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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책임지는 자세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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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경란 작성일13-06-20 13:37 조회2,6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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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세민 자활자금 대출 신청서

대출신청자 : 서대원. 김경란 부부 
주소 : 강서구 등촌3동 707 주공아파트 703동 114호

1. 제 남편 서대원의 경력과 이력 :

  제 남편 서대원은 1964년 덕수상고를 졸업한 후, 유명만화가의 문하생으로 만화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노력하여 탄탄한 실력가가 된 후에 만화가로 출발해야, 유명만화가들이 만화공장(?)을 운영하면서 한 달에 수십 권 내지 백여 권의 만화를 출판하는 만화계 풍토 속에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만화가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판단했기 때문에, 1966년 동국대학교 국문학과에 진학한 후, 한 학기를 마치고 자원 입대하였습니다.

  군에서는 전우신문에 열심히 투고하면서 스스로 만화수업을 하였고, 복학한 후에는 동대신문의 만화(고기리)를 그리면서 만화수업을 하였습니다.
  졸업 후에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한국일보의 독자투고란에 열심히 투고하는 한편, 성공학, 처세술 책 등에 만화삽화를 그리는 일을 개척하였습니다.
  1990년대의 초반까지도, 만화는 "망가"로 통하는 지경이었습니다. 남편의 실력을 인정해주는 출판사 사장들이 저자에게 만화삽화를 넣겠다고 하면, 대학교수급의 저자들이 "내 책을 망가책으로 만들 셈이냐!"라고, 펄쩍 뛰는 지경이었습니다.
  저자들이 만화삽화를 냉대하면 할수록, 남편은 더더욱 성심 성의껏 삽화를 그려 주었습니다. 제 남편이 만화계의 한 구석에서 그런 노력을 했기 때문에, 저자들의 인식이 급속히 바뀔 수 있었던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만화삽화가 급속히 확산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한 사람의 노력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1980년 11월, 아들아이가 뇌종양 수술을 받고 사망했었습니다.
  그로부터 7개월이 지난 1981. 7. 1. 다니던 직장을 사직하고, (주) 교학사와 「한국역사만화전집 14권」을 그리기로 계약했습니다.
  남편의 작가관은, "작가는 돈보다 일을 더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방아공이를 갈고 갈아서 바늘이 될 때까지 노력해 보겠다는 것이, 그의 좌우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직한 노력은 찬밥의 도토리 신세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풍토입니다. 작가에게 그러한 세상풍토를 개선해야할 책임이 있는 것이라면, 제 남편처럼 그 의무를 다하고있는 작가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만, 작품으로 말하지 못하고, 몸으로 말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1981. 7. 1. 당시, 교학사가 참고서를 출판하는 국내 굴지의 교육출판사였기 때문에, 교학사 사장의 말을 무조건 믿었다고 하는데, 문제가 된 역사만화전집의 계약서를 작성할 당시, 교학사 양철우 사장은 다음과 같은 거짓말을 했었습니다.
"금성출판사의 역사만화를 그린 신동우 화백이 50만원을 받았으니, 화료는 85만원이면 충분하다."
 
  교학사가 출판할 한국역사만화전집을 그리게 됐다는 사실에 감지덕지한 나머지, 제 남편은 교학사 사장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한국역사만화전집 14권을 완성시키고 나자, 교학사 사장의 배신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교학사가 원색분해가 잘못된 필름을 덤핑시장에 헐값으로 팔아치우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7년 동안 딸자식의 목숨을 걸고 완성시킨 작품만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감히(?) 검찰에게 대들었기 때문에, 괘씸죄에 걸려서, "만화가"라는 직업을 통째로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1992년도부터 저는, 남편을 대신하여, 수입이 한푼도 없는 상황에서 검찰이라는 괴물과 싸우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데, 교학사가 제 남편의 작품을 단돈 3천만 원을 받고 멋대로 팔아치운 것은, 1989. 1. 9.입니다.     

2. 그 남편에 그 아내

  1981년 당시는, 이혼을 결심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때문에 그 멍청한 계약을, "나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투자를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말이 안 되는 계약이니 파기하고, 차라리 대학원에 등록하십시오. 당신에게 만화가가 되기 위한 투자가 더 필요하다면, 대학원에 진학하는 편이 훨씬 더 확실한 투자가 될 것 같습니다." 라고 권유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굳이 역사만화를 그려보겠다고 고집했었습니다. 저는 그러한 고집이, 저하고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때는, 남편이 그 어떤 결정을 하든, 반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 우둔한 남자와 더 이상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지만, 저는 제 결심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에, 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남편 서대원이 교학사 사장이라는 악인에게 자기 자신의 미래를 내맡겼던 것이라면, 저는 판단력이 미숙하고 결단력도 부족한 사람에게 저의 미래를 내맡겼던 꼴입니다. 

  제가 이혼을 결심했던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었는데, 제가 왜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는지를 곰곰이 분석해 보니, 그 이유가 너무나 한심했었습니다.
  이혼의 책임을 남편에게 몽땅 뒤집어씌우려고 하다가,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에 제동이 걸렸던 것입니다.
  남편이 미련한 곰이었다면, 저 역시 미련한 곰이었습니다. 남편에게 무지했던 죄가 있었다면, 저에게도 미련했던 죄가 있었는데, 제가 상대성 원리를 몰랐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죄를 모르고, 남편의 잘못만 따지고 들다가 코가 꿰인 꼴이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인생입니까!
  참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 깨닫게 된 교훈이기 때문에,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겠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 전가하는 일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 인생을 저 자신이 책임지기 위해 노력하는 세월이 20년쯤 흐른 지금 이 순간에는, "저희 부부의 실수를 교훈 삼아, 저희 부부와 같은 실수를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라고, 외쳐대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모두, 비슷한 실수(선택)를 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3. 저는, 저작권투쟁기를 완성시키려고 합니다.

  악인에게 미래를 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리석은 짓은, 미련하고 우둔한 사람에게 자기 인생을 몽땅 내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신뢰할 수 있는 기업이 몇 개나 되며, 부정부패에 찌들지 않은 정직한 직장이 과연 존재하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이 나라의 젊은이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실 참스승과 현자가 과연 몇 분이나 계시는 지도 생각해 봅니다.  참스승이 분명히 존재하시건만, 이 나라가 이토록 오리무중이 돼버릴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진짜와 사이비를 어떻게 가려내야 하는지도 생각해 봅니다. 아무런 경험도 없는 젊은이들이 그런 것을 정확하게 판단할 능력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제가 20대 초반의 젊은이라면, 저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도 생각해 봅니다.

  저의 저작권 투쟁기가 그런 지침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저를 위해, 그리고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을 위해, 이제는 그것을 쓰려고 합니다.

  제아무리 썩었다 해도, 사법고시를 패스한 분들의 인격은 평범한 사람의 인격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상(?)한 분들이, 얼마나 비열한 짓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는지를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국민이 사법부패상을 제대로 인지해야 한다고 절규하면서! 
  범죄자 이상도 이하도 아닌, 법조인 범죄를 사실 그대로 설명하면 되는데, 그러나 글을 써놓고 보면, 저 자신이 비열한 사람으로 전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실수를 거듭하다가 깨닫게 됐었습니다. 부패한 검판사들과 어우러져서 진흙탕에서 씨름을 해봐야, 저만 더러워질 뿐이라는 사실을!  "그 ×이나, 그 ×이나!"라는 평가를 듣게되면, 제가 검찰을 이기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해 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추악한 짓을 하면 할수록, 저는 지극히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었습니다. 검찰을 이기기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훌륭한 대의명분을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을 쌓아올리는 것과, 저 자신의 인격수양이었습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는 일이며, 검찰의 30년 철옹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증거가 확실한 사건 한 개" 뿐입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그 점을 역설해도,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딴전만 부리는 것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미래와 장래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분들이 검찰의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악착같이 외면하고 말겠다고 하는지,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 참!"하면서, 사건의 핵심과 검찰의 잘못을 외면하고 말겠다는 분들은 정직한 그룹에 속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저의 설명을 실컷 경청(?)한 후, 그 설명 속에서 저의 실수와 잘못을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한 후, 가당치 않은 힐책을 퍼붓는 분(?)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권리주장과 대의명분이, "가당치 않은 욕심"으로 매도되는 실정이었으니, 참으로 절망스러운 세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 세상이었기 때문에, 악인들의 막무가내가 기승을 부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진심으로 염려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일에서 1등(?)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실력이 쟁쟁한 분들이 가차없이 내팽개쳐버리고 말겠다는 대한민국의 사회정의와 사법정의를 제 손으로 소중하게 가꾸어 나가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사법정의와 사회정의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값진 인생은 없다고 계산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생명도 기꺼이 바칠 수 있다고, 결심했었습니다. 

  악을 무서워하지 말고 인정과 의를 무서워하라는 것이 친정어머니의 교육이었습니다. 그런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지, 저의 판단, 의지, 결심은 추호의 흔들림도 없습니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고생 속에서도 불철주야로 저 자신의 실력과 능력을 갈고 닦는 일에 매진했었습니다. 

  제가 어떤 보석을 연마하기 위해 제 인생을 그처럼 송두리째 쏟아 부었던 것인지를 저 자신도 알지 못합니다.  12년을 고생하고 노력하여 얻게된 저의 판단과 결론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난 12년의 고생과 노력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정말로 엄청난 보석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물밑에 숨어서 형체를 드러내 놓지 않는 보석의 실체를 파악하고 분석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연마한 보석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제대로 자랑(?)할 수 있는 일이므로, 저작권투쟁기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동안, 여러 번 시도했었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했었습니다. 
  보석으로 숙성하는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고, 보석은 함부로 캐는 것이 아닌데, 여물지도 않은 실력으로 여물지도 못한 보석을 캐버리고 말겠다고, 서둘러 댔던 것입니다.
  막연하게, "아직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면, 작업을 중단하곤 했었는데, 제가 왜, "시기상조"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해 답답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너무나 뻔한 이치를 깨닫지 못해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짓을 거듭했던 것입니다.

  이제 겨우 그 단순한 이치를 깨닫게 되었으니, 저작권투쟁기를 쓰는 작업이 보석의 근원을 싹둑 잘라버리는 작업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저 혼자 외롭게 가꾸던 보석이 국민적인 차원에서 가꾸는 보석으로 승화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이제는 정말, 저작권투쟁기를 써버릴 수 있다!" 라는 환호성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제 마음 속에서.

4. 영세민 자활자금을 신청합니다.

  저작권투쟁기만 완성되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에서 졸업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저의 자활도 중요하지만, 남편의 자활은 더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제 남편의 작업환경을 1992년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 남편의 훔페이지를 개설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합니다.
  희망과 꿈을 잃어버린 남편에게, "만화가의 집"부터 마련해 주는 방법으로, 만화가로서의 의지를 되살려 보겠다는 것입니다.

  남편의 홈페이지가, "당신 자신의 창작의지를 되살리는 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일깨워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되면 중풍으로 쓰러진 후, 점점 어린아이로 퇴보하고 있는 남편도, 자신의 창작의지를 되살리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1998년 11월 9일, 제 남편이 중풍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11월 18일, 살고있던 집에서 가차없이 쫓겨났었습니다.
  남편이 쓰러지자, 그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저희가족을 가차없이 길거리로 내 몰았던 집주인은, 30대 초반에 남편을 잃고, 세 아이를 훌륭하게 길러놓은 여인이었습니다.

  집주인이 그 정도로 야멸 찬 사람이었다면, 집세를 무려 50-60개월 씩 밀릴 수가 없는 일입니다. 6월달에 이미 선고를 받아놓고, 11월에 내 몰았다는 사실 등등, 저희가 길거리로 쫓겨난 시기에, 검찰의 농간이 개입되었음을 증명하는 증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집세가 자그만치 50-60개월이나 밀려있었는데, 6월에 이미 선고를 받아놓고, 11월에 남편이 쓰러지자, 가차없이 내쫓았다는 사실이, 집주인의 농간일 수는 없었습니다.
  누가 봐도, 그것은 검찰의 농간이 분명했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더더욱 굴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위기를 슬기롭게 활용하면 기막힌 기회가 되고, 독을 약으로 쓰면 특효약이 되는 것이니, 어디 한번 시원하게 붙어 보자구! 내가 죽게될 것인지, 검찰이 항복을 하게 될 것인지, 어디 한번, 결판을 내보자구!"
저는 그렇게 절규하면서, 참으로 숨가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검찰과의 일전을 준비했었습니다.

  1998. 11. 18. 새벽 6시에 집달리가 들이닥쳤는데, 우연인지, 농간인지, 바로 그 날 오전 10시에, 만화잡지사 OZ의 인터뷰가 약속돼 있었습니다.

  널부러져 있는 세간을 길거리에 방치하고, 너무 황당해서 부들부들 떨고 계시는 시어머님과 겁에 질려있는 딸아이만 챙겼습니다.  마침 길 건너에 외사촌이 살고 있었기에, 그리로 피신시킨 후, 세수도 하지 못한 상태로 잡지사를 찾아갔었습니다.
  저의 결심이 분명한 이상, 굳이 인터뷰 약속을 미룰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스스로 억제하면서 저는 저의 의지와 결심을 단호하게 설명했었습니다.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설명하기 위해 그 기막힌 시간에 기자를 만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자는, 제가 법률투쟁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사를 작성했었습니다.  "............"

  잡지사에서 나와서 곧바로, 서울법대학생회를 찾아갔었습니다.
저의 결심을 밝히면서 도와달라고 부탁하자, 제18대 법대학생회가 기꺼이 도와주겠노라고 약속했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시간 후,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시동생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형수님이 대학가에 대자보를 붙이면, 제 목이 위태로워집니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연히 저를 도와주셔야 할 분들이, 제가 돈 때문에 육갑을 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곡해를 하면서 온갖 비난을 퍼붓는 지경이었습니다. 그것이 너무 야속했기 때문에,
"만화가로 활동하는 것과, 저작권 투쟁기를 출판하는 것만 방해하지 마라. (검찰이!) 그러면, 법률투쟁은 얼마든지 중단할 수 있다!"
저는 시동생에게 그것만 검찰에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었습니다.

  제가 내거는 조건을 듣고, 시동생부터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형수 때문에 형이 고생하는 것이며, 저로 인해 만화가로 활동하는 것까지 막혀버린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내거는 조건으로 인해, 먹고사는 길이 막혀버렸기 때문에 형수가 그처럼 독해졌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시동생은 분명히 장담했었습니다.
  "그런 조건이라면, 분명히 관철될 수 있을 것!" 이라고.
  그러나, 시동생이 3달 후에 들고 온 검찰의 대답은,
"두 가지 모두,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 는 것이었습니다. 

  IMF 때문에 거덜이 난 시누이 돈으로 2000만 원짜리 전셋집을 얻어주고, 만화가게를 차려주겠다는 제의(?)는, "삶은 소대가리가 웃을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직도, 서방님 목이 위험합니까? 그것만 대답해 주십시오!"
라고 대답(?)하자,
  "그렇지 않습니다. 형수님 뜻대로 하십시오!"
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검찰의 그 얄궂은 농간이 행해지기 전에는, 검찰이 저희 가족을 말려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98년 11월 이후로, 저는 검찰의 고사작전을 증명해줄 확실한 증인을 얻게 된 셈입니다.
  한국과학기술대학의 교수로 재직중인 제 시동생이, 국가공권력의 농간을 증명해줄 증인입니다.

  제 남편은 1945년 생입니다. 그런데 그는 18세부터 만화가로 헌신하기 위한 인생을 준비해 왔던 사람입니다.
  선량한 사람의 꿈과 노력을 여지없이 박살내서 폐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에, 검찰이 절대적인 공헌(?)을 했고, 정부당국은 그런 짓을 방관하고 방치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적당히 우물쭈물하면서, 영세민자활자금을 호소하고 애걸을 해 보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영세민이 자활하기 위해 1200만원 이하의 자활자금을 지원 받을 수 있다면, 저희부부는 당연히 수급대상자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평생 국가가 지원하는 생계비로 생계를 꾸려 나가겠다는 생각이 추호도 없을 뿐 아니라, 저의 자활능력을 저 자신이 분명히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먹고사는 일에서 하루 속히 해방되기 위해, 자활자금을 청구합니다.
  사용 용도는, 남편의 홈페이지를 개설해주고, 남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책과 그림도구, 그리고 홈페이지를 운영하기 위한 도구들을 구입하기 위한 비용입니다. 

  한 트럭이 넘는 책을 1년 이상이나 길거리에 쌓아둔 상태로 지냈는데, 집주인이 통고도 없이 치워버리고 말았습니다.
  "정 옮겨갈 곳이 없으면, 검찰청 앞에 옮겨다 놓고 불을 질러 버리고 말겠다!"라고 했더니, 통고하지 말고 치워버리라고 부탁했던 권력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검찰의 패악이 10년 이상이나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남편의 소장도서가 깨끗이 사라지고 만 것인데, 환갑이 가까워지고 있는 제 남편이 하루속히 작가로서의 감각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최소한도의 책이나마 시급히 장만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영세민 자활자금은 국가가 공짜로 주는 돈이 아닙니다. 장기저리로 빌려주는 돈입니다.  저희 부부에게 1200만원 이하의 자활자금을 국가가 장기저리로 제공하는 것은 최소한도의 예의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영세민 자활자금을 융자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서기 2002년 3월 27일 
                          영세민 서대원. 김경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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