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탐사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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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수 작성일13-06-21 12:19 조회5,80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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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와 남산소개@@@@@@@@@@@@@
우리나라 전체 보물중에 거의다가 신라때의 것이라고 합니다..
신라 불교문화는 불국사,석굴암등으로 그 독창성이
세계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네스코에서도 세계 10대 유적지로 선정하였으며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처럼 느껴지는 곳이라고 합니다.
신라의 불교가 공인된 후로 남산은
하늘에서 하강하신 부처님들이 내려와 머무시는 도솔천으로 여기고 신앙되어
많은 절이 생기고 탑이 서고 불상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신라 왕업은 992년의 역사로
거리거리마다 계곡마다에 서려있는 서라벌 옛터는
우리 민족문화의 고향이요 정신문화의 터전이며,
경주 남산. 그곳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신라의 첫 임금인 박혁거세가 태어난 나정(蘿井)이 있고,
55대 경애왕(景哀王)이 술놀이를 벌이다 후백제 견훤에게 비운의 죽음을 당해
신라 사직의 종막을 예고한 포석정(鮑石亭)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직 까지도 신라 천년의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곳으로,
경주 사람들은 “남산을 빼놓고 경주를 다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천년 고도(古都)의 진면목은 바로 남산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역사상으로 가장 불교가 중흥한 시기이고
우리나라의 유명한 스님들도 거의 신라때의 스님들 이시기도 합니다.
원효,의상(화엄사상),원광(화랑의 세속오계),자장,진표율사,충담,원추스님등....
처음 신라불교전파시기에는 아도화상,이차돈순교등을 보면
많은 어려움도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국교가되어 불교로서
모든 대립과 편견등을 하나로 통일하여서
가장 이상적인 정치와 삶이 이루어진 시기입니다.._()_
.......경주남산에얽힌전설.....
어느 날 이 벌판으로 흘러가는 시냇가에서 한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이 때 두 신이 서라벌로 찾아왔다.
한 신은 검붉은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한 남신이었고,
또 한 신은 둥근 얼굴에 샛별 같이 눈동자가 반짝이는
아주 부드러운 여신이었다.
신은 평화롭고 기름진 서라벌의 경치를 둘러보며
" 야! 우리가 살 곳은 여기로구나 ! "
하고 감탄하며 외쳤다.
이때 빨래하던 처녀가 신들이 외치는 우뢰같은 큰 소리에 놀라며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 보았다. 아 ! 산과 같이 거대한 남녀가
자기 쪽으로 발을 옮겨 걸어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
겁에 질린 처녀는 " 산 봐라 ! " 하고 힘을 다해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산과 같은 사람 보아라"
라고 해야 할 말을 너무 급하여
" 산 봐라 ! "
라고 외쳤던 것이다
발 아래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두 신을 발을 멈추었는데 다시는 발을 옮길 수 없게 되었다.
처녀의 외침에 따라 그 자리에서 두 신은 산으로 변했던 것이다.
자기들의 소원대로 서라벌을 안고 처녀의 말을 따라 산이 된 것이다.
여신은 남산 서쪽에 아담하게 솟아오른 부드럽고 포근한 망산이 되고,
남신은 검은 바위와 붉은 흙빗으로 울퉁불퉁한 산맥을 모아
장엄하게 자리잡은 남산이 된 것이라 전한다.
두 부부의 신이 변해 이루어졌다는 남산과 망산은 지금까지 나란히 정답게 솟아있다.
이렇게 전설은 전함니다...
그 후 서라벌 둘레에는 많은 산들이 생겨났는데,
망산 바로 곁에는 젊고 푸른 청년의 벽도산과 선도산이 솟아 있어
그들은 젊은 팔을 벌려 얌전하고 예쁜 망산을 쉴 새 없이 유혹한다.
그러나 망산의 머리는 한결같이 남산 쪽으로 향하고 있다.
"망산의 절개가 변하지 않는 한 서라벌 처녀들의 순결도 변하지 않는다"라고
믿어온 서라벌의 딸 가진 부모들은 망산을 바라보며
한시름 덜고 살아온 것이다.........
정일근시인은 남산을 이렇게 노래했다.
‘마음이 길을 만드네
그리움의 마음 없다면 누가 길을 만들고
그 길 지도 위에 새겨 놓으리
보름달 뜨는 저녁 마음의 눈도 함께 떠
경주 남산 냉골 암봉 바윗길 따라
돌 속에 숨은 내 사랑 찾아가노라면
산이 사람들에게 풀어놓은 실타래 같은 길은
달빛 아니라도 환한 길 눈을 감고서도 찾아갈 수 있는 길
사랑아, 너는 어디에 숨어 나를 부르는지
마음이 앞서서 길을 만드네
그 길 따라 내가 가네.’(정일근의 ‘길-경주 남산’)
사서에 따르면 신라인들에게는 위기 때마다
중요한 국사를 논했던 네 곳의 성지가 있었는데
사영지(四靈地)로 불렸던 이곳은 서라벌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위치한 청송산·피전·남산·금강산이다.
“삼국유사”는 이곳이 신성한 땅이어서 이곳에서 논의하면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고 적고 있으며.....
역사기록에는 신라가 번성했을 때 서라벌 성 안에는
17만호나 되는 기와집들이 처마를 마주하면서
사방 55리에 걸쳐 차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남산 동쪽 산기슭에 피리촌이 있고
그 마을에 절이 있어 피리사(避里寺)라 했다.
그 절에 이상한 중이 있었는데… 아미타불을 염하여
그 소리가 성 안에까지 들려 3백60방 17만호에서
그 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라고도 전해온다...
이는 7세기 원효(元曉)의 불교 대중화 이후 염불만으로도 왕생할 수 있다는
정토신앙이 신라사회에 지배적으로 퍼져 있었던 것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남산의 주봉인 금오산(468m)과 고위산(494m)에서 흘러내린
40여개의 남산 골골마다에는 특히 기암괴석이 가득하다.
남산은 남북으로 8km, 동서로 4km에 걸쳐 길게 늘어서 동서로 평야를 끼고 있다.
남산에서 내려다보는 왕도는 오르는 이면
너나 할 것 없이 저절로 감탄을 토해내게 할 만큼 신비스럽다.
멀리서 바라보는 남산은 두루뭉수리하지만 실제 그 산세는 험한 편이다.
사람들은 서남산의 골짜기는 골이 깊어 위압감을 주지만
동남산은 골이 얕아 온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막상 남산의 품에 일단 안겨보면
누구나 깊고 그윽한 자비심에 사로잡힌니다....
남은 절터가 1백12군데, 이곳에서 발견된 불상만 81구에 달한다.
남산 불적(佛跡)의 백미에 해당하는 마애불(磨崖佛)은 무려 52구나 되고,
입체불상이 29구, 온전하지 않지만 석탑도 61개가 남아 있다.
전체 불적이 4백20여개, 문화재로 지정된 유물·유적만도 22점에 달한다.
땅속에 묻혔거나 남산을 떠난 것과 합친다면 만불만탑의 정토세계가 펼쳐질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독립된 지역에 불상과 탑이 집중된 경우는 경주 남산이 유일한 곳이라합니다.
“삼국유사”는 남산에 대해
"그 산에 ‘절(사찰)이 별처럼 많고, 탑들은 줄지은 기러기만큼 많았다"고 적고 있을 정도다.
이처럼 아주 성스러운 곳으로
산을 오르다보면 부처님이 계시는 도솔천인 듯 생각을 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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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답사한 코스는
삼릉 → 냉골 석조여래좌상 → 마애관음입상 →
선각육존불 → 마애여래좌상 → 석조여래좌상 → 선각마애여래상 →
상선암마애대좌불 → 금오산 정상 →
용장사지 삼층석탑 → 마애여래좌상 → 삼륜대좌불 → 용장사터 →
배리 삼존불
경주에 도착하여 남산 진입로에는 벚나무가 양옆으로
벚꽃 꽃망울이 이제막 맺혀지고 있었습니다...
남산의 삼릉에 도착하니 12시쯤 입구 잔뒤밭에서 요기를 마치고
산에 오르니 진달래가 수줍은 듯 발그른 얼굴로 반가워하며 손을 흔들어 줍니다~~
삼릉주위와 오르는길에는 소나무숲이 울창합니다
중년쯤 되 보이는 소나무들은 제각기 제 성품대로 사방팔방으로 기울어지며
빼곳이 서있다...
※삼릉(拜里三陵) 史蹟 219 號
이 계곡 북쪽 언덕에는 많은 무덤들이 줄지어 있었던 흔적이 있는데
지금은 세 개의 릉만 남아 있어 삼릉(三陵)이라 부르고 있다.
제일 앞의 무덤은 신라 54대 경명왕릉(景明王 : 917 ~ 924)이라 전해 오는 릉이고
가운데 것이 53대 신덕왕릉(神德王 : 912 ~ 917)이라 전해 오는 릉이다.
맨 뒤의 것은 8대 아달라왕릉(阿達羅王 : 154 ~ 184)이라 전해 오고 있는데,
초기 임금님의 릉이 왜 이 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무덤들은 원래 봉분 둘레에 호석(護石)을 쌓고 큰 자연암석(自然岩石)을 둘러놓은
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과 같은 양식이었는데
지금은 다 묻혀 원형토분(圓形土墳)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앞에 있는 경명왕릉에서는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본래 자연이 우리에게 친근함은 그 자연 스러움에 있다^^...
칡넝쿨이 소나무를 타고 못살 게 굴어도
칡넝쿨이 나쁘다 하지 않는다...
그것은 걔 성품이 원래 그러함을 알기 때문이다....
시원한 봄바람에 시원한 솔향을 맡으며 얼마를 오르니
둥글둥글한 돌들이 있는 맑은 계곡이 나오고
계곡을따라 얼마를 더 오르니
냉골 석조여래좌상이 나왔다.
아! 목없는 부처님을 뵈오니 가슴이 아련해지며...
누가 이랬을까하는 마음부터 앞섰지만
우리나라 조선조등 역사속에 불교를 박해한 때에 그러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보며......_()_
※ 냉골 석조여래좌상
삼릉에서 개울을 따라 계곡으로 약 300m쯤 가면 길 옆 바위 위에
머리 없는 석불좌상이 앉아 계신다.
현재 높이가 1.6m되고 무릎 너비가 1.56m되는 큰 좌불이다.
근년까지도 계곡에 묻혀 있던 것을 파내어 지금 장소에 앉혀 놓은 것이기 때문에
마멸이 없고 옷주름들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다만 머리가 없어지고 두 무릎이 파괴되어 손 모양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편안히 앉은 자세며 기백이 넘치는 가슴이며 넓은 어깨는
8세기 중엽 신라 전성기의 위풍당당한 불상이다.
특히 왼쪽 어깨에서 가사 끈을 매듭지어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영총 수실은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우리 나라의 특색 있는 장식품인 매듭은 먼 신라 때부터 전해 왔다는 것을
이 가사 끈이 말해 주고 있다.
부처님의 아래옷을 동여맨 끈도 예쁜 매듭으로 매어져 있다.
이 불상은 용장사 삼륜대좌불처럼 가사 끈이 있기 때문에
존명을 정하기 어려우나 여래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왼쪽위로 30미터쯤에는 마애관음입상이
바위들 사이에 있는데
그 입상 자체가 자연과 묘한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보니
신라불교의 조화로움을 보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관세음보살...
시공을 초월한 신라의 불심을 느끼며....._()_
※마애관음입상(지방유형문화재 19호)
머리 없는 여래상에서 북쪽 산등성이를 쳐다보면
뾰죽한 기둥바위들이 높고 낮게 솟아 있는데
그 중 한 바위에 빙그레 미소를 머금고 하계를 내려다보고 있는
관세음보살입상이 새겨져 있다.
살결이 풍만한 얼굴은 미소를 머금었고 오른손은 설법인을 하고,
머리에 쓴 보관에는 화불을 배치하여 관세음보살임을 표시하였는데
목걸이와 가사를 동여맨 끈은 나비날개 처럼 매듭을 짓고
그 자락이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발가락 끝에까지 피가 도는 듯 섬세하게 조각된 이 불상은
따스한 촉감을 일으키는 복련 위에 서 계신다.
얼마쯤 계곡을따라 위로 올라가니
넓은 바위면에 선으로 부처님을 새긴 선각 육존불이 보였습니다..
아름다운 선율로 새겨진 부처님앞에
시공을 초월하여 전하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의
부처님의 진리에 합장하고 ..._()_
옆으로 해서 위로 오르는데 진영이가 부처님선각쪽으로 빗물이 흐르지 않게
선각한곳을 가르켜 주어서 보니 과연 그러한지라..
부처님을 향한 세심한 신라인의 마음이 전해 오는 듯 하였습니다...
※.선각육존불(지방유형문화재 21호.)
동쪽 바위 면에 설법하고 있는 석가모니 삼존불을 새기고,
서쪽 바위 면에 아미타 삼존불을 새겨, 현생과 내생을 나타내었다.
아미타삼존불은 좌우에 보살이 두 손에 꽃을 받쳐들고,
부처님은 죽은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오시는 내세아미타여래이다
선각 육존불위쪽 널직한 바위에서 한참 앉았다가
다시금 위로 걸음을 옮기니...
산 중턱쯤에 마애여래좌상이 큰 바위면 가운데에 나타남니다...
이도 선각으로 되어있습니다....
한참을 ......_()_
오르는 곳곳 부처님이 계시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느듯 부처님을 뵙는 설래임이
생겨남니다...
※.마애여래좌상(지방유형문화재 159호.)
선각육존불에서 등성이로 계속 200m쯤 올라가면
높이와 너비가 각각 10m쯤 되는 넓은 절벽바위가 서향으로 서 있다.
그 암벽 중앙에 지름 2.5m쯤 되는 연꽃 위에
설법인을 표시하고 앉아 계신 여래상이 있다.
몸체는 모두 선각으로 나타내었는데 얼굴만은 깍아 내어 돋을새김으로 표현하였다.
두 눈썹과 눈은 아주 가깝고 코는 길고 입술은 두텁고 커서
균형 잡힌 얼굴이라 할 수 없으나 소박한 위엄이 있다.
옆에는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다.
중요한 선은 굵게 그었고 옷주름 같은 것은 가는 선으로 변화를 주었다.
상 전체에서 재주를 부리지 않는 소박한 느낌을 느끼게 되는데,
남산 부처님은 바위 속에 숨어 계시다가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실 때는
언제나 누추한 차림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을 깊이 신앙하고 있었다.
이 마애불은 남산에서 가장 늦은 시기인 고려초기 즉 10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옆으로 조금 이동해 가니
조금 아래쪽으로 부처님의 앉은 석조여래좌상이 보이는데
이번에는 온전한 좌상인 것 같아 걸음을 더 재촉하였습니다..
부처님 앞에서 합장하며 뵈오니.._()_
얼굴 코밑으로는 형상이 일부 훼손되어 시멘트로 그 형상을
만들었지만 보기에 좋지 않아 이런 역사적 보물은
신라 예술성에 버금가는 실력으로 하였으면하는 아쉬운이 남았습니다..
※.석조여래좌상(보물 666호.)
냉골 골짜기 옆 솔숲에 많은 바위무리가 있고,
그 가운데 순백 화강암으로 조성된 여래상이 화려한 연화대석 위에 앉아 계신다.
연화대좌는 투박하게 8각으로 깍은 하대석과 면마다
안상을 새긴 중대석을 놓고 중대석위에 얹혀 있다.
안상이란 귀인들이 앉는 평상을 말하는 것이니 중대석 위는 절대로 존엄한 세계라는 뜻이다.
이렇게 존귀한 평상 위에 보상화로 장식된 화려한 둥근 연꽃송이를 얹어 놓았으니
이 연꽃은 수미산 위에 핀 하늘의 꽃송이인 것이다.
불상의 광배의 안쪽에는 부드러운 넝쿨무늬를 새기고
바깥쪽은 힘있게 활활 타오르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윗 부분이 조금 깨진 채로 불상 후면에 세워졌으나
1972년 겨울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 산산조각나 버렸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제 옆으로 계곡을 따라 오라가는데
진영이가 계곡위 바위를 가리키며 보라고 하기에
얼굴을 들어보니 높은 바위위에 머리부분만 보이는 선각마애여래상이 있었다..
※.선각마애여래상
석조여래좌상의 옆 계곡 30여m의 바위 절벽면에 머리 부분만 선각으로 새긴 불상이 있다.
이 불상은 바위 속에서 숨어있다가 살며시 그림자를 드러내 반겨 주는 듯한 모습이다.
상선암에 이르니많은 등산객들이 절의 자판기커피도 마시고
약수로 목도 축이며 쉬고 있었다...
상선암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_()_
우리는 위로 향했다..
이번에는 아주 큰 바위에 마애대좌불이 보였다..
여지껏 오르며 보았던중 제일 큰 부처님으로
자비하신 모습으로 심심미묘법문을 설하시고 계셨다..
이곳은 앞쪽으로는 시멘트로 넓혀놓아서
신발을벗고 참배하게끔 되어있었다..
그래서 신발벗고 삼배.._()_
이곳에서 시원스레 펼쳐진 앞을 멀리 둘러보니
그 시원함에 모든걸 잊고 만다^^
앉아서 사진한 장 클릭!!
※.상선암 마애대좌불(지방유형문화재 158호.)
거대한 자연 암반의 벽면에 6m 높이로 양각된
이 여래좌상은 남산에서 두 번째로 큰 불상이며,
얼굴의 앞면과 귀부분 까지는 원만하게 새겨진 반면,
머리 뒷부분은 투박하게 바위를 쪼아 내었다.
불상의 몸부분은 선이 거칠고 억세게 조각하였고,
좌대 부분은 희미하게 사라져 버린 듯한 모습이다.
이러한 조각 수법은 불교가 바위신앙과 습합하여 바위 속에서
부처님이 나오시는 순간을 표현하였다고 생각된다.
불상의 조각연대는 통일신라 하대로 추정된다
이어 정상갈래길에서 상사암이 있다는 왼쪽길은 다음에 들리기로 하고
우리는 오른쪽으로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산능선을 타고 얼마를 가니
금오산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은 널찍한 평지로 되어있었다...
※.금오산 정상
해발 468M로서 이곳에서 냉골, 포석계,
지바위골, 비파골, 약수골 등의 분수령이 된다.
국가 지정 문화재이다
정상에서 지도를보며 우리는 용장골을 가기전에
정상 아래쪽으로 600미터쯤에
약수골 마애여래대불입상을 보고 가기로 하고
아래로 향하는데..한참을 내려간다...
두시간 가까이 쉬엄쉬엄 산을 탔는데 아래로 향하니
다시 올라올일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부처님께 이르는길은 험난한길도 있다고 생각하며
아래로 향했다...
한참을 내려가니 묘가 보이는데 안내 표지가 없다면 찾지못할
작은길이 묘옆으로 나있다..
대나무잎 사이로 한사람지나갈정도의 길이다..
여기서 조금더 옆으로 돌아가니 약수골 마애여래대불입상이
나타남니다.. _()_
이곳도 규모는 엄청 큰데 부처님 머리가 없엇습니다...
※.약수골 마애여래대불입상(경북 유형문화재 제114호)
남산에 있는 많은 마애불 가운데 제일 규모가 큰 것으로
높이 8.6m, 너비 4m정도이다.
머리를 다른 돌로 조각해서 얹게 만든 구조인데 없어졌다.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흘러내린 옷주름이
양쪽 팔에 걸쳐져 수직으로 내려오는 옷주름과 직선,
곡선의 대조를 이루어 더욱 아름답다.
다시 위로 올라가서 우리는 용장골로 향했다...
용장골로 향하는 길에는 산불이 나서
나무들을 새로심었는데....
한순간의 방심이 얼마나 큰 화가 되는지 느끼게 된다...
차가 다닐정도의 널찍한 길을 따라 가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며 김밥도 먹고...
에너지를 재충전^^하여 용장골로 향했다
큰길을따라 아래로 얼마를 가니 갈래길에서
용장골임을 알리는 표지판이있었다...
용장골로 능선을 타고
내려가는데 곳곳이 아름다운 소나무며 바위가 있었다
얼마를 내려가니 용장사지 삼층석탑이
나왔는데 규모가 아주 작은 탑 이려니했는데....
의외로 내 생각보다 크기가 컸다!
진영이는 여기가 그렇게 보고싶었던 탑이라며 좋아했다^^
우리는 탑앞에서 조용히 두손을 합장하며 한참을 서있었다.._()_
그리고 기념찰영....
※.용장사지 삼층석탑(보물 186호.)
용장사지 동편 능선 위에 자리하여 이 계곡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이 탑은 현재 3층 옥개석까지 남아 있는데 높이가 4.5m이다.
높이 200m가량 되는 산의 바위를 하층기단으로 삼은 점이
신라인의 자연과의 조화 방법을 잘 나타내 준다.
아마도 수미산 꼭대기의 도리천에 탑을 세운 듯 하다.
바위에 6Cm정도 되는 괴임을 2단으로 마련하고
기단의 한 면은 1석으로 나머지 3면은 2매의 석재로 결구 시켰다. 탱주가 1주이다.
위에는 옥신괴임이 2단 마련되었고 2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으며, 갑석정연이 있다.
옥신과 옥개석은 각각 1매의 석재로 되어 있고,
2층 옥신은 1층에 비해 체감 효과를 크게 주어 전체적인 안정감을 꾀했다.
옥개받침은 모두 4단으로 되어 있고 옥개석의 상면에는 옥신괴임이 2단씩 마련되어 있다.
상륜부는 모두 유실되어 없고 삼층 옥개석 가운데에 찰주를 세웠던 구멍이 남아 있다.
이 탑은 1922년에 도괴 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는데
2층 옥신 상부에 방형사리공이 있었다 한다.
신라하대인 9세기 이후 작품으로 보아진다.
여기서 아래로 조금더 내려가니
마애여래좌상과 삼륜대좌불이 한번에 나온다
마애 여래좌상옆 바위틈에서는 작은 진달래꽃이
부처님 옆이라 좋은 듯 한들한들 몸을 흔들며 미소를 띄운다.
삼륜 대좌불은 세 개의 대위에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데
이곳도 얼굴부분은 훼손되어있었다...
이런 둥근 탑처럼 세대가 아래에 있고 그위에 부처님이 계시는 것은
처음 보았다....._()_
※.마애여래좌상(보물 913호.)
용장사지 삼륜대좌불 뒷편 동쪽으로 높이 5.5m, 폭 3.6m 가량 되는
암면이 남향을 하고 있고 그 바위면에 고운 연꽃 위에
결가부좌하고 항마촉지인을 한 여래상이 있다.
이 마애불은 손상이 거이 없이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얇게 돋을새김으로 되어 있는데
대좌의 연꽃은 정면 꽃잎은 비교적 크게 나타내고
양 가장자리로 가면서 차츰차츰 작게 하여 끝에서는 구름처럼 사라지도록 하였다.
불상은 풍만하고 건장한 위엄을 느끼게 하고
결가부좌로 앉은 두 무릎과 넓은 두 어깨는 당당하다.
상호는 머리 깊이를 반분한 자리에 눈썹이 길게 그어졌고
양눈썹에 이어 아래로 뻗어 내린 예리한 콧등은 얼굴길이의
⅓쯤에서 고운 코를 형성하였다.
굳게 다문 입술은 양가에 힘을 주어 긴장된 표정인데 풍성한 두뺨과
군살어린 턱의 부드러움은 자비롭기 그지없다.
육계는 얼굴과 조화롭게 덩실 솟아있다.
옷자락은 속이 다 비칠 것 같은 얇은 느낌으로 잘게 주름을 잡아 놓고 있다.
두광은 무늬 없이 두겹의 원으로 표현되었고 신광 역시 마찬가지이다.
신광 좌측에는 명문이 3행으로 10여자 있으나 판독이 불가능하다.
9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삼륜대좌불(보물 187호.)
용장사지의 동쪽 등성이에 우리 나라에서 유래가 없는
삼륜의 대좌에 머리가 없는 좌불이 얹혀있는 석불좌상이 있다.
현재는 머리가 없어져서 존명을 알 수 없는데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지대석은 자연석을 윗면만 고르게 가공하여 쓰고 있는데
지대석이자 곧 기단으로 보여진다.
높이 1m 남짓한 이 기단 위에 둥글게 다듬은 북모양의 중대괴임을 얹고
그 위에 쟁반모양의 둥근 반석을 놓았고 다시 그 위에 중대석과 반석을 놓았고
세 번째의 중대괴임을 결구시킨 후 앙련의 둥근 반석대좌를 마련한 후
그 위에 화려한 연꽃방석 위에 결가부좌로 앉은 불상을 모셔 놓았다.
불상의 높이는 연꽃방석 밑에서 목까지가 141Cm이고 대좌의 총 높이는 2m에 달한다.
불상은 결가부좌로 앉고 오른손은 선정인을
왼손은 무릎 위에 얹은 인상을 취하고 있는데
양어깨를 덮고 흘러내린 가사깃 사이엔 승기지가 비스듬히 가슴을 가리고
매듭이 맵시 있게 조각되어 있다.
또 왼쪽 어깨에 드리워진 가사끈의 수실은 이 불상을 승상이라고
자주 거론하게 만든 이유 중의 하나이다.
흘러내린 가사의 자락들은 물결처럼 펄럭이며 무릎을 덮고 흘러내려
상현좌를 이루고 있는 것도 특이하다.
삼국유사의 賢瑜伽, 海華嚴 조에 의하면,
옛날 용장사에 유가종의 대덕이신 대현스님이 계셨는데,
그 절에는 미륵장륙석상이 있어 대현스님이 그 미륵부처님을 기도하면서 돌면,
미륵부처님 또한 대현스님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불상을 삼국유사의 이야기처럼 미륵불이라 한다면
기단석 위가 사왕천이 되고 처음의 둥근 반석 위는 도리천,
두 번째 반석 위는 야마천이 되며 마지막의 연화 원반대좌는
미륵보살이 계시는 도솔천이 된다.
아래로 더 내려가며 바위와 소나무를보고
참 이곳은 도닦기?에 좋았겟다는 이야기도 했다^^
대나무가 둘러싸인 용장사터에 가보니 묘가 두 개있었다..
명당자리...........!?
옛 용장사터를 둘러보니 세월이 무상함을 실감케 한다..._()_
※.용장사
용장골 어귀에 있는 마을 이름이 용장리이고 계곡 이름도 용장골이니
모두가 용장사에서 기인된 이름들이다.
용장사는 이 계곡의 주인격일 뿐 아니라 남산 전역에서도 손꼽는 대가람이었다.
용장골의 남쪽면은 수리산을 정상으로 하여 흘러내린
여러 갈래의 계곡들로 되었는데 열반골의 기암과 괴암들이며
은적암 부근의 삼각봉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데 비해
금오산에서 뻗어내린 여러 산맥들로 구성된 북쪽면에는
이렇다 할 잘생긴 봉우리들이 별로 없다.
하지만 용장사가 자리잡은 그 봉우리만이 거대한 바위들로 첩첩이 솟아 있다.
용장사는 어느 시대에 폐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초기 설잠스님(김시습)이 이곳에 오래 머물고 있으면서
금오신화를 썼다고 하니 조선초기까지는 절이 있었고,
지금은 절터 축대들과 기와 조각들만이 폐허를 뒹굴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용장사 맑은 계곡을따라 내려오며
부처님을 뵈온 설래임 그대로 가슴은 뛰고 있었다..
돌아볼곳은 너무 많지만 다음을 생각하며..
길을 내려 하산했다...
그리고 출발지점으로 돌아와서 조금 쉬고 삼릉 바로옆의 배리삼존불을
뵈러갔다...
온화한 배리삼존불은 이를 보존하기위해 위에 지붕을 하여
이제 비바람은 피할 수 있게 모셔져 있었다..._()_
※.배리 삼존불(보물 63호.)
이 세 석불은 이곳 남산 기슭에 흩어져 누어 있던 것을
1923년에 지금의 자리에 모아서 세운 것이다.
본존불은 높이 2.66m, 좌우의 보살상은 높이 2.3m이다.
특히 조각 솜씨가 뛰어나 다정한 얼굴과 몸 등이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면서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종교적인 신비가 풍기고 있다.
풍만한 사각형의 얼굴, 둥근 눈썹, 아래로 뜬 눈, 다문 입, 깊이 파인 보조개,
살찐 뺨 등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을 간직한 이 석불들은
7세기경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적인 것이다.
간략히 남산답사 후기를 적지만,
부처님을 찾아 나선 걸음걸음은 너무나 뜻깊었다 생각된다.
이제 남산에온 발자취는 우리둘의 가슴속에서는
영원히 살아 숨쉴 것임니다......!!
아래는 남산안내 사이트중 좋은곳이라 생각되는곳들입니다.
경주남산연구소: http://www.kjnamsan.org/z/nam3/nam3.html
신라 체험나라 : http://www.dabsa.co.kr/silllaroad/nam_san_area.htm
다시찾는 경주여행: http://www.newcyberspace.com/lch/html/lch002.htm
경주남산 불상이미지: http://home.tinc.co.kr/~amita/namsan/namsan.htm
우리나라 전체 보물중에 거의다가 신라때의 것이라고 합니다..
신라 불교문화는 불국사,석굴암등으로 그 독창성이
세계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네스코에서도 세계 10대 유적지로 선정하였으며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처럼 느껴지는 곳이라고 합니다.
신라의 불교가 공인된 후로 남산은
하늘에서 하강하신 부처님들이 내려와 머무시는 도솔천으로 여기고 신앙되어
많은 절이 생기고 탑이 서고 불상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신라 왕업은 992년의 역사로
거리거리마다 계곡마다에 서려있는 서라벌 옛터는
우리 민족문화의 고향이요 정신문화의 터전이며,
경주 남산. 그곳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신라의 첫 임금인 박혁거세가 태어난 나정(蘿井)이 있고,
55대 경애왕(景哀王)이 술놀이를 벌이다 후백제 견훤에게 비운의 죽음을 당해
신라 사직의 종막을 예고한 포석정(鮑石亭)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직 까지도 신라 천년의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곳으로,
경주 사람들은 “남산을 빼놓고 경주를 다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천년 고도(古都)의 진면목은 바로 남산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역사상으로 가장 불교가 중흥한 시기이고
우리나라의 유명한 스님들도 거의 신라때의 스님들 이시기도 합니다.
원효,의상(화엄사상),원광(화랑의 세속오계),자장,진표율사,충담,원추스님등....
처음 신라불교전파시기에는 아도화상,이차돈순교등을 보면
많은 어려움도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국교가되어 불교로서
모든 대립과 편견등을 하나로 통일하여서
가장 이상적인 정치와 삶이 이루어진 시기입니다.._()_
.......경주남산에얽힌전설.....
어느 날 이 벌판으로 흘러가는 시냇가에서 한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이 때 두 신이 서라벌로 찾아왔다.
한 신은 검붉은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한 남신이었고,
또 한 신은 둥근 얼굴에 샛별 같이 눈동자가 반짝이는
아주 부드러운 여신이었다.
신은 평화롭고 기름진 서라벌의 경치를 둘러보며
" 야! 우리가 살 곳은 여기로구나 ! "
하고 감탄하며 외쳤다.
이때 빨래하던 처녀가 신들이 외치는 우뢰같은 큰 소리에 놀라며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 보았다. 아 ! 산과 같이 거대한 남녀가
자기 쪽으로 발을 옮겨 걸어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
겁에 질린 처녀는 " 산 봐라 ! " 하고 힘을 다해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산과 같은 사람 보아라"
라고 해야 할 말을 너무 급하여
" 산 봐라 ! "
라고 외쳤던 것이다
발 아래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두 신을 발을 멈추었는데 다시는 발을 옮길 수 없게 되었다.
처녀의 외침에 따라 그 자리에서 두 신은 산으로 변했던 것이다.
자기들의 소원대로 서라벌을 안고 처녀의 말을 따라 산이 된 것이다.
여신은 남산 서쪽에 아담하게 솟아오른 부드럽고 포근한 망산이 되고,
남신은 검은 바위와 붉은 흙빗으로 울퉁불퉁한 산맥을 모아
장엄하게 자리잡은 남산이 된 것이라 전한다.
두 부부의 신이 변해 이루어졌다는 남산과 망산은 지금까지 나란히 정답게 솟아있다.
이렇게 전설은 전함니다...
그 후 서라벌 둘레에는 많은 산들이 생겨났는데,
망산 바로 곁에는 젊고 푸른 청년의 벽도산과 선도산이 솟아 있어
그들은 젊은 팔을 벌려 얌전하고 예쁜 망산을 쉴 새 없이 유혹한다.
그러나 망산의 머리는 한결같이 남산 쪽으로 향하고 있다.
"망산의 절개가 변하지 않는 한 서라벌 처녀들의 순결도 변하지 않는다"라고
믿어온 서라벌의 딸 가진 부모들은 망산을 바라보며
한시름 덜고 살아온 것이다.........
정일근시인은 남산을 이렇게 노래했다.
‘마음이 길을 만드네
그리움의 마음 없다면 누가 길을 만들고
그 길 지도 위에 새겨 놓으리
보름달 뜨는 저녁 마음의 눈도 함께 떠
경주 남산 냉골 암봉 바윗길 따라
돌 속에 숨은 내 사랑 찾아가노라면
산이 사람들에게 풀어놓은 실타래 같은 길은
달빛 아니라도 환한 길 눈을 감고서도 찾아갈 수 있는 길
사랑아, 너는 어디에 숨어 나를 부르는지
마음이 앞서서 길을 만드네
그 길 따라 내가 가네.’(정일근의 ‘길-경주 남산’)
사서에 따르면 신라인들에게는 위기 때마다
중요한 국사를 논했던 네 곳의 성지가 있었는데
사영지(四靈地)로 불렸던 이곳은 서라벌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위치한 청송산·피전·남산·금강산이다.
“삼국유사”는 이곳이 신성한 땅이어서 이곳에서 논의하면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고 적고 있으며.....
역사기록에는 신라가 번성했을 때 서라벌 성 안에는
17만호나 되는 기와집들이 처마를 마주하면서
사방 55리에 걸쳐 차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남산 동쪽 산기슭에 피리촌이 있고
그 마을에 절이 있어 피리사(避里寺)라 했다.
그 절에 이상한 중이 있었는데… 아미타불을 염하여
그 소리가 성 안에까지 들려 3백60방 17만호에서
그 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라고도 전해온다...
이는 7세기 원효(元曉)의 불교 대중화 이후 염불만으로도 왕생할 수 있다는
정토신앙이 신라사회에 지배적으로 퍼져 있었던 것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남산의 주봉인 금오산(468m)과 고위산(494m)에서 흘러내린
40여개의 남산 골골마다에는 특히 기암괴석이 가득하다.
남산은 남북으로 8km, 동서로 4km에 걸쳐 길게 늘어서 동서로 평야를 끼고 있다.
남산에서 내려다보는 왕도는 오르는 이면
너나 할 것 없이 저절로 감탄을 토해내게 할 만큼 신비스럽다.
멀리서 바라보는 남산은 두루뭉수리하지만 실제 그 산세는 험한 편이다.
사람들은 서남산의 골짜기는 골이 깊어 위압감을 주지만
동남산은 골이 얕아 온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막상 남산의 품에 일단 안겨보면
누구나 깊고 그윽한 자비심에 사로잡힌니다....
남은 절터가 1백12군데, 이곳에서 발견된 불상만 81구에 달한다.
남산 불적(佛跡)의 백미에 해당하는 마애불(磨崖佛)은 무려 52구나 되고,
입체불상이 29구, 온전하지 않지만 석탑도 61개가 남아 있다.
전체 불적이 4백20여개, 문화재로 지정된 유물·유적만도 22점에 달한다.
땅속에 묻혔거나 남산을 떠난 것과 합친다면 만불만탑의 정토세계가 펼쳐질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독립된 지역에 불상과 탑이 집중된 경우는 경주 남산이 유일한 곳이라합니다.
“삼국유사”는 남산에 대해
"그 산에 ‘절(사찰)이 별처럼 많고, 탑들은 줄지은 기러기만큼 많았다"고 적고 있을 정도다.
이처럼 아주 성스러운 곳으로
산을 오르다보면 부처님이 계시는 도솔천인 듯 생각을 하게 합니다..
@@@@@@@@@@@@@@@@@@@@@@@@@@
이번에 답사한 코스는
삼릉 → 냉골 석조여래좌상 → 마애관음입상 →
선각육존불 → 마애여래좌상 → 석조여래좌상 → 선각마애여래상 →
상선암마애대좌불 → 금오산 정상 →
용장사지 삼층석탑 → 마애여래좌상 → 삼륜대좌불 → 용장사터 →
배리 삼존불
경주에 도착하여 남산 진입로에는 벚나무가 양옆으로
벚꽃 꽃망울이 이제막 맺혀지고 있었습니다...
남산의 삼릉에 도착하니 12시쯤 입구 잔뒤밭에서 요기를 마치고
산에 오르니 진달래가 수줍은 듯 발그른 얼굴로 반가워하며 손을 흔들어 줍니다~~
삼릉주위와 오르는길에는 소나무숲이 울창합니다
중년쯤 되 보이는 소나무들은 제각기 제 성품대로 사방팔방으로 기울어지며
빼곳이 서있다...
※삼릉(拜里三陵) 史蹟 219 號
이 계곡 북쪽 언덕에는 많은 무덤들이 줄지어 있었던 흔적이 있는데
지금은 세 개의 릉만 남아 있어 삼릉(三陵)이라 부르고 있다.
제일 앞의 무덤은 신라 54대 경명왕릉(景明王 : 917 ~ 924)이라 전해 오는 릉이고
가운데 것이 53대 신덕왕릉(神德王 : 912 ~ 917)이라 전해 오는 릉이다.
맨 뒤의 것은 8대 아달라왕릉(阿達羅王 : 154 ~ 184)이라 전해 오고 있는데,
초기 임금님의 릉이 왜 이 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무덤들은 원래 봉분 둘레에 호석(護石)을 쌓고 큰 자연암석(自然岩石)을 둘러놓은
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과 같은 양식이었는데
지금은 다 묻혀 원형토분(圓形土墳)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앞에 있는 경명왕릉에서는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본래 자연이 우리에게 친근함은 그 자연 스러움에 있다^^...
칡넝쿨이 소나무를 타고 못살 게 굴어도
칡넝쿨이 나쁘다 하지 않는다...
그것은 걔 성품이 원래 그러함을 알기 때문이다....
시원한 봄바람에 시원한 솔향을 맡으며 얼마를 오르니
둥글둥글한 돌들이 있는 맑은 계곡이 나오고
계곡을따라 얼마를 더 오르니
냉골 석조여래좌상이 나왔다.
아! 목없는 부처님을 뵈오니 가슴이 아련해지며...
누가 이랬을까하는 마음부터 앞섰지만
우리나라 조선조등 역사속에 불교를 박해한 때에 그러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보며......_()_
※ 냉골 석조여래좌상
삼릉에서 개울을 따라 계곡으로 약 300m쯤 가면 길 옆 바위 위에
머리 없는 석불좌상이 앉아 계신다.
현재 높이가 1.6m되고 무릎 너비가 1.56m되는 큰 좌불이다.
근년까지도 계곡에 묻혀 있던 것을 파내어 지금 장소에 앉혀 놓은 것이기 때문에
마멸이 없고 옷주름들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다만 머리가 없어지고 두 무릎이 파괴되어 손 모양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편안히 앉은 자세며 기백이 넘치는 가슴이며 넓은 어깨는
8세기 중엽 신라 전성기의 위풍당당한 불상이다.
특히 왼쪽 어깨에서 가사 끈을 매듭지어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영총 수실은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우리 나라의 특색 있는 장식품인 매듭은 먼 신라 때부터 전해 왔다는 것을
이 가사 끈이 말해 주고 있다.
부처님의 아래옷을 동여맨 끈도 예쁜 매듭으로 매어져 있다.
이 불상은 용장사 삼륜대좌불처럼 가사 끈이 있기 때문에
존명을 정하기 어려우나 여래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왼쪽위로 30미터쯤에는 마애관음입상이
바위들 사이에 있는데
그 입상 자체가 자연과 묘한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보니
신라불교의 조화로움을 보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관세음보살...
시공을 초월한 신라의 불심을 느끼며....._()_
※마애관음입상(지방유형문화재 19호)
머리 없는 여래상에서 북쪽 산등성이를 쳐다보면
뾰죽한 기둥바위들이 높고 낮게 솟아 있는데
그 중 한 바위에 빙그레 미소를 머금고 하계를 내려다보고 있는
관세음보살입상이 새겨져 있다.
살결이 풍만한 얼굴은 미소를 머금었고 오른손은 설법인을 하고,
머리에 쓴 보관에는 화불을 배치하여 관세음보살임을 표시하였는데
목걸이와 가사를 동여맨 끈은 나비날개 처럼 매듭을 짓고
그 자락이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발가락 끝에까지 피가 도는 듯 섬세하게 조각된 이 불상은
따스한 촉감을 일으키는 복련 위에 서 계신다.
얼마쯤 계곡을따라 위로 올라가니
넓은 바위면에 선으로 부처님을 새긴 선각 육존불이 보였습니다..
아름다운 선율로 새겨진 부처님앞에
시공을 초월하여 전하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의
부처님의 진리에 합장하고 ..._()_
옆으로 해서 위로 오르는데 진영이가 부처님선각쪽으로 빗물이 흐르지 않게
선각한곳을 가르켜 주어서 보니 과연 그러한지라..
부처님을 향한 세심한 신라인의 마음이 전해 오는 듯 하였습니다...
※.선각육존불(지방유형문화재 21호.)
동쪽 바위 면에 설법하고 있는 석가모니 삼존불을 새기고,
서쪽 바위 면에 아미타 삼존불을 새겨, 현생과 내생을 나타내었다.
아미타삼존불은 좌우에 보살이 두 손에 꽃을 받쳐들고,
부처님은 죽은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오시는 내세아미타여래이다
선각 육존불위쪽 널직한 바위에서 한참 앉았다가
다시금 위로 걸음을 옮기니...
산 중턱쯤에 마애여래좌상이 큰 바위면 가운데에 나타남니다...
이도 선각으로 되어있습니다....
한참을 ......_()_
오르는 곳곳 부처님이 계시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느듯 부처님을 뵙는 설래임이
생겨남니다...
※.마애여래좌상(지방유형문화재 159호.)
선각육존불에서 등성이로 계속 200m쯤 올라가면
높이와 너비가 각각 10m쯤 되는 넓은 절벽바위가 서향으로 서 있다.
그 암벽 중앙에 지름 2.5m쯤 되는 연꽃 위에
설법인을 표시하고 앉아 계신 여래상이 있다.
몸체는 모두 선각으로 나타내었는데 얼굴만은 깍아 내어 돋을새김으로 표현하였다.
두 눈썹과 눈은 아주 가깝고 코는 길고 입술은 두텁고 커서
균형 잡힌 얼굴이라 할 수 없으나 소박한 위엄이 있다.
옆에는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다.
중요한 선은 굵게 그었고 옷주름 같은 것은 가는 선으로 변화를 주었다.
상 전체에서 재주를 부리지 않는 소박한 느낌을 느끼게 되는데,
남산 부처님은 바위 속에 숨어 계시다가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실 때는
언제나 누추한 차림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을 깊이 신앙하고 있었다.
이 마애불은 남산에서 가장 늦은 시기인 고려초기 즉 10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옆으로 조금 이동해 가니
조금 아래쪽으로 부처님의 앉은 석조여래좌상이 보이는데
이번에는 온전한 좌상인 것 같아 걸음을 더 재촉하였습니다..
부처님 앞에서 합장하며 뵈오니.._()_
얼굴 코밑으로는 형상이 일부 훼손되어 시멘트로 그 형상을
만들었지만 보기에 좋지 않아 이런 역사적 보물은
신라 예술성에 버금가는 실력으로 하였으면하는 아쉬운이 남았습니다..
※.석조여래좌상(보물 666호.)
냉골 골짜기 옆 솔숲에 많은 바위무리가 있고,
그 가운데 순백 화강암으로 조성된 여래상이 화려한 연화대석 위에 앉아 계신다.
연화대좌는 투박하게 8각으로 깍은 하대석과 면마다
안상을 새긴 중대석을 놓고 중대석위에 얹혀 있다.
안상이란 귀인들이 앉는 평상을 말하는 것이니 중대석 위는 절대로 존엄한 세계라는 뜻이다.
이렇게 존귀한 평상 위에 보상화로 장식된 화려한 둥근 연꽃송이를 얹어 놓았으니
이 연꽃은 수미산 위에 핀 하늘의 꽃송이인 것이다.
불상의 광배의 안쪽에는 부드러운 넝쿨무늬를 새기고
바깥쪽은 힘있게 활활 타오르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윗 부분이 조금 깨진 채로 불상 후면에 세워졌으나
1972년 겨울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 산산조각나 버렸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제 옆으로 계곡을 따라 오라가는데
진영이가 계곡위 바위를 가리키며 보라고 하기에
얼굴을 들어보니 높은 바위위에 머리부분만 보이는 선각마애여래상이 있었다..
※.선각마애여래상
석조여래좌상의 옆 계곡 30여m의 바위 절벽면에 머리 부분만 선각으로 새긴 불상이 있다.
이 불상은 바위 속에서 숨어있다가 살며시 그림자를 드러내 반겨 주는 듯한 모습이다.
상선암에 이르니많은 등산객들이 절의 자판기커피도 마시고
약수로 목도 축이며 쉬고 있었다...
상선암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_()_
우리는 위로 향했다..
이번에는 아주 큰 바위에 마애대좌불이 보였다..
여지껏 오르며 보았던중 제일 큰 부처님으로
자비하신 모습으로 심심미묘법문을 설하시고 계셨다..
이곳은 앞쪽으로는 시멘트로 넓혀놓아서
신발을벗고 참배하게끔 되어있었다..
그래서 신발벗고 삼배.._()_
이곳에서 시원스레 펼쳐진 앞을 멀리 둘러보니
그 시원함에 모든걸 잊고 만다^^
앉아서 사진한 장 클릭!!
※.상선암 마애대좌불(지방유형문화재 158호.)
거대한 자연 암반의 벽면에 6m 높이로 양각된
이 여래좌상은 남산에서 두 번째로 큰 불상이며,
얼굴의 앞면과 귀부분 까지는 원만하게 새겨진 반면,
머리 뒷부분은 투박하게 바위를 쪼아 내었다.
불상의 몸부분은 선이 거칠고 억세게 조각하였고,
좌대 부분은 희미하게 사라져 버린 듯한 모습이다.
이러한 조각 수법은 불교가 바위신앙과 습합하여 바위 속에서
부처님이 나오시는 순간을 표현하였다고 생각된다.
불상의 조각연대는 통일신라 하대로 추정된다
이어 정상갈래길에서 상사암이 있다는 왼쪽길은 다음에 들리기로 하고
우리는 오른쪽으로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산능선을 타고 얼마를 가니
금오산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은 널찍한 평지로 되어있었다...
※.금오산 정상
해발 468M로서 이곳에서 냉골, 포석계,
지바위골, 비파골, 약수골 등의 분수령이 된다.
국가 지정 문화재이다
정상에서 지도를보며 우리는 용장골을 가기전에
정상 아래쪽으로 600미터쯤에
약수골 마애여래대불입상을 보고 가기로 하고
아래로 향하는데..한참을 내려간다...
두시간 가까이 쉬엄쉬엄 산을 탔는데 아래로 향하니
다시 올라올일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부처님께 이르는길은 험난한길도 있다고 생각하며
아래로 향했다...
한참을 내려가니 묘가 보이는데 안내 표지가 없다면 찾지못할
작은길이 묘옆으로 나있다..
대나무잎 사이로 한사람지나갈정도의 길이다..
여기서 조금더 옆으로 돌아가니 약수골 마애여래대불입상이
나타남니다.. _()_
이곳도 규모는 엄청 큰데 부처님 머리가 없엇습니다...
※.약수골 마애여래대불입상(경북 유형문화재 제114호)
남산에 있는 많은 마애불 가운데 제일 규모가 큰 것으로
높이 8.6m, 너비 4m정도이다.
머리를 다른 돌로 조각해서 얹게 만든 구조인데 없어졌다.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흘러내린 옷주름이
양쪽 팔에 걸쳐져 수직으로 내려오는 옷주름과 직선,
곡선의 대조를 이루어 더욱 아름답다.
다시 위로 올라가서 우리는 용장골로 향했다...
용장골로 향하는 길에는 산불이 나서
나무들을 새로심었는데....
한순간의 방심이 얼마나 큰 화가 되는지 느끼게 된다...
차가 다닐정도의 널찍한 길을 따라 가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며 김밥도 먹고...
에너지를 재충전^^하여 용장골로 향했다
큰길을따라 아래로 얼마를 가니 갈래길에서
용장골임을 알리는 표지판이있었다...
용장골로 능선을 타고
내려가는데 곳곳이 아름다운 소나무며 바위가 있었다
얼마를 내려가니 용장사지 삼층석탑이
나왔는데 규모가 아주 작은 탑 이려니했는데....
의외로 내 생각보다 크기가 컸다!
진영이는 여기가 그렇게 보고싶었던 탑이라며 좋아했다^^
우리는 탑앞에서 조용히 두손을 합장하며 한참을 서있었다.._()_
그리고 기념찰영....
※.용장사지 삼층석탑(보물 186호.)
용장사지 동편 능선 위에 자리하여 이 계곡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이 탑은 현재 3층 옥개석까지 남아 있는데 높이가 4.5m이다.
높이 200m가량 되는 산의 바위를 하층기단으로 삼은 점이
신라인의 자연과의 조화 방법을 잘 나타내 준다.
아마도 수미산 꼭대기의 도리천에 탑을 세운 듯 하다.
바위에 6Cm정도 되는 괴임을 2단으로 마련하고
기단의 한 면은 1석으로 나머지 3면은 2매의 석재로 결구 시켰다. 탱주가 1주이다.
위에는 옥신괴임이 2단 마련되었고 2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으며, 갑석정연이 있다.
옥신과 옥개석은 각각 1매의 석재로 되어 있고,
2층 옥신은 1층에 비해 체감 효과를 크게 주어 전체적인 안정감을 꾀했다.
옥개받침은 모두 4단으로 되어 있고 옥개석의 상면에는 옥신괴임이 2단씩 마련되어 있다.
상륜부는 모두 유실되어 없고 삼층 옥개석 가운데에 찰주를 세웠던 구멍이 남아 있다.
이 탑은 1922년에 도괴 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는데
2층 옥신 상부에 방형사리공이 있었다 한다.
신라하대인 9세기 이후 작품으로 보아진다.
여기서 아래로 조금더 내려가니
마애여래좌상과 삼륜대좌불이 한번에 나온다
마애 여래좌상옆 바위틈에서는 작은 진달래꽃이
부처님 옆이라 좋은 듯 한들한들 몸을 흔들며 미소를 띄운다.
삼륜 대좌불은 세 개의 대위에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데
이곳도 얼굴부분은 훼손되어있었다...
이런 둥근 탑처럼 세대가 아래에 있고 그위에 부처님이 계시는 것은
처음 보았다....._()_
※.마애여래좌상(보물 913호.)
용장사지 삼륜대좌불 뒷편 동쪽으로 높이 5.5m, 폭 3.6m 가량 되는
암면이 남향을 하고 있고 그 바위면에 고운 연꽃 위에
결가부좌하고 항마촉지인을 한 여래상이 있다.
이 마애불은 손상이 거이 없이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얇게 돋을새김으로 되어 있는데
대좌의 연꽃은 정면 꽃잎은 비교적 크게 나타내고
양 가장자리로 가면서 차츰차츰 작게 하여 끝에서는 구름처럼 사라지도록 하였다.
불상은 풍만하고 건장한 위엄을 느끼게 하고
결가부좌로 앉은 두 무릎과 넓은 두 어깨는 당당하다.
상호는 머리 깊이를 반분한 자리에 눈썹이 길게 그어졌고
양눈썹에 이어 아래로 뻗어 내린 예리한 콧등은 얼굴길이의
⅓쯤에서 고운 코를 형성하였다.
굳게 다문 입술은 양가에 힘을 주어 긴장된 표정인데 풍성한 두뺨과
군살어린 턱의 부드러움은 자비롭기 그지없다.
육계는 얼굴과 조화롭게 덩실 솟아있다.
옷자락은 속이 다 비칠 것 같은 얇은 느낌으로 잘게 주름을 잡아 놓고 있다.
두광은 무늬 없이 두겹의 원으로 표현되었고 신광 역시 마찬가지이다.
신광 좌측에는 명문이 3행으로 10여자 있으나 판독이 불가능하다.
9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삼륜대좌불(보물 187호.)
용장사지의 동쪽 등성이에 우리 나라에서 유래가 없는
삼륜의 대좌에 머리가 없는 좌불이 얹혀있는 석불좌상이 있다.
현재는 머리가 없어져서 존명을 알 수 없는데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지대석은 자연석을 윗면만 고르게 가공하여 쓰고 있는데
지대석이자 곧 기단으로 보여진다.
높이 1m 남짓한 이 기단 위에 둥글게 다듬은 북모양의 중대괴임을 얹고
그 위에 쟁반모양의 둥근 반석을 놓았고 다시 그 위에 중대석과 반석을 놓았고
세 번째의 중대괴임을 결구시킨 후 앙련의 둥근 반석대좌를 마련한 후
그 위에 화려한 연꽃방석 위에 결가부좌로 앉은 불상을 모셔 놓았다.
불상의 높이는 연꽃방석 밑에서 목까지가 141Cm이고 대좌의 총 높이는 2m에 달한다.
불상은 결가부좌로 앉고 오른손은 선정인을
왼손은 무릎 위에 얹은 인상을 취하고 있는데
양어깨를 덮고 흘러내린 가사깃 사이엔 승기지가 비스듬히 가슴을 가리고
매듭이 맵시 있게 조각되어 있다.
또 왼쪽 어깨에 드리워진 가사끈의 수실은 이 불상을 승상이라고
자주 거론하게 만든 이유 중의 하나이다.
흘러내린 가사의 자락들은 물결처럼 펄럭이며 무릎을 덮고 흘러내려
상현좌를 이루고 있는 것도 특이하다.
삼국유사의 賢瑜伽, 海華嚴 조에 의하면,
옛날 용장사에 유가종의 대덕이신 대현스님이 계셨는데,
그 절에는 미륵장륙석상이 있어 대현스님이 그 미륵부처님을 기도하면서 돌면,
미륵부처님 또한 대현스님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불상을 삼국유사의 이야기처럼 미륵불이라 한다면
기단석 위가 사왕천이 되고 처음의 둥근 반석 위는 도리천,
두 번째 반석 위는 야마천이 되며 마지막의 연화 원반대좌는
미륵보살이 계시는 도솔천이 된다.
아래로 더 내려가며 바위와 소나무를보고
참 이곳은 도닦기?에 좋았겟다는 이야기도 했다^^
대나무가 둘러싸인 용장사터에 가보니 묘가 두 개있었다..
명당자리...........!?
옛 용장사터를 둘러보니 세월이 무상함을 실감케 한다..._()_
※.용장사
용장골 어귀에 있는 마을 이름이 용장리이고 계곡 이름도 용장골이니
모두가 용장사에서 기인된 이름들이다.
용장사는 이 계곡의 주인격일 뿐 아니라 남산 전역에서도 손꼽는 대가람이었다.
용장골의 남쪽면은 수리산을 정상으로 하여 흘러내린
여러 갈래의 계곡들로 되었는데 열반골의 기암과 괴암들이며
은적암 부근의 삼각봉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데 비해
금오산에서 뻗어내린 여러 산맥들로 구성된 북쪽면에는
이렇다 할 잘생긴 봉우리들이 별로 없다.
하지만 용장사가 자리잡은 그 봉우리만이 거대한 바위들로 첩첩이 솟아 있다.
용장사는 어느 시대에 폐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초기 설잠스님(김시습)이 이곳에 오래 머물고 있으면서
금오신화를 썼다고 하니 조선초기까지는 절이 있었고,
지금은 절터 축대들과 기와 조각들만이 폐허를 뒹굴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용장사 맑은 계곡을따라 내려오며
부처님을 뵈온 설래임 그대로 가슴은 뛰고 있었다..
돌아볼곳은 너무 많지만 다음을 생각하며..
길을 내려 하산했다...
그리고 출발지점으로 돌아와서 조금 쉬고 삼릉 바로옆의 배리삼존불을
뵈러갔다...
온화한 배리삼존불은 이를 보존하기위해 위에 지붕을 하여
이제 비바람은 피할 수 있게 모셔져 있었다..._()_
※.배리 삼존불(보물 63호.)
이 세 석불은 이곳 남산 기슭에 흩어져 누어 있던 것을
1923년에 지금의 자리에 모아서 세운 것이다.
본존불은 높이 2.66m, 좌우의 보살상은 높이 2.3m이다.
특히 조각 솜씨가 뛰어나 다정한 얼굴과 몸 등이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면서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종교적인 신비가 풍기고 있다.
풍만한 사각형의 얼굴, 둥근 눈썹, 아래로 뜬 눈, 다문 입, 깊이 파인 보조개,
살찐 뺨 등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을 간직한 이 석불들은
7세기경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적인 것이다.
간략히 남산답사 후기를 적지만,
부처님을 찾아 나선 걸음걸음은 너무나 뜻깊었다 생각된다.
이제 남산에온 발자취는 우리둘의 가슴속에서는
영원히 살아 숨쉴 것임니다......!!
아래는 남산안내 사이트중 좋은곳이라 생각되는곳들입니다.
경주남산연구소: http://www.kjnamsan.org/z/nam3/nam3.html
신라 체험나라 : http://www.dabsa.co.kr/silllaroad/nam_san_area.htm
다시찾는 경주여행: http://www.newcyberspace.com/lch/html/lch002.htm
경주남산 불상이미지: http://home.tinc.co.kr/~amita/namsan/namsa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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