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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어떤 임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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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수 작성일13-06-24 10:00 조회4,3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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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어떤 임금인가
정치지도자의 결단과 오류로 본 朝鮮史



선조년간의 정치적 격변을 보면 지도자는 어떻게 위기관리를 하고 인맥을 효율적으로 조성해야 하는지 알수 있다. 선조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도 정치행위를 하는데 몇가지 오류와 지도자의 흠결사항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상종가의 시청률을 올리며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다.

이에 선조임금과 선조의 치세에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 가를 살펴보고 우리가 칭송하는 조선조의 문화와 지혜 이외에 냉혹한 정치논리는 어떻게 이어져 왔는가를 찾아보자.





붕당정치는 한마디로 기회의 선점이다. 이론과 도의는 가당치 않고 오히려 ''벼슬을 한다는 것은 푸른 바다 위에 뜬 배와 같다''는 순조代 윤태긍의 고백이 있지만 기실 그러면서도 <공명을 세워 군친의 영광이 되어야 한다>는 수많은 사임당들의 부추김들과 세뇌가 민본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붕당,세도, 내명부정치를 잉태하게 되었다.



선조의 등극


선조는 중종의 손자이다. 중종은 세 분의 정비를 두셨는데, 초비는 단경왕후 신씨.

단경왕후 신씨는 연산조에서 정승을 지낸 신수근의 따님이셨는데, 신수근의 또다른 딸이 연산군의 부인이었던 관계로 중종반정 직후 신하의 간언으로 폐출되었다.



중비는 장경왕후 윤씨로 소생은 인종이 있습니다. 인종을 생산하시고는 산후조리과정에서 숨을 거두었다. 후비는 문정왕후 윤씨로 소생으로는 명종이 있다.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보여주듯이 중종은 다수의 후궁을 두었는데, 이 중 경빈 박씨와 그 소생인 복성군은 작서의 변에 연루되어 사사되었고, 희빈 홍씨의 소생 봉성군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사사되었습니다. 희빈의 소생으로 봉성군의 아우인 금원군마저 문정왕후가 기를 쓰고 제거하려 하였으나 명종이 두둔하여 화를 겨우 피할 수 있었다. 당시 내명부를 관할하던 문정왕후는 엄청난 야심가였기에 자신의 소생을 제외한 중종의 다른 왕자들과 그 왕자들을 생산한 후궁들을 끝내 덫을 놓아 죽였기에 후궁과 그의 소생들은 감히 왕위에 대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명종께서 훙서하였을 때 왕실의 최고어른은 인종비인 인성왕후 박씨였으나 후계를 결정할 만한 힘이 없었죠. 명종 초기 을사사화에 인성왕후의 집안이 거의 멸문이 된 데다가 당시의 조정이 청송 심씨에 우호적인 세력에 의해 장악되어 손아래동서인 인순왕후에게 모든 실권을 빼앗긴 것입니다. 실권에서 멀어진 인성왕후는 그 무덤도 매우 초라한 편이지요. 명종이 위독한 상태에 빠져 후사문제가 대두했을 때 일부 조정대신들은 인종의 아내 인성왕후 박씨가 후사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실세였던 영의정 이준경은 이 문제는 심씨가 결정해야 된다고 적극 밀어 하성군이 즉위하게 된 것입니다. 심씨가 하성군을 지목한 것은 그를 통해 권력을 잡으려는 친정의 입김 때문이었습니다. 여하한 이유이건 하성군은 16세의 어린 나이였으니 어린 임금을 보위에 올리고 청송 심씨 일문이 권력을 누릴 계산.



그러나 인순왕후는 선조를 즉위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자신이 문정왕후의 전횡을 겪으면서 성장했기 때문에 직접 정사에 나서지 않으려고 하였다. 다만 친정 식구들이 조정에 많이 포진한 것으로 만족할 따름이었지요.



따라서 영의정의 거듭된 요구에 따라 수렴청정을 하긴 했으나 조정 대신들의 의중을 따를 뿐 자신이 의견을 내놓는 경우는 드물었다. 야사에는 인순왕후가 교지를 내릴 때 한자를 몰라 애를 먹었다고 전하고 있지만,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는 인순왕후가 내릴 교지는 신하들이 이미 결론을 내린 이후에 올라온 것들이어서 인순왕후가 ''允'' 혹은 ''不允''이라고 기록하기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순왕후는 친정의 이익을 대변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국사보다 위에 놓지는 않았던 것.

인순왕후가 척신 윤원형과 가까웠던 작은 할아버지 심통원의 관직을 삭탈한 것이 이를 증명하지요. 명종이 사림정치에 강한 집착을 지니고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던 인종왕후는, 결코 이를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행동했으며 또한 한꺼번에 사림정치를 실현하려고 서두르지 않는 현명함도 지니고 있었다. 거기다 인순왕후는 섭정을 그리 오래하지 않았다. 영의정, 좌의정이 함께 조정을 잘 이끌고 있는 데다 선조도 곧 국사에 익숙해져, 1568년 2월 대사간 백인걸이 선조의 친정을 요구하자 인순왕후는 이를 수용.



아마도 인순왕후는 문정왕후가 사대부들에게 저주의 표적이 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굳이 이들과 싸우며 수렴청정을 계속하고 싶은 의지도 없었을 것이다.



수렴청정을 거둔 지 7년 만에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인순왕후는 명종의 능인 강릉에 안치되었다.


등극에 관련된 비화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은 명종의 동생이었는데 아들이 없던 명종이 덕흥대원군의 세 아들을 불러놓고 임금만이 쓸 수 있는 익선관을 가리키며 ''머리의 크고 작음을 알기 위함이니 차례로 한번씩 써보라''고 하자 선조의 위 두 형들은 아무 생각없이 시키는 대로 하였으나 막내인 선조만이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함부로 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하며 공손하게 받들어 제자리에 가져다 둠으로써명종의 믿음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는 고사가 전해집니다. 이렇게 해서 명종은 하성군을 각별히 좋아하여 자주 대궐로 불러들였다고 합니다. 심통경과 인순왕후가 어린 나이의 하성군을 즉위시키면서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검증된 지혜도 일조를 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선조의 치세

인순왕후의 퇴장과 선조의 친정은 도학정치를 주장하던 사림계열이 집권세력으로 부상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선이 건국된 후, 15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훈척신 세력이 정국을 주도해왔다면 이제부터는 집권 사림 내부의 대결, 즉 당쟁의 시기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선조은 친정을 하게 되자 가장 먼저 과거제를 개편하여 현량과를 다시 실시하고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조광조에게 영의정을 증직하고 이후 억울하게 화를 당한 사림들을 신원한 반면 그들에게 화를 입힌 남곤 등의 관직은 추탈하였다. 또한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유관 등을 죽이고 녹훈의 영전을 받았던 이기, 윤원형 등을 삭훈하였다. 이로써 민심은 안정되고 정계는 사림이 득세하여 한때 문치의 깃발 아래 조정은 평화를 찾았다. 하지만 정권을 장악한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리되어 당파 싸움을 지속한다.



당파싸움이 어느 정도 익어갈 무렵 조선 최대의 국난인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7년 간의 전쟁은 조선의 국토와 인민들에게도 지대한 타격을 주었지만, 선조 자신이 구현했던 정치를 할 수 없게 만든 결정적 이유가 되었습니다. 즉위 초부터 정제된 신권을 바탕으로 유학의 이념에 맞추어 정치를 하고자 노력을 기울였으나, 임진왜란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군벌들을 출현시켰고, 도학자적 정치를 추진하였던 유학자들이 막상 전란에 봉착하자 아무런 역할도 수행하지 못하였음을 절감하게 된 선조는 끊임없이 신하들을 의심하는 소심한 왕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는 전란의 뒷수습을 채 마무리짓지도 못한 채 1608년 59세를 일기로 41년 동안의 치세를 마감해야 했다. 능은 목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임진왜란과 장수들의 억울하지만 필요했던 죽음



임진왜란 직전에 조정은 일본에 정부사를 보내 그들이 병란을 일으킬 지에 대해 알아보게 합니다. 하지만, 정부사의 의견은 달랐고 당시는 부사인 김성일이 속한 동인계열이 조정에서 강한 세력을 형성하였기에 조정에서는 전보다는 강화되었지만 엄정하지 않은 상태의 군비를 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 관군이 거둔 승리는 수군의 승리뿐이었고, 육군의 승리로는 오직 김시민의 영도하에 진주성에서 거둔 승리밖에 없었다.

문제는 관군의 연이은 패배와 의병의 승리가 아니라 조정이 보여준 태도였습니다. 조정은 한양을 버렸고, 심지어 선조 자신은 국가를 들어 명에 내부할 의견마저 제시하였기에 민심이 조정을 떠나게 된 것. 중국의 당조에서는 현종이 민심을 잃자 안록산의 난을 만났을 때, 아들에게 양위를 하여 떠나간 민심을 황실과 조정으로 되돌리기 위해 애를 썼는데, 선조도 결국은 세자인 광해군에게 분조를 허락하게 되었다. 분조는 양위와는 조금 달라서, 선조가 재위하면서 조정을 거느리고 관직을 내릴 수 있으면서도 광해군도 조정을 설치하고 관직을 내릴 수 있는 조정이 2개가 되는 정치형태.

선조가 사림을 등용하면서 가장 먼저 선두로 치고 나간 세력은 서인이었습니다. 또한 의병을 이끌어 피의 대가로 조선을 지켜낸 이들은 거의 동인세력이었습니다. 충무공은 내근을 한 적이 없어서 직접적으로 당파싸움에 가담한 흔적은 없지만, 처음부터 그 죽음에 이르르는 순간까지 서애 유성룡의 비호하에 있었기에 동인계열로 판단되었다.



충무공이 전란 도중 입는 고신의 화는 결국 동서 당파전의 산물인 것이지요. 동인들은 조용하지만 행동으로 조선을 지키고자 하였고, 서인은 그렇게 해서 남은 조선의 권력만은 잃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양 당파의 중간에 서 있었던 선조로서는 서인의 주장이 설혹 약간은 그릇된 점이 있어도 수용을 하였다. 달아오른 민심에도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백성들이 설혹 왕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을 갖더라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어야 그들의 영웅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임란 이후 몇 차례의 반란에서 그들은 민심을 사로잡는 방편으로 몇몇 의병장의 명의를 도용하였고, 그 대가로 김덕룡은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곽재우는 강요된 은거를 택해야 했다.

명성을 떨친 의병장들을 죽이고, 수군의 전설이 되어버린 충무공을 고신한 것은 선조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마치 고려 말의 이성계처럼 왜군토벌의 공이 있는 이가 민심을 타고 개혁을 이뤄 왕이 되는 이가 출현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이 된 것.결국 이런 상황은 선조로 하여금 그릇된 선택을 강요하였다.



왕권을 유지하고 조정의 명분은 유지하는 일 그것은 의병장들에게는 그들이 죽음이나 은거를 택하여 조정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이라고 강요하는 반면 충무공에게는 그가 가진 병력에 대한 작전권을 명에 넘기게 하였으며, 후일 왜적을 무찌른 것은 天兵-당시 종주국이었던 명을 하늘이라고 한 것-의 덕택이라고 하여 조선민중의 저력을 무시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1등공신으로 무장으로는 이순신, 원균, 권율 3인만이 등재되었으나, 호성공신이라는 으리으리한 명분으로 의주까지 자신을 수행했던 문관들은 무려 18인이나 그 이름을 올리게 한 것이다.


광해군에로의 양위파동


조선시대에 정권의 재신임을 위해 ‘선위파동’을 일으킨 왕이 여럿 있다. 군주가 정치적인 주도권을 잃은 채 민심이반이 일어나고 정치적 대화와 타협이 무너질 때 친위 쿠데타적인 성격으로 선위파동이 일어났다.

선위파동은 자신의 왕위를 담보로 정치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외척을 제거하거나 세자를 교체하기 위한 것, 혹은 당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정국 주도권을 쥐기 위한 고단위 정치행위다.



실제 선조는 임진왜란 발발 당시 15번이나 선위파동을 일으켰다. 조선 518 년 동안 27명의 군주가 배출됐지만 적자 적통의 계승은 7명에 불과하다.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암투가 치열했음을 말해준다. 그런 만큼 군주는 정치적인 승부수를 위해 선위파동을 일으켰을 것이다. 선위파동을 비롯해 ‘기획사정’ ‘토사구팽’ 등 정권유지 차원에서 행한 역대 군주들의 정치행위이다.

인목대비와 정치판도

광해군이 세자로 있는 상황에서 인원왕후 박씨가 사망하였다. 아들이고 딸이고 할 것 없이 아무 자식도 생산하지 못한 채.

선조는 인원왕후가 사망하자 바로 후처를 맞이하였다. 당시에 선조의 나이 이미 50이었다.

후처로 들어온 분이 운명의 여인 인목왕후 김씨였다.

혼인할 당시 왕후의 춘추는 갓 19살이었고 광해군은 이미 30에 가까운 스물여덟이었다. 나이야 어쨌든 새파랗게 젊은 인목왕후가 공식적으로 광해군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인목왕후는 영창대군을 낳았다. 이를 기화로 그렇지 않아도 광해군을 질시하던 선조는 영창대군으로 후계자를 바꾸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이루지 못하고 영창대군이 3살되던 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서궁 유폐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자신의 왕권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과 적 자인 영창대군이 1차 대상자였다.

결과적으로 광해군은 임해군과 영창대군에게 역적의 누명을 씌워 제거하였다. 이에서 나아가 광해군은 인목대비 자체를 폐위시키려 하였다. 인목대비의 친정이 멸문의 화를 당한 것도 정해진 수순이라 할 수 있다. 귀하디 귀한 아들을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친정 식구들까지 씨몰살을 시킨 광해군이 인목대비에게는 철천지원수였다.

게다가 자신을 폐위시키려고까지 하자 두사람 사이는 더 이상 화해가 불가능 하게 되었다. 광해군의 입장에서도 갈 때까지 가는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는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고 대비에서 후궁으로 격하시키고 말았다.





유영경과 선조 유교칠신


인목대비의 어린 왕자이자 선조의 적통대군인 영창대군을 왕위계승하도록 광해군에게 계승한다는 뜻의 선조의 비망기를 감추고 선조의 유언을 듣는 유교 칠신이 있었다.

1608년(선조 41년) 2월 선조의 승하시에 임종을 한 유영경, 한응인, 박동량, 서성, 신흠, 허잠, 한준겸으로 선조의 유언은 영창대군이 보위에 올라 이들 소북파의 섭정을 통해 정권이 유지되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대북파의 암중모색과 등장



이때 선조의 후사 승계문제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이 대립하자, 대북파의 영수로써 정인홍(鄭仁弘)과 짜고 광해군의 옹립을 주장하면서 당시 선조의 뜻을 받들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는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파를 논박하였다. 이로 인하여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잠시 갑산에 유배를 당하게 되었는데, 이해 2월에 선조가 갑자기 죽고 광해군이 즉위함으로써 일약 예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대제학을 겸임하고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이첨은 정인홍과 함께 대북의 세력을 강화하는 한편, 임해군(臨海君)과 유영경을 사사하게 하는 등 소북 일파를 숙청하였다.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을 일으켜 김직재와 그 아들 백함, 선조의 손자 진릉군 태경(晉陵君 泰慶)등을 죽이고, 이듬해 강도죄로 잡힌 박응서(朴應犀), 심우영(沈友英) 등을 사주, 그들로 하여금 영창대군을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어 강화에 안치하게 하고 대군의 외조부 김제남(金悌男) 등을 사사하게 하였다.이듬해(1613년) 광해군을 부추겨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1617년에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을 발의하여 이듬해 대비를 서궁(西宮:경운궁)에 유폐했다.





아! 광해 광해



작가는 역사적 인물의 招魂에 능해야 하는가. 광해는 임진왜란에 근왕병을 모아 나름대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다했으나 서자의 신분적 한계 때문에 영창대군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소북파만의 대의명분에 실각 할 뻔한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적서 차별, 문화개혁 등에 대한 대북파의 로드맵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포용하게 되었다. 오늘날에 보면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정권이 수구보수세력이라고 규정할수는 딱히 할수 없었을 것이나 광해가 느낀 정치적 환멸과 적서차별 등의 사회적 부조리가 오늘날에도 여전한 학력과잉, 나이제한, 지역주의로 남아 사회적 장벽으로 기득권을 보장하는 장치로 여전히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법정치학 연구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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