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jm1

2012.1학기.대학원 상사법 박사과정 리포트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승재 작성일13-06-29 07:47 조회4,041회 댓글0건

본문

보낸 사람;이승재    주소록 추가하기  수신거부하기
▼보낸 날짜2012년 06월 17일(일) 오후 04:13 KST
받는 사람▼"김재문 교수님"
제목;과제물 제출 - 상사법 박사과정 이승재

 첨부파일  조선왕조실록에 관하여.hwp (17.71KB)

상사법 박사과정 이승재입니다.

이번학기도 많은 가르침을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부족하나마 말씀하신 과제물을 제출합니다.

무더위 건강관리 잘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 제자 이승재 배상 -
..................................................
조선왕조실록에 관하여


 상사법 박사과정
 이 승 재



〈目 次〉




Ⅰ. 序
Ⅱ. 本
1. 조선왕조실록의 세계적 기록유산으로서의 의의
2. 위대한 유산, 조선왕조실록
3. 실록의 편찬과정
Ⅲ. 結



Ⅰ. 序
 역사(歷史)의 사전적 개념은 ① 인간 사회가 거쳐온 변천의 모습, 또는 그 기록 ② 어떤 사물이나 인물․조직 따위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자취라고 정의하고 있다. 허나 이 책에서는 역사를 유교적인 역사로 해석하는 그 역사는 ‘지나간 일의 선악과 시비를 평가하고, 나아가 이 평가를 현재와 미래의 교훈으로 삼자는 것’이었다.
1997년에 유네스코 선정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된 대표적인 우리나라의 기록문화유산인 ‘朝鮮王朝實錄’에 대해 그 의미를 간략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Ⅱ. 本
1. 조선왕조실록의 세계적 기록유산으로서의 의의

  첫째, 조선왕조실록은 25대 군주의 실록이며, 472년간의 역사를 수록한 것이기에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 세계에서 가장 장구한 세월에 걸친 실록이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중국의 대청역조실록(大淸歷朝實錄)도 296년간에 걸친 실록에 불과하다.

  둘째, 조선왕조실록은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은 세계적인 역사서이다. 일본의 삼대실록(三代實錄)은 빈약한 것이고, 남원조(南院朝)의 대남실록(大南實錄)은 548권으로 편성되었다. 중국의 황명실록(皇明實錄)은 2,964권으로 된 대질이나 권수만 많을 뿐이지 기록내용은 소략하다. 조선왕조실록이 총 6,400만 자인데 대해 황명실록은 총 1,600만자에 불과하다.

  셋째로, 조선왕조실록은 내용이 다양하여 가히 백과전서적 실록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사회, 경제, 학예, 종교 생활로부터 천문, 지리, 음악, 과학적 사실이나 자연재해나 천문현상과 동북아시아의 외교적 관계가 수록되어 있는 종합사서요, 국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의 생활기록이 담겨져 있는 민족문화서인 것이다.

  넷째, 조선왕조실록은 그 역사기술에 있어 매우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 기록물이다. 조선왕조 실록의 기초자료 작성에서 편술까지 담당했던 사관은 관직으로서의 독립성과 기술(記述)에 대한 비밀성을 보장받던 전문관료였다. 사관의 기록은 군주라해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고, 비밀이 보장되는 제도가 이 실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보장하였다.

  다섯째로, 활자로 인쇄 간행된 조선왕조실록은 한국 인쇄문화의 전통과 높은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역사서인 것이다. 조선은 세계적으로 금속활자를 가장 앞서 실용한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어, 활자개량에 힘쓰고, 각종 도서를 간행해 온 전통이 있었다.

여섯째, 조선말기까지 이들 실록이 완전하게 보존되어온 것도 세계적으로 유례를 보기 힘든 일이다. 선왕의 실록편찬사업이 끝나면 최종원고 4부를 인쇄하여 서울의 춘추관과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각지 깊은 산중에 소재하던 사고(史庫)에 보관하여 왔다.

  끝으로, 조선왕조실록은 일본, 중국, 몽고 등 동아시아 제국의 역사연구, 관계사 연구에도 귀중한 기본자료이기도 하다.

2. 위대한 유산, 조선왕조실록

  실록이 완성된 후에는 특별히 설치한 사고(史庫)에 각각 1부씩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사고의 실록들이 병화에 소실되기도 하였으나 그때마다 재출간하거나 보수하여 20세기초까지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의 4사고에 각각 1부씩 전하여 내려왔다. 정족산,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1910년 일제가 당시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였다가 광복 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그대로 소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대산 사고의 실록은 일본으로 반출하여 갔다가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어 현재 27책만 남아 있다. 적상산본은 구황궁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가져가 현재 김일성종합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1984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함께 보관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 정족산본 및 태백산본을 분리하여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27책, 기타 산엽본 21책을 포함해서 총 2,077책이 일괄적으로 국보 제 1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중국에도 오래 전부터 실록이 편찬되어 왔으나 지금 남아있는 것은 명실록과 청실록뿐이다. 그러나 이 조차도 국가 정책에 관한 내용만을 수록하고 있을 뿐 조선왕조실록처럼 사회, 문화, 경제, 군사, 외교, 풍속 등에 관한 세세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은 그 양이나 질에 있어서 세계 제일이다.

3. 실록의 편찬과정

  전임사관인 한림 8원은 매일매일 왕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낱낱히 기록했다. 그러므로 한림 8원은 승지․주서․홍문관원 등과 함께 왕을 모시는 시신이라고 불렀다.

특히 늘상 있는 조회 때에는 검열이 승정원 옆에 방 한 칸을 정하여 높고 빙상일기를 써서 춘추관에 바쳤다. 그리고 역사평가가 필요하거나 비밀에 속하는 사항이 적힌 사초는 집에 보관했다가 실록을 편찬할 때 제출했다. 이를 가장사초라 한다.

한림8원은 춘추관에 모인 사초와 각 기관에 배치된 겸임사관들이 보낸 기록들을 기초로하여 초서로 시정기를 만드는데 이를 비초라 한다. 이 비초를 가지고 시정기의 정본을 만들고, 춘추관 당상관 1명이 매일 한 차례씩 이를 감독했다.

시정기는 3년마다 인쇄하여 해당 관청이나 의정부, 사고에 보관했으며, 연말마다 그 책수를 왕에게 보고했다. 시정기는 해마다 만들었으나 여의치 않으면 몇 년 뒤에 모아서 만들기도 했다. 시정기는 전임․겸임사관들로부터 쏟아지는 방대한 사초를 일차적으로 정리한 자료였다.

왕이 죽으면 곧 실록이 편찬되었다. 실록 편찬은 임시관청인 실록청을 설치하여 전담하게 했다. 실록천에서는 의정 중의 한 사람을 총재관, 대제학 등 글 잘하는 사람들을 당상과 낭청에 임명하고, 도청과 방을 설치하여 이전 시기부터 분담하여 편찬했다 이때 시정기․승정원일기․각종등록․가장사초 등이 자료로 이용되었다. 사론은 가장사초를 근거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각 방의 당상은 낭청과 더불어 초초를 작성하고, 이것을 도청에서 늘리고 깎아서 중초를 만들며, 중초를 총재관등 대신이 감수하여 정본을 만들었다. 3단계 공정을 거쳐 실록이 완성되는 셈이다. 완성된 실록은 춘추관과 각 사고에 보관했다.

실록 편찬이 완료되면 시정기와 초초․중초는 자하문 밖에 세검정 부근 차일암에서 세초하여 종이로 재생하여 썼다. 세검정 가까이에 종이 공장인 조지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록편찬에 관련된 일체의 자료를 세초했던 것은 이 자료들이 후일 누설되어 사단이 일어날까 우려해서였다.


Ⅲ. 結

 조선왕조실록과 관련한 거의 모든 주요 사항을 갖추어져 있으며, 실록을 둘러싼 갖가지 에피소드가 포함되어 있어 매우 흥미롭다.

우리 역사와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워주는 그런 책인 것 같다. 실록의 내용을 면밀히 분석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삶의 더 큰 지혜를 얻기 위한 필수적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溫故而知新이란 말이 있다. 현재 일련에 벌어지고 있는 비윤리적이고 비상식적인 모든 일들을 조선왕조실록을 재조명하고 검토하여 현명히 해결해 나가는 溫故而知新 정신이 절실히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
한국전통문화연구 강의를 마무리하며...

상사법 박사과정
 이승재


 한국전통문화연구 강의를 통해 우리나라 전통법을 좀 더 심도있게 알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조선왕조의 정치방법을 자세히 공부하면서 우리민족이 예로부터 민주주의 꽃을 피워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민위천 사상, 애민사상이 고스란히 법에 깃들어 있어 조선시대에는 이미 민주주의가 정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선조들은 모든 백성들을 소중히 여기며 임금은 백성을 받든다는 마음을 법을 집행해왔다.

또한 효종임금은 가난한 시골 오두막집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보며 불쌍히 여기고 이를 임금 자신의 잘못으로 인정하고 고뇌했다.

또한 조선시대 공직자들의 청렴함이 확고하여 오두막집 생활을 할 정도로 청빈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재물에 초연한 공직자들의 모습을 보며 지금 현재의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부패함과 타락함이 비교되어 안타깝다.


지금 우리 현 정치인들을 보면 같은 민족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선조들의 청렴함과 청빈함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것 같다.

모든 정치인들이 그렇다고 치부할 수는 없겠지만.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권력을 갖고 부를 축적하기 위해 정치판에 뛰어든다.

그들은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시되는 것이 정치적인 신념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정치인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바로, 서두에서 언급한, 민천위 사상, 애민사상, 그리고 청렴함이다.

개인적으로 지금의 정치인들과 정치인의 꿈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본 강의의 수강을 적극적 독려하고 나아가 수강이력을 정치인의 자격요건으로 제도화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바뀐다 하더라도 변치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한국전통문화연구 이 강의를 통해 깊이 새기게 된 생각이다.

온고이지신 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왕조의 전통법을 연구하여 지금의 우리법에 반드시 적용해야 할 것이며 본 강의를 모든 정치인들이 수강할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교수님! 
한 학기동안 많은 가르침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많이 부족한 제자이지만 앞으로 더욱 절차탁마하여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무더운 여름 건강 유의하십시오!

감사합니다.


                                    - 상사법 박사과정 이승재 배상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