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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법이론특수연구수업 강의 소감문-정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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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병경 작성일13-06-29 07:44 조회1,037회 댓글0건

본문

보낸 사람;정병경
▼보낸 날짜2011년 12월 28일(수) 오전 10:40 KST
받는 사람▼ 참조▼

제목: 법이론특수연구 소감문
28 Dec 2011 01:40:26
첨부파일  소감문.hwp (2.22MB)

지난 금요일 보내드린 건데 행정실 조교가 메일 주소를 잘 못 알려줘서 다시 보내드립니다. 
---- Original Message ----
From : 정병경(cozy@dgu.edu)
 To : kjm@dgu.edu
 Sent : Friday, Dec 23, 2011 05:36 PM
 Subject : 법이론특수연구 소감문

.....................................................
법이론특수연구수업 강의 소감문

 부동산법전공 정병경


 먼전, 한학기동안 법이론 특수연구 수업을 위해 애쓰신 김재문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수업에 참여하기전 경국대전에 대해서는 첨부의 내용처럼 백과사전에서 접할 수 있는 내용이 전부였다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수업을 통해 경국대전의 실체도 보고 경국대전의 기본원리인 민위천(民爲天) 사상과 그에 대한 실례들을 접하면서 경국대전에 대한 이해와 함께 경국대전이 이전시대의 유산일 뿐아니라 법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계승해야될 ‘법’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일제의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의 법률을 계수하고 부분부분 영미법과 독일법을 차용한 현행 대한민국의 법률체계에서 경국대전과의 비교법적 차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으며, 사법시험 과목 위주로 짜여진 법학 교육과정속에 조선시대의 법률을 소개하고 이에 대한 연구를 정례화해야 될 필요성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동산법을 전공하고 있는 부동산 근저당과 관련한 법제도적 개선책 마련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수업중 교수님께서 소개해주신 조선시대 부동산 저당제도중 환태라는 제도를 알게되어 향후 저당관련 논문을 작업을 할 때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경국대전에 대한 내용을 찾던 중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소개해주신 내용들이 정리된 자료를 찾게 되어 첨부하였습니다. 향후 경국대전과 관련된 수업이 개설되면 다른 원우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한학기 동안 수고하신 교수님께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첨부 1. (역사스페셜 46) 사형수는 왕께 보고하라. 경국대전
    2. 경국대전의 의의

 첨부 1. [조선] 사형수는 왕에게 보고하라, 경국대전
 
조선의 법전이라고 하면 아마도 경국대전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경국대전 안에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는 다들 모른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제일 먼저 입수한 책 중의 하나라고도 한다. 그리고 조항까지 꼼꼼히 분석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조선을 이해하는데 경국대전만큼 좋은 책이 없다고 생각해서라고 한다. 어떤 책이길래 조선을 이해할 수 있는 걸까?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 경국대전을 통해 본 조선은 어떤 조선인지 자세히 살펴보자.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운 왕의 남자.
그런데 영화의 내용 중에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다.
 
 '입만 열면 아니된다 아니된다, 대체 되는 게 무엇이란 말이오?'
 '어찌 천한 광대를 궁에 둔단 말이십니까?'
 '정녕 궁에 광대를 두면 아니된단 말이오?'
 

 
대신들이 거세게 반대한 이유는 광대를 불러 연회를 베풀었고 거처까지 마련했기때문이다.
이때 대신들이 반대의 근거로 내세웠던 것은 조선의 법도였다.
 
 '선왕께서는 연회를 베풀때 그 연회의 성격과 의에 따라서 하도록 법도를 정하셨습니다.'
 '정말 이나라 법도에 그런 것까지 정해져있소?'
 
조선의 법도란 경국대전을 의미한다.
과연 경국대전에는 왕이 마음대로 연회를 베풀고 광대들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을까?
 

 
경국대전에는 언제 어느 때 연회를 여는지 자세히 나와있다.
임금이 행차를 하거나 무술훈련을 마쳤을 때, 의정부와 6조에서 임금에게 연회를 차려 올리며
 단오나 추석, 설날 같은 명절에도 연회를 연다.
 
그리고 외국에 나가는 사신이나 관찰사의 노고를 치할 때는 임금이 직접 연회를 베풀어 준다.
 
이처럼 법전에 연회를 여는 시기와 이유를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함부로 국왕이 잔치를 베푸는 일은 없었다.
 
그만큼 잔치를 절도있게 하고 불필요한 행사를 함부로 하지 말것을 권고하고
 낭비와 사치를 막아보자는 것으로 해석된다.
 
광대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준 것 역시 경국대전에 의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궁에서 근무하는 기술직들을 일일히 열거해놓았는데 연회때 공연을 맡은 건 장악원이다.
그런데 장악원에는 궁중음악을 연주하는 악사들만 있을 뿐 광대는 없다.
 
이렇게 연회에 대한 자세하고도 구체적인 조항을 명시하는 경국대전.
총 319개 조항을 담고있는 경국대전은 이,호,예,병,형,공 6전으로 나뉘어져있다.
 

 
그 첫 시작은 이전이다.
이전은 중앙과 지방관제, 그리고 관직의 종류와 임명에 관한 것으로
 국가 행정 조직에 관한 법이다.
 
호전은 조세제도와 토지, 가옥, 노비매매등에 관한 경제관련 법이다.
 

 
예전은 과거제도, 제례, 상복, 혼인등에 관한 법을 담고 있다.
지금으로 치면 민법에 해당한다.
 
병전은 말 그대로 군사제도에 관한 것이고
 

 
형전은 각종 범죄에 대한 재판과 형벌, 노비매매에 관한 것으로 지금의 형법에 해당한다.
 
공전은 도로 건축 등 산업에 관련된 법이다.
 
6전에 담겨있는 조항들은 세세하고 구체적이어서 조선시대 풍속,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고궁박물관에는 조선시대 쓰이던 자가 전시되어있는데 크기가 여러가지다.
뿐만 아니라 자마다 각기 다른 이름이 새겨져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자마다 각기 다른 이름을 붙여 사용했는지 경국대전을 보면 알 수 있다.
 

 
저울 역시 그 규정이 경국대전이 나와있다.
저울은 축량별로  그 종류를 정해놓아 사용했다.
 
도량형까지 법전에 자세히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혼인 규정을 알아보자.
춘향전에 보면 이몽룡과 성춘향이 16세에 만나 백년가약을 맺는다.
 
현대 민법에 의하면 아직 혼인이 불가능한 미성년자들이다.
하지만 경국대전 예전에 따르면 혼인 가능한 나이는 남자는 15살, 여자는 14살, 소설 속에 설정은 조선시대 법에 의하면 가능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혼인규정에는 관리 집안의 딸로 30살이 되도록 시집을 못가면 혼인비용을 대주도록 했다.
 

 
이외에도 경국대전에는 당시 시대상황을 알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계절별로 다른 종류의 땔깜을 뗄 수 있도록 했다.
 
왜 이런 규정까지 경국대전에 명시해놓았을까?
 
과거시대에 사람들은 불을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히 생각한 것이다.
 

 
왕실 후궁들의 서열도 법전을 통해보면 알 수 있다.
경국대전 예전에 제일 처음 나오는 내명부는 후궁에 대한 조항이다.
 
우리에게 낯익은 이름의 빈이 후궁 중 가장 높은 서열이며 그 다음 귀인, 소의의 순서이다.
경국대전은 후궁들의 품을 정 1품부터 종 9품까지 명시해 법으로 정해놓았던 것이다.
 

 
숙종의 총애를 받았던 장희빈은 서열이 가장 높은 빈으로 정1품이다.
영의정과 맞먹는 지위다.
 
연산군의 여인이었던 장녹수는 종3품 숙용이다.
왕실의 여자들의 서열을 잡아 왕실의 질서를 잡으려 했던 것이다.
 
얼음 사용 제한 법조도 있다.
석빙고에 보관된 얼음을 여름철이 되면 나누어주는데
 얼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왕실 가족들과 일흔이 넘은 당상관들이었다.
 
이채로운 것은 국립외료기관의 활인서의 환자들과 옥에 갇힌 자들도 그 지급대상이었다.
 
- 심희기 교수 연세대학교 법학부 -
경국대전이라는 큰 통일법전에 지금식으로 말하면 형법, 재산법, 민법, 가정법이 총망라 되어있으므로
 분석할 수 있으면 조선시대를 잘 살명할 수 있겠죠.
 
크게는 조선의 통치구조부터 왕실 여인네들의 삶, 백성들의 소소한 삶까지
 경국대전에는 조선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조선시대의 관리들은 지금으로 치면 공무원들의 24시간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알 수 있다.
관리들은 묘시까지 즉, 오전 5시부터 7시까지 출근해야 한다.
해가 긴 봄이나 여름에는 해가 일찍 뜨기 때문에 일찍 출근을 하고
 해가 짧은 가을이나 겨울에는 해가 늦게 뜨기 때문에 오전 7시에서 9시까지 출근을 해도 되었다.
 
일주일에 한번 왕의 조례가 있는 날은 일찍 출근해야 하는데
 새벽 3시부터 5시까지 사이에는 궁에 도착해있어야 했다.
 
관리들이 새벽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그리고 법전에는 결근일수가 많을 때 어떻게 처리해야하는지도 나와있다.
30일이 넘어갈 시에는 바로 파직당하고 29일 이하일 때에는 속죄금이라고 해서 일종의 벌금을 낸다.
 
관리들 월급, 조선시대로 치면 녹봉도 경국대전에 나와있을까?
녹패, 일종의 녹봉 증명서인데 4개월에 한번씩 녹봉을 받는다.
매달이 아닌 일년에 네 번씩 녹봉을 받는데 돈이 아니라 백미, 현미, 조, 콩, 명추 이런 것들을 받는다.
관리의 등급별로 조금씩 차이가 난다.
 
등급별로 공급까지 경국대전에 적혀있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법대로 받게 된다.
 

 
또한 방석과 지팡이가 지급이 되는데 이것은 녹봉이 아니라 일흔이 넘은 관리가 국가의 중경사로 인해
 은퇴하지 못했을 때 그 노고에 감사한다는 의미로 주는 것이다.
 
경국대전을 통해 조선시대 관리들의 삶까지 살펴보니 경국대전은 조선시대의 창과 같단 생각이 든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에 조선은 유교적 이념을 강조하는 사회, 신분이 엄격한 신분 사회, 다소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모습이지만 경국대전에는 그런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는 조항들이 많이 있다.
 

 
정조 14년인 1790년.
전남 강진에서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살인죄를 지은 여인이 관아에 끌려온 것이다.
 
살인을 한 여인은 젊은 새댁인 김은애.
그녀가 한 마을에 사는 안조이라는 여인을 흉기로 찔러 살인한 것이다.
 

 
은애라는 여인이 실토한 사건의 내막은 이러했다.
은애가 결혼하기 전 오랫동안 은애를 흠모해오던 최정련이라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여러차례 은애에게 접근하려 했지만 은애는 받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최정련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은애를 아내로 얻고싶은 마음에 마을의 중매를 잘 섰던 안조이에게 부탁한다.
이웃에 살았던 안조이는 최정련의 부탁을 받고 안조이를 찾아왔다.
 
하지만 은애는 안조이의 중매마저 거절했다.
그리고 얼마 뒤, 은애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자 안조이와 최정련이 짜고 은애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리기로 한다.
안조이는 마을 아낙들을 상대로 은애가 간통했다는 등의 헛소문을 퍼트렸고
 순식간에 마을 전체에 소문이 돌아 은애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이에 분을 참지 못한 은애는 헛소문을 퍼트린 안조이를 살해하기에 이르른것이다.
 
 '분한 마음이야 이해하겠다만, 그렇다고 사람을 죽여서야 되겠느냐'
 
순순히 자신의 죄를 자백한 은애에게는 법적인 처벌만이 남아있다.
 
정조 14년인 1790년, 전남 강진을 떠들썩하게 한 한 살인사건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어떻게 처리했을까?
 
살인죄에 대해서만큼은 복잡한 조사과정이나 판결문 없이 그대로 사형에 처했을거라 생각하기 쉽다.
게다가 순순히 죄를 자백했으니 더 조사할 것도 없는 명백한 사건이다.
하지만 사건의 처리과정을 보면 그리 단순하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에 은애사건이 기록되어 있을까?
지방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인데도 실록엔 꽤 길고 자세하게 사건의 처리과정이 남아있었다.
실록에 따르면 은애사건을 처음 조사한 관찰사는 한양의 형조의 사건을 올리고
 형조는 또 한 번의 심의과정을 거치고 왕에게 보고한다.
 
그러자 왕은 더 추가할 조건이 되는지 정상을 참작할 조건이 되는지 더 조사해보라고 한다.
 

 
왜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 조사하고 왕에게까지 보고한 걸까?
오랫동안 법을 연구한 동국대학교 김재문 교수를 찾아 자문을 구해보았다.
 
은애사건의 처리결과는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을 따른 것이었다.
경국대전 형전에는 삼복제도라고 해서 사형에 처해야하는 중죄인의 경우,
3번에 걸쳐 심의하도록 하고 있다.
죄가 무거운만큼 신중하게 조사하는 것이다.
 

 
즉 삼복제도란 지금의 지방장관격인 관찰사가 1차로 사건을 조사한 뒤,
한양에 있는 형조에 보고한다.
 

 
그러면 형조에서 또 한번 조사를 해 왕에게 보고하고 마지막으로 왕은 사건을 대신들과 논의해 최종판결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 김재문 교수 동국대학교 법학과 -
살인사건이나 사형죄수에게는 다시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세번 재판을 형조에서 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판결은 언제나 왕이 내리는 것이었다.
관찰사나 형조가 이미 판결을 내렸다 하더라도 왕이 또 다시 살펴본 뒤에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은애 사건의 경우 왕은 과연 어떤 판결을 내렸을까?
 

 
오랜 고민 끝에 정조는 이런 결정을 내린다.
 
 '목숨을 걸고 자신의 결백을 알리려 했던 은애의 절개와 지조를 참작해 석방하라'
 
절개와 지조를 중시했던 시대, 은애사건에 정상이 참작되었고
 비록 살인죄를 지었더라도 정황을 꼼꼼히 분석해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조선의 삼복제도는 지금의 삼심제도와 아주 비슷한 것이다.
 
잘못된 판결로 사형을 당하거나 옥살이를 하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조선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제도를 마련했던 것이다.
 

 
18세기 책인 형전도첩에 나온 그림들이다.
조선의 형벌들을 그림으로 묘사해놓은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죄를 지은 사람은 감옥에 가둬두고 조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아무리 중죄를 지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구속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바로 나이가 70세 이상이거나 나이가 15세 이하인 경우였다.
지금 소년 소녀 범죄자들을 보호하는 것과 아주 유사한 것이다.
 
그리고 고문을 하는 그림도 있다.
고문은 3일 이내에 두 번 못하도록 법전에 명시해놓았다.
곤장을 때릴 때에도 한 번에 30대 이상은 때릴 수 없게 했다.
 
예를 들어 장형 중에 가장 중횽인 100대형에 처해졌다 하더라도 법대로 여러 번 나눠서 때려야 했다.
그리고 똑같은 장형일지라도 처벌 도구의 굵기가 다르다.
처벌 도구의 굵기도 다르게 하고 죄의 형중에 따라 다르게 했다.
 

 
그리고 이 중에 가장 규격이 큰 처벌 도구인 신장은 때리는 방법도 명시해 놓았는데
 살이 많은 종아리 부분만 치고 정강이 부분은 치지 못하게 했다.
정강이 부분을 치면 치명적인 부상을 입기 때문이었다.
 
죄인일지라도 최소한의 보호장치는 마련해놓았다.
 

 
경국대전에는 지금 봐도 놀라울 정도의 사회 복지법이 있다.
바로 출산 휴가 조항인데 관.노비의 경우 출산을 앞두고 한달, 그리고 출산 후 50일의 휴가를 주었다.
그러니 총 80일간의 법정 휴가가 있었던 것이다.
 
그림에는 남편이 군불을 떼고 있는데 남편에게도 15일의 휴가를 주어 산후조리를 도울 수 있게 했다.
2008년부터 남편도 출산 휴가를 줄 수 있도록 한다고 하는데 출산 휴가에 있어서는 조선이 더 앞서있었다.
 
이렇게 경국대전 조항들을 보면 설사 죄인이거나 신분이 낮은 노비일지라도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적인 장치들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당시 만든 사람들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경국대전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성종 9년인 1485년, 조선이 건국하고 90여년 만에 완성이 되었다.
하지만 법전의 필요성은 이미 조선 건국 초부터 대두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건국하면서 법에 따라 통치할 것을 천명했다.
 

 
태조의 즉위교서에 보면
'의장과 법제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에 의거하게 된다.
일체 율문에 의거하여 죄를 판정하고 그 전에 폐단을 따르지 말 것이며'
 
이렇게 태조가 건국 초부터 법의 중요성을 시사한데에는 이유가 있다.
 
- 윤훈표 연구교수 연세대 국학연구원 -
고려 말에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고려옹사 3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는데 나라 일이 3일도 안되어 바꾸고 바꾸는
 혼란스러움을 뜻한 것이었습니다.
 

 
조선 법전의 기초를 다진 사람은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조선 건국을 도모한 인물로 당대 최고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이다.
 

 
삼봉집은 정도전의 방대한 양의 글을 모아서 묶은 책으로 정도전의 사상과 철학이 담겨져있다.
그런데 이 삼봉집 속에 조선 법전의 초안이 되었던 조선 경국전이 있다.
 

 
조선 경국전은 고려 때부터 내려온 관습법을 정리하고
 당시 법률적 효력을 가졌던 왕의 명령을 정리한 것으로
 조선이란 국호의 의미와 함께 관료, 인사제도 등 여러 제도가 정리되어 있다.
 
조선의 통치이념과 함께 제도를 담은 하나의 법전인 것이다.
 
그리고 태조 3년,
조선경국전의 내용을 토대로 경제육전이라는 법전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태종때 성육전, 세종때 신찬경제육전이 편찬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왕이 바뀔 때마다 법전이 새로 편찬되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기존의 법전의 새로 나온 왕의 수교들을 합치다 보니 법전의 통일성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매번 새롭게 법전을 편찬하다보니 경제적, 시간적 손실이 생겼다.
 

 
그러다보니 통일된 법전의 중요성이 제기 되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끈 것이 세조였다.
 
세조 원년, 7월 5일.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법들이 일정한 법제를 이루지 못했으니 이제 조선 만대의 법을 삼으라 상소를 올렸고 세조는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드디어 세조는 왕위에 오른지 3년째인 1457년 육전상정소를 설치하고 경국대전을 만들 것을 명한다.
서거정, 양성지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모여 그동안 만든 법전과 수교들을 통일되게 정리하고
 왕들의 수교 외에 오랫동안 지켜오던 관습법과 관례법도 정리해서 법전에 수록한다.
 
경국대전의 내용을 보완해 줄 하위법 체계도 만들어 나갔다.
조선의 예법을 정리해놓은 국조오례의는 경국대전 예전의 법을 보완해준다.
 

 
그리고 중국 명나라의 형법저인 대명률 중에 합리적인 조항들을 뽑아 형전을 만드는데 참고한다.
이렇게 경국대전은 체계적이고 통일된 법전의 형태를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세조는 법전 편찬 작업에 직접 참여하는 열의를 보였다.
육전에 들어갈 항목들을 정할 때는 학자들과 함께 했으며
 학자들이 만든 법 조항을 일일히 검토하고 필사하는 작업을 했다.
 
그 뿐 아니라 세조는 상을 입어 빠지게 되면 특별히 어명을 내려 다시 나오게 할 정도였다.
 

 
세조가 이렇게 경국대전에 힘을 기울인 것은 당시 정치적 상황과도 연결시킬 수 있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 즉, 수양대군이었다.
적장자가 아닌 수양대군은 왕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세종의 뒤를 이어 문종이 오르고 그 뒤를 이어 12살의 어린 왕 단종이 오르자
 왕권강화를 명분으로 조카인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는다.
 
- 정호훈 연구교수 연세대 국학연구원 -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죠.
그런 상황에서 정치적인 입지를 굳히기 위해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 필요했고
 그런 방법으로 경국대전을 편찬하는 것이 필요했다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정치적인 입지를 다지기 위한 세조의 노력은 다른 제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과전법을 직전법으로 바꾸는 것이다.
 
과전법이란 현직은 물론 전직 관리들에게도 과전을 물려받는 것으로 자손들이 물려받을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직전법은 현직 관리만 받을 수 있었으며 나라에 다시 돌려주어야 했다.
 
관리들의 권한을 축소하고 왕권을 강화의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한 것이다.
왕의 주관하에 경국대전을 만든 것도 이런 일련의 작업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드디어 세조 13년 경국대전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세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경국대전은 세상에 반포되지 못한다.
 

 
대신 대대적인 수정, 보완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그 중 가장 오랜 시간 논란이 된 것이 직전법이다.
 
대신들은 세조가 죽은 것은 무리하게 직전법을 시행했기 때문이라고 명하고
 직전법을 과전법으로 다시 바꿀 것을 요구하지만 오랜 줄다리기 끝에 직전법을 그대로 시행하기로 한다.
왕과 대신들의 충분한 논의의 결과였다.
 
모든 사람들이 만족하고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고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법전을 편찬하려 했다.
그러려면 상당한 시간이 요구가 되었다.
 

 
직전법 외에도 문제가 되는 조항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충분한 논의를 거쳐 수정,보완 작업을 했다.
이렇게 수정,보완 작업에 심혈을 기울인 건 경국대전 서문에도 밝히고 있듯이 만세토록 변치 않는 법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법의 안정성 문제가 가장 중요했다.
만세불변의 통일법전이라고 하는 것은 조항 하나 하나가 다른 것과 충돌을 일으키거나 모순을 일으켜서는 안되기때문에 매우 신중한 작업이 요구가 되었다.
 

 
세조 3년에 시작된 경국대전 편찬작업은 예종, 성종대까지 편찬되었다.
무려 3대에 걸쳐 진행된 길고도 방대한 작업이었다.
 

 
그리고 성종 15년인 1485년 경국대전이 완성, 반포되기에 이른다.
나라를 다스리는 책이라는 의미의 경국대전은 그렇게 탄생했다.
 
만세토록 변치않을 통일법전이라는 편찬 의도대로
 경국대전은 조선왕조 500년동안 조선을 다스리는 기본 법전으로 쓰인다.
 
실제 경국대전을 수정, 보완해 영조대의 속대전, 정조대의 대전통편, 고종대의 대전회통이 나오지만
 경국대전 원문은 전혀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법전에 수록하고 있다.
 
경국대전의 원문은 그대로 놓고 그 위에 수정 보완한 법조항을 덧붙이고 있다.
경국대전 원문은 제일 위에 원자를 붙여 기록했고 속대전 조항은 속, 대전통편 조항은 증, 보완된 조항에는 보자를 써놓았다.
 
만세불변의 법전을 만들기 위해 그렇게 오랜 산고끝에 탄생한 경국대전은
 조선의 통치이념이오, 조선의 근간이었다.


 
그런데 경국대전의 전체 조항을 살펴보면 한 가지 의아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처벌 규정 중 가장 많은 것이 범죄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로 관리이다.
 
전체 처벌 규정 중 45%, 그러니까 절반 가까이가 관리에 대한 것이다.
왜 이렇게 관리 처벌 규정이 많은 걸까?
 
나라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관리였다.
관리가 맡은 바 소임을 다하지 않고 비리를 저지른다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무엇보다 백성들이 살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었다.
 
비리 공무원, 백성을 괴롭히는 공무원, 근무 태만의 공무원 등이 해당했다.
처벌만 엄하게 한 것이 아니라 관리를 뽑을 때부터 아주 신중했다.
 
예를 들자만 비리에 연루되어 파면된 관리의 집안에서는 관리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과거 시험의 경우 지역별 과거 급제자의 수를 법으로 정해두었다.
각 지역의 인구 수 별로 제한을 둔 것인데 한성부 200명,경기도 60명, 충청도 90명, 전라도 90명 등이었다.
우수한 인재를 전국적으로 골고루 뽑기 위한 것이고 어느 지역에만 편중되면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유가적인 이상 국가를 실현하고자 하는 나라이므로 관리들부터 유교적 이념에 맞게 청렴결백해야 했다.
 

 
성종 14년, 8월 26일.
한 여인이 관아에 잡혀왔다.
 
그녀는 사헌부 장령인 송영의 처 신씨, 죄목은 분경죄였다.
분경이란 원래 분추경이란 말로 분주하게 다니면서 이권을 경쟁한다는 중국의 고사다.
경국대전 형전이 명시된 분경죄는 권세있는 자에 드나드는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지금으로치면 인사 청탁을 하는 것이다.
 

 
송영은 작은 아버지 송현수가 역모에 연루되어 관직에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송정이 송영을 총해해 사헌부 장령으로 임명했다.
사헌부 장령이란 종4품의 벼슬로 관리들의 부정과 비리를 감독하는 막중한 권한을 가진 자리다.
 
그런데 송영의 사헌부 장령의 임명에 따른 상소가 잇달아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그러자 송영의 처 신씨가 자신의 팔촌 오빠인 사헌부 관리인 홍석본을 찾아가 탄핵을 무마시키고
 남편이 벼슬에 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엄연한 분경죄인 것이다.
 

 
분경죄에 대한 처벌은 엄중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파직은 물론, 장형 100대와 유형 3000리에 처해진다고 되어 있다.
 
유형 3000리는 사형 바로 밑에 가장 무거운 벌이다.
유형의 경우는 곤장 100대를 때려서 귀향을 보내는 것이었다.
분경죄로 귀향을 가게 되면 용서를 받고 풀려나온 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요직에서 혀용되는 건 어려웠다.
 
신씨 사건은 관리의 처가 인사 개입된 첫 번째 사건이었다.
관례가 없던 터라 고심하던 성종은 경국대전에 언급되어 있는대로 신씨에게 장 100대형에 명한다.
그러자 송영은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해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난다.
 

 
송영 사건 외에도 분경죄로 인해 처벌받은 사례는 실록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분경죄에 직접 관련이 되지 않더라도 파직은 물론 다시는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분경죄에 대해 왜 이렇게 엄하게 다스렸던 것일까? 그 이유는 고려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말, 인재 등용의 과거시험은 극도로 부패해져있었다. 시험관과 응시자가 미리 짜고 응시자의 필체를 미리 기억해 둔 후, 후한 점수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은 관직에 나아간 뒤에도 서로 결탁해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성장해나갔다.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조선은 분경죄에 대한 규정을 점점 더 강화해 나간다. 분경금지법이 처음 반포되었던 정종 당시만 해도 주요 지배층의 집에 찾아가는 것을 금지했는데 세종 때에는 정3품 이상 관리까지 확대했고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인사 관리 말단까지 금지대상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팽형이라는 독특한 처벌 규정이 있다. 팽형이란 탐관오리에게 처해지는 형벌로 말 그대로 삶아죽이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실제로 팽형에 처해진 사례들이 나온다. 그렇다면 과연 팽형과 같은 끔찍한 형벌이 실제로 이루어졌을까? 현장에는 가마솥과 땔깜이 준비되어 있고 팽형에 처해질 탐관오리는 눈이 가려져있다. 그런데 형벌 집행 과정을 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가마솥 안에 물이 없다. 뿐만 아니라 불을 지피는 시늉만 할 뿐 실제로 불을 떼지는 않는다. 실제 삶아죽이는 극형이 아니라 관원을 그 관직으로부터 영원히 못 나오게 하는 명예형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형집행은 형식정이었지만 관리에게는 치명적이었다. 팽형은 지금의 광화문 네거리 포도청 근처에서 치뤄졌는데 조선 시대에도 번화가였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공개적으로 치뤄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형집행이 끝난 뒤에는 실제 사람이 죽은 것과 똑같은 절차를 밟았다. 죽은 사람처럼 장례를 치뤘는데 가족들이 와서 곡을 하고 문구행렬을 만들어 집까지 갔다. 집에 돌아간 뒤에도 바깥 출입을 할 수 없었으며 손님을 맞을 수도 없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은둔하며 살아야 했다. 그 사유에서 영구적으로 격리되고 추방시키는 것이 팽형이었다. 이 팽형은 뇌물이라든가 부정부패와 연루되어서 사형에 처하고도 싶은 그런 경우에도 사형에 처하지 않고 사형에 이를만큼 결정적인 근거가 없는 경우에 관습적으로 실행했다. 사형제도 보다도 더 효과가 컸다고 보여진다.
 

 
세무비리에 관련된 규정도 엄격했다. 사형에 처하고 아내와 자식에게 남겨진 재산도 모두 몰수했다. 실제로 성종 24년, 세금으로 거둔 면포와 종이를 빼돌린 하향현감 김진은 사형에 처해졌다. 효종 1년, 미원군수 권영이 세금으로 거둔 인삼 수백근을 수탈했다. 당시 대신들은 권영이 일흔이 넘었으니 유배형 정도로 마무리짓자고 했고 사감원과 사헌부에서는 법대로 사형에 처해야한다고 했다.
 
효종은 고심 끝에 경국대전 규정대로 사형에 처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고려말의 혼란을 지나 세워진 조선. 조선은 관리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생각했다. 500년 조선이 이루고자 한 것은 유교적인 이상 국가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근간이 되는 것이 조선의 만세불변의 법전인 경국대전이었다. 근대 이후 서구문물이 대거 들어오면서 법체계도 서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우리의 경국대전은 그렇게 과거에 역사 속으로 묻혔다. 우리는 경국대전이 담고있는 의미마저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역사학자들은 아쉬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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