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가옥과 프라이버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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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수 작성일13-06-24 10:21 조회6,50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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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식 전통가옥의 원형, 어명기가옥과 왕곡마을......
죽왕면 삼포리 어씨(魚氏) 집성촌의 어명기(魚命驥) 전통가옥은 1500년대에 처음 건립된 옛 부유층의 가옥, 북방식 양통집구조(ㄱ자형 겹집구조)그대로 보존된 남한의 유일한 곳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다. 국가 중요민속자료 제 131호.
같은 시기 강릉 최씨, 강릉 함씨의 집성촌이었던 오봉리 왕곡마을에도 50여동이 밀집, 보존되어 있다. 이 곳은 6.25전쟁 중에도 한 번도 폭격을 당하지 않아 이겉은 양통집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제 1호 전통 건조물 보존지구.
송지호의 호반을 끼고 울창한 송림에 쌓여 있는 왕곡(旺谷)마을은 조선시대 때는 금성(錦城),왕곡(旺谷), 적동(笛洞)마을로 불려오다가 1910년 한일합방후 간성군 죽도면과 왕곡면으로 행정구역이 분리될 때 금성, 왕곡, 적동이 합하여 오봉리로 되었다. 마을 뒤쪽에는 오음산(五音山)이 있는데 이 산의 정상에 올라가면 주위에 장현리(長峴里), 근성 왕곡리, 적동리, 서성리, 탑동리에서 들려오는 닭소리와 개짖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하여 오음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이 산밑에 선유담(仙遊潭)이있어 신선이 여기서 오음육률(五音六律)을 즐겼다고 하여 오음산이라 하기도 한다. 오봉리는 오음산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두백산(頭伯山), 공모산(拱帽山, 骨無峰, 骨美峰), 순방산(脣防山), 제공산(濟孔山:馬山,밭도산), 그리고 호근산(湖近山:갯가산) 등 5개의 산봉우리로 둘러싸여 있어 오봉리라고 한다. 오봉1리를 왕곡마을이라고 하는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아을은 병화하입지(兵火下入地)의 협소한 분지로 해발 200m이상인 5개의 야산과 하나의 커다란 호수에 의해 외부와 차단되어 수많은 외적의 침략과 6.25동란 등 전란과 재난 속에서도 전통가옥이 잘 보존되어 있어 50여동의 가옥이 집단적으로 모여있는 오봉1리가 1988년 8월 18일 전통건조물보존지구로 지정되었다. 이에 따라 매년 변형가옥에 대한 전통가옥 복원사업이 연차적으로 계속 추진되고 있다.
가옥의 공간적 특성으로는 지세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가옥이 동쪽으로 약간 기운 남향의 배치향을 취하고 있으며 담의 위치는 대부분 마을안길과 연결되는 앞마당은 개방적이고 공동의 작업공간인 반면, 뒷마당은 뒷담길에서 내려다 보더라도 지붕만 보여 개인의 사생활이 최대한 보장되도록 되어 있다. 뒷마당은 반드시 부엌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해 여성의 전용공간을 의미하고, 비교적 작은 공간에 나무를 심어 방풍과 그늘을 유도해 기온이 낮으므로 개방적인 앞마당에 내리쬐는 태양 복사열로 인한 상승기온의 영향으로 뒷마당의 차가운 공기가 앞마당쪽으로 이동, 이것이 안방 뒷문의 작은 개구부를 지나며 유속이 빨라져 안방 전면의 마루까지 열린 개구부의 맞통풍 효과에 의해 통풍 냉각작용을 유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건축의 재료는 목조 와가와 초가집이 대부분이었으나 한와가 비사고 구하기 어려워 지금은 함석과 양기와, 스레트로 대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붕의 구조는 팔작지붕이 대부분이고 담의 재료는 흙과 돌을 섞어서 쌓았다. 가옥의 평면적 특징은 겹집형으로 금강산계 문화권으로 "ㄱ"자형과 "ㅡ"자형의 분포를 보이고 있고 "ㄱ"자형의 돌출부분은 외양간으로 왼쪽에 있는 것은 북서풍에 방풍역할을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정지와 외양간은 구유를 경계로 서로 통하여 정지와 마루는 공간적으로 연결되어 채열채온에 의한 기온이 외양간과 마루까지에도 자연대류 시키는 효과가 있고 마루와 사랑방의 개구부는 채광과 통풍기능이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가옥의 후면에는 안방, 웃방, 도장방이 위치해 있는데 현재는 안방과 웃방을 터서 넓게 쓰고 있으며 도장방은 창고를 사용하고 있다.
가옥의 대부분 자연석을 재료로 기단을 쌓았고 일부는 자연석과 흙을 섞어 쌓았다. 비교적 추운 북방식 가옥구조로 문은 방과 마루 모두 한지를 바른 띠살문이고 창은 도장방과 외양간 상부의 다락에서만 볼 수 있는데 도장바의 위치는 가옥의 측면으로 봉창의 형태이다. 굴뚝은 대부분 사랑방 측면 벽체 가까이 붙어 있고 1.2 ∼ 1.5m정도의 높이로 밑이 넓고 위가 약간 좁은 원통형여며 재료는 작은 자연석이나 와편을 흙과 같이 섞어 쌓아 매우 정감있고 운치가 있다.
호수 서편의 산정에는 이 지역 독지가에 의해 1959년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송호정 정자가 있었으나 1996년 4월 23일 죽왕면 일대를 휩쓴 큰 산물로 소실되었다가 1997년 8월에 8천만원을 들여 가은 위치에 송호정 정자를 새롭게 지었다. 하지만 주변의 송림이 산불로 소실되고 정자만이 덩그렇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지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안타갑게 하고 있지만 호수에는 변함없이 찾아오는 고니와 청둥오리 등 철새들이 한가롭게 헤엄치고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라는 소설! 이 소설은 사상경찰(thought police)이 `텔레스크린(tele screen)`이라는 장치를 조작해 모든 시민을 감시함으로써 빅 브러더가 그의 절대권력을 유지하고자 한다는 소설이다. 이 텔레스크린이라는 장치는 최첨단 컴퓨터와 네트워크 그리고 광통신이 결합된 과학기술의 메커니즘으로서 어떠한 소리나 동작도 낱낱이 감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설 `1984`와 같이 지금의 정보기술(IT)은 유선전화, 휴대폰, e-메일, 팩스 등등 모든 통신수단에 대한 도청이 가능하다고 하니 우리 모두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한다. 이제는 사생활을 보호한다는 것이, 프라이버시라는 것이 이미 사전 속으로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는 것은 사생활의 평온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프라이버시 침해가 이루어진 경우에는 명예훼손과는 달리 진실증명에 의해 위법성이 조각되는 것이 아니고, 공표된 내용이 진실인 것일수록 피해자의 손해가 크다는 것이 특색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있어서의 프라이버시 보호 문제는 국민의 알 권리와의 관계에서 어느 것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로 파악해 왔다. 그래서 전통적인 이론의 하나가 유명인사ㆍ공적인물론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정치인ㆍ예술인 또는 유명인사 등에 대한 프라이버시의 권리는 일반인에 비해 어느 정도 한정적으로 해석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교형량에 의해 위법성의 유무를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공익성이라는 것을 계량할 수 있는 척도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아날로그 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의하여 개인의 정보가 보호받기 어렵게 된 현대의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정보의 공개에 관한 윤리성이 요구된다. 상업주의의 탈을 벗은 네트워크의 윤리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고도정보화 사회`라고 말하는 현대는 `프라이버시 위기의 시대`라고 특징 지을 수 있다. 정보화시대에서 개인의 프라이버시권은 개인정보권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은 `자기 정보의 컨트롤권`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정보권도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따라 타인에 의하여 너무나 쉽게 침해당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에 문제가 된 소위 X파일에 관계된 사건에서 불거진 것처럼 자기정보권이라는 것이 디지털 기술 앞에서는, 특히 정보화 사회가 고도화되고 정보 네트워크가 확대돼 감에 따라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 환경에 있는 현대에 있어서는 프라이버시를 더욱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해서는 프라이버시를 `인권`으로 파악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우리들의 사생활은 디지털 환경에서도 보호될 수 있는 것이다.
http://cafe.daum.net/krolp
죽왕면 삼포리 어씨(魚氏) 집성촌의 어명기(魚命驥) 전통가옥은 1500년대에 처음 건립된 옛 부유층의 가옥, 북방식 양통집구조(ㄱ자형 겹집구조)그대로 보존된 남한의 유일한 곳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다. 국가 중요민속자료 제 131호.
같은 시기 강릉 최씨, 강릉 함씨의 집성촌이었던 오봉리 왕곡마을에도 50여동이 밀집, 보존되어 있다. 이 곳은 6.25전쟁 중에도 한 번도 폭격을 당하지 않아 이겉은 양통집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제 1호 전통 건조물 보존지구.
송지호의 호반을 끼고 울창한 송림에 쌓여 있는 왕곡(旺谷)마을은 조선시대 때는 금성(錦城),왕곡(旺谷), 적동(笛洞)마을로 불려오다가 1910년 한일합방후 간성군 죽도면과 왕곡면으로 행정구역이 분리될 때 금성, 왕곡, 적동이 합하여 오봉리로 되었다. 마을 뒤쪽에는 오음산(五音山)이 있는데 이 산의 정상에 올라가면 주위에 장현리(長峴里), 근성 왕곡리, 적동리, 서성리, 탑동리에서 들려오는 닭소리와 개짖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하여 오음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이 산밑에 선유담(仙遊潭)이있어 신선이 여기서 오음육률(五音六律)을 즐겼다고 하여 오음산이라 하기도 한다. 오봉리는 오음산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두백산(頭伯山), 공모산(拱帽山, 骨無峰, 骨美峰), 순방산(脣防山), 제공산(濟孔山:馬山,밭도산), 그리고 호근산(湖近山:갯가산) 등 5개의 산봉우리로 둘러싸여 있어 오봉리라고 한다. 오봉1리를 왕곡마을이라고 하는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아을은 병화하입지(兵火下入地)의 협소한 분지로 해발 200m이상인 5개의 야산과 하나의 커다란 호수에 의해 외부와 차단되어 수많은 외적의 침략과 6.25동란 등 전란과 재난 속에서도 전통가옥이 잘 보존되어 있어 50여동의 가옥이 집단적으로 모여있는 오봉1리가 1988년 8월 18일 전통건조물보존지구로 지정되었다. 이에 따라 매년 변형가옥에 대한 전통가옥 복원사업이 연차적으로 계속 추진되고 있다.
가옥의 공간적 특성으로는 지세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가옥이 동쪽으로 약간 기운 남향의 배치향을 취하고 있으며 담의 위치는 대부분 마을안길과 연결되는 앞마당은 개방적이고 공동의 작업공간인 반면, 뒷마당은 뒷담길에서 내려다 보더라도 지붕만 보여 개인의 사생활이 최대한 보장되도록 되어 있다. 뒷마당은 반드시 부엌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해 여성의 전용공간을 의미하고, 비교적 작은 공간에 나무를 심어 방풍과 그늘을 유도해 기온이 낮으므로 개방적인 앞마당에 내리쬐는 태양 복사열로 인한 상승기온의 영향으로 뒷마당의 차가운 공기가 앞마당쪽으로 이동, 이것이 안방 뒷문의 작은 개구부를 지나며 유속이 빨라져 안방 전면의 마루까지 열린 개구부의 맞통풍 효과에 의해 통풍 냉각작용을 유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건축의 재료는 목조 와가와 초가집이 대부분이었으나 한와가 비사고 구하기 어려워 지금은 함석과 양기와, 스레트로 대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붕의 구조는 팔작지붕이 대부분이고 담의 재료는 흙과 돌을 섞어서 쌓았다. 가옥의 평면적 특징은 겹집형으로 금강산계 문화권으로 "ㄱ"자형과 "ㅡ"자형의 분포를 보이고 있고 "ㄱ"자형의 돌출부분은 외양간으로 왼쪽에 있는 것은 북서풍에 방풍역할을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정지와 외양간은 구유를 경계로 서로 통하여 정지와 마루는 공간적으로 연결되어 채열채온에 의한 기온이 외양간과 마루까지에도 자연대류 시키는 효과가 있고 마루와 사랑방의 개구부는 채광과 통풍기능이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가옥의 후면에는 안방, 웃방, 도장방이 위치해 있는데 현재는 안방과 웃방을 터서 넓게 쓰고 있으며 도장방은 창고를 사용하고 있다.
가옥의 대부분 자연석을 재료로 기단을 쌓았고 일부는 자연석과 흙을 섞어 쌓았다. 비교적 추운 북방식 가옥구조로 문은 방과 마루 모두 한지를 바른 띠살문이고 창은 도장방과 외양간 상부의 다락에서만 볼 수 있는데 도장바의 위치는 가옥의 측면으로 봉창의 형태이다. 굴뚝은 대부분 사랑방 측면 벽체 가까이 붙어 있고 1.2 ∼ 1.5m정도의 높이로 밑이 넓고 위가 약간 좁은 원통형여며 재료는 작은 자연석이나 와편을 흙과 같이 섞어 쌓아 매우 정감있고 운치가 있다.
호수 서편의 산정에는 이 지역 독지가에 의해 1959년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송호정 정자가 있었으나 1996년 4월 23일 죽왕면 일대를 휩쓴 큰 산물로 소실되었다가 1997년 8월에 8천만원을 들여 가은 위치에 송호정 정자를 새롭게 지었다. 하지만 주변의 송림이 산불로 소실되고 정자만이 덩그렇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지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안타갑게 하고 있지만 호수에는 변함없이 찾아오는 고니와 청둥오리 등 철새들이 한가롭게 헤엄치고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라는 소설! 이 소설은 사상경찰(thought police)이 `텔레스크린(tele screen)`이라는 장치를 조작해 모든 시민을 감시함으로써 빅 브러더가 그의 절대권력을 유지하고자 한다는 소설이다. 이 텔레스크린이라는 장치는 최첨단 컴퓨터와 네트워크 그리고 광통신이 결합된 과학기술의 메커니즘으로서 어떠한 소리나 동작도 낱낱이 감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설 `1984`와 같이 지금의 정보기술(IT)은 유선전화, 휴대폰, e-메일, 팩스 등등 모든 통신수단에 대한 도청이 가능하다고 하니 우리 모두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한다. 이제는 사생활을 보호한다는 것이, 프라이버시라는 것이 이미 사전 속으로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는 것은 사생활의 평온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프라이버시 침해가 이루어진 경우에는 명예훼손과는 달리 진실증명에 의해 위법성이 조각되는 것이 아니고, 공표된 내용이 진실인 것일수록 피해자의 손해가 크다는 것이 특색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있어서의 프라이버시 보호 문제는 국민의 알 권리와의 관계에서 어느 것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로 파악해 왔다. 그래서 전통적인 이론의 하나가 유명인사ㆍ공적인물론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정치인ㆍ예술인 또는 유명인사 등에 대한 프라이버시의 권리는 일반인에 비해 어느 정도 한정적으로 해석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교형량에 의해 위법성의 유무를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공익성이라는 것을 계량할 수 있는 척도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아날로그 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의하여 개인의 정보가 보호받기 어렵게 된 현대의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정보의 공개에 관한 윤리성이 요구된다. 상업주의의 탈을 벗은 네트워크의 윤리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고도정보화 사회`라고 말하는 현대는 `프라이버시 위기의 시대`라고 특징 지을 수 있다. 정보화시대에서 개인의 프라이버시권은 개인정보권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은 `자기 정보의 컨트롤권`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정보권도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따라 타인에 의하여 너무나 쉽게 침해당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에 문제가 된 소위 X파일에 관계된 사건에서 불거진 것처럼 자기정보권이라는 것이 디지털 기술 앞에서는, 특히 정보화 사회가 고도화되고 정보 네트워크가 확대돼 감에 따라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 환경에 있는 현대에 있어서는 프라이버시를 더욱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해서는 프라이버시를 `인권`으로 파악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우리들의 사생활은 디지털 환경에서도 보호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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