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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어제 추가된 유네스코 문화유산의 내용과 문화유산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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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재문 작성일13-06-19 11:49 조회4,4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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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선생님 반갑읍니다.
저도 미쳐 신문을 보지 못해서 잘 몰랐는데 선생님의 지적으로 인해서 문화재청에 문의를 해 본 결과 이번에는 경주역사유적과 고창.화순.강화등에 산재한 고인돌 두가지가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말을 들었읍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지적에 의해서 저의 홈페이지의 관련사이트란에 문화재청의 홈페이지를 연결해 놓았읍니다.부족한 부분은 참고하시기 바람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세계문화유산으로는 1.창덕궁.2.화성.3.석굴암.불국사.4.해인사 장경판전.5.종묘등 이미 지정된 것과 6.경주역사유적  7.고인돌유적으로  7점이 된것으로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실려져 있읍니다.

아래는 선생님의 해설요청이 계신걸로 이해하고 문화재청의 홈페이지의 기록을 복사해 올림니다.참고하셔서 선생님의 역할에 도움이 되시기를 바람니다.


김  재  문

제    목  경주유적과 고인돌유적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록
부 서 명  국제교류 작 성 일  2000/11/29
구    분  보도자료 첨 부 물  세계유산등록.hwp [1195884 bytes]  고창고인돌 1.jpg [191159 bytes]
내    용
「경주역사유적지구」(이하 경주유적)와 「고창·화순·강화고인돌유적」(이하 고인돌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World Cultural Heritage)으로 추가 등록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케언즈(Cairns)에서 11. 27∼12. 2 간 개최중인 세계유산위원회(WHC : World Heritage Committee)는 11월 29일 총회를 열어 우리나라의 '경주유적' 과 '고인돌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로 의결하였다.(현지시간 오후 9시 30분경)

위원회의 이같은 결정은 2000. 2월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이들 유적을 조사한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조사관의 평가에 근거하여 2000. 6월 위원회 의장단(Bureau) 회의가 건의한 권고를 따른 것이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오늘 의결한 사항을 오는 12월 2일 총회의 폐막일에 공식 발표한다.

세계유산등록 심의에서 '경주유적'은 신라시대 천년의 문화적 업적과 불교 및 세속건축의 발달을 보여주는 뛰어난 유적으로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으로 결정되었으며, '고인돌유적'은 기원전 2-3천년전의 장례 및 의식유적으로 선사시대 기술 및 사회발전을 생생히 보여주는 뛰어난 유적으로서 평가를 받았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지난 '95년 「불국사·석굴암」, 「종묘」,「해인사 장경판전」, '97년「수원화성」,「창덕궁」에 이어 이번에 「경주 역사유적지구」와「고창·화순·강화고인돌유적」이 추가로 등록됨으로써 모두 7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경주유적'과 '고인돌유적'이 세계유산으로 등록됨으로써 유적의 세계사적 가치와 그 우수성을 국제적으로 인정 받는 의미 외에도 훼손방지와 과학적 보존을 위한 기술·재정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됨에 따라 이들 유적을 '세계적인 유적'으로 보호하고 가꾸어 나갈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였다는데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앞으로 문화재청은 이들 유적의 세계유산 등록을 계기로 체계적인 보존·정비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경주유적'은 「신라문화권 유적정비사업」에 따라 유적의 보수·정비를 꾸준히 실시해 나가면서 도시계획, 문화재, 주변 경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경주시가 역사도시로서의 품격이 느껴 지도록 보존하기 위하여 경주시 등 유관기관과 협력하여 노력해 나갈 계획이다.

또한 '고인돌유적'은 고창, 화순, 강화지역의 고인돌들의 특성과 각각의 차별성을 부각하여 보존·정비를 실시하고 이들 유적들을 역사교육의 장소, 선사문화의 체험공간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고품격의 역사문화유적 및 관광자원으로 활용되도록 할 계획이다.

유네스코는 세계유산 등록문화재에 대한 사후관리를 강화하고 있으며 이에따라 세계유산에 대한 정기모니터링 보고서를 6년마다 제출하도록 의무화(종묘 등 '95년 등록 세계유산 2008년 모니터링 의무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문화재청은 이번에 등록한 '경주유적'과 '고인돌유적'을 포함한 7건의 세계유산에 대하여 향후 모니터링에 대비하여 모니터링 지표 개발 및 연구, NGO등과 연계하여 모니터링 요원 위촉 및 수시 모니터링 실시,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등과 협력하여 모니터링 관련 국제학술세미나 개최 등 세계유산에 대한 체계적인 모니터링을 위한 기반조성에 주력해 나갈 계획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세계유산보호협약」(우리나라 1988년 가입)에 따라 인류전체를 위하여 보호되어야 할 현저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목록(World Heritage List)에 등록한 문화재를 말하며, 세계유산위원회는 세계유산 등록문화재의 심의·결정 등을 위하여 1975년 구성된 유네스코 산하 정부간 위원회로 임기 6년의 21개 위원국으로 구성되며 우리나라는 1997년 위원국으로 선출되어 활동하고 있다.



*세계유산 개요

1. 현황
ㅇ 세계유산협약에 따라 세계유산위원회가 협약가입국의 문화유산 중에서 인류전체를 위해 보호되어야 할 현저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여 UNESCO 세계유산 일람표에 등록한 문화재를 말한다

ㅇ 세계유산에는 문화유산, 자연유산, 복합유산 3가지가 있음

ㅇ 세계유산 협약은 1972년 UNESCO 총회에서 채택되었으며, 현재 가입국은 160개국으로 우리나라는 1988년 102번째로 가입함
※ 북한은 1998.7.21 세계유산협약에 가입함

ㅇ 1975년 구성된 세계유산위원회는 문화유산 및 자연유산 보호, 세계유산 등록 대상 문화재 심의·결정 등을 목적으로 하는 유네스코 산하 국제위원회로 임기 6년의 21개 위원국으로 구성되며, 우리나라는 1997년 위원국으로 선출됨

2. 세계유산위원회(WHC) 개요

ㅇ 설립연혁
- 1975 세계유산보호협약에 의해 구성된 정부간위원회

ㅇ 목적·기능
- 현저한 보편적 가치를 갖는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
- 세계유산등록대상 문화재 심의결정 및 공표
- 세계유산기금 확보, 위험에 처한 유산선정, 보호비용 및 기술 지원

ㅇ 조직·재정
- 의장단: 의장1, 부의장5, 서기1
- 위원국: 21개국, 임기6년(2년마다 7개국씩 순차교체)
- 총회: 매년 12월 1회 또는 유네스코 총회시 개최
- 집행이사회: 의장단 7개국 대표, 매년 6~7월 연 1회 개최
- 재정: 협약국 유네스코 분담금의 1%
3. 세계유산 보유현황

ㅇ 총 등록건수 : 118개국 630건
(문화유산 480, 자연유산 128, 복합유산 22)
ㅇ 우리나라 등록건수: 5건
- '95년: 불국사·석굴암,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
- '97년: 창덕궁, 수원화성

※ 1999년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고인돌유적 추가신청

4. 등록절차
ㅇ 잠정목록 유네스코 제출
- 세계유산 등록신청을 위한 사전예비단계

ㅇ 등록신청 대상 선정
-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선정

ㅇ 등록신청 서류 제출 : 매년 7.1까지
- 접수처 : 세계유산위원회 사무국
- 제출서류 : 신청서(영문) 및 부속자료(사진, 슬라이드, VTR 등)

ㅇ 1차 평가 : 제출익년 1-4월
-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자연보존연맹(IUCN)과 국제기념물
유적협의회(ICOMOS)에서 전문가를 해당국가에 파견, 현지
조사후 평가서 작성

ㅇ 2차 검토 : 매년 6월-7월
- 세계유산위원회 의장단(BUREAU)회의에서 1차 평가 결과를 토대로 등록 대상 검토후 세계유산위원회에 권고
· 세계유산목록에 등재 권고
· 등재하지 말 것을 권고
· 추가자료 제출요구를 위해 세계유산위원회 사무국 환부
· 심층연구가 필요하여 검토 연기

ㅇ 최종 심의·결정 : 매년 12월중
- 세계유산위원회 정기총회에서 등록여부 최종 심의·결정, 공표

경주역사유적지구

1.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일원
2. 면적: 2,880 ha.
3. 구성 및 소장문화재
ㅇ 경주남산 지구(사적 제311호)
- 남산 칠불암 마애석불등 보물 13점, 사적11점, 지방유형문화재등 13점
ㅇ 월성지구
- 첨성대(국보), 계림등 사적 4점
ㅇ 대능원지구
- 신라 미추왕릉등 사적 7점
ㅇ 황룡사지구
- 분황사 석탑(국보), 황룡사지(사적)
ㅇ 산성지구
- 명활산성(사적)

4. 특징
ㅇ 신라천년(B.C 57~A.D935)의 고도로서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불교유산 및 왕경유산이 잘 보존되고 있어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일본의 교토, 나라의 기념물지구와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유산임

ㅇ 남산은 신라의 건국설화에 나타나는 나정(蘿井)에서부터 신라왕조의 종말을 맞게했던 포석정(鮑石亭), 불상·석탑등 수많은 불교유적등 야외박물관이라 불릴만큼 신라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임

ㅇ 천년왕조를 이어온 월성을 비롯한 궁궐터, 신라최대의 가람인 황룡사지를 중심으로 한 절터, 고분군, 왕릉등 신라문화의 최극성기에 이룩한 유적들이 산재해 있음




*고창·화순·강화고인돌 유적

1. 고창 고인돌유적(사적 제391호)
가. 위치: 전북 고창 죽림리, 도산리
나. 면적: 8.38 ha.(핵심지역)
다. 분포 및 특징
ㅇ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로 약1,764m범위에 442기 분포
ㅇ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 군집을 이루고 있는 지역
ㅇ 10톤미만에서 300톤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의 고인돌 분포
ㅇ 탁자식, 바둑판식, 지상석곽형등 다양한 형식의 고인돌 공존

2. 화순 고인돌유적(사적 제410호)
가. 위치: 전남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 춘양면 대신리
나. 면적: 221ha.
다. 분포 및 특징
ㅇ 계곡을 따라 표고 80m에서 130m사이에 약 10㎞에 거쳐 500여기의 고인돌이 군집을 이루어 분포
ㅇ 좁은 범위안에 집중분포하고 있으며, 최근에 발견되어 보존상태가 좋음
ㅇ 고인돌의 축조과정을 보여주는 채석장이 발견되어 당시의 석재를 다루는 기술, 축조와 운반방법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됨

3. 강화 고인돌유적
가. 위치: 인천광역시 강화군 부근리, 삼거리, 고천리, 오상리, 교산리
나. 면적: 12.27 ha.
다. 분포 및 특징
ㅇ 고려산 산기슭을 따라 120여기의 고인돌이 분포
ㅇ 길이 7.1m, 높이 2.6m의 우리나라 최대의 북방식고인돌(사적 제137호)이 있음
ㅇ 북방식과 남방식고인돌이 혼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고인돌의 평균고도 보다 높은 해발 100m~200m까지 고인돌이 분포
세계유산 등록 경축 행사

1. 경주역사유적지구
ㅇ 경축식 및 경축공연
- 시기 및 장소 : 2000.12월중, 경주 서라벌 문화회관
- 행 사 내 용 : 경과보고, 학술강연, 경축공연(신라국악예술단)
ㅇ 남산 사진전 개최
- 주 관 : 사진작가협회 경주지부(민간단체)
- 시기 및 장소 : 2001. 3월중
ㅇ 도립예술단 경축 음악회
- 주 관 : 경상북도
- 시 기 및 장소 : 2001. 1∼3월중

2. 고창·화순·강화 고인돌유적
ㅇ 세계고인돌 축제 개최
- 시 기 : 2001.10.25∼10.27
- 장 소 : 고창 고인돌유적 일대, 고창읍성, 동리국악당
- 주 관 : 고창군, 고창문화원
- 참 석 : 세계거석문화 보유국 등 국내외 관련학자 및 단체
- 행사내용 : 고인돌관련 국제학술회의, 해외예술단 공연
고인돌 축조재현 및 가장행렬 등 원시문화 체험
ㅇ 세계유산 모니터링 국내훈련 워크샵 개최
- 기간 및 장소 : 2000.12.8∼12.9, 전남도청, 화순군청
- 주관 :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한국위원회
- 내용 : 문화재 모니터링 기법연구 및 모니터링 실무요원 교육
ㅇ 등록기념식 개최
- 일시 : 2000.12.15, 14:00
- 장소 : 강화 문예회관
- 주관 : 강화군
- 행사내용 : 기념식, 강연회 등

2개의 문화유산 이외의 기존의 문화유산의 해설을 원하시므로 문화재청의 기록을 복사해 드립니다.

창덕궁

  건물배치에 있어, 정궁인 경복궁, 행궁인 창경궁과 경희궁에서는 정문으로부터 정전, 편전, 침전 등이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궁궐의 위엄성이 강조된 데 반하여, 창덕궁에서는 정문인 돈화문은 정남향이고, 궁안에 들어 금천교가 동향으로 진입되어 있으며 다시 북쪽으로 인정전, 선정전 등 정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편전과 침전은 모두 정전의 동쪽에 전개되는 등 건물배치가 여러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스런 산세에 따라 자연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산세에 의지하여 인위적인 건물이 자연의 수림속에 포근히 자리를 잡도록한 배치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완전한 건축의 표상이다. 또한, 왕들의 휴식처로 사용되던 후원은 300년이 넘은 거목과 연못, 정자 등 조원시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건축사적으로 또 조경사적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후원은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창건할 때 후원으로 조성되었으며, 창경궁과도 통하도록 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정자가 소실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정자와 전각들은 인조 원년(1623)이후 역대 제왕들에 의해 개수·증축된 것들이다. 이 곳에는 각종 희귀한 수목이 우거져 있으며, 많은 건물과 연못 등이 있다. 역대 제왕과 왕비들은 이곳에서 여가를 즐기고 심신을 수양하거나 학문도 닦았으며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후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조원 시설로서 자연적인 지형에다 꽃과 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아름답고 조화있게 건물을 배치한 왕궁의 후원인 것이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전통건축으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이 고도의 조화를 표출하고 있으며, 후원은 동양조경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인 조형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궁궐지, 창덕궁조영의궤, 동궐도 등의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1830년경에 그린 동궐도(국보 제249호)가 창덕궁의 건물배치과 건물형태를 그림으로 전하고 있는데, 궁궐사와 궁궐건축을 연구 고증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창덕궁은 사적 제12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창덕궁내 중요 문화재로 돈화문(보물 제383호), 인정문(보물 제813호), 인정전(국보 제225호), 대조전(보물 제816호), 구선원전(보물 제817호), 선정전(보물 제814호), 희정당(보물 제815호),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 다래 나무(천연기념물 제251호)등이 지정되었으며, 창덕궁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화성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선왕인 영조의 둘째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화성은 축조이후 일제의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 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성곽의 전돌, 건조물의 기와 등이 독특한 방법으로 제작되어 있어 현재의 기술로 이를 재현하기 어려워 보수시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계속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돌의 교축, 현안·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 (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선왕인 영조의 둘째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화성은 축조이후 일제의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 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성곽의 전돌, 건조물의 기와 등이 독특한 방법으로 제작되어 있어 현재의 기술로 이를 재현하기 어려워 보수시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계속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돌의 교축, 현안·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 (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불국사

석굴암과 같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때 김대성이 창건하여 서기 774년 신라 혜공왕때 완공하였다. 토함산 서쪽 중턱의 경사진 곳에 자리한 불국사는 심오한 불교사상과 천재 예술가의 혼이 독특한 형태로 표현되어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인정받는 기념비적인 예술품이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지상에 옮겨 놓은 것으로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와 무량수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및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불국사의 건축구조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하나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청운교, 백운교, 자하문, 범영루, 자경루, 다보탑과 석가탑, 무설전 등이 있는 구역이고 다른 하나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칠보교, 연화교, 안양문 등이 있는 구역이다.

  불국사 전면에서 바라볼때 장대하고 독특한 석조구조는 창건당시 8세기 유물이고 그 위의 목조건물은 병화로 소실되어 18세기에 중창한 것이며, 회랑은 196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불국사의 석조 구조는 길고 짧은 장대석, 아치석, 둥글게 조출된 기둥석, 난간석 등 잘 다듬은 다양한 형태의 석재로 화려하게 구성되었는데 특히 연화교와 칠보교의 정교하게 잘 다듬은 돌기둥과 둥근 돌난간은 그 정교함, 장엄함과 부드러움이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불국사의 높이 8.2m의 삼층석탑인 석가탑은 각 부분의 비례와 전체의 균형이 알맞아 간결하고 장중한 멋이 있으며, 높이 10.4m의 다보탑은 정사각형 기단위에 여러가지 정교하게 다듬은 석재를 목재건축처럼 짜맞추었는데 복잡하고 화려한 장엄미, 독특한 구조와 독창적인 표현법은 예술성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불국사는 사적·명승 제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불국사내 주요 문화재로는 다보탑(국보 제20호), 석가탑(국보 제21호), 청운교와 백운교(국보 제23호), 연화교와 칠보교(국보 제22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비로자나불(국보 제26호)등이 있으며, 불국사는 1995년 12월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해인사 장경판전

13세기에 만들어진 세계적 문화 유산인 고려 대장경판 8만여장을 보존하는 보고로서 해인사의 현존 건물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장경판전은 정면 15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두 건물을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하였다. 장경판전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장,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이라 하며 동쪽과 서쪽에 작은 규모의 동·서사간판전이 있다.
  건물을 간결한 방식으로 처리하여 판전으로서 필요로 하는 기능만을 충족시켰을뿐 장식적 의장을 하지 않았으며, 전·후면 창호의 위치와 크기가 서로 다르다. 통풍의 원활, 방습의 효과, 실내 적정 온도의 유지, 판가의 진열 장치 등이 매우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되어 있는 점은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장경판전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 세조 3년(1457) 어명으로 판전 40여칸을 중창하였고 성종 19년(1488)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30칸의 대장경 경각을 중건한 뒤 보안당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광해군 14년(1622)에 수다라장, 인조 2년(1624)에는 법보전을 중수 하였다. 장경판전은 가야산 중턱의 해인사에 위치한 관계로 서기 1488년 조선 초기에 건립된 후 한번도 화재나 전란 등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보존 가치가 탁월한 팔만대장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장경판전은 세계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해인사의 건축기법은 조선초기의 전통적인 목조건축 양식을 보이는데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은 물론, 건물내 적당한 환기와 온도·습도조절등의 기능을 자연적으로 해결할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 판전에는 81,258장의 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으며, 글자 수는 무려 5천2백만자로 추정되는데 이들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대장경판은 고려 고종때 대장도감에서 새긴 목판이다.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으로서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이라 하며 또한 판수가 8만여판에 이르고 8만4천 법문을 수록했다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고려 현종(1009~1031, 재위) 때 새긴 초조대장경은 몽고의 침입에 불타버려 다시 새겼다하여 재조대장경이라 일컫기도 한다. 이 대장경판은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막기위하여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대장경판을 다시 조각하기 시작하였다.

  대장경판은 당초 경상남도 남해에서 판각하여 강화도 대장경판당으로 옮기고 보관하였으나 고려말 왜구의 빈번한 침범으로 조선 태조 때인 1398년 현재의 해인사 장경판전에 옮겨 보관 중이다. 이 대장경판은 개태사의 승통인 수기(守其)가 북송관판과 거란본 및 우리의 초조대장경을 대조하여 오류를 바로잡은 대장경이다.

  이규보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보면 현종 2년(1011)에 거란병의 침입때 대장경을 새겨 거란병이 물러갔음을 상고하고, 몽고의 침입으로 이 대장경판이 불타버려 다시 새기니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물리치게 하여 달라는 염원을 기록하고 있다. 대장경판은 고종 24년(1237)부터 35년(1248)까지 12년 동안 판각하였는데 준비기간을 합치면 모두 16년이란 기간이 걸려 완성 된 것이다.

  해인사 동·서사간판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교 경전은 국가에서 새긴 고려대장 경판과는 달리, 고려시대에 사찰에서 새긴 고려각판이다. 팔만대장경은 불교의 경·율·논 삼장을 집대성하였기에 세계불교연구의 귀중한 문헌으로, 이 대장경은 일본이 신수대장경을 만들때 표준으로 삼았으며, 중국에도 역수입되고, 영국·미국·프랑스·독일 등 서구 선진국에도 전해져 세계불교 연구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국보 제5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서는 대장경판 81,258판(국보 제32호), 고려각판 2,725판(국보 제206호), 고려각판 110판(보물 제734호)이 있으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종묘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종묘는 태조 3년(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 하였으며,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56,503평의 경내에는 종묘정전을 비롯하여 별묘인 영녕전과 전사청, 재실, 향대청 및 공신당, 칠사당 등의 건물이 있다. 정전은 처음에 태실 7칸, 좌우에 딸린 방이 2칸이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1608)에 다시 고쳐 짓고, 그 후 영조 헌종때 증축하여 현재 태실 19칸으로 되어있다.

  영녕전은 세종 3년(1421)에 창건하여 처음에는 태실 4칸, 동서에 곁방 각 1칸씩으로 6칸의 규모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에 10칸의 규모로 지었으며 그후 계속 증축하여 현재 16칸으로 되어 있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정전에서 매년 춘하추동과 섣달에 대향을 지냈고, 영녕전에는 매년 춘추와 섣달에 제향일을 따로 정하여 제례를 지냈으나 현재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을 정하여 종묘제례라는 제향의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제사드릴때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와 무용을 포함하는 종묘제례악이 거행되고 있다.

   
  종묘의 주전인 정전은 건평이 1,270㎡로서 동 시대의 단일 목조 건축물로는 세계에서도 그 규모가 가장 큰 건축물로 추정되며, 종묘의 건축 양식은 궁전이나 불사의 건축이 화려하고 장식적인데 반하여 유교의 검소한 기품에 따라 건립된 특수목적용 건축물이다.
  종묘는 한국의 일반 건축물과 같이 개별적으로 비대칭구조를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의례공간의 위계질서를 반영하여 정전과 영녕전의 기단과 처마, 지붕의 높이, 기둥의 굵기를 그 위계에 따라 달리 하였다.

  중국 주나라에서 시작된 종묘제도는 7대까지 모시는 제도로 시작되어 명나라 때에 와서 9묘 제도로 확대 되었는데 중국의 태묘에서는 태실이 9실에 불과하나 한국의 종묘만은 태실이 19칸인 매우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성이 강조된 독특한 형식의 건물모습은 종묘제도의 발생지인 중국과도 다른 건축양식이며 서양건축에서는 전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건축유형이다.

  종묘제례는 종묘인 의례공간과 함께 의례절차, 의례음식과 제기, 악기와 의장물, 의례음악과 의례무용 등이 조화되어 있으며, 1462년에 정형화된 형태를 500년이상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적 의례문화라고 할 수 있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에 나타난 의례 절차, 음악, 무용 등은 중국의 고대문명을 바탕으로 형성된 하, 은, 주 시대의 의례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양의 고대문화의 특징과 의의를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동양 고대문화를 연구하기 위한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문화유산 중의 하나이다.

  종묘제례악은 기악, 노래, 춤으로 구성되는데 세종때 처음짓고 세조때 다듬은 보태평과 정대업 22곡을 연주하고 그 동작이 단순하면서도 장엄한 것이 특징인 육일무 등의 춤을 춘다. 신라향가나 고려가요가 오늘날 가사만 전하여 지는데 비하여 종묘제례악은 500년전의 선율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전하고 있어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종묘는 조선시대의 전통건물로서 일반건축이 아닌 신전건축임에도 불구하고 건축의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많은 현대 건축가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으며 종묘의 뛰어난 건축적 가치는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칭하여 지고 있을 만큼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종묘는 사적 제12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정전(국보 제227호), 영녕전(보물 제821호), 종묘제례악(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제 제56호)가 있으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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