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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송도감과 이극배의 법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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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법정치학연구회 작성일13-06-22 19:09 조회4,0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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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능부원군 휘 극배(廣陵府院君 諱 克培)


공의 휘(諱)는 극배(克培)요, 자(字)는 겸보(謙甫)이며 광주인(廣州人)이다.
증조부(曾祖父)의 휘(諱)는 집(集)이며 관(官)은 고려말(高麗末) 봉순대부판전교시사(奉順大夫判典校寺事)이고, 조선조(朝鮮朝)의 증직(贈職)은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며 호(號)는 둔촌(遁村)이시다.

조부(祖父)의 휘(諱)는 지직(之直)이고 관(官)은 통정대부형조우참의(通政大夫刑曹右參議)를 거쳐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堤學)에 이르렀으며 증직(贈職)은

의정부영의정(議政府 領議政)이시다.

고(考)의 휘(諱)는 인손(仁孫)이고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우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이시며 시호(諡號)는 충희공(忠僖公)이시다.

광릉산천(廣陵山川)의 기절(奇絶)한 영기(靈氣)와 선조(先祖)께서 오래 쌓아올린 정성(精誠)의 음덕(陰德)으로 충희공(忠僖公)께서 아드님 오형제(五兄弟)분을 두셨는데 모두 국가의 큰 그릇이 되어 명망(名望)이 높으시었다.

특히, 공께서는 제일 먼저 그 영기(靈氣)를 타고 나오셨으니 즉 맏아드님이시다.

낳으셨을때 벌써 특이한 용모와 특이한 기개(氣槪)가 있었으며, 배움에 당하여 재능이 특출해서 옛 성현(聖賢)들의 팔서<(八書:시전(詩傳),>를 통달하여 여러 사람들이 원대(遠大)의 기재(器才)라고 하였다.

세종29년(世宗二十九年) 정묘년(丁卯年:144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곧 대과(大科)에 급제(及第)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로서 관계(官界)에 진출하여 박사(博士)로 전직후(轉職後) 세종32년(世宗三十二年) 경오년(庚午年:1450)에 성균주부(成均主簿)로 진급되고, 다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계시다가 성절사검찰관(聖節使檢察官)의 중책을 맡아 명(明)나라 사신으로 가시게 되었다. 당시 통사(通事) 한사람이 범법을 했으므로 공께서 법에 의하여 이를 처단하니 일행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외국의 사신으로 가게되면 특히, 명(明)나라로 가는 통사들은 원래 범행을 일삼는 자가 많았으며, 검찰관(檢察官)으로 가는 분들은 의당 이런 일이 없도록 엄중경계를 해야 하는데, 범법을 해도 벌은 안주고 묵인을 하기 때문에 잡간(雜奸)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로지 공께서는 이러한 범법자(犯法者)를 의법처단하여 범법자를 없애게 하니 공의 용단과 준법정신에 당시 내외의 여론이 자자하였다.

돌아오기 전에 사간원(司諫院:임금에게 충간하는 곳) 우정언(右正言), 지제교(知製敎) 등의 벼슬을 받으셨으며, 사헌부(司憲府)에서는 이 사실은 들어 범법자를 능히 검찰(檢察)하였으니 마땅히 포장(褒奬)을 해야 한다고 임금께 아뢰니, 문종대왕(文宗大王)께서도 옳게 여기시고 말씀하시기를 "내 이미 그 일을 알고 있었노라"하시며 곧 병조좌랑(兵曹佐郞) 벼슬을 주시고 정랑(正郞)에 이르게 하시었다.

당시 세조(世祖)가 등극(登極)하시기 전 이조, 병조(吏曹, 兵曹)의 대권(大權)을 잡고 있을 때 공의 기량(器量)을 보고 "후일(後日)에 도승지(都承旨)감이 될 인물(人物)" 이라고 하시었다.

때에 경상도(慶尙道) 등지에서 수령(守令)과 만호(萬戶)들이 선정을 하지못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많아, 나라에서는 공을 파견하여 징치하게 하니, 일일이 잘잘못을 가리어 불법한 수령(守令)들은 파직하고 혹은 귀양을 보내어 백성의 원성을 덜어 주었다.

공의 이러한 공평한 처사에 불만을 말하는 자가 한 명도 없었으며 오히려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자가 많았다.

세조원년(世祖元年) 을해년(乙亥年:1455) 세조즉위(世祖卽位)에 수충좌익공신(輸忠左翼功臣)이 되어 사재감부정(司宰監副正)벼슬을 받으시고 이어서 감정(監正)으로 승진(昇進)되고 판통예문사(判通禮門事)로 보직(補職)되시었다.

세조(世祖)가 친히 단구(團丘)에 제사하고 집사자(執事者)를 상줄때, 가자삼품(加資三品)의 지위(地位)에 있는 사람이라야 당연(當然)히 당상(堂上)에 오르는 것인데, 공이 또한 그 중에 끼어 있는지라 대간(臺諫 : 사헌부와 사간원을 대간이라 함)들이 논박하니 전교하여 말씀하시되 "그것은 다 옳은 말이지만 이모(李某)에 있어서는 어찌 보통사람으로 대우할가 보냐"하고 특히 승당(陞堂)을 명하고 곧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삼았다.

세조4년(世祖四年) 무인년(戊寅年:1458)에 명(明)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라는 통첩을 받고, 상감께서는 공에게 안마( 馬)와 옷 한 벌을 하사(下賜)하시고 가선대부중추동지사(嘉善大夫中樞同知事)직을 내려주시고 광릉군(廣陵君)을 봉(封)하여 다녀오시도록 하였다.

세조5년(世祖五年) 기묘년(己卯年:1459)에 병조참판(兵曹參判)과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냈으며 그 해에 다시 경사(京師)에 가서 천추절(千秋節)에 참석하고 돌아와 예조참판(禮曹參判)이 되시고, 세조6년(世祖六年) 경진년(庚辰年:1460)에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을 겸하고 가정대부(嘉靖大夫)가 되시었다.

당시 명(明)나라에서는 마감 초무모린(馬鑑 招撫毛麟)이라는 자를 우리나라에 보내어 야인(野人)을 방위하게 하였는데, 모린(毛麟)이 국동북경상(國東北境上)에 이를 즈음 상감께서는 야인관계에 능하고 외교적 수완이 비범한 공을 보내어 선위(宣慰)케 하시었다.

한편 문충공 신숙주(文忠公 申叔舟)가 야인토벌의 명을 받고 야인인 랑보아한(郞甫兒罕)을 정벌한 후에 동행을 청함으로 신숙주(申叔舟)와 더불어 개선해서 돌아오니, 자헌대부(資憲大夫)에다 노주(奴州)를 주며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임명하였다.

세조7년(世祖七年) 신사년(辛巳年:1461)에 광릉군(廣陵君)을 환봉(還封)하고, 임오(壬午)에 이조판서(吏曹判書)로 경상 전라도(慶尙 全羅道)를 순찰하여 군적(軍籍)을 바로잡고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전임, 세조9년(世祖九年) 계미년(癸未年:1463)에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었다가 충희공 상사(忠僖公 喪事)를 당하였으며, 세조11년(世祖十一年) 을유년(乙酉年 1465)에는 모부인상(母夫人喪)을 또한 당하게 되었다.

세조13년(世祖十三年) 정해년(丁亥年:1467)에 탈상(脫喪)하고 예궐(詣闕)하여 삼감께 뵈이니, 세조(世祖)가 정희왕후(貞憙王后)와 더불어 내전(內殿)에서 같이 인견(引見)하고 술을 따라 주시며 광릉군겸도총관(廣陵君兼都摠管)을 봉(封)하고 병조판서 평안도절도사(兵曹判書 平安道節度使)를 시키니 적절히 무어(撫禦)하였다.

세조14년(世祖十四年) 무자년(戊子年:1468)에 상감께서 글을 내리어 포장(褒奬)하고 정헌대부(正憲大夫)를 주었다.

예종대왕(睿宗大王)이 왕위(王位)를 받은 후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과 조판서(兵曹判書)를 거쳤으며 성종즉위후(成宗卽位後)엔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판서급)이 되었다.

성종2년(成宗二年) 신묘년(辛卯年:1471) 전라도민(全羅道民)이 기아(饑餓)에서 신음할 때 공으로 하여금 구제케 하니 공이 심혈을 기우려 구하니 도민이 모두 기아선상에서 새로운 생활을 얻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상감께서는 매우 기쁘게 생각하여 옷 한벌을 주시고 제상(諸相)에 보좌공(補座功)을 유시(諭示)하여 순성명량좌리공신호(純誠明亮佐理功臣號)를 내리시고 숭정대부(崇政大夫)를 가(加)하였다.

그 해 다시 성절사(聖節使)로 경사(京師)에 다녀오시고 성종5년(成宗五年) 갑오년(甲午年:1474)에 또한 병조판서숭록대부(兵曹判書 崇祿大夫)를 가(加)하였다.

성종8년(成宗八年) 정유(丁酉:1477)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성종10년(成宗

十年) 기해(己亥:1479)에 보국영중추부사 광릉부원군(輔國領中樞府事 廣陵府院君)을 가(加)하였다.

성종11년(成宗十一年) 경자(庚子:1480)에 특설기관(特設機關)으로 도감(都監)을 3개소에 두고 삼품이상직(三品以上職)에 있는 자 중에서 제일 공평하고 기식이 있는 사람을 뽑아 각각제조(各各提調)를 삼아 노주(奴州)의 미결자를 다스리게 하였는데, 단송도감(斷訟都監)이 그것이다.

공께서도 그 한 자리를 차지하여 공평무사하게 처결하니 모두들 공정한 처사라 하였다.

성종12년(成宗十二年) 신축(辛丑:1481), 성종13년(成宗十三年) 임인년간(壬寅年間:1482)에 흉년(凶年)이 들어 굶는 백성이 많아짐에 진휼사(賑恤使)를 삼고 판윤조사(判尹曹事)를 겸하게 하니, 활민(活民)의 혜택이 많았으며 민생고를 해결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다.

성종15년(成宗十五年) 갑진년(甲辰年:1484)에 대광보국(大匡輔國)을 가(加)하고, 성종16년(成宗十六年) 을사(乙巳:1485)에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을 배(拜)하였다.

성종17년(成宗十七年) 병오년(丙午年:1486) 가을, 상감이 홍복산(洪卜山)에 행행(行幸)하여 수렵대회(狩獵大會)를 참관(參觀)할때, 여러 장군(將軍)들이 수류(獸類)떼를 쫓아 평지사장(平地射場)으로 몰아놓고 급히 잡으려고 청하니, 좌우(左右)에서 모두 좋다고 하는데 공이 유독 반대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왕자(王者)는 당연히 정도(正道)로서 물(物)을 취(取)할 것이지, 만약궤우획금(萬若 遇獲禽)함은 옳은 일이 못된다."고 하시니 상감께서도 옳다고 여기시었다.

성종1,8년(成宗十八年) 정미년(丁未年:1487)에 큰 가뭄이 들어 스스로 책임을 지고 사직하려하니 상감께서는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얼마 후 비가 내려 민정(民情)이 흡연(洽然)하게 되니 상감께서는 중사(中使)를 시켜 어주와 어서를 보내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말씀하시되 "공의 경방(經邦)하는 술책(述策)에 힘입어 이같은 흡족한 혜택을 얻었으니 정말 기쁠 뿐이로다."하였다.

당시 각도군적(各道軍籍)을 개정하게 될 때 공이 평소 병무에 숙련하기 때문에 병조판서(兵曹判書)를 겸하게 하였다.

또 그 해 명(明)나라 임금이 즉위(卽位)하게 되니, 으레 공이 진하사(進賀使)로 다녀오게 되었으나 노병(老病)으로 인하여 이를 사양하고 부원군(府院君)을 사양하였다.

성종19년(成宗十九年) 무신년(戊申年:1488) 봄 명(明)나라의 한림대강동월(寒林待講董越)과 급사중(給事中) 왕창(王敞) 등이 우리나라에 와서 등극조(登極詔)를 반포(頒布)하려 그들 행차(行次)가 홍제원(弘濟院)까지 이르렀을 때 상감이 모화관(慕華館)에 나가 영접(迎接)하니 동월왕창(董越王敞)등이 공연한 트집을 잡아 영접의 예를 어겼다고 힐책하면서 안들어 오려고 하자, 상감께서는 그들을 설복시키기 위하여 여러 사람을 보내었으나 모두 허사가 되고 공이 그들을 찾아가시니 덕기(德器)가 크고 예모(禮貌)가 있음을 보고서야 비로소 조서(詔書)를 반포(頒布)하였다. 이에 상감께서는 매우 기뻐하사 마일필(馬一匹)을 하사하시었다.

그들 일행이 서울을 떠나 돌아갈 때에 백관들이 모두 교외로 나가 환송하게 되었다. 그 때 동월(董越)이 유독히 공 앞에 다가와서 하는 말이 "진정 조선(朝鮮)의 노재상(老宰相)"이라고 하였다.

성종21년(成宗二十一年) 경술년(庚戌年:1490) 공의 나이 70에 이르므로 관직에서 그만 물러서려 하였으나 상감이 이를 듣지 않으시고, 신해년(辛亥年)에 다시 퇴위(退位)를 청원하여도 안 들으시고 궤장( 杖)을 주시었다.

한번은 태학생(太學生) 이목(李穆) 등이 대신(大臣) 윤필상(尹弼商)을 논박하여 필상(弼商)을 삶아야 비가 올께다 하니 말이 자못 불손하다 하여 삼감이 죄를 주고자 할 때 재상(宰相)과 대간(臺諫)들이 석방해 줄 것을 간청하여도 안 들으시다가 공께서 장계(狀啓)를 올리어 "신학소생(新學小生)들이 사체(事 )를 분간 못하고 좋지않은 언사를 썼지만 한 번 용서하여 주소서, 조종이래(祖宗以來) 유생(儒生)들이 강직한 말을 한 일은 있었으나 죄를 받은 자는 없었으니 이번에 만일 죄를 주게되면 앞으로는 충간(忠諫)하는 길이 막힐까 염려가 되나이다." 하시니 상감께서도 특별히 용서하시어 세인들이 모두 기꺼운 일이라고 하였다.

성종24년(成宗二十四年) 계축년(癸丑年:1493)에 영의정(領議政)을 하라해도 아픈 핑계를 대고 이를 사양하니 물론 임금께서는 들어주지 않았다.

성종25년(成宗二十五年) 갑인년(甲寅年:1494) 모해사건(謀害事件)이 있었는데 한 노파가 모해한 사람은 바로 공주(公主)라는 것을 누설(漏泄)하였다. 상감께서는 이를 노하여 의금부(義禁府)에 가두고 공에게 위촉하여 처리할 것을 명하여도 역시 사양 하시었으나 상감은 이를 수락치 않았다.

상감이 사위(嗣位)하는 연산군1년(燕山君一年) 을묘년(乙卯年:1495) 구정승급(舊政丞級)으로 좋은 이상(理想)을 글로 써서 각각 올리라 명하니 공의 글이 "성종(成宗)께서 임옹걸언(臨雍乞言)하시므로 신이 중용(中庸)을 강론(講論)하다가 애공문정장(哀公問政章)의 내용을 보니 천하국가(天下國家)를 다스림에 구경(九經)이 있으나 행하는 바는 하나이옵니다. 고금제왕(古今帝王)의 정치하는 요건이 바로 여기에 있사오며 신의 평생 배운바도 여기에 있사오니 상감께서는 깊이 유의하옵소서. 하였더니 성종께서 가납(嘉納)하셨으니 지금도 신은 그 외는 딴말씀 없사옵니다"라고 하시니 상감께서는 옳게 여기어 그 뜻을 정중히 여기시어 승정원(承政院)에 명하여 특별히 책에 기록토록 하였다.

수개월후 병환으로 인하여 세번씩이나 사임을 간청하여 비로소 이를 수락(受諾)하시고 부원군(府院君)을 봉하였다.

병환으로 계신지 6개월후 연산1년(燕山一年) 을묘(乙卯:1495)에 돌아가시니, 향년(享年)이 74세이시며 임종시에 여러 자손들을 모아놓고 말씀하시기를 "내 나이 살만큼 살았고 벼슬도 할대로 다했으니 이제 무슨 한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시면서 숨을 거두시었다.

공의 부음(訃音)이 대궐에 들어가자 상감께서는 나라 거울이 없어졌다고 통탄하였으며 백료(百僚)들은 스승을 잃은 것과 같이 애통히 여기어 궁중에서는 조회(朝會)를 중지하고 상가는 모두 철시하고 시골에까지 가무(歌舞)를 금하여 조의를 표하였다.

빈소(殯所)에는 조객(弔客)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모든 장례절차(葬禮節次)는 국가에서 부담(負擔)하였으니 이는 공의 평소의 관후(寬厚)한 공덕의 소치이다.

공은 그 기도(氣度)가 웅심(雄深)하고 지려(志慮)가 견확(堅確)하여 경술(經術)로써 근본(根本)을 삼고 이치(吏治)로써 문식(文飾)하고 정대(正大)로써 수성(守成)하고 충근(忠勤)으로서 행동하니 모두 본을 받아야 할 처세(處世)시었다.

띠를 띠고 조회(朝會)에 나가면 그 엄연(儼然)한 위풍(威風)은 기이(奇異)한 바 있었다. 초임(初任)할 때부터 유망(有望)한 징조(徵兆)가 보이더니 과연 그 위(位)가 높고 년만(年滿)하심에 이르러서는 덕업(德業)도 더욱 높아서 맹자(孟子)의 소위 "달불이도(達不離道)하고 인불실망(人不失望)이라" 한것이 바로 공을 두고 한 말이다.

공은 양조(兩朝)에 책봉(策封)되고 삼도(三道)에 관찰(觀察)하여 추충명량출척등청(推忠明亮黜陟登淸)의 칭(稱)이 있었으며, 춘궁(春宮)에 전례(典禮)하고 문무(文武)의 대권(大權)을 잡은 일이 세 번이요, 오전(五典)을 부(敷)하여 방국(邦國)을 평정(平定)하며 인재선발(人才選拔)에는 공정한 운영을 하고 경륜(經綸)을 논함에 있어서는 언제나 바른 의논(議論)을 하였으며 제법(諸法)을 장악(掌握)하고 정승(政丞)의 지위에 있기 세번이었으며 만물을 광명(光明)케 하니 정말 참다운 재상(宰相)이시다.

다섯 임금을 섬기어 (단종을 치면 여섯임금이다) 출장입상(出將入相)하였으니 국가의 흥망(興亡)과 안위(安危)가 30여년간이나 공의 한 몸에 달려 있었다. 그 와같이 지위와 명예가 높았으며 상감의 총애(寵愛)가 많았으되, 집에 출입하는 사람은 없었으며 사람들이 전연 이간(離間)을 붙일 수가 없었으며 공을 대하기를 퍽 어려워하였다.

성품은 엄중(嚴重)하고 평소 말과 웃음이 적었으며 늘 문(門)을 닫고 손님을 접대하지 않았으며 혹시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주인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모두 돌려보내어 문정(門庭)이 늘 쓸쓸하여 거미줄을 칠 정도였다고 하니 과연 공의 청백(淸白)을 짐작할 수가있다.

서책(書冊)을 매우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학술을 연구하였으며 공연히 입으로 시율(詩律)을 읊조리는 일은 없었다.

한편, 화려한 것과 허식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늘 검소한 생활로 의식은 사치스러움이 없었다. 술은 매우 좋아하셨으나 훈기가 날 정도에 그치시고 가무와 관현(管絃)의 낙(樂)은 즐기지 않으시었다. 간혹 부득이한 자리에서 가무를 듣고보면 종일 불쾌하여 중한 죄를 범한 것과 같이 불안해 하시었다. 국가사(國家事)를 논함에는 큰 줄거리만 다루시고 사소한 일은 직접 담당관에게 처리토록 하시었다.

평생토록 사람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으며 어떤 사람이 혹 남의 단점을 말하게되면 꾸중하시어 "단점이 있는 반면에 장점도 있는 법인데 하필 단점만을 끄집어서 말을 하느냐"하고 힐책(詰責)하시었다.

그리고 집안이 너무 크게 일어남을 항상 염려하시며 자손들에게 훈계(訓戒)하여 말씀하시기를 "한때 성하면 한때 기울어지는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러하니 늘 자만한 행동을 하지말고 겸손해야 한다."고 하시었다. 그래서 두 손자의 이름을 겸(謙)자와 공(恭)자를 택하여 수겸(守謙), 수공(守恭)이라 하였으며 처세하는 도리가 모두 이 두 글자의 뜻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시었다.

자손들이 와서 뵈이면 장중(莊重)한 태도로 임하시어 자손들이 잘 받들어 모시고 감히 예(禮)에 어긋나는 태도는 취하지 않았다.

공은 이조초기(李朝初期)의 명재상(名宰相)인 문경공 허조(文景公 許稠)의 손녀를 아내로 맞이했으며, 어려서 문경공에게 공부를 배웠는데 문경공께서는 원래 지감(識鑑)이 있는 분이라 늘 공을 비상한 기재(器才)라고 칭하였다.

공은 9형제분을 두셨는데 세충(世忠), 세필(世弼), 세광(世匡), 세주(世柱), 세량(世良), 세공(世恭), 세검(世儉), 세훈(世勛), 세질(世質)이요, 위로 네 분은 모두 공보다 먼저 세상을 뜨시고 따님 몇 분을 명가(名家)로 출가(出家)하셨으나 일찍 혼자 되셨다. 내외제손(內外諸孫)의 수가 수십인이며 그 중 세충(世忠)의 2자 수공(守恭)은 갑과(甲科)에 합격하여 명망(名望)이 심히 높았고, 세필(世弼)의 2자 수량(守諒)과 수성(守誠)은 모두 유학(儒學)을 닦아 공명(功名)을 뜻하였다. 수량(守諒)이 공의 평생업적을 가지고 와서 행장(行狀)을 지어달라고 청하니 평소 친근히 공을 알고 지낸 터이라 글이 옹졸함을 사양치 않고 행장(行狀)을 짓노라.

좌상 홍귀달 근장(左相 洪貴達 謹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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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조에도 오늘날처럼 소송이 많아 관료들을 번잡하게 하였다.
      三度得伸法은 오늘날의 삼심제도와 다를바 없으나 삼도득신법은
      무고 등 소송의 번잡을 줄이고 아예 소송을 근절할 목적으로
      "두번 제소하는 것은 허용하나 세번은 허용하지 않고 벌을 주는"
        삼도득신법과 단송도감을 도입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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