 쇄도할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 결과를 뻔히 내다보면서도
저는 입을 다물어 버릴 수가 없습니다.
제 양심이 저를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다면,
그것을 생각한 사람이 해야한다는 사실을
저는 분명히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제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면서,
어찌 감히 남의 양심만 탓할 수 있겠습니까!.
저 자신이 똑똑히 체험한 부조리에 침묵하면서
어찌 감히, "침묵하는 죄"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온갖 비난이 쇄도하더라도,
저들이 저를
정신병자로 몰고 가는 지경을 당한다 해도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양심의 자유"를 스스로 지키는 길입니다.




제가 참여연대에서 쫓겨난 날이
1996년 3월 29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김재구 검사가 교학사 사장의 위증죄를
무혐의처분 했습니다.

집으로 날라 온
무혐의처분통지서에서
3. 29. 이라는 일자를 확인한 순간,
온 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처럼 확실한 증거를 외면하고 말겠다면,
저도 똑같은 부류로 전락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검찰의 미련함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기막힌 조작술을 가차없이 발휘하여
3. 20 경쯤에 이미 무혐의처분을 해버렸던 것으로
조작해 주었다면,
제가 제 양심을 적당히 속일 수도 있는 일이건만....

분명히 3월 29일에 참여연대에서 쫓겨났는데,
3월 29일 자로 무혐의처분이 되었으니,
제가 제 양심을 속일 방법이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설사 그것이, 우연의 일치에 불과하다고 해도,
저로서는 우연으로 돌려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운명의 장난으로 비약이 돼버리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얌통머리 없는 검찰의 미련함 때문에
저는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참으로 엄청난 짐을 걸머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운명에 절대로 휘둘릴 수가 없었습니다.
제 운명이 저를 계속해서 갖고 놀도록
방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혐오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부류가 절대로 될 수 없었습니다.
똑같은 부류가 돼버린다는 것이,
저에게는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저는 천사표도, 청교도도 아니었습니다.
적당히 거짓말도 하고, 적당히 도둑질도 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청교도(?)가 돼버린 이유는
지극히 단순합니다.
"저 추잡한 위인들과 한통속이 될 수는 없다!"
라는 생각이,
저를 참으로 극단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똑같은 부류로 전락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포기(?)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엄청난 짐을
슬기롭게 받아 안을 수 있는지,
오로지 그것만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재구 검사는
비교적 정확하게
저의 의지와 결심을
파악했었다고 확신합니다.

참여연대에서 농성을 하고 있을 때,
김재구 검사는 저를
두 번이나(?) 소환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두툼한 수사기록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의 질문에 제가 대답을 하기 시작하면,
이미 그 부분을 설명하여 제출해 놓은 것을 후다닥 찾아내어
눈과 귀, 그리고 머리를 동시에 활용하여
사건의 진상을 확실하게 파악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말을 중간에 끓어버리거나
"이미 알고있는 사실이니,
간략하게 설명하라!"라고
윽박지르는 일도 없었습니다.
제가 바보천치는 아니었기 때문에,
미처 글로 쓰지 못했던 것들을
충분히 설명할 수가 있었습니다.

너무 오래된 사건이기 때문에
진상을 정확하게 통찰하게 된 검사에게
2회에 걸쳐서, 6-7 시간 이상이나
보충설명을 충분히 했던 셈입니다.





1993년 11월
김기정 검사도 비슷한 조사를 했었습니다.
김기정 검사실에는
그동안 제가 보낸 저작권별곡들이
두 개의 뭉치로 묶여져 있었는데, 
높이가 각각 1m 이상이었습니다.
제가 보낸 책들이 얼마나 가지런히 묶여 있든지,
"참, 많이도 보냈구나! 그런데 참 잘 묶어놨다.
역시, 묶어놓는 기술만큼은 일가견이 있네!"
라고 한탄했었습니다.

김기정 검사와 김재구 검사의 조사는
김한수, 조광수, 정병두 검사의 조사와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위 세 검사는 분명히
뇌물을 받고
사건을 조작하기 위한 수사(?)를
감행했던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김기정, 김재구 검사는 분명히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진실한(?) 조사를 진행했었습니다.
그들이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을
저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수사의 차원은 분명히 달랐지만,
그러나, 결과는 같았습니다.
무혐의처분!
김기정 검사와 김재구 검사 역시
무혐의처분을 하기 위해 참으로 별난 조사를
그처럼 성심성의를 다해 진행했던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차원이 전혀 달랐지만 결과는 한결같은 수사를
이처럼 명확하게 구분할 실력이 없었습니다.
이렇듯 구분을 해서 설명을 해놓고 보니,
무엇이 그리도 어려웠던 것인지,
도리어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지경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간단명료하게 설명하는 일!
그보다 더 어려운 일도 없다고 생각됩니다.
저에게는
분명히 될 듯 싶은데,
그러나 제아무리 애를 써도 되지 않는
안타까운 세월이
참으로 지루하게 계속됐었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설명할 수 있는 경지! 
제가 그러한 경지에
절대로 이를 수 없다고는
생각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백이면 백 사람 모두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장담하는 실정이었지만,
저는
사실을 사실대로 설명할 수 있는
실력만 갖추면 된다고 절규하면서
쓰고 또 쓰는 일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박규은 검사를 만나기 직전에 있습니다. 
그는 이미 김재구 검사가 무혐의처분 한
95형제43268호(서부지청) 사건의
수사기록을 넘겨받아서
주도면밀하게 검토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 자신을 위해.
박규은 검사를 위해
그리고 검찰의 권위와 명예를 위해
박규은 검사 역시
무혐의 처분을 하기 위해
사건서류를 주도면밀하게 분석하는 일은
제발 없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 동안,
검사를 만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검찰이 따돌리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 아닙니다.

검사 개개인의 비리를
미주알고주알 따지고 드는 것보다는
검찰의 보편적인 비리를 싸잡아서(?) 공격하는 편이 
훨씬 더 수월합니다.
때문에, 그동안 저는, 담당검사들을
굳이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무엇보다도 명분 쌓기에 주력했었습니다.
마지막 사생결판이 확실하게 준비될 때까지는
"역시, 만나주지 않았다!"라는
거절 횟수만 쌓아올리면 충분(?)하다고 생각됐기 때문에,
거절을 당하기 위해
열심히 면담신청을 해두는 일을 계속했었습니다.
똑같은 이치로
불기소처분을 당하기 위해
고소장을 제출하는 일을 열심히 결행했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뒷구멍으로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면,
제가 비열한 인간입니다.
인간이 그토록 독하고 무서울 수는 없습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토록 무서운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1993년, 고소투쟁을 시작하면서부터,
저는 반드시 "예고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너무 무모하다"는 비난과 야유가 빗발쳤지만,
저는 슬그머니 뒤통수를 치는 짓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의 굳건한 전략과 결심을
활활 털어서 밝히기 위해 참으로 열심이었건만,   
그러나 대한민국 검찰청은
저의 호소와 노력을 여지없이 무시한 채
70건에 달하는 불기소처분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부르짖는 사람에게
대한민국 검찰청이
참으로 노골적인 폭력을
가차없이 휘둘러대고 있건만,
언론과 사회단체는 저를 따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지경이었습니다.

언론과 사회단체의 양심은
어디에 팔아치웠다는 것인지, 
저의 피맺힌 호소와 절규를 무시해 버리면
된다는 식이었으니,
기도 막히지 않았습니다. 
   


이대 물리학과를 간신히 졸업한 위인이
악착같이 노력하여, 드디어
사실을 사실대로 설명할 수 있는
경지(?)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생결판을 내려고 합니다.
죽든 살든,
결정을 해버리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검찰이 스스로 알아서 기소를 해주신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그러나 불기소처분이 떨어질 경우에는
검찰과 언론 역시
불기소처분(?)을 밀어붙이고 말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대통령 후보들이 어떤 결정을 하실 것인지가
참으로 궁금한 지경입니다.

검찰이 알아서 기소를 해준다면,
저는 그런 것을 확인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박규은 검사(?)가 불기소처분을 감행한다면, 
저는 그것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 돼버리고 맙니다. 




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던
김기정, 김재구 검사는
양심의 가책을 어찌 처리했다는 말씀입니까?
아예 모르는 사람은 편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진상을 알게 된 사람들은
결코 편안해 질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는 양심은
그 어느 누구도 갖고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김기정, 김재구,
두 검사가 그동안
양심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고 하면,
그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만나본 두 검사는
비교적 순수한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분명히, 쥐새끼가 고양이를 염려하는 꼴이었지만,
그래도 제 양심은 편안치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는 현실 때문에
마음을 다치는 사람들을
더 이상은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고생을 하는 일도, 마음을 다치는 일도
저 혼자 감당을 해 버리고 마는 편이
저에게는 훨씬 더 속편한 일이었습니다.

남 모르게 마음을 혹사시키는 것보다는
훤히 드러내놓을 수 있는 몸을 혹사시켜서
저의 고생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편이
훨씬 더 슬기로운 길이 된다는 일념 하나로,
지금 이 순간까지 열심히(?) 고생하고 있습니다.

검찰이라는 괴물을 상대로
저보다 더 당당하게 싸울 수는 없다고 확신합니다.
때문에, 언제 죽어도 여한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죽고 나면,
스스로의 비겁한 모습들을 되돌아보게 될 것이라는
마음입니다.


 
 
박규은 검사가 어떤 사람인지를
저는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검찰 수뇌부에 진심으로 호소하고 싶습니다.
"젊은 검사들의 양심을 여지없이 짓밟는 짓거리를
이제는 제발 중단해 주십시오!"라고. 

김재구 검사가 작성했던 
공소부제기이유서를
타이핑 한 후,
거기에 간단한 설명을 붙여서 올릴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또한 전혀 엉뚱한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의 심성과 검찰의 심성(?)
그것이 합쳐진 것이
서대원 사건입니다.
때문에 굽이굽이
설명하기 어려웠던 사연들이 숨어 있다가
이런 식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서기 2002년 4월 10일  삼가 김경란 올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