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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의 자녀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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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수 작성일13-06-21 12:19 조회3,8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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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의 자녀 교육 

모든 게 서구화되다시피 한 오늘, 우리 조상들의 자녀 교육을 되새긴다는 것은 많은 이로부터 케케묵은 구시대에 대한 향수로, 부질없는 일이라고 외면당할지도 모르겠다.

자녀 교육에 관한 글들을 쓰면서 여러 문헌을 참고하던 중, 그대로 지나치기에 아까운 글들이 있었다. 많은 글들 중에서 일부만 뽑아 조금 가필해서 몇 회 소개해 본다. 이 글 중에서 한두 편이라도 마음에 닿아서 자녀 교육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사양하는 것은 덕행의 첫째다

․조선 연산군 때, 학자 정여창(鄭汝昌)은 젊었을 적에 술 마시기를 좋아했다. 어느 날 그는 친구와 술을 잔뜩 마시고 만취해서 그만 들판에서 밤을 새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가 꾸짖었다.

“네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으므로 내가 의지할 데는 오직 너뿐인데, 지금 네가 이와 같은 짓을 하니 나는 누구를 의지하겠느냐?”

그러자 정여창은 자기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신라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어렸을 때의 일이다. 그 어머니가 날마다 엄격한 훈계로 함부로 벗들과 사귀어 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아들은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다. 어느 날 아들이 기생 천관의 집에서 자고 돌아왔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흐느껴 울면서 꾸짖었다.

“나는 이미 늙었으므로 밤낮으로 네가 얼른 자라서 나라에 큰 공을 세우기를 바라고 있는데, 지금 너는 어린아이들과 함께 기생방에서 논다는 말이야?”

그제야 유신은 어머니 앞에서 다시는 그런 집에 가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하루는 유신이 술이 잔뜩 취해 돌아오는데, 타고 있던 말이 지난날 다니던 길에 익숙하여 그만 기생 천관의 집에 이르렀다. 술에서 깬 유신은 잘못을 깨닫고 말의 목을 벤 후 안장을 버려 둔 채 집으로 돌아왔다.

․고려 말기 문간공 안종원(安宗源)은 17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한(史翰) 벼슬에 선임되었다. 뒷날 벼슬에 오를 때 그 동료인 심동노(沈東老)는 나이가 많으면서도 벼슬이 낮으므로, 공은 그에게 벼슬을 사양하였다. 그러자 공의 아버지 문정공 축(軸)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였다.

“사양하는 것은 덕행의 첫째다. 네가 남에게 사양하면, 남이 누가 너를 버리겠는가? 우리 집에 인물이 났으니 너는 꼭 큰 인물이 되겠구나.”

․고려 명종 때 함유일(咸有一)은 벼슬이 상서(尙書)에 이르렀으나 재산을 모으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부인이 말하기를

“공이 살아 있을 동안에 왜 자손들의 장래를 염려하지 않습니까?”

그는 대답하여 말하였다.

“나는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한 생활에 힘쓰고, 절개를 지키는 사람으로 우리 가문을 세우려고 하니, 아이들은 마땅히 몸가짐을 바르고 곧게 가지고 생활비를 절약하여 타고난 운명을 기다릴 따름이지, 어찌 가난함을 근심하오.”


하늘이 감동할 어머니의 마음

정절공 정갑손(鄭甲孫)은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강직하여 그 자제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 부탁하지 못하였다. 공은 일찍이 관찰사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가다가 도중에 과거에 합격한 방을 보니 자기 아들이 급제하였다.

공은 시관(試官)을 보고 꾸짖어 말하였다.
“네가 감히 나에게 아첨하여 미혹케 하려는가? 내 집 아이는 아직도 학업이 훌륭하지 못한데 어찌 감히 요행으로 임금을 속이겠는가?”

그런 후, 그 명단에서 아들의 이름을 지워 버리고, 마침내 시관을 파면시켰다.



퇴계(退溪) 선생이 손자를 훈육하는 글에 말하였다.

“너는 여러 어른들과 이야기할 때에는 마땅히 마음을 안정하고 감정을 낮추고 조용히 그 의견을 듣도록 하여라.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꼭 같지 않으면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살펴 그 장점을 쫓아서 그 이익이 됨을 얻도록 해야 옳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먼저 소홀한 의견을 가지고 오로지 자기의 뜻을 주장하거나 말이 나오는 대로 떠들거나 큰 소리를 질러 여러 어른들의 말을 능가한다면, 가령 그 의견이 사리에 어긋나지 않더라도 이미 소리친 것은 무례한 것으로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이로움을 구하는 도리가 아니다.”



조선 영조 때 조현명(趙顯命)이 재상으로 임명된 후, 공의 부인이 죽었다. 그러자 여러 영문과 외방에서 부조가 매우 많이 들어왔다.

장례를 치른 다음, 재정을 맡았던 사람이 조용한 시간에 공을 만나 남은 돈으로 밭을 살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맏상제에게 물어봤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예, 맏상제가 좋다고 했습니다”하였다.
그러자 공은 여러 아들을 불러놓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 놈들아! 그래 너희들은 부의(賻儀)로 들어온 재물을 가지고 땅을 사려고 한다니, 이는 곧 어버이의 장례를 이용하는 꼴이다. 나는 재상이 되어서도 땅을 사지 않았다. 어찌 너희들은 굶어죽을 근심을 하였느냐?”

그리고는 곧 회초리로 아들을 치면서 통곡하여 말하였다.
“내가 죽으면 나를 제사하는 아이들도 없겠구나!”

이튿날 부의로 들어온 모든 재물을 가난한 일가와 궁색한 친구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조선 인조 때 영의정 홍서봉(洪瑞鳳)의 어머니는 일찍이 집안이 가난하여 채소로 국을 끓여 먹었는데 늘 굶는 때가 많았다. 하루는 하인을 시켜 고기를 사오게 하였다. 하인이 사온 고기를 보니 빛깔이 상하여 독이 있는 것 같았다. 공의 어머니는 하인에게 묻기를,

“푸줏간에 고기가 얼마쯤이나 있더냐?” 하고 묻고는, 곧 머리에 장식한 패물을 팔아서 그 고기를 다 사오게 하여 담 밑에 묻어 버렸다.

이는 다른 사람이 그 고기를 사서 먹다가 병이 날까 염려한 때문이었다. 그러자 아들이 말하기를

“어머니의 이런 마음씨는 하늘이 감동할 만하오니 반드시 자손들이 크게 성공할 것이다”하였다.



조선 성종 때 좌찬성 손순효(孫舜孝)는 벼슬이 높을수록 더욱 조심하고 절약하여, 손님을 대하고 술상을 차리더라도 다만 검은 콩조림과 쓴 나물과 솔싹 등으로 안주를 만들어 가지고 대접하였으며, 늘 사치한 일들을 꺼렸다. 공은 일찍이 자제를 경계하여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어려운 처지에서 일어났으므로, 옛 물건으로 전할 것은 없고 오직 청렴결백한 생활 태도를 전한다면 역시 족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황금을 보기를 돌과 같이 하라

고려 말 시중 최영(崔塋)이 나이 열여섯 살 때, 아버지 최옹(崔雍)은 아들에게 훈계하였다.

"너는 마땅히 황금을 보기를 돌과 같이 하라.”

공은 죽을 때까지 이 말을 마음 속에 새겨서 늘 입는 옷이나 먹는 밥에 검소하였다. 벼슬살이 중에도 공은 청렴 강직하여 여러 번 집안 살림이 텅텅 비어 아무 것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공은 살찐 말을 타고 좋은 옷을 입는 사람을 보면 개나 돼지와 같이 여길 뿐 아니라, 당신의 신분이 장수와 재상으로 오랫동안 병권(兵權)을 맡아보았어도 뇌물을 주고받는 따위의 부정을 행하지 않았고, 나라에서 상으로 내준 전답은 다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조선 초기 참판 강석덕(姜碩德)이 일찍이 그 아들 희안(希顔)과 희맹(希孟)에게 훈계하여 말하였다.

“사람의 부귀 영달(榮達)은 타고난 분수에 달려 있는 것이지, 구한다고 얻게 되는 것은 아니고, 스스로 힘쓸 것은 효도와 공경, 충성과 신의와 예절, 그리고 의리와 청렴 수치 뿐이다.”

그 뒤, 두 아들이 다 과거에 급제한 후에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는 잔치를 베풀 것을 청하니, 공은 이를 허락지 않으면서 말하였다.

“영화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로우면 반드시 욕이 따른다.”

뒷날 두 아들은 다 문학으로써 깨끗한 이름을 빛냈으나 항상 그 몸가짐을 삼갔다.


조선 선조 때 우찬성 정종영(鄭宗榮)은 늘 그 자제를 훈계하여 말하였다.

“내 일찍이 자기의 편리한 점을 찾으려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 너희들은 부하고 귀한 가정에서 자라서 굶주림과 추위를 알지 못하므로, 만약 몸가짐을 삼가지 않고 도리어 교만하고 사치스러운 마음이 생긴다면 반드시 재앙을 당할 것이니, 모름지기 그를 경계할 것이다.”


조선 인조 때 실학자이며 이조판서였던 이수광(李晬光)의 부인 김씨는 자녀들을 훈계하는 데 엄격하였다. 자녀들이 일을 할 때는 부지런하도록 깨우쳐 게으름이 없도록 하였고, 비록 일상생활에는 늘 인자스럽게 사랑하였으나, 조그만 잘못이라도 저지르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분은 늘 말하였다.

“부녀자가 자식을 사랑할 줄만 알고 가르치지 않으면, 그 자식은 악한 행실을 조성하게 되는 일이 많다. 나는 그런 점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 세종 때 영의정 황희(黃喜)는 늘 청렴하고 검약한 생활을 하였다. 어느 하루 거처하는 방밖에 있는 복숭아가 빨갛게 잘 익었는데 이웃 아이들이 달려들어 따고 있었다. 그러자 공이 느린 소리로 말하였다.

“얘들아, 다 따 가지는 말아라. 나도 맛 좀 봐야지.”
잠시 후 뜰에 나가 보니 많이 달려 있던 봉숭아가 한 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조선 중종 때 영의정 홍언필(洪彦弼)은 아들을 훈계하는 데 엄격하였다. 그 아들 섬(暹)은 벼슬이 공경(公卿)에 이르렀어도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아버지로부터 종아리를 맞았다.

일찍이 그 아들이 대사헌이 되었을 때 초헌(軺軒: 벼슬아치가 타는 수레)을 타는 것을 보자, 공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초헌은 나이가 많고 벼슬이 높은 사람이 타는 것인데, 아직 새파란 네가 타다니!” 하며 그 아들을 초헌에 매어 뜰에 놓아두었다.


 자료제공: 법정치학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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