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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진포 ( 赤珍浦) 位置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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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수 작성일13-06-25 13:04 조회2,7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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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진포 임진왜란 해전승첩지를 가다
임진왜란 1차 해전지 적진포 동해면 내산리 적포로 밝혀져



이 글은 임진왜란 1차 해전인 옥포해전 및 적진포 해전에서 종래 적진포가 통영시 광도면 적덕리라는 견해를  반박하고 새로이 적진포의 위치를 규명 충무공의 업적을 조명하여  충무공의 얼과 행동이 우리나라를 선진통일강국으로 만들어 갈수 있게 하고 싶은 소박한 마음에서 쓰게되었다.


바람이 조금 매서운 초겨울 날씨에 적진포를 향토자산답사회 회원들과 함께 찾아나섰다. 12월 3일 마침 일요일이라 시간을 내어 승용차로 다녀왔다. 여기를 방문한 후 가까운 신라고찰인 대한불교 법화종 벽발산 안정사를 찾아 참배를 했다. 조금 추운날 이라 그렇게 바람이 매섭지 않았다.



경남 고성군 고성읍에서 <천해지 조선소>를 지나 한내마을 삼거리에서 덕곡마을 삼거리를 진입 77번 국도를 5분 정도 달려 전도마을에 도착했다.12시 가량 길가에서 우연히 전도어촌계장 박춘길 씨를 만나 적포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 전도마을에는 수명이 500년 이상이 된 고목이 자리잡고 있는데 여기서 동제를 지낸다. 이 고목만이 임진왜란 승첩지 적진포를 증명해 주는 듯 했다.



적포에서 만난 삼광호 선장은 적포를 사투리로 '젖개'라고 낯선 과객에게 일러주었다. 앞에 있는 산은 '앞산'으로 부르며 그 옆산에 철마산성이 있다고 몸집이 좋은 삼광호 선장은 일러주었다.

조선특구로 이곳 13만평을 매립한다고 하니 향토자산 답사회 맹렬회원들이 아니었다면 임진왜란의 1차 해전 승첩지인 이 적진포(적포)를 찾을수 없을 뻔하지 않았나 싶어 안도감을 갖게 되었다.



고산자 김정호의 동여도에 동해면 방면의 산성은 바로 철마산성이다. 임진왜란시 동해면은 그야말로 해전의 보루였다. 요즘 동해면 조선특구로 해안을 매립해 조선소를 만드는 등 개발이 시작되고 있다. 동아지중해의 교두보 역활을 할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승첩지 적진포(적포)는 철마산성과 가까운 전도마을에 있다.

잡안개 덮을개 젖개처럼 갯벌이 있는 갯가는 사투리로 '개'를 붙여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를 한문으로 옮길때는 浦(포)로 표기하게 된다. 다른 시골의 어촌처럼 이곳 적진포도 조용하고 소박한 포구였는데 고기잡이 배 몇척이 대어 있었다. 적진포가 있는 큰 길 건너에는 안악이씨 문중에서 세운 '범바위골'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적진포 해전은 어떤 해전인가 살펴보고 전도마을의 인문지리학적 데이터를 덧붙인다.




1592년 원균, 이순신, 이억기 연합함대는 진해 고리량에 왜적이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여수 전라좌수영에서 출발했다. 적진포 해전은 옥포 해전과 합포 해전이 있은 그 다음날인 (선조 25) 음력 5월 8일에 발생했다. 전날의 여세를 몰아 조선 수군은 고성의 적진포에 정박 중이던 왜군 함대를 공격하여 모두 11척을 격침시켰다. 이순신의 1차 출정은 적진포 해전으로 마감하고 다시 본영으로 복귀한다. 이때에는 아직 거북선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보통 음력 5월 7일의 옥포 해전과 합포 해전, 그리고 이 적진포 해전까지 합쳐서 옥포 해전으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적진포는 진해(= 오늘날의 진동만)와 가까운 지역이어야 하는 것이다.

당동이 적진향으로 불렸다고 하나 오늘날의 지명과는 너무 동떨어져 억측에 가깝다. 가령 삼국유사에 보이는 포상팔국의 고사포는 고성과 그 음이 비슷하다. 이러한 면에서
적진포와 유사한 음이나 한자를 가진 곳을 찾아보면 광도면 적덕리와 동해면 내산리 적포만이 있다.

필자는 임진왜란 전사의 적진포(赤珍浦)는 경남 고성군 동해면 내산리 적포만(赤浦灣)이라 확신한다.


아마도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조선 해군의 대제독 이순신의 이 불멸의 기록은 세계 해전사에 영원히 신화로 남을 것이다. 그는 36번의 크고 작은 해전에서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일본의 군신, 도고 헤이아치로 제독이 보는 이순신 장군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준 전쟁이 쓰시마 해전이다. 여기서 일본은 3배에 달하는 러시아 함대를 전멸시켰으며 결국 이 해전은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구심점이 된다. 도고 헤이하치로는 바로 이 해전을 승리로 이끈 제독이며 일본에서는 '군신'이라는 칭호를 받는 영웅이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전승축하연이 마련되었고 그 자리에서 한 기자가 영국의 넬슨[나폴레옹의 함대를 무찌른 영국 해군제독. 영국의 영웅 - 해전사를 연구할 때 항상 거론되는 유명한 인물이다]과 도고 자신과 비교한다면 어떻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도고는

"넬슨은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비슷한 수준의 함대를 가지고 싸워서 이겼다.(25 대 30 정도) 그러나 나와 나의 함대는 러시아의 발틱함대의 3분의 1 규모로써 이겼다."라고 말해 자신이 넬슨보다 우위에 있다는 표현을 한다.

그러자 기자왈, 그렇다면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어떠냐 하자,
"이순신 장군에 비하면 나는 일개 하사관에 불과하다. 만일 이순신 장군이 나의 함대를 가지고 있었다면 세계의 바다를 제패했을 것이다."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러시아 함대와 일전을 치르기 위해 도고는 이순신 장군의 영혼에 기원하는 의식을 갖기도 했으며 일제 때는 일본의 해군 사령부가 있던 경남 진해에서 약 40km 떨어진 통영 충렬사에 가 주기적으로 진혼제를 지내는 것이 일본 해군의 중요 행사 중 하나였다고 한다.

영국학자 발라드라는 사람은
"영국 사람으로서 넬슨[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른 영국 해군제독. 영국의 영웅]과 견줄만한 사람이 있다는걸 인정하긴 항상 어렵다. 그러나 그렇게 인정될만한 인물이 있다면, 그 인물은 바로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위대한 동양의 해군 사령관 이순신 장군 뿐이다."
이렇게 쓰고 있다.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동여도에는 적진포와 남촌이 표기되어있고 철마산성을 선으로 그려넣고있다.
철마산성은 철마산 정상 아래 능선을 따라 산 정상을 둘러 쌓은 테뫼성으로 소가야 때 쌓은 성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동여도에는 적진포(積珍浦)라고 나온다. 적(積)이라고 씌여진 곳이 대략 적진포이다.

해양수산부가 2002년 발간한 <한국의 해양문화> 동남해역 편에는 적진포가 경남 고성군 동해면 내산리 적포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정부의 공식문서를 믿지못하는 것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다를바 없다.



고성평야 동쪽에 있는 철마산은 지리적으로 서쪽을 제외한 나머지가 바다에 둘러 싸인 곳이다. 특히 북쪽에는 임진왜란 때의 전적지인 당항포만이 있어 남해안을 관망할 수 있는 요충지이다. 곡선을 이루고 있는 성벽은 자연 암벽 사이에 돌을 쌓은 형태인데, 현재 남아있는 부분은 둘레 250m, 높이 3m 정도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화살을 막기 위한 방패로 사용하기 위해 철로 말(馬) 수십기를 만들어 세웠으나, 왜적이 침입하면서 가져가서 다시 인근 주민들이 돌로 만들어 세웠다고 하며, 현재 석마(石馬) 1필이 남아있다.

성 주위에 내산리고분군(사적 제120호), 양촌리에 무덤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성은 가야 때 만들어 왜적을 방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동명의 유래(由來)
전도마을은 본래 고성군 포도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내산리에 편입되어 왔으며 1984년 고성군의 이동 명칭 및 행정구역 확정시 전도마을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形成)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최초로 전도마을에 입촌하였다는 김해김씨(金氏)의 26대 자손이 현재 거주하고 있으며, 또한 약 450여년전에 마을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이 동신제(洞神祭)를 지내던 터에 서나무와 팽나무를 심어 큰 숲을 이르고 있는 숲땀과 큰바위에 호랑이가 놀았다는 범바위골(호석곡(虎石谷))과 고려장(高麗葬)을 하였다는 고래실(古來室) 등의 취락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 마을의 지세(地勢)
전도마을은 동해면 소재지인 장기마을에서 동북쪽으로 약 5km 떨어진 해안지대에 "괭이"바다를 앞으로 넓은 해안 중턱에 자리잡은 반농·농어촌 마을로 산록지대에 산재해 있는 농경지는 천수답이 많으며 해안지선의 공동어장은 바지락등 패조류의 생산이 많고 피조개등 양식어업이 성행하고 있는 지대이다.

◎ 주민(住民)
마을 주민은 65가구에 216명(남자:102명, 여자:114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거주민의 성씨는 김해김씨(金氏), 안악이씨(李氏), 밀양박씨(朴氏), 창원황씨(黃氏), 고성이씨(李氏) 등 여러 성씨가 거주하고 있다.

◎ 주민의 생업(生業)
주민의 생업은 반농·반어업으로 농업은 미·맥 위주의 농업에 일부 축산을 겸하는 농가도 있으며 어업은 근해의 어선어업과 피조개등 양식어업으로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는 잘사는 마을이다.

◎ 주거환경(住居環境)
마을의 초가지붕은 1970년대에 새마을 사업으로 전면 지붕개량을 하였으며, 지금은 현대식 주택을 건축하는 가구도 있고 주택구조도 입식부엌과 수세식 화장실로 개량을 하고 있으며, 문화시설인 전기, 전화, TV등은 전 가구에 보급이 이루어져 가고 있다.

◎ 교육(敎育)
초등학교는 동해초등학교에, 중학교는 동해중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고등학교는 고성, 마산 등지의 고등학교에 교육을 받고 있다.

◎ 사적(事蹟) 및 기타
◇ 내산리 고분군(古墳群)
내산리 적포만(赤浦灣)의 해안일대와 수양산 구릉지대에 군재(群在)하는 36기의 큰 봉토분(封土墳)으로서 원래는 백여기가 있었다.
이 주변에서 나온 토기편의 특징으로 보아 가야지역의 것과 같으며 남아있는 고분지역의 대부분이 전·답 사이와 야산에 분봉이 큰것만 남아있다.
봉토는 직경 15∼20m에 가까운 대형분으로 가야고분과 같다.
남해안의 좁은 평야지대인데 이렇게 큰 고분이 있다는 것은 주목할 일이다. 특히 "수혈식(竪穴式)석곽분(石槨墳)"에 해당 된다고 할 수 있으나 농지로 개간되어 고분벽이 흩어져 깨뜨려지고 주민들이 발견한 것은 토기 완제품 4개와 파손품 3개로 동해중학교에 보존되어 있다. 내산리 고분군은 1961년 3월 2일에 유적 제120호로 지정되었다.
◇ 생숲
마을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는 숲으로 마을의 명물로 보존되고 있다.
전하는바에 의하면 약 450여년전에 마을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이 동신제(洞神祭)를 지내던 자리에 서나무와 팽나무를 심어 큰 숲을 이룬 것으로 마을 이름도 "숲땀"으로 부르고 있다.
옛날부터 선조들의 놀이터로 지금은 마을주민들의 휴식처로 잘 보존되고 있다.

◎ 동제(洞祭)
바다에 접해 있는 전도마을은 농토는 좁고 원래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옛날 마을의 나무위에 학 한쌍이 둥지를 틀고 살아 주민들도 학을 길조(吉鳥)로 여기고 소중히 생각했다.
어느날 수컷 한 마리가 나무에 앉은 채 죽었고 그 후로부터 고기잡이배가 돌아오지 않거나 소가 머리가 둘이 달린 기형송아지를 낳고 일가족이 원인 모르게 죽는 등 재앙이 끊이지 않았다.
주민들은 이 같은 원인이 학의 노여움 때문이라고 판단 학이 앉았던 나무에 동제를 지냈다.
그로부터 마을에서는 재앙이 없어져 동제의 영험을 철저히 믿는 주민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제물은 일반가정의 제사와 비슷하며 별도의 제관대신 소원 성취를 원하는 주민이면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다만 제에 참여한 사람은 한해동안 궂은 일을 당한 집에 가지 않고 초상을 당한 사람은 제에 참여할 수 없다.
동제는 매년 음력 섣달 그믐날밤 11시에 지내고 있다.

◎ 지명일화(逸話)
◇ 범바위(호암(虎岩))
범바위골에 있는 바위로 옛날에 범 한쌍이 발정기가 되어 바위 위에서 교미를 하던중 하늘에서 갑자기 뇌성 벼락을 치는 바람에 숫컷이 놀라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 후로부터 밤만되면 암컷이 달을 보고 울부짖고 있어 주민들이 고사를 지내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여 죽은 수컷 호랑이의 혼을 기리고, 암컷을 달래 보내 놓고 나니 그 곳에 범의 형상을 한 바위가 생겨났다고 하며, 그 바위를 일컬어 범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옛부터 궁합이 맞지 않고 고민하는 청춘 남녀들이 범바위에서 자기의 소원 성취를 빌었다고도 한다.
◇ 고래실(古來室)
소가야시대의 고분으로 추정하는 내산리 고분군의 고려장(高麗葬)을 고래장(古來葬)으로 인정하여 고래실로 표기하여 마을명을 고래실로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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