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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공학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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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수 작성일13-06-21 12:20 조회4,2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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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진 wrote:
>안녕하십니까?
>
>저는 도시지역과학부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 학생입니다.
>
>인사동처럼 한국적인 전통거리는 우리나라에 어떤 것이 있고
>
>전통거리를 한마디로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까요?
>
>상업적인 면도 많이 띄는 것 같고 또 인사동 같은 경우에는 우리나라 문화가
>
>특별히 다 표현 되지 않고 있는것 같은데말입니다...
>
>그리고 그 거리의 가치는 무엇인가요?
>
>단지 문화상품을 선전하고 파는 공간이기만 할까요?
>
>그리고 그 거리의 필요성은 무엇인지 알고싶습니다.
>
>외국인의 관광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공간인지?
>
>
>
>한국적인 전통거리과 그 공간에 대해서 꼭 알려주세요....^^
>
>그리고 그에 대한 참고도서가 있는지도 좀 알고 싶습니다.






        ^^^^^^^  답변입니다.


  김재문 교수님께서 논문 준비로 아주 바뻐시므로 제가

  대신 아는 대로 적고, 여러 자료를 검색하여 붙입니다.


      난  박찬진님의 글을 읽고 조선시대의 관부위치도를

      인터넷으로 찾아 볼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종로에 가면 사간원이 있던 자리, 육의전이 있던 자리를

      알려주고 있는 표지석을 잘 발견할수 있고, 조선일보의

      이 규태 논설위원은 심지어 한명회의 집터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답니다..


        그런데 지금도 청진동 해장국 골목, 약종상 거리, 비석거리

        삼각지 아구탕골목, 황학동 도깨비 시장 처럼 같은 품목이

        집적되어 있어 그 효과를 증대시키는 많은 골목, 거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육의전이나 칠패골목, 주막, 장터, 무당골 등이

            현대의 도시공학에서도 충분히 고찰할만한 것입니다..



            참고 사이트 안내


              http://www.seeltus.com


              http://www.zip.org


              http://www.zangter.co.kr

              http://www.culturefactory.co.kr




     

     


 운영2  조회: 1    (0)    (0) 

 전통거리
글 작성 시각 : 2003.05.05 22:33:55 


http://www.donggu.busan.kr/contents/sanghai/sangh_02.html


우리 궁궐의 모든 것, 궁궐 지킴이 사이트
http://www.palace.or.kr
이곳은 우리 궁궐을 지키는 사람들, 일명 궁궐 지킴이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사이트다.

우리 궁궐 지킴이 시민활동은 서울의 주요 궁을 찾는 내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유래와 역사 등을 설명해주는 자원봉사 활동이다. 이는 우리의 문화유산인 고궁(古宮)을 보다 친근하게 배울 수 있도록 하는데 그 취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주변환경, 관람질서 등에 대한 집중 모니터링을 통해 궁궐 보호활동과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으며 궁에 대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도 준비하고 있다. 우리 궁궐 지킴이 교육과정을 거치면 궁궐 지킴이로서 자원봉사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이 밖에도 경회루가 멋진 경복궁, 돈화문이 있는 창덕궁, 춘당지가 있는 창경궁,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있는 종묘, 돌담길로 유명한 덕수궁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어 고궁을 방문하기 전에 들러 본다면 깊이 있는 관람에 도움을 줄 것이다. 결혼 성수기인 봄이나 가을철은 야외 촬영 등으로 조용한 관람을 방해받기 쉽다. 비교적 겨울이나 여름철의 한산함을 이용하여 한번쯤 가까운 궁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

복잡한 시내에서 산책을 하며 명상에 잠길 수 있는 한가로운 쉼터 중에 고궁(古宮)만한 곳은 없을 것이다. 고층 빌딩 사이에서도 궁은 단아한 처마 밑에 태고적 시간들을 간직한 채 방문객들에게 역사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항상 꿋꿋하게 서 있을 것이다.



한국민속과 전통문화
http://www.koreanfolk.org

사람들은 시시각각 시대에 맞는 문화적 관습을 새롭게 만들거나 기존의 관습을 변형하거나 혹은 그대로 이어나가기도 한다. 잘 맞고 좋아 보이면 그대로 남겨지고, 거추장스럽게 여겨지면 수선되어지고, 촌스럽거나 낡게 여겨지면 재활용 쓰레기통에 가차없이 버려지고 마는 외투처럼 말이다.

재활용 쓰레기통에 버려진 옷들은 재활용 수거반의 손을 거쳐 새로운 누군가에게 입혀질 수도 있다. 무관심 속에 버려진 우리 민속 문화도 반드시 그 누군가가 수거해 주길 바란다.


이 사이트는 우리의 민속과 전통문화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면서, 사이버 공간을 통해 쉽게 실제적인 체험 학습을 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우리 민족 고유의 의식주 문화, 생업도구, 세시풍속, 인간의례, 민속신앙, 민속놀이, 구비문학, 민속극, 민속무용 등 민속문화 전반에 걸친 다양한 정보들이 일목요연하게 수록되어 있으며, 각 주제별로 체계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다. 이 밖에도 민속문화 관련 용어사전, 참고문헌, 민속 박물관 및 민속토탈 전문관련 사이트 등 벗겨낼수록 알찬 정보가 가득한 사이트다.




인사동 사이트
http://www.insadong.or.kr

네모처럼 구획지어진 삶 속에서 가끔씩 인사동의 냄새가 그리울 때가 있다. 인사동의 어느 한 곳이라도 푸근한 향냄새가 나지 않는 곳은 없다. 최근의 패스트 푸드점이나 커피 전문점이 곳곳에 들어서 경관이 망가뜨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인사동은 도심의 3일장, 5일장 같은 재미난 전통거리다.


이 사이트는 인사동 전통문화 보존회의 사이트로 서울, 종로, 인사동의 유래와 상점을 소개하고, 운현궁, 박영효 생가, 이율곡 선생 집터, 천도교 중앙 교당 등 답사해 볼 만한 인사동 주변의 대표 유적지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인사동 일대의 편의시설, 인사동 지도, 행사 정보도 얻을 수 있다.


전통문화지구를 보존·계승·발전시킴과 동시에 세계적 문화관광 명소로 기반을 구축하여 인류 문화 발전에 공헌함을 목적으로 1987년에 설립된 단체가 바로 인사동 전통문화 보존회다. 종로구 인사동, 관훈동, 공평동, 견지동, 낙원동, 경운동, 종로2가동 일대는 보존회 관할 구역에 속하는 고서(古書)같은 거리다. 생각보다 넓고 볼거리가 풍성한 인사동을 다 보려면 몇 일은 족히 걸린다. 아주 맛있는 간식거리를 조금씩 아껴 먹는 심정으로 시간날 때마다 들러 전통문화를 몸소 느껴보자.



http://www.koreahistory.pe.kr

http://www.koreadb.net

http://www.koreafolk.org

http://www.kfr.or.kr

우리 옛시장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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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모


사람과 사람,공간과 공간을 한데 묶는 꿈

전통적인 우리 시장의 모습은 농촌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정기 시장에서 찾을 수 있다. 정기시장은 지역 사회를 공간적으로, 그리고 시간으로 한데묶는다.여기서'공간적'이라는 말은 지리적인 거리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거리와 인구의 수까지를 포함한다.시간적으로는 개시일(開示日), 즉 장날이 지정되어 있으므로 능률적으로 판매자와 구매자를 한 장소로 모은다.

전통 사회의 시장은 분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개개의 촌락들은 이와 같은 원리를 통해 서로 연결시켜 전체 사회와 닿게 하는 역활을 해 왔다.또한 시장은 그 시대 그 지역 주민의 생활 실태를 반영한다.그들이 평소에 무엇을 먹고 입는지,생활속에서 어떠한 물건들을 사용하는지는 시장에 가보면 알수있다. 농민들은 꼭 사거나 팔 물건이 없도라도 구경삼아 시장에 나와 본다. 이것이 농촌 시장의 특징이다. 그래서 '남이 장에 간다고 하니 씨오쟁이 짊어지고 따라간다.'라는 속담도 있다.

평소에는 조용하던 농촌의 마을도 장날이 되면 활기를 띤다. 장터에서 이르는길은 손이나 어賁,등 머리 위에 곡식 자루,닭,계란,채소 등을 지니고 나오는 농민들로 북적거린다. 장에는 못 보던 새로운 물건이 있는가 하면,자주 못 만나는 친척을 만나 주막에 마주 앉아 막걸리 잔을 주고 받을 수도 있는 곳이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과 도시의 유행도 장터에 모인 사람들의 귀와 입을 통해 시골 구석까지 퍼져나간다.또한 시장은 자연스럽게 혼담이 오고갈 수 있는 곳이며 젊은 남녀들에게는 서로가 눈을 맞추어 눈을 맞추어 보는 사교의 장이다.또 아이들은 이곳에 와야 엿이되든 사탕이 되었든 사달라고 할수 있으므로 부모를 졸라 이곳으로 온다. 먹거리에 대한 기대는 어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장터 국수,장터 국밥,지금은 도시에 연쇄 음식점상호로도 쓰이는 이것들은 말만 들어도 매일 똑같은 밥과 반찬에 식상한 입맛을 새롭게 해준다.

시장의 왁자질껄함,이것은 장터 국수가 입맛에 새로운 것처럼 지루할 정도의 조용함에 익숙해 있던 농부의 귀를 흔들어 놓은 청량제이다.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해방감도 맛볼수가 있다.시장은 소음이 갖는 상징성이 한껏 드러내는 무대인 것이다.

장터에서 들을 수 있는 능청맞은 익살과 노랫가락,깡깡이 소리는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서민의 소박한 오럭이자 무대 예술이다.이들에 의해 장터는 어느덧 연희의 공간으로 바뀐다.이를 눈치 챈 상인들은 고객들을 더 많이 모을 속셈으로 아예 굿판을 벌인다.시장 개업식이라고 할 수 있는 난장,백중날 열리는 백중장 등은 장터가 민중의 놀이 마당임을 실감케하는 시장의 큰 행사들이다.

자루 속의 감자처럼 조직되지 않은 민중에게 시장은 자연스러운 집회처가 된다.민란의 불길이 시장에서부터 번지기 시작한 것도,일제의 총칼에 맞서 만세를 불렀던 것이 바로 이곳이었던 것도 시장이 갖는 이러한 특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시장이 주는 해방감이 있고 사람들도 많이 모여 있으니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불만을 행동으로 옮길수 있었고 독립을 외칠수 있는 용기가 솟았던 것이다.

시장에서는 경제적 교환이 행해졌음은 물론 이와 같이 사회적 교환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문화적 전통이 이어져 나갔다. 적어도 '시골장에서는 파는 사람이 곧 사는 사람이고 사는 사람이 곧 파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통용될 수 있을 때까지는 그러했다. 그러나 산업화된 현대사회의 농촌시장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없다. 왜냐 하면,거의 모 든 부분에서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농민은 원래 반상인(半商人)이었다. 빈손으로 시장에 나가는 농민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과거에는 그랬다.그러나 모든 것이 상품화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농민이 시장에 들고 갈 만한 품목은 자꾸 없어져 간다.아직 기계로는 만들 수 없는 채소 등 농산물이 있어 시장에 내다 팔기는 하나 과거에 비하면 저주 있는 일은 아니다.농민의 수공품 생산은 이미 도시의 공산품에 밀려 끊어진 지가 뗩다.농촌 시장의 도처에 도시 자본이 침투해 있다.이제 농촌 시장도 농민을 세계 자본주의 체계로 편입시키는 통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 시장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가 볼 만한곳은 여전히 농촌시장,즉 시골장뿐이다.시공장에서는 장날마다 꼭 만나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주로 순회 상인들로서 각자 자기 자리가 있어서 장이 설때마다 그 자리를 지킨다. 시장에는 이와 같은 행상인 말고도 이들을 따라 함께 이동하는 장수들이 있다. 신발을 수선 하는 신기료 장수,냄비,솥,쟁기 같은 각종 생필뿐이나 농기구를 고쳐 주는 수선공,이발사,점쟁이 등이 그들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풍각쟁이,악당,극당서커스단들도 순회 상인들을 따라 공연장을 옮겼다.

시골장에 가면 장날은 농민들의 날인 것이다. 농민들은 대개 20~30리 정도의 거리안에 사는 주민들이다. 이들은 물건을 구입할 헌금은 마련하기위해 자신들이 직접 생산한 상품들을 조금씩 들고 시장에 나오기도 하고,제사 지낼 때 필요한 제수를 장만하는 등 순전히 물건 구입을 목적으로 시장에 오기도 한다.시장에 나온 거의 모든 농민들은 장날만은 아마추어 상인이 된다. 또 단순히 장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도 있고,시장가까이 있는 읍사무소 조합에 들러 일을 볼 겸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

시골장은 해가 뜰 때 시작되어 해가 질 때 끝이 난다. 따라서 계절로 보면 겨울보다 여름이 개장 시간이 길다.또한 상황에 따라서도 달라서 대목장일 때가 보통때마다 길다.대목당은 철시인,즉 시장에 모인 사람들이 가장 많은 장으로 대시(大市)라고도 하며,일 년중에 추석 전 장과 설날 전이 이에 해당한다.


과거 시골장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은 당시 장시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장시를 돌아보니 촌촌에서 사람들이 모두 돈꾸러미를 차고 나갔다가 취하여서 붙들고 돌아온다."


또 1800년대 초에 우하영(禹夏永)이 역은 [천일록(千一錄)]에는 '장이 서면 길거리에 사람들이 줄을 잊는다.'라고 하였다.

규모가 작은 한 시골 정기 시장에 관하여 기술한 외국인 켐벨의 다음 글에서는 외국상품이 이미 침투한 개항기 이후 시골장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시장으로 가는 길을 장을 보러 가는 사람들의 즐거운 목소리로 활기를 띠었다.부녀 자들은 머리위에 참외,배 등의 과일을 담은 도기나 바구니를 이고 가고 있었다.황소나달구지에는 연료용 마른 나무가 실려가고,말은 곡물과 건어를 비롯한 여러 가지의 생산품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윗도리를 벗어 제쳐 반나체가 된 지게꾼은 내리누르는 무거운 짐 때문에 허리를 굽힌 채로 도기와 칼로 퍼서 만든 나무 그릇을 붙들에 맨 지게를 등에 지고 가고 있었다.그 당시는 마을의 큰 거리가 시장으로 되어 있었다.그 당시는 마을의 큰 거리가 시장으로 되어있었다.그리하여 이따금 사각형으로 넓혀지고 점포를 만들기 위해 짚으로 된 차양들이 재빨리 쳐지곤 하였다. 정기 시장에서는 토산품만 아니라 외국 삼품도 팔고 있었다.토산품은 주로 과일이었다.예를 들면 탐스러운 살구 등이다. 그리고 연어와 건어,잎담배,명석에 널려있거나 부대에 들어 있는 대맥, 여러 가지 품질의 쌀,콩과 수수,숯,무쇠 단지와 솥,면포와 섬우로 만든 직물,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광주리와 농,은 가락지 ,머리핀과 여러 가지 장신구,짚신과 대마로 만든 신,여러가지 여러 가지 모양의 갓과 기타 보잘것없는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외국삼품으로는 회색모직물,상등의 마포(麻布)수건,바늘 일제 성냥,베를린에서 온통에서 온 통에 튼 청색 물감과 병에 든 아니린 염료,싸구려 칼,세멘시의 씨로 만든과자,리본,끈,권련초와 니스 칠한 일제 담배 파이프,싸구려 비누와 맨체스터에서 만든 약간의 물품들이 있었다."


한국 중부의 한 정기 시장에 관한 이사벨 비숍여자의 기술도 캠벨의 그것과 유사하다.


'장날이 되면,언제나 단조로운 모습을 보이던 한국의 마을들은 온통 활기와 윤기를 띠게 되고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로 야단스럽다.이른 새벽부터 당국이 정기시장이 서도록 지정한 지점으로 가는 소로(小路)는 농민들로 메워진다.이들은 주로 닭,돼지,짚신,그리고 모자나 나무 주걱과 같은 자기들이 생산한 물건을 시장에서 팔거나 다른 물품과 교환하기 위해 장으로 가는 것이다.동시에 커다란 길에서는 상인들,정확히 말하면 무거운 짐을 진 짐꾼이나 소 잔등에 짐을 싣고 온 행사인들과 합류하게 된다.이들 행상인은 순서에 따라 일정 구역에 서는 모든 시장을 두루 돌아다니는 것이다.이들 중 소수의 사람만이 차양을 치고 주로 여러 가지 품질의 종이,그리고 견포(絹布0,견사(絹紗).허리띠로 사용되는 끈,용정향 단추,감은 견사 작은 가울,담배지갑,남자용 빗,바지끈,거울이 달린 상자 등을 판매한다.그러나 한국인 의 수요나 기호에 맞는 상품은 낮은 걸상이나 그저 맨땅 위의 거적때기에 진열되어 있다.이때 상인은 남의 집 앞을 사용하는 대가로 집주인에게 약간의 돈을 지불한다(정기 시장은 마을의 큰거리에 서게 된다.).걸상 위에 놓여 있는 물건들은 다음과 같다.

주먹 크기만한 알사탕(이것들 중 어떤한 것은 그 안에 참깨가 들어 있다),대량으로 팬매되는 감미 식품,여러가지 직물,즉 영국이나 일본산 모직물,마포,대마포(大麻布),적색 면직물, 한국산 희귀 견직물, 주로 정기 시장에서 대량으로 팔리는 아닐린염료, 그리고 샤프탄, 인디고와 형광 염료이다. 바로 그 걸상에는 또한 긴 담뱃대, 청소년층에 널리 보급되어 있는 일본제 궐련초, 가죽 가방, 일본제 성냥, 나무빗, 끝에 금.은실이 달려 있는 머리핀과 은전을 넣는 돈지갑 등이 진열되어 있다.

땅에 깔려 있는 거적때기 위에는 짚으로 만든 돗자리, 짚신과 노끈으로 만든 신, 규석 조잡하고 거친 한국산 견직물, 수요가 많은 말고삐용 줄,빗자루, 나막신, 흑색 유포, 그리고 짚.갈대.대나무로 만든 여러가지 형태의 갓이 진열되어 있다. 또 거기에는 한국산 철제 제품으로서 음식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단지, 제철(蹄鐵), 삽, 문고리, 못, 망치, 조선산 초근(草根)등이 있고 과일로는 크고 딱딱한 배, 밤, 그리고 땅콩, 생강 등이 놓여 있다."


1980년대 초에 발간된 책이긴 하지만 임병무의 "장날"에 나오는 청주의 목물전(木物廛)풍경에서도 과거 시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활처럼 휘어진 약전 골목 끝에서 고당 다리로 향하다가 왼쪽으로 꺾어들면 유서 깊은 목물전이 초췌한 모습을 드러낸다.......

동동주를 뜰 때 사용하는 용수, 알곡과 뉘를 고르는 키, 눈비를 쓸고 낙엽을 치우는 싸리비와 대나무비, 시루떡을 찔 때 없어서는 안 될 어레미와 가는 체, 대갓집 잔칫날 갖가지 전을 부쳐 두던 채반과 광주리, 조상의 차례를 지낼 때 쓰던 각종 제기, 이불 호청을 풀먹여 다듬던 방망이, 국수 만들 때 사용하던 홍두깨, 곡식을 찧던 돌 절구, 밥 푸는 나무 주걱, 봉당이나 마루를 쓸던 장목비(수수비), 농산물을 담아 두던 대가구, 사대부 집은 물론 일반 민가에서 사용하던 주방 기구인 조리와 도마, 흥부의 삼간 모옥에 얹혀 있던 뒤웅박, 농가에서는 안될 삼태기와 바소쿠리, 콩 타작할 때 후려 패는 도리깨, 자개상, 개다리 소반 등 민가에서 쓰던 갖가지 물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곳이 이곳이다."

지금의 시골장은 자본주의 싱품 경제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개항 이전의 시골장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바로 앞에서 본 것처럼 그 외형만은 여전히 과거의 모습을 담고있다.

그러나 도시의 시장은 외형마저 크게 변화되어 예전의 흔적을 찾기 힘들게 됐다. 그러면 시전이라 일컬어지던 과거의 도시 시장, 특히 서울 시전의 모습은 어떠하였는가.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에는 장을 보려는 사람들이 새벽에는 이현(梨峴,지금의 종로 4가 배오개)과 소의문(昭義門,서소문) 밖에 모이고 오후에 종가(종로)에 집결하는 서울 풍경이 나와 있다.러시아 대장성에서 펴낸 "한국지(韓國誌)"(1905년)에는 서울 시전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건물은 창고가 딸린 기다란 단층 시설로 창문이 아주 적다. 건물은 길기 때문에 크지 않은 어두운 방으로 나누어져 뒤칸들은 상품을 쌓아 두는 창고로 이용되었으며 앞칸 정면에서 상인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가 손님이 오면 어두운 방에서 물건을 꺼내 온다. 이러한 상점들은 한 종류의 상품만을, 즉 서화지나 제지품을 판매하고 있으나 대신 여러 가지 등급과 품질의 것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똑같은 어두운 작은 방들이 마주보게 되어 있으며 높고 두꺼운 벽으로 거리쪽이 가려진다. 안쪽으로 점포들이 이어진 각 줄 옆에는 툇마루를 놓아 여기에 상인들이 앉아서 상품의 일부를 손님에게 보이기 위해 진열해 놓는다. 손님들은 베란다 사이로 나 있는 좁은 마당 을 따라 오간다. 이들 점포의 옆은 문이 나 있는 벽으로 막혀 있다. 이것은 물건이 도난당하는 것을 막고 관리들의 물욕을 자극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만들어 진것으로 보인다."

또 이 책 에서는 우리가 흔히 구멍 가게라고 부르는 소규모 점포의 모습도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초가 건물들은 보통 앞뒤 두 칸으로 나뉘어 있는데 거리 쪽을 향하고 있는 앞칸은 겨울이나 여름이나 열어 놓아 팔 물건을 진열해 놓는다. 뒤칸 방은 상인과 그의 가족들이 살림하는 방이다. 상점이 이러한 모양으로 시설되어 있기때문에 특히 상품의 수요가 적은 겨울철에는 상점 주인은 보통 뒤칸방에 앉아 벽에 만들어 놓은 구멍을 통해 상점을 지킨다."

위의 견문기들을 통해 우리는 과거 전통 시장의 분위기를 대략이나마 느낄 수 있다.


정승모/ 국립민속박물관 연구원이며, 저서로는 '시장의 사회사'가 있다.

http://www.seeltus.com




장터는 어떤 기능을 수행할까?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거리의 장꾼들은 하나 둘 사라지고, 흥건하게 술이 취한 아저씨들도 지게를 지고 제각각 비틀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그러면 하루 종일 자신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던 장터에는 인적이 뚝 끊긴 채 쓰레기만 바람이 날렸다.

그러면 이러한 장터는 어떤 역할과 기능을 수행할까? 첫 번째로 장터는 물물 교환의 기능을 수행한다. 즉, 장터는 주변 지역 사람들과 잉여 농산물, 생활 필수품, 화폐 등을 서로 교환하는 장소로서, 사람들은 이 잉여 농산물을 팔아 자녀의 학비도 내고, 세금도 내며 필요한 생활 필수품을 산다. 반면, 도시의 상인들은 장터에 가서 농산물을 사 이를 다시 도시 사람들에게 판다. 이렇게 장터는 시골과 도시를 경제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연결해 주는 곳이며, 장터의 물물 교환 기능은 시골 사람들의 생산 의욕을 증대시켜 소득 향상에 기여하고, 상업화를 촉진시켜 지역 주민의 복지 향상에도 기여하게 된다.

장터의 두 번째 기능은 만남과 정보 교환의 기능이다. 장터를 통해 사람들은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던 이웃 마을의 친지를 만나 아낙네들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을 사 먹으며, 어른들은 대폿집에서 막걸리를 권하며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나눈다. 개똥이 아버지가 어떻게 되었다는 둥, 윗말 김주사(주사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의 별칭) 댁 막둥이가 양짓말 옥순이와 가깝다는 둥, 장사꾼이 콩 한 말 값을 너무 안 쳐줬다는 둥, 이렇듯 장터는 세상 인심과 각종 소식을 전하고 전해 듣는 정보 교환 및 수집, 홍보의 장이며, 나눔의 장소이다.

장터의 또 하나의 기능은 문화 교류의 기능이다. 장터는 시골의 농부들이 고된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 도시 상인이 가져온 공산품과 옷가지, 음식 등을 사고 먹으며 도시 문화를 흡수하고, 도시 상인들은 농촌 사람들의 구수하고 어눌한 말솜씨와 행동을 이해하는 장이 된다. 또한 입심 좋은 약장수의 마술과 각종 묘기들이 벌어지는 장터는 농촌 사람들에게 약간의 예술적 문화를 제공하며 생활의 활력을 얻게 해 주는 하나의 문화 예술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렇듯 시골 장터가 수행하는 이 모든 역할들은 중심지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물 교환의 중심지, 만남과 정보 교환의 중심지, 문화 교류의 중심지로서의 장터는 이웃 마을 간, 시골과 도시 간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정기 시장이 상설 시장으로 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골에서는 며칠에 한 번씩 장이 열리는데, 대체로 5일을 주기로 매 2일과 7일, 3일과 8일식으로 정기 시장이 열린다. 반면에 도시에는 매일 장이 열리는 상설 시장이 존재한다. 왜 시골에는 도시처럼 상설 시장이 열리지 않고 정기 시장이 열릴까?

그 이유는 시골 사람들 대부분이 농사일에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관계로 상거래 활동에 자주 참여할 수 없으며, 인구 밀도가 낮고 경제력이 약해 물품을 구매하려는 수요가 적어 상인들이 필요로 하는 최소 고객수(최소 요구치)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사일중에 짬을 내도록 하며, 시골 사람들의 구매 수요가 충분히 확보되도록 하기 위해 몇 일 간의 간격을 두고 정기 시장이 열리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정기 시장은 인구가 증가하고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상설화된다.

아래의 그림을 보면서 정기 시장이 상설 시장으로 변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A)는 정기 시장이 형성되지 않아 상인이 행상(떠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행위나 사람)을 하는 단계로, 한 곳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범위(물품의 최대 도달 범위, 물건을 구매하는 주민의 거주 범위)가 매우 좁다. 이는 물품에 대한 구매 수요자가 적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때문에 계속 다른 장소로 옮겨 다니며 물건을 팔아야만 필요한 최소 고객수를 확보할 수 있다. 즉, 한두 달 간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녀야만 충분한 수요자를 만나 물건을 많이 팔게 되는 것이다.

(B)는 (A) 단계보다 인구 밀도가 증가해 지역 간 물물 교환의 필요성이 생기면서 주 1회의 정기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도보 교통에 의존하는 상태라 한두 시간이 소요되는 반경 4k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여러개의 정기 시장이 형성된다. 이로 인해 상인들은 구태여 행상을 하지 않고도 시장에 앉아서 물건을 팔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충분한 구매 수요자가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에 날짜를 달리하여 열리는 이웃의 정기 시장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판매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행상의 단계보다 상인이 한 곳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범위(―으로 표시된 범위, 재화의 최대 도달 범위)는 넓어지고, 최소 생계 유지를 위해 확보해야 하는 최소 고객수는 보다 짧은 범위(…으로 표시된 범위, 최소 요구치의 확보 범위)에서 충족되는 것이다.

(C)는 이러한 변화가 계속되어 나타난 것이다. 즉, 교통이 발달하여 보다 먼 거리에서도 쉽게 물품을 구매하거나 판매할 수 있기 때문에 물품(재화)의 최대 도달 범위가 확대되고, 이로 인해 주변의 정기 시장이 통합되어 시장의 수가 줄어들게 된다. 또한, 인구 밀도의 증가와 경제 발달로 구매 수요가 계속 증가하여 상인이 필요로 하는 최소 고객수의 확보 범위가 계속 좁아지게 된다.

(D)에서는 교통이 보다 발달하여 기존의 여러 정기 시장의 재화(물품) 최대 도달 범위가 하나의 시장권에 포함되고, 보다 많은 구매 수요자가 확보되면서 매일 시장이 열릴 수 있게 되어 상설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우리 나라의 정기 시장은 어떻게 발달해 왔을까?


정기 시장이 언제부터 발달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원시 시대가 끝나고 물물 교환이 성행하면서 사람들이 빈번하게 왕래하는 지역에 부정기적으로 장이 열리다가 통일 신라 시대에 와서 정기 시장이 형성된 듯하다. 이러한 정기 시장의 장터를 옛날에는 장(場), 장시(場市), 향시(鄕市), 허시(墟市), 장문(場門), 시상(市上), 저자라고 불렀다.

조선 초기까지 정기 시장은 주로 수도에만 발달하고 지방에는 형성되지 못했다. 그러다 15세기 후반부터는 지방 각지에도 정기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명종 11년(1566) 과전법의 폐지로 지방 지주의 토지 겸병이 늘어나고, 지가의 상승으로 지주들이 많은 소작료를 곡물로 받을 수 있게 되자 이 곡물을 처리하는 장소로 정기 시장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조선 전기에는 정병(正兵, 16∼60세의 평민 남자들이 3인 1조의 군역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구성원 중 고향에서 생업에 종사하면서 정병이 된 1명에게 베로써 재정 지원을 하는 2명을 말함)으로 군역 의무를 이행하였는데, 이것이 후기에 들어와 군포로써 대신하게 하는 납포제(納布制)로 바뀌었고, 이와 더불어 농민층의 분화와 상인의 증가, 17세기 대동법의 실시, 금속 화폐의 유통와 조세의 금납화 등으로 화폐 유통이 크게 확대되고 상품 유통이 보다 촉진되어 정기 시장이 발달하게 되었다.

지방의 정기 시장은 전라도 지방에서부터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되었는데, 이는 집약적 농업 기술이 전라도 지방에 먼저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부 지방에서 시작된 장사가 전국적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농업 생산력이 향상됨에 따라 소농민들도 시장을 위한 상품 마련이 가능해졌고, 재난과 기근의 잦은 발생으로 물자의 교역이 요구되었으며, 과중한 세금과 군역을 피해 이농한 농민들이 상인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던 데에 기인한다.

조선 초에는 이렇게 발달한 정기 시장에 농지에서 이탈한 농민들이 몰려드는 것을 막으려고 조정에서 수시로 장시의 금지령을 내렸지만 그 추세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후 법제화된 정기 시장은 전국 각지에서 발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많은 정기 시장이 쇠퇴 일로에 있는데, 이는 교통이 발달하면서 시간 거리가 짧아졌기 때문이다. 즉, 과거에는 걸어서 한 시간이나 걸리던 10리 길을 오늘날에는 5분이면 갈 수 있고, 또 인근의 도시에도 짧은 시간에 다녀올 수 있게 되어 굳이 장날까지 기다렸다가 곡물을 팔거나 필요한 물건을 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또한 교통의 발달로 운송비가 줄어들어 상품 공급의 공간적 범위가 확대되고, 농촌 사회의 소득 증대로 구매력이 높아져 전보다 더 작은 범위에서도 상인들이 필요로 하는 최소 고객수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변화로 인해 정기 시장은 쇠퇴하거나 상설 시장으로 변하게 되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산업화ㆍ도시화로 인한 농촌 인구의 급격한 감소(이촌 향도)와 교통의 발달은 정기 시장의 쇠퇴를 가져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미래에는 운송 수단의 다변화와 통신의 발달로 아무리 먼 거리에서도 시장을 거치지 않고 쉽게 직거래로 상품을 구매하거나 판매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시장은 존재 자체가 불투명해지고 있다.

[지리교사 모임 '지평', "지리로 보는 세상"에서]

http://user.chollian.net/~gos5410/readdf.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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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인식(歷史認識)과 선비정신
> 역사를 보는 시각에는 여려가지가 있겠지만, 제나라의 역사를 비하(卑下)하고 소흘히 하는 지식층을 형성하고 있으면 그 민족의 저력은 절대로 드러나지 않는다.우리민족은 역사를 소중히 했다.다만 역사를 근대적 학문으로 정립한 것이 늧었을 뿐이다.왜 그렀을까? 개화기에 우리민족은 일제의 강점을 당하였기 때문이다.그러서 학문으로서"조선사"는 일본인에 의해서 그 틀이 잡혔다고 한다.합방이후 조선총독부의 역사편수관인"이마시니(今西龍)"<경성제국대학 교수이자 사학자>라는 일본을 대표하는 사학자들에 의해서 "조선사(朝鮮史)"는 여지 없이 비하되었고 그것을 그대로 공부하여 답습한 조선청년(지금은 元老들이지만)들이 수를 헤알일수 없는 자신들의 제자들에게 까지 송두리체 물려준 결과라고 한다.역사는 배울 것이 없어면 버릴 것을 배우라는 가르침이 있다.이 말을 바꾸면 버릴 것이 없다는 뜻이 된다. 정관정요(貞觀正要)에 보면 "이동위경 가이정의관(以銅爲鏡 可以正衣冠)"이요 "이고위경 가이지흥체(以古爲鏡 可以知興替)"라는 말이 있다.<풀이>하면 "거울을 보면 옷과 갓을 바로 잡을수 있고, 옛 일을 거울로 삼으면 흥망성쇠"를 알수 있다고 한다. 현제나 미래의 일을 과거 역사를 통한 지헤로 거울 삼자는 것이다.
> 그른되 서울대학 모교수(국학교수)는 당면한 우리역사과에 대하여 이려기를 "제국주의 역사관에 의하여 왜곡된 우리역사를 바로보자는 작업(저술)에 매달려왔고 또 그 일환으로 연구실 속의 연구 성과가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10여년이 걸이고 아직도 식민사관과 민중사관과의 흐름을 완전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한 것을 보면 학계현실이 여러가지 걸림돌이 많은 것 같은 생각이 던다.
> 2,조선왕조가 5백년이란 장구한 세월동안 그 체제를 유지 하고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래 쉽지 안다. 그렀게 된데는 그 시대를 지배하는 사상과 이를 실현할수 있는 여건과 제도가 있었다는 것이다.그렀다면 그 사상과 제도가 무엇이 여설까?.사상은 선비사상이요 그사상을 실현 할수 있었던 제도는 다음과 같은 제도를 살펴 봄으로서 쉽게 이해가 가리라 믿는다.
> 첫째가;사관(史官)과 왕조 실록이요,
> 둘째가;상소(上疏)와 언로(言路)이며,
> 셋째가;전낭(銓郎과 인사제도(人事制度)이다.
>
> 0;첫째;사관(史官)과 왕조실록에 대하여 간락하게 살펴보자;조선왕조가 그 엄천난 분량(1.886권-887책)에 달하는"조선왕조실록"을 편년체(編年體)의 일기(日記)로 남겠다는 것은 세계사속에서도 그 유래가 드물다고 한다.거기에는 몇가지 중요한 연유가 있다.
> 우선 사관으로 지명된 30여명의 관원들이 금력과 권력에 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수가 있다.가령 정승이나 판서들이 자기들의 비행이 사초(史草)에 적혔다는 사실을 알면,해당 사관을 찾아와서 금력으로 지워거나 고처 써주기를 애원하고,그래도 듣지 않으면 권력으로 협박을 했다.그러나 직급이 낮은 젊은 사관들은 결단코 이에 응하지 않았다.물론 이로 인하여 마찰이 사화(士禍)로 발전하여,연산군4년(1498년)에 있었던 무오사화(戊午士禍)가 바로 그 것이다.
> 그 뿐인가"왕조실록"의 편찬은 임금이 죽은 다음에 이루워 젔습으므로 임금의 비정(秕政)과비행(非行)까지 낱낱이 적어서 남길수가있었다.
>
> 0;둘째인 상소(上疏)와 言路;조선왕조 시대의 강점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언로가 트여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임금이 권위만으로 정사를 전횡한 사람은 연산군 뿐이다. 임금의 독제가 용인되지 않았던 것은 언로가 트여 있어 임금의 언행을 철져하게 비판할수 있어기 때문이다. 상소의 제도가 바로 그 것이다.신하(백성포함)가 임금의 언행을 토할 수 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않일수 없다.임금은 상소문을 읽은 것이 주어진 임무였다.아무리 바빠도 상소문을 읽어야 했고,읽은 3,상소문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에 대한 비답(批答)을 내려야 했다.상소문은 서민도,상민도 심지어는 기생도 상소문을 올릴수가 있었다.현종12년 평안도 사는 초월(楚月)이 관원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린 상소문이 그 것이다.현종은 초월에게 숙부인(淑夫人-正3品)을 내려 치하 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금의 실정을 지적하는 비판의 상소문의 서두에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서두문이 쓰여져 있다."전하,신의 망녕된 주청을 살피시고 신에게 중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죽음을 각오하고 상소를 올리고 있음이다.나라가 바로되고 백성들이 편하게만 살 수 있다면 자신은 죽어도 무방하다는 각오로 직언(直言-上疏)을 하고 있음이 아니겠는가?.바로 이 점이 조선왕조를 5백년이나 지탱하게 한 기둥이며 힘일 것이다.<이것이 선비의 정신에서 찾아 볼수가 있었다>.
> 상소문의 특징은 철학적,문학적인 소양을 가추고 있는 점도 중요하다 하겠다,따라서 우리역사나 중국의 역사사에 있었던 전레를 소중이 하고 있다.그러므로 상소의 제도가 곧 언론의 자유임을 말하는 것이다.
>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 제도를 시행하고 있어면서 어론의 행적을 살펴 보면 말 못할 사연 들도 많았다고 생각된다. 언론이 막강한 힘(정부의-4部)을 가지고 있지만 민족과 국민을 선도 하는 데는 미흡하거니와 우리의 역사인식 조차도 계승하지 못하고 있지 안는가 하는 생가이 들 때가 있다.언론은 언론자체의 사사로움이나 정권적 차원을 초월했어 국가적,민족적 차원을 우선시 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익을 도모 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언론의 사명을 다 할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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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5. 5.


          법정치학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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