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왕의 호칭뒤에 조와 종을 다르게 붙인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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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재문 작성일13-06-14 13:14 조회3,78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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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미양
질문을 잘 읽어 보았어요.
박양이 묻는 질문이 스스로 잘 몰라서 묻는 것이라서 용서를 해 달라고 하는데...
아마 나도 잘 모르는 내용이라 내가 더 미안하다네.왜냐하면 정확히 근거를 알아야 하는데 그정도로 적확히 잘 모르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고 정상이라네.
왜냐 하면 이런내용은 조선왕조 실록을 읽어보아야만 정확히 알수 있기 때문이라네.박양도 나도 잘모르는 것이 당연하나,그러나 우리 조상의 전통문화의 한 부분이기에 남이 아닌 우리가 정확히 알아야 하기에 설명을 해보기로 하겠네.
우리가 알고 있는 태조.정종.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순조등의 임금에 대한 명칭은 그 왕이 죽은 뒤에 붙여준 그 왕의 무덤의 이름이라네.
먼저 임금이 죽으면 임금의 업적에 상응한 시호와 묘(무덤)에 대한 명칭인 묘호를 정하여 붙이는데 임금의 묘의 명칭을 함부로 붙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큰일이며,묘호를 지어주는 임금도 2급이상의 신하들의 의논속에 찬반이 갈리면 [조]라고 해야 할지,[종]이라고 붙여야 할지 결정을 감히 함부로 못하고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겨우 정하는 경우도 있다네.그리고 정한 뒤에도 후일의 다른 임금이 [종]을 [조]로 고치는 경우와 이런 경우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네.
우리조선왕조의 경우만 살펴보면 조상이라는 [조]의 묘호를 가진 왕은 태조.세조.선조.인조.영조.정조.순조가 있고 나머지 왕의 묘의 명칭에는 [종]자를 붙이고 있는데,이 중에서 선종은 광해군때에 다시 선조로 고치고,영종은 고종26년(1889)에 다시 영조로 고쳤고,정종은 광무 3년(1899)년에 정조로 고친 것이라네.
그래서 실록을 살펴본 바를 요약해 보면.
두가지 큰 원칙이 있었다고 볼 수 있네.
(1)[조]라고 붙이는 경우는 공을 세운 임금의 무덤의 호칭에 붙이고.그외 나 머지 임금은 덕이 있는 경우라고 해서 [종]자를 붙이고,
(2)부자지간에 왕위를 계승한 경우,그 아들의 무덤의 명칭에는 [종]자를 붙이는 원칙이 있었다네.
예외적으로
(1)부자지간이 아니면서 왕위를 계승한 경우는 [종]자를 붙이지 않고,[조]자를 붙이기도 하였음.(대개 정식의 왕후의 아들이 아닌 빈(왕의 첩)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한 경우에 [조]자가 붙는 경우도 적지 않은 현상이라네.
(2)폭군이나 사후에 왕의 칭호가 박탈당한 경우는 묘호도 없고 대원군등 같이 [군]자를 붙이는데 이것은 왕의 칭호지 묘호는 아니라네.(노산군.연산군.광해군)
그래서 이태조는 나라를 세로 세운 공이 있어서 ,그리고 세조는 조카의 왕위를 빼앗기도 하였지만,사륙신들이 죽는등 무오사화를 거치며 반역의 정치적인
시련을 이겼다고(?),선조는 임난을 겪었다고(?),인조때에는 반정으로(구테타),영조.정조는 원래는 영종.정종이 었으나 후에 탕평책으로 공을 세웠다고,영조로,정조는 사도세자인 아버지가 정치적으로 죽고나자 아버지 대신으로 왕위를 이어 받은 공으로 정조라고 고쳤다네.순조는 천주교와 홍경래난을 이겨낸 공으로 [조]라고 붙였다네.그러나 실록을 보면,세조나 선조등에 대해서는 [종]으로 해야 하는데에도 [조]를 붙인데 대한 찬반비판의견이 갈라지며,비난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네.
이상과 같은 내용이 실록의 대강의 기록의 내용이라네.
그래서 참고로 실록내용을 소개하겠으니 더 정확히 우리 전통문화속의 한 단면을 이해 하기로 해 보세.
광해 원년2월8일(을축) 대신이 아뢰기를,
“대행 대왕의 묘호(廟號)를 지금 바야흐로 의정(議定)하고 있는데 신들의 의견은 모두 ‘대행 대왕께서는 나라를 빛내고 난(亂)을 다스린 전고에 없던 큰 공렬이 있으니, 진실로 조(祖)라고 일컫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제왕이 공을 세운 경우에는 조(祖)라고 일컫고 덕(德)이 있는 경우에는 종(宗)이라고 일컫는 뜻이 이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묘호를 조라고 일컫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감히 여쭙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의 뜻도 이와 같으니 아뢴 내용대로 조라고 일컫는 것이 매우 온당하겠다.”
하였다.【원전】 31 집 261 면
광해 00년02월10일(정묘) 정언 이사경(李士慶)이 와서 아뢰었다.
“옛날 송 고종(宋高宗)이 붕(崩)하였을 적에 홍매(洪邁)가 세조(世祖)에게 묘호(廟號)를 올릴 것을 청하자, 우무(尤?)가 말하기를 ‘광무제(光武帝)는 장사왕(長沙王)의 후손으로서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우뚝하게 일어나 애제(哀帝)·평제(平帝)를 직접 계승하지 않았으니 조(祖)라고 일컫는 것을 혐의할 것이 없다. 그러나 태상(太上)께서는 중흥(中興)한 것은 광무제와 같【원전】 31 집 262 면
광해 00/02/13(경오) 홍문관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예기》를 보건대 ‘조(祖)는 공이 있는 데 대한 호칭이고 종(宗)은 덕이 있는 데 대한 호칭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대행 대왕께서는 공렬이 고금에 우뚝이 뛰어났으니 조라고 일컫는 것이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만 단, 역대의 중흥한 임금은 모두 종으로 일컫고 있습니다.
【원전】 31 집 263 면
광해 00/02/17(갑술) 예조가 아뢰기를,
“조(祖)로 일컫는 일에 대해 대신(大臣)과 의논하니, 이산해는 ‘부자(父子)가 대를 이었을 경우에는 으레 조(祖)라고 일컫지 않고 종(宗)이라고 일컬었으니 조라는 호칭을 더하는 것은 삼가 미안스러울 것 같다.’ 했고, 이원익·이덕형·윤승훈·한응인 등은 ‘종(宗)으로 일컫는 것이 의당하다는 뜻으로 이미 의계(議啓)하였는데 지금도 이동(異同)이 없다.’ 했고, 이항복은 ‘종(宗)이 조(祖)보다 낮고 조가 종보다 높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 신의 당초 의견이다.’ 했고, 기자헌·심희수·허욱도 또한 ‘조라고 일컫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원전】 31 집 267 면
광해 00/02/21(무인) 대신들이 아뢰기를,
“신들이 《실록(實錄)》을 참고하여 반복하여 상의한 결과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는 선양(禪讓)받아 중흥시켰으니 조(祖)라고 일컫는 것이 진실로 당연합니다. 대행 대왕께서는 재조(再造)의 공덕이 있기는 합니다만, 대를 이어 수성(守成)하였으니, 사체가 본래 다릅니다. 따라서 종(宗)으로 일컫는 것이 당연하겠기에 감히 아룁니다.”
【원전】 31 집 273 면
광해 00/02/23(경진) 예조의 <낭청이> 대신들의 뜻으로 아뢰기를,
“역대 제왕들을 조사하여 보건대 비록 성대한 공렬이 있다고 해도 계체(繼體)이면서 조(祖)라는 호칭을 일컬은 때는 있지 않았습니다. 사리에 의거 헤아려 본다면 대행 대왕의 묘호는 종(宗)이라고 일컫는 것이 윤당(允當)합니다. ,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원전】 31 집 278 면
효종 00/05/23(신사) 대행 대왕의 묘호(廟號)를 개정해서 올리기를 인조(仁祖)라 하고, 시호를 헌문 열무 명숙(憲文烈武明肅)이라 하였다.【몸을 바르게 하여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숙(肅)이다. 나머지는 모두 위에 나타났다.】 대신 이하가 아뢰기를,
“시호를 의논하던 날에 뭇사람의 의논이 모두, 공이 있는 분을 조(祖)라 하고 덕이 있는 분을 종(宗)이라 하는 것이 고례(古禮)인데 대행 대왕께서는 공은 조종(祖宗)을 빛내시고 덕은 온 누리에 입혔으니 높혀 조(祖)라 하는 것이 실로 고례에 부합하며 시법에 열(烈)자에 대한 해석이 셋이 있는데 그 중에 덕을 지켜 업을 높였음을 일컫는 것으로 정하는 것이 묘호에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같았으므로 열자로 의논해 정했던 것입니다. 【원전】 35 집 366 면
효종 00/05/23(신사) 응교 심대부(沈大孚)가 상소하기를,
“예로부터 조(祖)와 종(宗)의 칭호에 우열(優劣)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창업한 군왕만이 홀로 조(祖)로 호칭되었던 것은 기업(基業)을 개창(開創)한 1대(代)의 임금이어서 자손이 시조(始祖)로 삼았기 때문이었으니, 역대의 태조(太祖), 고조(高祖)의 유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선대의 뒤를 이은 군왕들은 비록 큰 공덕이 있어도 모두 조로 호칭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깨뜨릴 수 없는 정리(定理)입니다.
우리 나라의 세조 대왕은 친히 노산(魯山)의 선위(禪位)를 받아 위로 문종(文宗)의 계통을 이었는데도 오히려 묘호를 조(祖)라고 호칭한 것에 대해서는 신의 견문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러므로 선대를 이어받은 임금은 비록 공덕이 있어 영원히 체천(遞遷)하지 않는 묘가 된다고 하더라도 모두 종(宗)이 되는 것이지 조(祖)가 되지 못합니다. 이른바 공이 있으면 조라 칭하고 덕이 있으면 종이라 칭합니다만 그 뜻이 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함께 체천하지 않는 종묘에 모셔진 것이라면 종이라 해서 조보다 낮아지는 것이 아니고 조라고 해서 종보다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중종 대왕께서는 연산(燕山)의 더러운 혼란을 깨끗이 평정하시고 다시 문명의 지극한 정치를 열으셨으되 조라고 호칭하지 않고 단지 종이라 호칭하였으니 이것이 오늘날 우러러 본받아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원전】 35 집 366 면
【효종 001 00/05/23(신사) 세조 대왕의 시호를 의논할 때 누가 이를 주장했습니까. 과연 후세에 비난이 없겠습니까. 이것은 세조의 시호를 논해 정한 자들의 잘못입니다. 선조(宣祖)를 조로 칭한 것은 당시 소인들의 아첨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어찌 다시 그 전철을 밟아서야 되겠습니까. 【원전】 35 집 367 면
이상이 대강의 내용이니 정확이 이해해 두기로 하세.그럼 자네의 하는일에 많은 발전이 있기를 바라네.
2천년 구정 아침.kjm
질문을 잘 읽어 보았어요.
박양이 묻는 질문이 스스로 잘 몰라서 묻는 것이라서 용서를 해 달라고 하는데...
아마 나도 잘 모르는 내용이라 내가 더 미안하다네.왜냐하면 정확히 근거를 알아야 하는데 그정도로 적확히 잘 모르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고 정상이라네.
왜냐 하면 이런내용은 조선왕조 실록을 읽어보아야만 정확히 알수 있기 때문이라네.박양도 나도 잘모르는 것이 당연하나,그러나 우리 조상의 전통문화의 한 부분이기에 남이 아닌 우리가 정확히 알아야 하기에 설명을 해보기로 하겠네.
우리가 알고 있는 태조.정종.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순조등의 임금에 대한 명칭은 그 왕이 죽은 뒤에 붙여준 그 왕의 무덤의 이름이라네.
먼저 임금이 죽으면 임금의 업적에 상응한 시호와 묘(무덤)에 대한 명칭인 묘호를 정하여 붙이는데 임금의 묘의 명칭을 함부로 붙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큰일이며,묘호를 지어주는 임금도 2급이상의 신하들의 의논속에 찬반이 갈리면 [조]라고 해야 할지,[종]이라고 붙여야 할지 결정을 감히 함부로 못하고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겨우 정하는 경우도 있다네.그리고 정한 뒤에도 후일의 다른 임금이 [종]을 [조]로 고치는 경우와 이런 경우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네.
우리조선왕조의 경우만 살펴보면 조상이라는 [조]의 묘호를 가진 왕은 태조.세조.선조.인조.영조.정조.순조가 있고 나머지 왕의 묘의 명칭에는 [종]자를 붙이고 있는데,이 중에서 선종은 광해군때에 다시 선조로 고치고,영종은 고종26년(1889)에 다시 영조로 고쳤고,정종은 광무 3년(1899)년에 정조로 고친 것이라네.
그래서 실록을 살펴본 바를 요약해 보면.
두가지 큰 원칙이 있었다고 볼 수 있네.
(1)[조]라고 붙이는 경우는 공을 세운 임금의 무덤의 호칭에 붙이고.그외 나 머지 임금은 덕이 있는 경우라고 해서 [종]자를 붙이고,
(2)부자지간에 왕위를 계승한 경우,그 아들의 무덤의 명칭에는 [종]자를 붙이는 원칙이 있었다네.
예외적으로
(1)부자지간이 아니면서 왕위를 계승한 경우는 [종]자를 붙이지 않고,[조]자를 붙이기도 하였음.(대개 정식의 왕후의 아들이 아닌 빈(왕의 첩)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한 경우에 [조]자가 붙는 경우도 적지 않은 현상이라네.
(2)폭군이나 사후에 왕의 칭호가 박탈당한 경우는 묘호도 없고 대원군등 같이 [군]자를 붙이는데 이것은 왕의 칭호지 묘호는 아니라네.(노산군.연산군.광해군)
그래서 이태조는 나라를 세로 세운 공이 있어서 ,그리고 세조는 조카의 왕위를 빼앗기도 하였지만,사륙신들이 죽는등 무오사화를 거치며 반역의 정치적인
시련을 이겼다고(?),선조는 임난을 겪었다고(?),인조때에는 반정으로(구테타),영조.정조는 원래는 영종.정종이 었으나 후에 탕평책으로 공을 세웠다고,영조로,정조는 사도세자인 아버지가 정치적으로 죽고나자 아버지 대신으로 왕위를 이어 받은 공으로 정조라고 고쳤다네.순조는 천주교와 홍경래난을 이겨낸 공으로 [조]라고 붙였다네.그러나 실록을 보면,세조나 선조등에 대해서는 [종]으로 해야 하는데에도 [조]를 붙인데 대한 찬반비판의견이 갈라지며,비난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네.
이상과 같은 내용이 실록의 대강의 기록의 내용이라네.
그래서 참고로 실록내용을 소개하겠으니 더 정확히 우리 전통문화속의 한 단면을 이해 하기로 해 보세.
광해 원년2월8일(을축) 대신이 아뢰기를,
“대행 대왕의 묘호(廟號)를 지금 바야흐로 의정(議定)하고 있는데 신들의 의견은 모두 ‘대행 대왕께서는 나라를 빛내고 난(亂)을 다스린 전고에 없던 큰 공렬이 있으니, 진실로 조(祖)라고 일컫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제왕이 공을 세운 경우에는 조(祖)라고 일컫고 덕(德)이 있는 경우에는 종(宗)이라고 일컫는 뜻이 이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묘호를 조라고 일컫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감히 여쭙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의 뜻도 이와 같으니 아뢴 내용대로 조라고 일컫는 것이 매우 온당하겠다.”
하였다.【원전】 31 집 261 면
광해 00년02월10일(정묘) 정언 이사경(李士慶)이 와서 아뢰었다.
“옛날 송 고종(宋高宗)이 붕(崩)하였을 적에 홍매(洪邁)가 세조(世祖)에게 묘호(廟號)를 올릴 것을 청하자, 우무(尤?)가 말하기를 ‘광무제(光武帝)는 장사왕(長沙王)의 후손으로서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우뚝하게 일어나 애제(哀帝)·평제(平帝)를 직접 계승하지 않았으니 조(祖)라고 일컫는 것을 혐의할 것이 없다. 그러나 태상(太上)께서는 중흥(中興)한 것은 광무제와 같【원전】 31 집 262 면
광해 00/02/13(경오) 홍문관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예기》를 보건대 ‘조(祖)는 공이 있는 데 대한 호칭이고 종(宗)은 덕이 있는 데 대한 호칭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대행 대왕께서는 공렬이 고금에 우뚝이 뛰어났으니 조라고 일컫는 것이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만 단, 역대의 중흥한 임금은 모두 종으로 일컫고 있습니다.
【원전】 31 집 263 면
광해 00/02/17(갑술) 예조가 아뢰기를,
“조(祖)로 일컫는 일에 대해 대신(大臣)과 의논하니, 이산해는 ‘부자(父子)가 대를 이었을 경우에는 으레 조(祖)라고 일컫지 않고 종(宗)이라고 일컬었으니 조라는 호칭을 더하는 것은 삼가 미안스러울 것 같다.’ 했고, 이원익·이덕형·윤승훈·한응인 등은 ‘종(宗)으로 일컫는 것이 의당하다는 뜻으로 이미 의계(議啓)하였는데 지금도 이동(異同)이 없다.’ 했고, 이항복은 ‘종(宗)이 조(祖)보다 낮고 조가 종보다 높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 신의 당초 의견이다.’ 했고, 기자헌·심희수·허욱도 또한 ‘조라고 일컫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원전】 31 집 267 면
광해 00/02/21(무인) 대신들이 아뢰기를,
“신들이 《실록(實錄)》을 참고하여 반복하여 상의한 결과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는 선양(禪讓)받아 중흥시켰으니 조(祖)라고 일컫는 것이 진실로 당연합니다. 대행 대왕께서는 재조(再造)의 공덕이 있기는 합니다만, 대를 이어 수성(守成)하였으니, 사체가 본래 다릅니다. 따라서 종(宗)으로 일컫는 것이 당연하겠기에 감히 아룁니다.”
【원전】 31 집 273 면
광해 00/02/23(경진) 예조의 <낭청이> 대신들의 뜻으로 아뢰기를,
“역대 제왕들을 조사하여 보건대 비록 성대한 공렬이 있다고 해도 계체(繼體)이면서 조(祖)라는 호칭을 일컬은 때는 있지 않았습니다. 사리에 의거 헤아려 본다면 대행 대왕의 묘호는 종(宗)이라고 일컫는 것이 윤당(允當)합니다. ,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원전】 31 집 278 면
효종 00/05/23(신사) 대행 대왕의 묘호(廟號)를 개정해서 올리기를 인조(仁祖)라 하고, 시호를 헌문 열무 명숙(憲文烈武明肅)이라 하였다.【몸을 바르게 하여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숙(肅)이다. 나머지는 모두 위에 나타났다.】 대신 이하가 아뢰기를,
“시호를 의논하던 날에 뭇사람의 의논이 모두, 공이 있는 분을 조(祖)라 하고 덕이 있는 분을 종(宗)이라 하는 것이 고례(古禮)인데 대행 대왕께서는 공은 조종(祖宗)을 빛내시고 덕은 온 누리에 입혔으니 높혀 조(祖)라 하는 것이 실로 고례에 부합하며 시법에 열(烈)자에 대한 해석이 셋이 있는데 그 중에 덕을 지켜 업을 높였음을 일컫는 것으로 정하는 것이 묘호에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같았으므로 열자로 의논해 정했던 것입니다. 【원전】 35 집 366 면
효종 00/05/23(신사) 응교 심대부(沈大孚)가 상소하기를,
“예로부터 조(祖)와 종(宗)의 칭호에 우열(優劣)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창업한 군왕만이 홀로 조(祖)로 호칭되었던 것은 기업(基業)을 개창(開創)한 1대(代)의 임금이어서 자손이 시조(始祖)로 삼았기 때문이었으니, 역대의 태조(太祖), 고조(高祖)의 유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선대의 뒤를 이은 군왕들은 비록 큰 공덕이 있어도 모두 조로 호칭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깨뜨릴 수 없는 정리(定理)입니다.
우리 나라의 세조 대왕은 친히 노산(魯山)의 선위(禪位)를 받아 위로 문종(文宗)의 계통을 이었는데도 오히려 묘호를 조(祖)라고 호칭한 것에 대해서는 신의 견문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러므로 선대를 이어받은 임금은 비록 공덕이 있어 영원히 체천(遞遷)하지 않는 묘가 된다고 하더라도 모두 종(宗)이 되는 것이지 조(祖)가 되지 못합니다. 이른바 공이 있으면 조라 칭하고 덕이 있으면 종이라 칭합니다만 그 뜻이 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함께 체천하지 않는 종묘에 모셔진 것이라면 종이라 해서 조보다 낮아지는 것이 아니고 조라고 해서 종보다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중종 대왕께서는 연산(燕山)의 더러운 혼란을 깨끗이 평정하시고 다시 문명의 지극한 정치를 열으셨으되 조라고 호칭하지 않고 단지 종이라 호칭하였으니 이것이 오늘날 우러러 본받아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원전】 35 집 366 면
【효종 001 00/05/23(신사) 세조 대왕의 시호를 의논할 때 누가 이를 주장했습니까. 과연 후세에 비난이 없겠습니까. 이것은 세조의 시호를 논해 정한 자들의 잘못입니다. 선조(宣祖)를 조로 칭한 것은 당시 소인들의 아첨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어찌 다시 그 전철을 밟아서야 되겠습니까. 【원전】 35 집 367 면
이상이 대강의 내용이니 정확이 이해해 두기로 하세.그럼 자네의 하는일에 많은 발전이 있기를 바라네.
2천년 구정 아침.kj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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