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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제가 미련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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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경란 작성일13-06-19 14:32 조회3,6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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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원 사건을 총 정리합니다 2

서대원 사건이 증명하는 것 2 :
힘없는 서민은 권리도 존재도 없다.

  제 남편 서대원은 1964년 덕수상고를 졸업한 후, 유명만화가의 문하생으로 만화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노력하여 탄탄한 실력가가 된 후에 만화가로 출발해야, 유명만화가들이 만화공장(?)을 운영하면서 한 달에 수십 권 내지 백여 권의 만화를 출판하는 만화계 풍토 속에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만화가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판단했기 때문에, 1966년 동국대학교 국문학과에 진학한 후, 한 학기를 마치고 자원 입대하였다고 합니다.

  군에서는 전우신문에 열심히 투고하면서 스스로 만화수업을 하였고, 복학한 후에는 동대신문의 만화(고기리)를 그리면서 만화수업에 열중했었습니다.
  졸업 후에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한국일보의 독자투고란에 열심히 투고하는 한편, 성공학, 논리학, 처세술 책 등에 만화삽화를 그리는 일을 개척하였습니다.

  1990년대의 초반까지도, 만화는 "망가"로 통하는 지경이었습니다. 남편의 실력을 인정해주는 출판사 사장들이 저자에게 만화삽화를 넣겠다고 하면, 대학교수급의 저자들이 "내 책을 망가책으로 만들 셈이냐!"라고, 펄쩍 뛰는 지경이었습니다.
  저자들이 만화삽화를 냉대하면 할수록, 남편은 더더욱 성심 성의껏 삽화를 그려 주었습니다.
  제 남편이 만화계의 한 구석에서 그런 노력을 했기 때문에, 저자들의 인식이 급속히 바뀔 수 있었던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만화삽화가 급속히 확산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한 사람의 노력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남편을 통해 한 사람의 노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쳤기 때문에, 저 역시, "중요한 한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는, 만화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책 한 권 없었습니다.  선배들의 작업을 어깨 너머로 지켜보거나, 외국잡지를 통해 스스로 만화를 터득하는 수밖에 없었던 시기입니다.
  척박하기 짝이 없는 사막에서 "나 홀로 만화수업"이 만 16년 이나 계속되던 중인데, 10개월 된 아들아이가 뇌종양수술을 받고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자식을 가슴에 묻는 일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잃는 것이 있다면, 얻는 것도 반드시 있는 법입니다.

  저에게는 자식의 죽음이, 남편과 이혼해야 할 기회(?)로 다가섰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는,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전업만화가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돼 버렸던 것입니다.
  제 남편 서대원이 일찌감치 전업만화가로 활동하지 못한 이유는, 스스로 양심을 저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화시장을 독점해버린 출판업자와 몇몇 유명만화가들이 술판에 어우러져서 1주일 내내 술 추념만 하다가, 때가 되면 삐죽 나타나서 제자(노예)들이 애써 그려놓은 그림들을 수거해다가, 자신이 그런 것처럼 출판하고, 그리고는 그 돈으로 다시 술타령을 하는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개판으로 돌아가는 만화계에서 실력이 없는 어린놈들은 죽어라하고 노예생활을 하다가, 스승(?)의 전철을 밟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풍토에 도저히 적응 할 자신(?)이 없다면, 만화계를 미련 없이 떠나는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만화에 대한 애착을 버릴 수가 없다면, 정직한 만화가로 당당하게 바로 설 수 있는 실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제 남편은 분명히 절굿공이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노력하는 작가가 되고자 했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20년 이상이나 도를 닦은 격입니다만, 그러나 교학사 사장이 제 남편의 작품을 가로채 버린 순간, 그러한 고생과 노력이 물거품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제 남편은 1946년 생(개띠)입니다. 그의 나이는 만 56세나 되는데, 그러나 지금 현재, 그가 이루어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7년 동안 딸자식의 목숨을 걸고 완성했던 한국역사만화전집이 덤핑시장에서 저자표시가 말살된 상태로 출판된 후, 만화가로 활동하는 것까지 원천봉쇄 당했기 때문입니다.
  교학사 사장이 단돈 3천만 원을 받고 팔아치운 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제 남편의 영혼과 인생,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모든 일이, 드러나는 것보다 드러나지 않는 부분이 훨씬 더 큰 법입니다. 언제나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절대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은,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눈(혜안)으로 보아야 합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짓을 계속하는 사람은 혜안을 기를 수 없습니다. 자신의 손바닥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도 분명히, 그처럼 어리석은 짓만 계속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검찰이라는 괴물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절대과제가 생기자, 스스로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 모든 사물을 마음의 눈으로 정확하게 꿰뚫어보는 일이었습니다. 
  올바르고 정당한 노력을 경주하면서, 저 자신의 잘못을 엄격하게 반성하는 생활을 계속할 때, 혜안이 길러진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갖고서는 그 어떤 요술도 부릴 수 없지만, 마음을 자유자재로 놀릴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요술(?)도 부릴 수 있다는 사실도 느끼고 있습니다. 
  마음이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오르게 되면, 태산을 들어서 옮기는 일이 결코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젊고 순수한 젊은이들의 마음에 날개를 달아줄 수만 있다면, 이 나라가 젊고 순수한 나라로 거듭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것이 저의 가장 핵심적인 전략일 뿐 아니라 소원이기 때문에, 저는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마음이 맑아야, 맑고 밝은 눈이 유지된다는 것은 익히 알고있는 상식입니다. 때문에 저는, 6살배기의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는 일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었습니다.
  만약 딸아이가 정신지체아가 돼버리지 않았다면, 저의 정신연령은 딸아이와 함께 성장(?)해 버리고 말았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제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은, 항상 6살배기의 마음을 갖고있는 정신지체 딸아이였습니다.
  가장 모범적인 스승이 항상 제 곁을 지키고 계셨기 때문에, 저에게는 6살배기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일이 결코 어렵지 않았습니다.
  사심 없는 딸아이의 영혼과 순진하게 교통하는 것이 저의 생활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노력을 경주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제 속에 혜안이 자리잡게 됐다는 사실을 느끼게 됐을 때, 저는 하늘이 저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느끼게 됐었습니다.
  저주와 축복의 경계를 저 자신이 정하게 된다는 사실도, 분명히 깨닫게 됐었습니다.

  서대원 사건에서 딸아이의 뇌수종은 움직일 수 없는 증거입니다. 교학사가 정말로 서대원의 저작권을 완전히 사버리기 위해 거금의 저작권료를 지불했었다면, 저와 딸아이가 수술비 200만원이 없어서 그 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교학사에서 받은 거금의 저작권료가 분명히 있었고, 아이가 필요한 때에 선천성심장병 수술을 받았다면, 아이는 지금 이 순간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있을 것이며, 서대원 사건은 존재할 수조차 없습니다.
  저희부부가 역사만화를 그리는 일에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최선의 작품을 뽑아냈을 것이니 말씀입니다.

  교학사 사장이 7년 동안 딸자식의 목숨을 걸고 완성시킨 작품을 덤핑시장에 가차없이 팔아치운 이유는, "원색분해가 잘못됐기 때문"입니다. 
  사건 초반, 동서문화사 장용일 상무가 분명히 그렇게 폭로했을 뿐 아니라, 인쇄기에 걸기만 하면 언제든지 정가 15만 원짜리 전집물을 출판할 수 있는 인쇄용 필름에 저자의 저작권이 덤(?)으로 얹어진 가격이 3천만 원에 불과했었다는 사실은, 하자가 발생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증거입니다.

  문제가 된 역사만화가, 최선을 다한 작품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만화경력 20년의 작가가 죽을힘을 다해 7년 동안 그린 작품"이라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제 딸아이의 뇌수종이 그것을 증명하는 증거인데, 어느 누가 감히, 그러한 진실을 부인할 수가 있겠습니까!
 
  동서문화사가 폭로하고 나섰던 "원색분해 실패"는,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합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서대원이 7년 동안 딸자식의 목숨을 걸고 완성시킨 작품이, 최고 수준의 작품이 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작품이, 저희 부부가 충분한 시간과 돈을 투자한 작품이었다면, 교학사는 원색분해가 잘못된 필름을 덤핑 시장에 팔아 넘기는 짓을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 번이라도 원색분해를 다시 하여, 교학사의 명의로 반드시 출판했을 것입니다.

  "서대원이 문제가 된 한국역사만화전집 14권에 시간과 돈을 충분히 투자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서대원은 분명히 거금의 화료를 받았지만, 그 거금의 화료를 서대원이 모두 다른 곳으로 빼돌렸기 때문!"입니까?
  "그럴 지도 모른다"라는 가정을 완벽하게 차단해 주고있는 것이, 딸아이의 선천성 심장병입니다. 

  문제가 된 역사만화를 그리고 있을 때, 저와 딸아이는 수술비 200만원을 구하지 못해,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지경에까지 갔었습니다. 
  그 이유가 교학사 사장의 착취 때문이라면, 교학사 사장이 죽일 놈입니다.  그러나 그 원인이 제 남편 서대원이 교학사에서 받은 돈을 빼돌렸기 때문이라면, 제 남편이 죽일 놈입니다.
  그것이, 서대원 사건의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며, 핵심입니다.

  그 간단한 사실을 판단해 보면, 교학사가 서대원에게 거금의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저작권을 완전히 사버렸기 때문에, 원색분해가 잘못된 필름을 덤핑출판사에 팔아 넘기는 짓을 자행하게 됐던 것인지, 교학사 사장이 인간의 탈을 쓴 악마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런 짓을 감행한 것인지를 누구나 판단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제 남편이 절규하는 대로, 교학사 사장이 인간이라면, 출판은 해주었어야 합니다. 

  죄 없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적나라하게 분석하여 자백(?)을 해버리면, 악인은 설자리가 없어지고 마는 법입니다.
  김근태 의원의 자백이 그런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제가 이런 글을 1992년도에 써서 발표할 수 있었다면, 사건이 12년 동안이나 미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일은 벌어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실력만 부족했던 것이 아닙니다.  혜안을 갖겠다고 그처럼 노력했건만, 이처럼 간단한 설명을 하는 일에 12년이 소모되었으니, 결국 저 자신이 미련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고생은, 저 자신의 미련함에 원인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 다시 한번 느끼고 있습니다.

서기 2002년 3월 13일  삼가 김경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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