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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부사 권준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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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수 작성일13-06-24 09:23 조회3,8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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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 인기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순천부사 권준이 허구의 인물이
  라는 데 대하여 조선왕조실록에서의 권준의 행적을 실록기사 원문을
  인용 소개한다.

  권준은 순천부사와 경기방어사를 역임한 실제의 인물이다.


    선조 25년(1592년 ) 06/21(기유) / 원균과 이순신이 한산도·
    당포에서 승전한 일에 대한 기록

이때 동래(東萊)가 이미 함락되어 왜적들이 계속 몰아쳐 곧장 진격하니 가는 곳마다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대가가 이미 서로(西路)로 들어가자 황해도 이남에서 동래까지 오직 패전 소식만 들려오고 전혀 다른 소식은 없었다.
그런데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은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과 약속하여 한산도(閑山島)에서 회합하였다. 이때에 이순신이 전선(戰船) 80척을 거느리고서 마침내 이해 5월 6일에 옥포(玉浦) 앞바다로 나아가니, 적선(賊船) 30여 척이 사면에 휘장을 두르고 길다란 장대를 세워 홍기(紅旗)·백기(白旗)들을 현란하게 달았으며, 나머지 왜적들은 육지로 올라가 마을 집들을 불사르고 겁탈하였다. 왜적들은 수군(水軍)을 보고는 노(櫓)를 빨리 저어 진지(陣地)를 나와 아군(我軍)과 바다 가운데서 만났는데 아군이 적선 26척을 불살라 버렸다. 이튿날 다시 대전(大戰)을 전개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행행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러 장수들이 도착하지 않아, 그대로 서로 모여 통곡하고는 마침내 9일에 제각기 본진(本鎭)으로 돌아갔다.
29일에 순신과 균이 재차 노량(露梁)에서 회합하여 적선 1척을 만나 불살라버렸는데, 조금 후에 보니 바닷가 한 산에 왜적 1백여 명이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있고 그 아래로는 전선 12척이 벼랑을 따라 죽 정박하고 있었다. 때마침 일찍 들어온 조수(潮水)가 벌써 빠져나가 바닷물이 얕아져서 큰 배는 나아갈 수 없었다. 순신이,
“우리가 거짓 퇴각하면 왜적들이 반드시 배를 타고 우리를 추격할 것이니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큰 군함(軍艦)으로 합동하여 공격하면 승전(勝戰)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고서, 배를 돌렸다. 1리를 가기도 전에 왜적들이 과연 배를 타고서 추격해 왔다. 아군은 거북선으로 돌진하여 먼저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쏘아대어 왜적의 배를 모조리 불살라버리니, 나머지 왜적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발을 구르며 울부짖었다. 한창 전투할 적에 철환(鐵丸)이 순신의 왼쪽 어깨를 명중하였다.
2일에 당포(唐浦)에 도착하니 적선 20척이 강 연안에 죽 정박하였는데, 그 중에 큰배 한 척은 위에 층루(層樓)를 설치하고 밖에는 붉은 비단 휘장을 드리워놓고서, 적장(賊將)이 금관(金冠)에 비단옷을 입고 손에 금부채를 가지고서 모든 왜적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중위장(中衛將) 권준(權俊)이 배를 돌려서 노를 재촉하여 바로 그 밑으로 돌진하여 그 배를 쳐부수고, 적장을 쳐다보고 활을 쏘니 시위를 놓자마자 적장이 거꾸러졌다. 4일에 당포(唐浦) 앞바다로 나아가자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와 회합하니 여러 장수들이 기운이 증가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
5일에 외양(外洋)으로 나가다가 적선이 고성(固城) 당항포(唐項浦) 앞바다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듣고, 순신이 배 3척을 먼저 보내야 형세를 정탐하도록 하였는데, 겨우 바다 어귀를 나가자마자 바로 포(砲)를 쏘아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일시에 노를 재촉하여 앞뒤를 고기꿰미처럼 연결하여 나아가 소소강(召所江)에 이르니 적선 26척이 강 연안에 죽 벌여 있었다. 그 중에 큰배 한 척은 위에 3층 판각(板閣)을 설치하고 뒤에는 검은 비단 휘장을 드리우고 앞에는 푸른 일산을 세워 놓았으며, 휘장 안에는 여러 왜적들이 죽 나열하여 시립하고 있었다. 모든 군사들이 처음 한번 교전하고 거짓 패한 척하여 퇴각하니, 층각을 세운 큰배가 돛을 달고 먼저 나왔다. 모든 군사들이 양쪽에서 공격하니 적장이 화살을 맞고 죽었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 불을 질러 적선 1백여 척을 소각해 버리고 왜적의 머리 2백 10여 급(級)을 베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적은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었다. 6일에 잔여 왜적을 외양(外洋)에서 추격하여 또 한 척을 불살라버렸으며, 9일에 모든 군사가 전투를 중지하고 본진으로 돌아왔다.
7월 6일에 순신이 억기와 노량에서 회합하였는데, 원균은 파선(破船)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정박하고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永登浦)에서 견내량(見乃粱)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모든 군사가 추격하여 가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地勢)가 협착한 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고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
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10일에 안골포(安骨浦)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첫째 배는 위에 3층 큰집을 지었고 둘째 배는 2층집을 지었으며 그 나머지 모든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그 지역이 협착하였다. 아군이 두세 차례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3진(陣)이 머리를 벤 것이 2백 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
순신 등이 그의 군관(軍官) 이충(李)을 보내어 치계하고 수급(首級)을 바치도록 하니, 행조(行朝)에서는 상하가 뛸듯이 기뻐하며 경하(慶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충이 오자 상이 영남(嶺南)의 일을 하문하니, 대답하기를 ‘감사(監司) 김수(金)가 함양(咸陽)에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소식이 통하지 않고 있습니다. 적이 직로를 따라 올라오기 때문에 좌·우도(左右道)가 두 조각으로 갈라져서 호령이 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였다.】


【원전】 21 집 502 면

【분류】 *외교-왜(倭) / *군사(軍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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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8년 /02/20(계해) / 《주역》을 강하고, 성영의 처벌·도원수의 체직 등의 일을 논의하다

상이 별전에 나아가 《주역》을 강하였다. 영사 정탁(鄭琢), 동지사 이항복(李恒福), 참찬관 김우옹(金宇), 특진관 유영경(柳永慶)·허진(許晉), 참찬관 정구(鄭逑), 시독관 박홍로(朴弘老), 지평 유희서(柳熙緖), 정언 이형욱(李馨郁), 기사관 신성기(辛成己)·김신국(金藎國)·윤휘(尹暉)가 입시하였다. 지평 유희서가 나아가 아뢰기를,
“성영(成泳)과 이준(李準)에 대하여 누차 계달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여 물론이 매우 분노해 합니다. 매우 인정에 가깝지 못한 일을 성영이 했기 때문에 감히 아뢴 것입니다. 계사(啓辭) 외에도 곡절이 많이 있으나 번쇄하게 다 아뢰지 않겠습니다. 이준이 성천에 간 것은 적의 난을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동궁이 성천부에 당도한 뒤에 그는 뒤따라 들어왔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판의 일은, 그 계사를 보면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도 마땅히 이와 같이 하지는 않을 것인데, 하물며 참판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풍문이 와전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유희서가 아뢰기를,
“성영이 의병장이 되어 여주 목사를 겸하고 있을 때 모든 의병의 군공을 보고하지 않았을 경우, 논상차 상신한다고 하면서 성영은 그것을 빼앗아 자기의 공으로 삼았습니다.”
하니, 상이 우상에게 이르기를,
“참판이 이런 일을 했겠는가. 계사에 ‘불충 불효’라 하였는데 어찌 이렇게까지 하였겠는가?”
하니, 정탁이 아뢰기를,
“간관의 직책은 들은 바에 따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간쟁하는 신하의 풍채는 당연히 그와 같은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상은 듣지 못하였는가?”
하니, 정탁이 아뢰기를,
“소신은 늘 외방에 있었고 또 몹시 고루해서 아직 그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당초에 여러 장수들이 적의 소문을 듣고 무너져 흩어졌는데, 성영은 병든 사람으로서 의병을 일으켰으므로 소신이 성천에 있을 때 이 소식을 듣고 매우 훌륭하게 여겼으며 다른 것은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동지사 이항복에게 이르기를,
“참판의 일이 어떠한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소신은 성영과 홍문관에서 함께 벼슬을 하여서 서로 익숙하게 아는 처지인데, 요사이 일은 소신이 대가를 따라 의주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니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계사를 보니 그 사람이 이와 같지 않을 텐데 지금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경악스러울 뿐입니다. 대간이 아뢴 군공에 대한 일은 모든 의병이 얻은 적의 수급(首級)이 모두 성영에게 바쳐지고 그 공이 끝내는 편비(裨)에게 돌아가서 심지어 상언(上言)과 정소(呈訴)가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보통 무식한 사람이라면 으레 이런 일이 있으니, 심상하게 보아 괴상히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유희서가 아뢰기를,
“이천 부사(利川府使) 신수팽(申壽彭)이 참획한 수급 17급을 모두 편비의 공으로 삼았습니다.”
하자, 상이 판서에게 이르기를,
“신수팽은 이일(李鎰)이 데리고 간 군관으로서 늙고 병들었다는 바로 그 자인가?”
하니,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버이를 잊고 나라를 저버렸다.’ 함은 그 죄가 너무도 크다. 이와 같은 말을 어찌 재상을 지목하여 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일은 참작해서 하라.”
하니, 유희서가 아뢰기를,
“이유없이 기복하였으니 이는 어버이를 잊고 나라를 저버린 것입니다. 성영의 일은 모두 저와 같으니 말하면 입이 더러워집니다. 또 그는 장흥사(長興寺)를 피난처로 삼아 오직 자기 한 집만 무사하기를 도모했을 뿐이고, 그가 세운 공은 모두 여러 의병들이 참획한 수급이었습니다.”
하였다. 정탁이 아뢰기를,
“대간과 재상이 서로 시비를 논하고 언관(言官)이 한때의 공론으로 상달하니 신은 가벼이 말할 수 없습니다. 단 당초에 모두 성영이 의병을 일으킨 것을 기특하게 여겼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파직시키고 서용치 않는 죄벌은 가할 수 없다. 그리고 좌윤은 이미 추고하였는데 어찌 파직까지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유희서가 아뢰기를,
“계복(啓覆)할 때는 으레 전후 장계를 취하여 사감(査勘)을 대비하는데 어제의 계복은 소루하기 막심하였습니다. 금부의 색낭청은 직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파직해야 합니다. 어찌 단지 추고만 할 것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파직은 과중하다.”
하였다. 유희서가 아뢰기를,
“현재 아뢸 것이 한 두가지 일이 아닙니다. 남쪽 지방의 일로 말하면, 그곳에서 온 자가 목이 메어서 말을 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적중으로부터 유인되어 나온 자가 좌도의 경우는 김태허(金太虛)에게 와서 붙었는데 양식이 없어서 먹이지 못하고, 우도의 경우는 김응서(金應瑞)에게 와서 붙었는데, 역시 양식이 없어서 먹이지 못하므로, 그 사람들이 도로 적중으로 들어가니 매우 한심한 일입니다. 그 같은 무리들을 잘 양성하면 모두 군사를 삼을 수 있습니다. 나주(羅州)에는 아직 원곡(元穀)을 쓰지 않았다 하니, 그 곡식을 풀어서 이들 무리를 먹이면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항복에게 이르기를,
“비변사는 공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대간의 말이 옳습니다. 적중에 방금(防禁)이 없으므로 한 사람이 들어가서 유인하면 따라 나오는데, 만일 먹을 것이 없으면 도로 들어가곤 하여 단지 왕래만 할 뿐입니다. 동궁이 남하했을 때 순천 부사(順天府使) 권준(權俊)으로 하여금 급료(給料)의 일을 주관하여 그들을 군병으로 삼게 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원하지 않고 야수(野獸)처럼 놀고 먹으려 하기만 하였습니다. 대개는 각읍 수령이 주관하지 않고 장무(掌務)에게만 맡기기 때문에 도망하기도 하고 죽기도 하나 수령은 알지도 못하고, 한 사람이 2∼3명의 요식(料食)을 받으므로 곡식은 날로 줄어들고 군사 양성에는 실효가 없으니, 매우 통분스럽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 수령이 잘못 처리해서 그런 것이다. 국가의 본뜻이 어찌 이와 같았겠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이들 무리는 첫째 가는 자는 정병(精兵)을 삼고, 그 다음 가는 자는 농군(農軍)을 삼고, 그 다음은 또한 신수역(薪水役)을 시킬 수 있으니, 어찌 모두 헛되이 버릴 것이겠습니까마는 잘 거두지 못하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항복에게 이르기를,
“판서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나주 같은 경우는 그 유가 매우 많습니다. 그중에서 토민(土民)보다 나은 자는 그가 하는 대로 맡겨 두고 약간 영리한 자를 골라서 장무(掌務)로 정하였는데, 급료가 매우 고르지 못하고 혹은 대신 받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소신이 남하했을 때 ‘어느 사람이 대신 자기의 요미를 받아갔다.’고 정소(呈訴)한 자가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일은 비록 소신의 직책이 아니나 그 사이의 사정을 알아보려고 잡아다 물었더니, 과연 그러하였습니다. 김의원(金義元)【일찍이 전라 도사(全羅都事)가 되었다.】 이 여기에 와서 또한 말하기를 ‘둔전(屯田)을 하여 이들 무리로 농군을 삼는다면 양식을 마련할 수 있는데, 그 일을 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신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의 선처 방법을 말해 보라.”
하니, 이항복이 대답하기를,
“장정은 골라서 활쏘기와 포쏘기를 가르쳐서 수군으로 보내고 노약자는 농군을 삼는 것이 매우 좋습니다. 신이 남쪽 지방에 있을 때 들으니, 이억기(李億祺)가 이들을 가지고 둔전을 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변사는 공사(公事)를 만들어 처리하라.”
하니, 특진관 유영경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항복이 아뢴 일은 비변사에게 이문(移文)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요즘 남쪽에서 온 사람의 말을 들으니, 그들 무리가 유리(流離)하여 굶어 죽기도 하고 혹은 도로 적중으로 들어간다 합니다. 어찌 공사가 없어서 그렇겠습니까. 봉행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정탁이 아뢰기를,
“대신의 직위는 헛되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음양을 섭리하며 도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는 자리이니 그 책임이 막중합니다. 비록 평시에 있어서도 마땅히 어진 덕이 있는 사람을 얻어서 맡겨야 하는데, 하물며 오늘날 같이 큰 적이 문정(門庭)에 있어 국사가 위급한 때인데이겠습니까. 적임자에게 맡긴다 해도 오히려 구제하기 어려울 것인데, 어찌 신 같은 자가 감당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상은 능력이 없지 않으니, 사피하지 말고 국사에 더욱 힘쓰라.”
하였다. 정탁이 아뢰기를,
“적정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비록 중국 조정에서 봉왕을 허락한다 하더라도 어찌 반드시 스스로 물러갈 리 있겠습니까. 지금 비록 물러간다 하더라도 뒤에 어찌 반드시 오지 않겠습니까. 나라에 당당한 기세가 없으니 이것이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모인(某人)을 보내어 남원 등지를 진압하여 그들의 기세를 막는 것이 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수를 보내야겠는가, 대신을 보내야겠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체찰사를 내려보내는 것이 가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번에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는데 아직도 의논하지 않았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대신이 모두 모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의정(議定)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이 근래에 출사하지 않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병으로 출사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정구가 나아가 아뢰기를,
“도원수는 크게 인심을 잃었습니다. 양남의 백성들은 모두 ‘이런 원수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세히 말해보라.”
하였다. 정구가 아뢰기를,
“이때에 연음(燕飮)으로 일을 삼고 군관이 작폐하여 뇌물이 공공연히 행한다 합니다. 체찰사가 내려가면 이렇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남쪽 지방 사람은 말을 만들어 내는 습관이 있다. 재주가 미치지 못하여 하지 못하는 것은 있을지라도 그 사람이 어찌 그같이 하겠는가.”
하였다. 김우옹이 아뢰기를,
“전하는 말이 어찌 사실이 아닌 것이 없겠습니까마는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절로 공론이 있어 물정이 분노해 합니다. 대개 그 사람은 성품이 매우 느슨하여 능히 군관을 통섭하지 못하니 장수의 재질이 아닙니다.”
하고, 정탁은 아뢰기를,
“그 직임을 대신할 자가 전임자보다 약간 낫더라도 우열의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다면 이때에 가볍게 교체할 수 없습니다.”
하고, 김우옹은 아뢰기를,
“장수를 바꾸는 것이 비록 중난한 일이나 조괄(趙括) 같은 자라면 바꾸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정탁이 아뢰기를,
“정문부(鄭文孚)는 북도에 있을 때 맨손으로 큰 공을 세웠는데 공주(公州)에 있을 때는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장계가 있었습니다. 그 사이의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이 같은 사람도 쉽게 얻을 수 없으므로 지난번에 비변사가 그를 그대로 재임시키고자 하였는데, 일이 중대한 관계로 그렇게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듣기에는 그렇지 않다. 북도의 일은 바로 정현룡(鄭見龍) 등의 공이요 정문부는 남의 힘으로 일을 이룬 것이라 한다.”
하고, 이어 이항복에게 이르기를,
“판서가 듣기에는 어떻던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대개 위인이 당돌하고 휘하의 제장들이 다 날쌔고 용맹스럽다 합니다.”
하고, 유영경은 아뢰기를,
“정문부는 당초에는 피신하려는 계획을 가졌다가 군사를 일으킨 뒤에는 남의 힘으로 일을 이루었으니, 장수의 재질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구황(具滉)은 북도의 권관(權管)으로 있을 때 그 보(堡)의 토병(土兵)을 거느렸으며, 인원심(印元諶)은 다년간 군관을 하면서 여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또한 토병도 많이 거느렸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좌·우척후(左右斥)가 되었고 거느린 군사도 모두 날쌔고 용맹스러웠기 때문에 적을 벤 공이 가장 많았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항복에게 이르기를,
“인원심은 지금 무슨 직임에 있는가? 그 같은 장사는 거두어 두는 것이 가하다. 구황은 내 일찍이 모르는 사람이다.”
하자, 이항복이 아뢰기를,
“인원심은 전에 훈련원 관원으로 있다가 사소한 죄로 해임되었는데, 보다 나은 직위에 별도로 서용해야 하겠습니다. 구황도 싸움에 과감한 용사입니다.”
하였다. 유영경이 아뢰기를,
“지금 온 항왜(降倭) 20명은 처치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김응서(金應瑞)의 진중에 있었으나 김응서도 그들을 제어하기 어려움을 알고 경성으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각기 궁시(弓矢)와 전마(戰馬)를 가졌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그들에게 ‘우리 나라의 법은 그렇지 않으니 너희는 궁시의 무장을 풀어야 한다’라고 효유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유영경이 아뢰기를,
“성질이 아주 불순하니, 한 곳으로 같이 보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20명이 한 곳에 모이면 난을 일으키는 일이 있을까 염려된다. 또 전마는 어디서 얻었는가?”
하였다. 유영경이 아뢰기를,
“김응서가 주었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판서는 빨리 처치하라.”
하였다. 정구가 아뢰기를,
“위에서 환도(還都)하신 뒤에 마땅히 애통한 뜻이 담긴 조서를 내려 팔도에 효유하고 허문(虛文)을 없애버려 백성들이 하고 싶은 것에 따라 인심을 감복시킬 수 있는 것을 대신에게 물어서 해야 합니다. 소신이 수령으로 있을 때 보니, 교서가 내려지면 백성들이 모두 감동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육지(陸贄)의 주의(奏議)를 보면 지금 사람으로서는 능히 상달할 수 없는 말이 있으니, 지금의 신하는 정말 옛날 신하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 주의를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의금부의 옥사에 대해서도 봄날씨 화창하여 만물을 소생시킬 때에는 옥수(獄囚)를 소결(疏決)하라고 전교하셨는데, 그 공사를 보면 소루하기 막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떤 사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가?”
하자, 정구가 아뢰기를,
“한두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상이 아뢴, 원왕(枉)을 씻어주어야 한다는 말은 극히 윤당합니다.”
하고, 김우옹은 아뢰기를,
“인심의 억울함은 씻어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당 덕종(唐德宗)은 혼암한 임금이었는데 육지의 말을 듣고 조서를 내리자 교만한 장수와 사나운 군졸들도 모두 흐느껴 울었으니, 인심의 감동이 이처럼 빠릅니다.”
하였다. 정구가 아뢰기를,
“양남의 인심은 진실하지 못하니 그들의 말은 참으로 믿을 수 없지만, 도원수는 바꾸는 것이 온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수를 체직시키면 대신할 만한 자가 있는가?”
하였다. 정구가 아뢰기를,
“체찰사가 내려가면 비록 도원수가 없더라도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라의 큰일은 반드시 주밀하게 생각해야 한다. 지금 만일 현재의 도원수를 체직시키고 다른 사람을 보낸다면 생소할 뿐만 아니라, 또 저 현재의 도원수보다 나은 자가 없다.”
하였다. 정구가 아뢰기를,
“전번에 영상이 이덕형(李德馨)을 보낼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이미 생각하였지만【이덕형이 이때 이조 판서로 있었다.】 내가 중히 여기는 것은 이곳에 사람이 없으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판서 이덕형은 일찍이 선위사(宣慰使)가 되었었으니, 왜적이 이미 그 기국의 천심을 헤아리고 있을 것이고 또한 그의 나이가 너무 적으므로 도원수를 삼을 수 없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승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정탁이 아뢰기를,
“경솔하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판서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이미 왜적을 접했다 하더라도 어찌 꼭 그 때문에 도원수를 삼을 수 없겠습니까. 아래에서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니 상께서 재결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재기(才氣)는 있는 사람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덕형을 도원수를 삼으면 적이 반드시 물러가겠는가?”
하니, 정구가 아뢰기를,
“비록 이덕형을 보낸다 하더라도 어찌 왜적으로 하여금 꼭 물러가게 할 수야 있겠습니까. 스스로 처치하는 일이 있을 것이니 어찌 권율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하고, 김우옹은 아뢰기를,
“이덕형이 반드시 권율보다 나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이 어찌 그와 같겠는가. 방관자와 당국자는 다른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은 모두 ‘모인이 가면 가하다.’ 하는데 그 사람이 가도 전의 사람과 다른 바가 없다. 속담에, 쥐를 고양이로 바꾸었다는 것도 역시 이런 유이다.”
하고, 이어 유영경에게 이르기를,
“특진관도 비변사 당상이니, 소회를 말해 보라.”
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신은 권율의 한 일을 모릅니다. 요즘 원수의 장계를 보니, 모두가 군량이 없다는 것을 말하였고 그가 거느린 군관을 각관에 나누어 보내어 먹이게 하였는데 각관에서도 능히 먹이지 못한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판서는 사마(司馬)의 장(長)으로서 왜 말을 하지 않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이덕형의 일은 이미 진계하였습니다. 권율은 소신의 처부(妻父)입니다. 비록 감히 이것을 혐의로 삼는 것은 아니나 자연 조정의 논의가 있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정구가 아뢰기를,
“부필(富弼)도 안수(晏殊)의 허물을 말하였는데, 어찌 피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조 판서로 도원수를 삼는 것이 가당한지의 여부를 말하라.”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권율은 재주가 없고 이덕형은 재주가 있으니, 시행 조처하는 일에 반드시 나은 점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조 판서가 대신하면 무슨 큰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장수는 반드시 형세에 따라서 시기를 탄 연후에야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라 이때에 운세를 전환시킨다는 것은 본디 기필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적으로 하여금 감화하여 이마를 조아려 절하게 만들고 탕패한 고을이 안전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은 반드시 기대할 수 없겠으나 앞의 사람과 논할 때 조금 나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판서의 생각에는 교체해야 된다고 여기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인심이 그러하니 교체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김우옹이 아뢰기를,
“한신(韓信)과 백기(白起) 같은 장수는 얻을 수 없으나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나으면 대신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의 소견이 각각 다르니 긴밀히 비변사에 의논하라.”
하였다. 유영경이 아뢰기를,
“관서 지방도 중요하지만 남쪽 지방이 더욱 긴급하니 이원익(李元翼)을 남쪽 지방으로 보내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영상에게 ‘이원익을 원수로 삼고 이덕형을 평안 감사로 삼으면 어떻겠는가?’ 하고 물었더니, 영상이 불가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만두었던 것이다.”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이원익이 낫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원익으로 원수를 삼는다 하더라도 적을 물리치는 일은 내가 기필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그 일은 이원익이라 하더라도 능히 하지 못합니다.”
하고, 유영경은 아뢰기를,
“이원익이 본디 이덕형보다 낫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안도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남쪽 지방에 우려가 없는 연후에 서쪽 지방을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평안도도 근본 구실을 하는 지방이니 이원익을 체직시키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나 내가 한 말과 여러 재상들이 답한 말을 상세히 다 적어서 비변사와 상의해 처리하라.”
하였다. 유영경이 아뢰기를,
“둔전(屯田)·연병(鍊兵) 등에 관한 일을 권율은 잘 하지 못하나 이덕형은 반드시 잘 해 낼 것입니다.”
하고, 정구는 아뢰기를,
“권율은 김응서로 하여금 적과 서로 만나게 내버려 두고 중지시키지 않았으니 이 같은 일은 극히 잘못된 것입니다.”
하고, 유영경은 아뢰기를,
“장수는 밖에 있는데 조정이 이처럼 의논하니 그가 들으면 필시 미안해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원의 인사 처리를 가지고 말하면, 송응창(宋應昌)이 체직되자 고양겸(顧讓謙)이 왔고 고양겸이 체직되자 손광(孫鑛)이 왔는데 손광이 온 뒤에 벌써 이 적을 쓸어 버렸는가. 대개 장수란 자주 교체할 수 없는 것이다. 경연관이 말한 조괄 같은 경우는 부득이 체직시켜야 할 것이다.”
하자, 정구가 아뢰기를,
“중원에서는 송응창을 갈아내고 교대자에 있어서 그 적임자를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원전】 22 집 445 면

【분류】 *외교-왜(倭) / *군사-부방(赴防)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왕실-경연(經筵) / *사법-탄핵(彈劾) / *사법-재판(裁判) / *인사-임면(任免) / *풍속-예속(禮俗)



자료제공: 법정치학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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