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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과 4학년 한국법제사;한국전통 법조윤리와 공직자 정신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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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원진 작성일13-06-27 12:59 조회2,8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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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교수님 : 김재문 교수님
학      번 :  2007113256
학      과 :    법학과
이      름 :    김원진

 
I. 서설

 신임 경찰공무원으로 교육을 받고 근무를 시작한지가

약 10개월 정도가 된 이 시점에 경찰공무원이 되기 전에 생각했던 것과

경찰공무원이 될 때의 초심을 잃어가고 있는 찰나에

교수님 덕분에 한국전통 법조윤리와 공직자정신이라는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과거 조선시대 법조윤리를 들여다 봄으로 인해서 경찰공무원으로서

쉽게 간과할 수 있는 부분들을 다시금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Ⅱ. 본론

 한국전통 법조윤리와 공직자 정신이라는 책에서 명재판관과,

자랑스러운 법조인, 공직자 부분을 특히 관심 있게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음보로 벼슬에 나가 여러 관직을 거쳐 전법정랑에 이르렀다.

이때에 권신이 노비를 가지고 소송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허주는 그것이 사곡한 것인 줄 알고 장차 결단하고자 하였다. 장관은 세력에 위협되어 음으로 감싸주었으나, 허주는 법을 지켜 아부하지 아니하였다. 장관이 그 의논을 누설하자 권신이 허주의 사제로 여러 번 찾아와 말을 낮추어 이를 청하였으나, 주는 끝끝내 쫓지 아니하였다. 권신이 깊이 원망하여 정방제조가 됨에 미쳐 곧 허주의 직임을 파면시켰다.

 무진년에 도 지안성군사가 되니, 아전과 백성들이 의복하여 쫓았다. 임기가 차서 개성소운에 제수되었고 경오년에 다시 사헌장령으로 옮겼다가, 얼마 아니 되어 공부총량에 제수되었다. 이 때에 전법이 크게 무너져 호족과 세도가들이 겸병하여 관가의 창고가 다 비었으므로, 조신으로 강명정직한 자를 택하여 이를 다스려 바르게 함에 허주가 뽑혀 경기우도염문계정사가 되었다.

신미년에 호조총랑으로 옮겼고, 임신년에 그대로 경기우도안렴사가 되었다. 우리 태조께서 즉위함에 미쳐 내부경에 배수되고 정축년에는 본직을 가지면서 사헌중승을 겸직하였다. 이 때에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경중과 외방의 쟁송을 결단하게 하였는데 허주로서 도청사를 삼아 그 일을 다스리게 하니, 소송하는 자들이 구름같이 모였다.

 한번 송사를 들으매 즉각 기억하여 잊어버리지 아니했고, 만일에 실정을 숨기고 다시 소송하는 자가 있게되면, 분석하여 개유하고 적발하여 굴복시키기를 귀신과 같이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복종하였다.

 뒤에 변정도감이 혁파하게 되자, 모두 그 직무를 도관에 돌려보내고, 허주를 판사수감사, 지형조사로 승진시켰다. 주는 잘 곡직을 가려 소송한 자에게 이치로 굴복시켜 자퇴하게 하였으므로, 소송에 진 자도 마침내 원통함이 없었다. 기묘년에 세도가에서 비리로써 부탁하자 허주가 듣지 아니하니 드디어 지형조사에서 파직되매 소송하는 사람들이 이를 한하였다.

 신사년에 외방으로 나가 경상도안렴출척사가되고, 을유년에 형조 함의로 배수되었다. 일찍이 동료와 옥사를 의논하다가 장관의 뜻과 맞지 아니하매 허주가 극력 변정하여 듣지 아니하고, 주가 드디어 병으로 사퇴하고 집에 있기를 몇 달이 되었는데, 장관이 뉘우쳐 사과하니 이에 직임에 나아갔다.


 병술년 가을이 되어 호조좌참의로 전보되고, 겨울에 나가 판홍주목사가 되었다가 병으로 면직하였다. 기축년에 전라도 관찰사에 제주되매, 일을 만날 때마다 조금도 잊어버리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일기관찰사라.”하였다.

 경인년에 한성부 윤에 배수되고 임진년에 특별히 참지의정부사에 배명되었다. 임금이 풍뢰의 변을 만나매, 현량과 기구들이 등용되지 못하였음을 염려하여, 이에 재집에게 명하여 대권 아래에서 회의하게 하니,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허주에게로 쏠려 바로 이 제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이어서 풍병이 중하여 사직함을 허락하였다. 한성부 윤으로 옮기고, 나가서 경기관찰사가 되었는데, 다시 풍병이 중하여 사직함을 들어주었다. 갑오년에는 임금이 재난을 만나 직언을 구하니, 허주가 이르기를,

“중외의 관리들이 구폐를 고치지 못하고 우물거리며 율문을 준수하지 아니하니, 죄의 경중을 분변 못하여 부녀들도 의례 모두 옥에 가둠은 심히 온당치 못합니다. 청컨대 이제부터는 일체를 율문에 의하여 간죄와 사죄를 제외하고는, 부녀자는 가두어 둠을 허락하지 마옵소서” 하였다.


 병,신년에 자헌대부 개서유후사유후로 승진되었고, 세종이 즉위하자 판한성부사가 되었다가 병이 심하여 사직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병이 더욱 위중하여 낫지 아니하매, 자손들이 약 먹기를 청하자 허주가 웃으며 말하기를 “세상의 일은 다 끝났다. 약은 먹어서 무엇하겠느냐.” 하였다.

 자손들이 억지로 권하니 몇차례 바치는 것을 허락하였다. 병이 급하게 되자 곧 정침으로 올기고 병을 참고 견디며 일어나 몸소 목욕하고 의관을 갖추고 누워 손을 휘둘러 부녀를 물러가게 하고,

그 아들에게 가르쳐 말하기를, “무릇 상제는 힘써 검약한 것을 따르라.” 하고 기타는 말함이 없었다. 마침내 졸하니, 나이가 82세 였다. 부음이 들리자 1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조문하고 부의를 내려 주어싿. 시호를 간숙이라하니, 덕을 오로지 하여 게을리하지 아니함을 간이요, 마음을 잡아 결단함이 숙이다.

 허주는 엄정 공검하고 총명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일을 생각함에 있어 깊고 주밀하였으며, 평생 동안을 거짓으로 겉모양만을 꾸미지 않았고 망령된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비록 큰 추위나 더위에라도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서 종일 단정히 앉았었고, 늙어서도 또한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부모상이 있을 때에는 슬픔을 극진히 하였고, 속절에는 반드시 술을 베풀고 모임을 가졌었다. 아우인 허조와 허척은 모두 호수로 재보가 되었으나, 자제의 예로써 그를 섬겼다. 허주도 또한 부형의 도리로 그들을 대접하니 우애가 더욱 두터웠었다. 아들로는 허성이 있었다. 』

이렇듯 이와 같은 실록을 보면 과거에는 오늘날처럼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도 못했었고, 관직을 떠나게 되면 당장 살아가기 힘든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고 강직하며 법대로 재판을 하였던  우리의 자랑스런 조상들을 보며,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에 물질적 풍요만을 쫓는 일부 판검사 및 부조리 등을 보며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사사로운 청을 듣지 말고 공평한 마음으로 송사를 다스리도록 하라』


 성종임금이 16년(1485)에 형조판서 성준 판결사 이평을 명소하여 이평에게 전교하기를, “그대가 일찍이 사헌부 공무원을 지냈으므로, 내가 그대를 잘안다. 또 들으니, 그대가 백성을 잘 다스린다고 하므로, 본직을 제수하였다.

지금은 농사
, 가을에는 다른 여러 송사를 판결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하고,
성준에게 전교하기를, “내가 특별히 정3품 이상의 품계를 올린 등급을 더하여 판서로 발탁시켜 제수한 뜻을 경은 아는가? 형조는 일이 많은 자리이니, 사사로운 청을 듣지 말고 공평한 마음으로 송사를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또한 『순조임금의 왕세자(임금의 자리를 이을 왕자 : 헌종)는 송사처결은 공평,염정,옥송을 중하게 여겨 자세히 살피고 신중하게 하며 공평하고 진실되게 하라고 한다.』


 순조 30년에 왕세자가 형조와 한성부 사헌부와 사간원의 낭관을 불러서 만나보고 영하기를, “서울 주민들의 기쁨과 근심은 형조와 한성부 양사에 매여 있는데, 요즈음에 와서 법관이 마음을 다하여 직무수행을 잘 하지 못하고 송사를 처결함에 공평하고 청렴하고 공정한 뜻이 없으며, 하리들은 제멋대로 굴며 침해하고 학대하는 폐단이 있어 폐해가 소민들에게 전해져 인심이 소란스럽고 심지어 위에까지 근심을 끼치게 하니, 어찌 이와 같은 도리가 있겠는가?

옛날의 성왕은 옥송을 중하게 여겨 자세히 살피고 신중하게 하며 공평하고 진실되게 하였으며, 우리 열성조에서도 백성을 사랑하는 뜻으로 매번 옥송을 거듭 엄격하게 하고 감독하여 경계하였는데, 오늘날의 법관이 된 자가 어찌 감히 어기고 뛰어넘을 수 있는가? 내가 비록 깊은 구중궁궐에서 기거하지만 역시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어느 관원이 어떤 일을 했다는 것을 하나하나 낱낱이 거론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번에 대면하여 회유하는 거사는 그대들만 조심하는 마음으로 직분을 다하도록 할 뿐만이 아니고 형조는 판서에서 좌랑까지, 한성부는 판윤에서 주부까지 그리고 오부의 관원에 이르도록 각각 한결 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서 힘을 다하여 하리들을 억제시키고 백성들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여 혹시라도 어김이 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하다. 하고,

또 영하기를 ”서울 주민들의 기쁨과 근심은 형조와 한성부 양사에 매여 있는데, 요즈음에 와서 소송을 담당한 관원이 그 직분을 다하지 못하고, 하리의 무리들도 법 밖에 침해하고 학대하면서 이름을 금란이라고 부르지만 그 실제로는 남의 재물을 빼앗아 먹는 것이다. 송사를 처결한다고 말하면서 오로지 사정 쓰기만을 일삼는다면, 이것이 어찌 옛날 성왕의 옥송을 다스리고 백성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입법의 본뜻이겠으며, 또한 어찌 관리된 자가 차마 할 수 있는 바 일이겠는가? 내가 비록 깊숙한 구중궁궐에서 기거하고 있기는 하지만 저절로 환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법관이 된 사람이 소송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뜻을 생각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본다면, 백성들이 어떻게 의뢰하고 살아가겠는가? 민심이 날마다 점점 옛날과 달라지는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니, 어떻게 한심스럽지 않겠는가?

무릇 오늘날 서울의 주민을 안정시키고 옥송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방법은 적합한 사람을 가려 뽑아 그에게 맡기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으며, 또 관장이 공평하고 염정하게 하리들을 억제시키고 제멋대로 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이번에 이 임금과 신하가 모여서 임금의 질문에 답을 하던 자리에서 가르쳐서 깨우치게 한 뒤에 만약 한 사람의 당상관이나 한 사람의 낭관이 혹시라도 어김이 있으면, 내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조와 병조의 인사부와 형조와 한성부에 분부하여 판에다 게시하게 하라 하였다고 합니다.


위와 같이 과거 우리 조상들은 사사로운 청을 듣지 아니하고 공평한 마음으로 백성들의 일을 공정하게 판결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런 점들을 본받아 행동하고 실천한다면 공정한 사회는 멀리 있지 않은 듯 합니다.

Ⅲ. 맺음말

 이책을 통해 조선왕조 500여년간 적어도 임금이나 신하들은 최고의 목표로


해 왔기에, 조선왕조실록 속에는 조선 왕조 초기부터 500여년간 이런 정신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고 임금의 하늘 같은 백성들이 원통하고 억울함이 없도

록 하기 위해 재판을 조심하고 신중히 하며, 백성들이 죄인이 되는 것을 예방

하고, 죄인을 위로해 주면서 철저한 증거재판을 도모하여 실체적 진실을 실현

시키며, 특히 살인사건은 반드시 임금이 3번이나 재판에 관여를 하고, 그래도

억울하면 신문고라는 북을 치거나 징이나 꽹과리를 두들겨서 최고 재판장인 임

금에게 호소를 하여 실체적 진실을 밝혀 나갔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


했습니다.


이러한 부분을 읽고 이전에 저는 어떠했는지 생각해보니 책에서 소개한

조선왕조의 청백리나 명예와 부를 초월하여 청렴결백한 삶을 선택하여

평생을 몸소 실천하신 우리의 자랑스럽고 존경받는 선현들과 달리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앞으로 제가 바라는 경찰 공무원 상을 그려보았고,

국민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봉사하는 마음을 잊지 아니하고

솔선수범하여 대한민국 경찰공무원이 진정한 우리 공동체의 민주주의 국가의

존경받는 공무원이 될 수 있도록 일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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