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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변호사협회가 5번이나 지워버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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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경란 작성일13-06-21 10:06 조회3,9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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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변호사협회 홈페이지를 방문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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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지우십니까? 지우지 마십시오! 
3907 번째로 김경란님이 2002-04-17 오전 11:2에 글올림    1번 읽음

검찰을 협박하여 진술조서 9장을 작성했다는 사실을
대한변호사협회가
알 필요조차 없다는 말씀입니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래 글이, 변협이 지워버리는 글입니다.
5번이나 지워버렸습니다.

검찰을 협박(?)하여 작성한 진술조서 9장

서기 2002년 4월 14일. 인터넷에 글 올리는 것을 쉬고, 박규은 검사에게 제출할 증거를 챙겼습니다.
"정가 15만원짜리 전집물의 한 번치 인세가 7500만원이다. 고로 서대원이 교학사로부터 받은 1370만원의 화료는 저작권을 통째로 팔아치운 대가가 될 수 없다"
라는 사실만 인정받으면 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따로 챙길 증거가 필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검찰청이, 그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면서, 교학사를 무혐의처분했습니다. 그리고는, 저의 무고죄를 조작했습니다. 그리고, 70건에 달하는 고소사건을 불기소처분 했습니다.
조사해보고 자시고 할 것조차 없는 사건인데, 검찰이 제대로 된 수사를 하는 대신, 거꾸로 가는 수사(?)만 하려고 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1991. 10. 30. 교학사에 배수된 조광수 검사가 그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교학사가 서대원에게 지불한 1370만원은 저작권을 통째로 사버리기 위해 지불했던 거금이었다." 라고, 못박아 버리자, 지난 12년 동안 검찰에서는 그것을 밀어붙이기 위해 못할 짓이 없었습니다. 민사소송을 방해하고, 헌법소원도 방해하고, 저희부부가 만화가로 활동하는 것까지 봉쇄해 버렸습니다. 때문에 저로서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말이 안 되는 사실을 법이라는 미명으로 포장하여 밀어붙이는 수법이, 검사가 저를 만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1996년 12월 이후, 50건에 달하는 고소각하처분을 당하면서, 저는 검사나 검사계장을 단 한번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 검사를 만나야 하고, 검사를 만난 다음에는, 요리를 당하지 말고, 요리(?)를 해버려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검사를 만나야 할 시기는, "요리를 당하지 않을 만한 실력이 구축된 후"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군소리 없이, 불기소처분을 당하고 또 당하는 일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12년 동안이나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한 결과로, "이제는 요리를 당하지 않고, 요리할 자신이 있다" 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검사를 만나는 일에 치중했었습니다.
참으로 기막힌 노력을 한 결과, 2002년 4월 15일, 드디어 박규은 검사를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검찰, 교학사, 동서문화사가 제각각, 지난 12년 동안 저를 어떤 방법으로 골탕을 먹이고, 놀려먹었는지를 증명하는 자료들을 잔뜩 챙겨 갖고, 아침 8시경에 집을 나섰습니다.
무려 1.5m 정도가 되는 책과 자료를 준비했을 뿐 아니라, 지난 12년 동안 얼마나 많은 교통비를 지출했는지를 증명하는 증거를 만들어 두기 위해, 택시를 탔습니다. 영수증이 발급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전 8시 4분에 탑승하여, 9시 3분에 도착했고, 요금은 16000원이 나왔습니다.

1993년 11월 초순, 김기정 검사가 사건해결을 약속했던 사실이 있습니다.
그 당시, 김기정 검사실 캐비넷 속에는 1m 높이가 되는 책과 서류가 2뭉치나 보관돼 있었습니다.
1996년 2월, 김재구 검사실에서 조사를 받을 때에도 적지 않은 서류가 준비돼 있었습니다. 저의 무고죄 공판기록과 검찰 수사기록, 그리고 제가 보낸 서류와 책자들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규은 검사실에는 아무런 서류도 없었습니다. 제가 제출해 놓은 고소장 한 통이 달랑 있을 뿐이었습니다.

택시 속에서 생각했었습니다.
만약 검사계장에게 조사를 받으라고 하면, "검사보다 검사계장이 높은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검사님과 직접 얘기하고 싶다." 라고, 능갈(?)을 쳐서라도, 검사와 얘기하고야 말겠다고.

그러나 박규은 검사를 보는 순간, "검사계장과 얘기하는 편이 오히려 낫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규은 검사가 너무 경직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는 사람과 애써 얘기해봐야, 서로 피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제가 갖고 간 자료들을 차례차례 꺼내 놓았습니다.
12년 동안 제출했던 고소장, 진정서 등등.... 지난 12년 동안 검찰이 보내준 불기소처분통지서와 진정사건 이첩통지서.... 그리고 검사가 작성한 공소부제기이유서와 저의 무고죄 공판조서 등등을 200만원 이상 들여서 30질이나 복사해 놨기 때문에, 아쉬울 것이 없었습니다.
검사가 묻고자 하는 것,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모두, 제가 갖고 간 자료 속에 들어있었습니다.

"박규은 검사는 김경란을 분명히 만나 주었다" 라는 사실(?)을 만들어 두기 위해, 저를 소환했던 것 같습니다. 달랑 고소장 한 통을 들고 조사(?)를 진행시켜, 적당히 어물쩡 넘겨버리려고 했는데, 그것이 불가능하게 돼 버렸으니, 당연히 대책회의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조사를 하다가 말고, "대기실에 나가서 기다려라!"라는 요구가, 수도 없이 떨어지는 판국이었습니다.

박규은 검사는 분명히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저를 만나게 된 것 같았습니다.
"교학사에 매수된 조광수 검사가"라는 표현에, 벌컥 화를 냈다가, 종이쪽지 한 장을 보고 누그러졌었습니다.
"검찰과 법원이 야합하여 조작한 무고죄", "내 무고죄 재판은 재판이 아니라, 협잡이었다"
라는 표현에도. 당연히 화를 냈었습니다.
그러나 종이쪽지 몇 장을 보고는, 수그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저의 무고죄 재판은, 검찰의 무지막지함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재판입니다.

저의 진술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박규은 검사가 한탄했었습니다.
"20여명에 달하는 검사들이 모두, 미친놈들이라는 뜻입니까?"라고.

"물론입니다. 미친놈과 한패거리가 되면, 미친놈이 되지 별 수 있습니까?"
제가 대답했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진술조서를 허술하게 작성하기 위해 애쓰는 검사와 검사계장!
저는 분명히 그들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싸웠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그런 식으로 조정하려고 하는, 검찰 수뇌부와 한판 전쟁을 치루었던 것입니다.
"비겁하게 뒷구멍에 숨어서 조정하지 말고, 그들보고 나와서 조서를 꾸며보라고 하십시오!" 라고 악을 쓰면서, 저는, 검찰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수 없는 진술조서를 작성해 버리기 위해 고군분투했었습니다.

그런데, "교학사에 저작권을 판 일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와 이유"에 대해서는,
조사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조사하지 않은 채로, 인터넷에 글을 만개씩이나 올린 일에 대해서만 꼬치꼬치 캐묻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그건 나중에 묻고, 증거조사부터 끝내라. 증거조사 없이 조사를 끝내겠다고 하면서, 그런 질문을 하는 저의가 무엇이냐!" 라고, 질책했었습니다.

그러자, 검사와 검사계장이 한꺼번에 우겨대는 것이었습니다.
"증거는 자료로 제출하면 된다. "더 할 말이 있으면, 나중에 작성해서 내라!"고.
"제가 집에서 저 혼자 작성한 글과 검사 앞에서 진술한 것을 검사계장이 타이핑한 진술조서의 증거능력이 같습니까?" 라고 질문하니, 한사코, "같다"고, 우겨대는 것이었습니다.
진술 조서 역시, "아주머니의 주장일 뿐!" 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우겨대는 검사와 싸움, 싸움을 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진술 조서에 기록했습니다.
"저작권을 팔고 산다는 사실이 출판계약서에 없을 뿐 아니라, 1989년 10월, 교학사로부터 저자표시가 말살된 상태로 책이 출판됐다는 연락을 받고,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에 찾아갔었다. 김정태 상담 과장이 '약 1주일 전, 교학사 실무 담당자 배종남도 똑같은 문제로 상담을 하고 갔는데, 저작권 양도가 아니라고 얘기해 주었으니, 기다려 보시지요. 교학사의 조치가 있을 것입니다!' 라고 얘기했었다. 그런데 교학사 실무담당 배종남이, '능력이 있으면 법으로 해봐라!'라고 놀렸었다. 그건, 검판사를 매수할 자신이 있다는 소리였다."

거기까지 받아 적고는, 더 이상 받아 적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잽싸게 조서를 프린트하여 내밀면서, 저에게 검토한 후에 서명날인을 하고 돌아가라고, 막무가내로 우겨대는 것이었습니다.
제아무리 검사와 검사계장이 막무가내라 해도, 저는 거기서 물러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에게는, 길고 긴 악몽의 시간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악몽의 시간을, 더 이상은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대로는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고 버티자, 박규은 검사가 막말을 해대는 것이었습니다.
"조사할 가치가 없는 사건", "(치워버리라고, 경호원에게), 연락해!" 등등.

그 순간, 제가 뒤집혔습니다. 아마도, 눈에서 광기가 번쩍번쩍 튕겼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더군요. 제가 악을 쓰며 소리쳤었습니다.
"감옥에서 죽지 못한 것을 7년 동안이나 후회하면서 살았다. 이제 또 다시 그런 후회를 하면서 살지는 않겠다. 마음대로 해봐라. 이제부터 물도 마시지 않는 단식이다. 나는 여기서 한발짝도 물러서지 못한다. 내가 단식으로 맞설테니, 나를 공무집행방해죄로 감옥에 쳐넣든, 말든, 마음대로 해봐라! 사람이 한번 죽지 두 번 죽는다더냐!" 라고, 악을 쓰면서 대들었습니다.

그러자, 눈짓이 오고갔는지, 검사계장이 종이를 내주면서 제가 하고싶은 말을 기록해서 불러주면, 자기가 진술조서에 기록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제가 진술한 내용을 집으로 갖고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까지 뺏어서 폐기처분을 해야 한다고는, 차마 우겨댈 수가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그것까지 빼앗길, 제가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기막힌 공갈협박(?)을 감행한 결과로 고소인진술조서에 덧붙일 수 있었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어령 문화부장관이 1991년 8월 초순, 중재를 지시해 주셨습니다. 교학사 사장 양철우가 저의 무고죄 법정에서 이미 인정한 사실입니다.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의 최성균 주임으로부터 그 소식을 듣게 됐을 때, 저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이제 사건은 해결됐다고 확신했었습니다. 1991. 9. 3. 이어령 문화부 장관의 중재지시에 의해서 열렸던 저작권심의조정 위원회에서 안경환 조정위원이 조정해주신 손해배상액은 3억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학사는 3천만원을 주겠다고 했었습니다.

서대원의 저작권을 교학사가 사버린 것이 분명하다면, 이어령 문화부 장관님이 중재를 지시했을 리 만무한 일이며, 교학사 역시 3천만원을 주겠다고 했을 리 만무한 일입니다.
1989. 10. 29. 제가 요구했던 것이, 판권회수와 사과광고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의 작품을 돌려달라는 것이었고, 저자표시말살에 대해 사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터무니없는 요구로 몰아 부쳤던 위인이, 3천만원을 주겠다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어령 문화부 장관의 협박 때문입니까?

1991. 10. 30. 교학사에 매수된 조광수 검사가 무혐의처분 했습니다. 그 무혐의처분이 정당하다면, 이어령 문화부장관의 중재지시가 선량한 출판사 사장을 괴롭힌 짓이 돼버립니다. 이어령 장관님은 그런 대우를 참아 넘길 수 있는지 모르겠으나, 저희는 참아 넘길 수가 없습니다. 작품이 작가의 분신이기 때문입니다.
조광수 검사의 무혐의처분이 정당하다면, 안경환 조정위원이 조정해 주셨던 3억원의 손해배상금은 또 무엇입니까? 안경환 서울법대 교수 역시, 교학사 사장 양철우를 괴롭힌 것에 불과합니까?

이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제 딸아이입니다. 그 아이는 문제가 된 한국역사만화전집 14권 때문에 뇌수종에 걸렸습니다. 18세가 되도록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합니다. 선천성심장병 수술비 200만원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학사는 서대원에게 정가 15만원짜리 전집물의 저작권과 그림원고를 통째로 사버리기 위해 거금의 저작권양도대금을 지불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제 딸아이의 뇌수종은 무엇입니까?
그 아이가 태어나면서, 지금 이 순간까지, 왜 그 고생을 하고 있습니까? 서대원이라는 작자는 교학사에서 받은 거금을 다 어떻게 하고, 아이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말씀입니까?

박규은 검사님이, "20여명에 달하는 검사들이 다 미친놈이라는 말입니까?"라고 말씀하셨죠.
그렇습니다. 미친 놈과 한패거리가 돼버리면 다 함께 미쳐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용호, 진승현, 최기선 사건 등등이 모두 검찰의 무혐의처분이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저희는 저작권을 교학사에 판 일이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밝히기 위해 12년 동안 죽을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이제 박규은 검사가 확실히 대답해 주십시오. 서대원과 양철우가 저작권을 팔고 사기로 약속한 일이 있으며, 서대원이 거금의 저작권료를 분명히 받았는지를!
정가 15만원짜리 전집물의 한번치 인세가 7500만원이나 됩니다. 때문에, 서대원이 받은 1370만원은 거금의 저작권 양도대금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제출하는 증거 외에도, "서대원이 저작권을 교학사에 판 일이 없다" 는 증거가 수두룩합니다. 집에 돌아가서, 그 증거를 일일이 정리하여 우송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있나요"라고 질문해주십시오!
그리고는 제가 기록해 놓은 것을 계속 읽어 내려갔습니다.

저는 제가 죽을 자리를 12년 동안이나 찾았습니다.
이제, 제가 죽을 자리를 찾았습니다. 아까,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예고한 대로 실행하는 여자입니다. 그리 아시고, 진실에 반하지 않는 처분을 해 주십시오!
라고. 검사계장이 그대로 타이핑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의 진술조서가 작성되었습니다. 출력한 것을 고쳐서, 서명날인을 한 후, 증거로 제출하는 책 25권의 목록을 일일이 기록했습니다. 모든 증거를 책으로 묶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300장 이상 됨직한 증거서류에 일일이 무인을 찍었습니다. 도장을 갖고 갔지만, 도장보다는 무인이 편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출한 서류는 등사가 된다기에, 자술서도 한 장(?) 써 두었습니다. 내일이라도 등사가 된다면, 등사를 해다가, 타이핑을 해서 인터넷에 올리기 위함입니다.

참으로 기막힌 협박(?) 끝에 완성시킨 진술조서에 서명날인을 하면서, 장수를 세어 보았습니다. 불과 9장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시계는, 오후 7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2시간도 걸리지 않을 진술조서를 작성하는 일에 9시간이나 걸렸습니다."라고 한탄하자,
박규은 검사가 대답(?)했습니다.
"말도 마십시오. 이건 약과입니다. 11시간 동안 5장을 작성한 일도 있습니다." 라고.
"그거야, 범행을 부인하는 범인의 경우겠지요. 오늘은 검찰이 범행을 부인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것 아닙니까? 지금 시각이 분명히 7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증거서류에 일일이 무인을 찍는 것을 도와주면서 검사계장이 말했습니다.
"검사계장 10년에 오늘처럼 힘든 조사는 없었다!"라고.
제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매일매일이 오늘과 같습니다. 저는 오늘과 같은 전쟁터에서 12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죽지를 않았다면, 말도 못하는 악질이 되었겠지요. 저, 대단한 악질입니다. 능히 검찰을 이길 수 있습니다. 무혐의처분? 하십시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박규은 검사님 댁 앞에 가서 죽겠습니다. 미련 없이 저 세상에 가서, 내려다보겠습니다. 제가 죽은 후, 검찰이 어떤 일들을 당하는 지를!"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마십시오! 듣기가 괴롭습니다."
"제가 지금 농담하고 있습니까? 12년 동안이나 전쟁터에서 살고있는 제가 농담을 합니까? 이렇게 말이 안 통하니, 망나니의 자비를 요구하는 겁니다. 검찰이 아직도 강도짓을 계속하시겠다면, 제발, 저에게 망나니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일부러라도 단두대를 만들어서, 제 목을 싹둑 잘라버리십시오! 그렇게 못하시겠다면, 제가 죽을 자리를 찾아서 죽는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제가 죽음을 결행하기에는, 이런 소리를 듣고도 무혐의처분을 한 검사의 집 앞이 제격일 것입니다."

집에 돌아가서, "만약 이번에도 또, 무혐의처분이 떨어질 경우, 검사 집 앞에서 죽고 말겠다고 협박했다."는 사실을, 인터넷에 올리겠습니다.
"아이구! 그건 좀 하지 마세요!"
"무슨 말씀입니까? 분명히 올립니다. 올려야죠. 당연히 올려야죠!"

아무튼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돌아가 보겠습니다. 검사님도 사시고, 저도 살 수 있는 길을, 제발 선택해 주십시오! 양철우의 공소시효가 5월 26일입니다. 그때까지만 기다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
박규은 검사가 그렇게 대답했었습니다.

다시 택시를 탔습니다. 기운도 없었지만, 조사가 끝난 시각을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를 만들어 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9시58분에 타서, 20시 34분에 내렸다고, 영수증에 분명히 찍혀있습니다.
9장에 불과한 고소인 진술조서에, 택시비 영수증 두 장을 붙여 보십시오!
그것이, 순조로운 조사를 의미하는 증거입니까?
제가 나오기 직전, 박규은 검사는 김치볶음밥을, 성명미상(?)의 검사계장은 김치찌개를 전화로 주문하더군요. 그 전화통화 역시, 증거가 될 수 있겠군요.

증거! 증거! 증거!
법에서는 무엇보다도, 증거가 중요합니다!
교학사가 서대원의 저작권과 그림원고를 거금을 주고 사버렸다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유일한 증거(?)가, 조광수 검사의 무혐의처분입니다.
대한민국에서는 그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제가 12년 동안이나 고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법고시에 합격한 최고 엘리트들이 얼마나 비열한 짓을 자행하고 있는지를 우리 국민은 머리로만 이해(?)할 뿐입니다. 가슴으로는 누구나 사법고시를 동경하기 때문에, 법조인들의 양식을 믿고싶어 합니다.

"설마! 검판사들이 터무니없는 짓이야 하려고! 김경란이 무언가를 오해하고 있는 거겠지!"
사람들마다, 그렇게 믿고 싶어합니다.
이용호, 진승현씨에게 내려졌던 무혐의처분이 이미 문제가 됐었습니다. 그리고 요즈음, 최기선씨의 무혐의처분이 또 다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가당치 않은 무혐의처분이 대한민국을 얼마나 황폐화 시켜 버렸는지를, 이제는 우리 국민이 마음으로 느껴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렇게 되면, 검찰이, 감히 드러내놓고 비리를 싸고돌지는 못할 것입니다.

서기 2002년 4월 16일. 삼가 김경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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