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jm1

제가 미련했기 때문입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경란 작성일13-06-19 14:30 조회3,721회 댓글0건

본문

서대원 사건을 총 정리합니다.

서대원 사건이 증명하는 것 1 :
모든 책임은, 저 자신에게 있습니다.

1989. 1. 9. 교학사는 동서문화사에,
서대원이 7년 동안 딸자식의 목숨을 걸고 완성시킨 "한국역사만화전집 14권"을
단돈 3천만 원을 받고 불법 전매해 버렸습니다.

1989. 1. 9. 동서문화사는 교학사로부터,
인쇄기에 걸기만 하면 정가 15만 원짜리 전집물을 출판할 수 있는 인쇄용 필름과
책이 인쇄될 때마다 저자에게 7500만원씩의 인쇄를 지불해야할 의무가 있는 저작권,
그리고 저자의 그림원고 등등의 엄청난 권리를, 모두 합해서,
단돈 3천만 원에 사(?)들였던 것입니다.

출판사 사장은, 물론, 상인입니다.
그러나 출판사는, 단순한 물건을 생산하는 기업이 아닙니다.
출판인들이야말로, 문화의 질을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화인입니다.
교학사는, 수십 년을 참고서만 출판해온 국내굴지의 교육출판사입니다.
교학사 사장이, 참고서업계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학사는 분명히, 역사와 전통, 그리고 대규모를 자랑하는 교육출판사입니다. 
때문에 교학사를 창립하여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는 양철우 사장은,
시정잡배나 하는 짓들을 스스로 삼가야 할 사람입니다. 

저작권과 출판권은 작가의 고유권한입니다.
출판권허락계약, 출판권설정계약, 저작권양도계약 중에서
어떤 계약을 선택할 것인지를 결정할 권리는 
분명히 작가에게 있습니다.

1981. 7. 1.  제 남편 서대원은 교학사사장 양철우와
문제가 된 한국역사만화전집 14권을 그리기로 하는 출판계약서를 작성했었습니다.
서대원에게 출판계약의 종류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면,
당연히, "출판권허락계약"을 선택했을 것이며,
인세는 10% 이상을 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법은, 유명작가와 무명작가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차별하는 것은, 법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법률적인 권리는 분명히 보장이 돼있었지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 남편 서대원은, 교학사 사장의 처분에 따르는 수밖에 없는
무명만화가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계약 당시, 교학사 사장은,
"금성출판사의 역사만화를 그린 신동우 화백이 50만원을 받았으니,
화료는 85만원이면 충분하다!"라고, 못을 박아 버렸습니다.

무명만화가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유명만화가 신동우씨보다 화료를 35만 원이나 더 준다고 하는데,
"화료가 적으니 더 주십시오!"라고 애걸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출판사 사장에게 애걸하는 작가는, 이미 작가가 아닙니다.
애걸해 봐야, 신통한 결과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 당시, 서대원이 결정해야할 일은,
"그 돈을 받고서라도 그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뿐이었습니다.

"이 책은 권당 85만원의 화료를 받고 그린 그림입니다"
라는 변명이, 통할 리가 없습니다.
권당 85만원을 받고 그렸든, 권당 8500만원을 받고 그렸든,
독자는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독자가 판단하는 것은 오로지, 작품성뿐입니다.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 말해야 합니다.

현실을 무시한 이상은 설자리가 없는 법입니다. 
제 남편 서대원은 
앞뒤 생각도 해보지 않고, 너무 경솔한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과 성실로
현실과 이상의 갭을 충분히 메울 수 있다고 오판한 나머지,
악인의 노리개(?)가 되는 것을 기꺼이 자청했던 꼴입니다.

1370만원의 화료를 받는 일에 7년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 멍청(?)한 짓을 뒷바라지하는 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 남편은 분명히, 화료에 연연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작품성에 대한 책임은 작가가 지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만약 저희부부에게 돈이 있었다면, 기천만원을 기꺼이 투자했을 것입니다.
그 투자는,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는 결과가 될 뿐 아니라,
작품성이 인정되면,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는 투자입니다.
그러나 저희 부부에게는, 돈이 없었습니다.

1980년 11월, 10개월 된 아이가 뇌종양 수술을 받고 사망했습니다.
바로 그 직전, 20만원에 3만5천 원짜리 단칸사글세방으로 분가한 상황에서,
1981. 7. 1.부터, 문제가 된 역사만화를 그리기 시작했었습니다. 
그런데, 1984년도에 출생한 딸아이 역시, 선천성 심장병이었습니다.
수술비를 구하지 못해 둘째(?)아이 역시 사망할 뻔했었습니다.
저희는 돈도 없고 주변머리도 없는 "답답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마음만 앞섰지, 능력이 따라주지 않는 상황에서
저도, 남편도, 최선을 다 해 보겠노라고,
악을 뻑뻑 쓰다가, 일찌감치 지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저희부부의 인생은 분명히, "작가정신"에 달려있는 것이었건만, 
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이었습니다.
그 작품에,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도저히 경주할 수가 없었습니다.
초반기부터, "하루 속히 완성하는 것"이 지상과제였었습니다.

그처럼 멍청한 짓을 해놓고도, 당당하기만 했었습니다.
"작가로써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자신했었습니다.
이 글의 가필과 정정을 하고있는 바로 이 순간,
무엇이 그리도 당당했던 것인지,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만약 화료가 300만원만 되었다고 해도, "작품성"을 지상과제로 삼아,
잘못된 부분은 몇 번이라도 고쳐 그리는 성의를 발휘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당연히 받아냈어야 할 최소한도의 금액"이었습니다.
서대원이 진실로 작가정신을 지키고자 했었다면,
"교학사의 정당한 투자"를 당당하게 요구했었어야 옳습니다. 

제 남편 서대원에게는 분명히, "판단을 잘못했던 죄"가 있습니다.
한 순간의 선택이 백년을 좌우하는 이상,
그 죄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닙니다.
 
작가로서 미숙했던 죄를 일찌감치 깨닫고,
그 죄를 일찌감치 자백(?)하고 나섰다면,
서대원 사건이 혼미를 거듭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서대원의 죄(?)보다는 교학사의 죄가 훨씬 더 크고,
교학사의 죄보다 더 큰 것이, 검찰의 죄다."
라는 점에 생각의 초점을 맞춰버렸기 때문에,
"나도, 남편도, 최선을 다했다"
는 사실을 설명하는 일만 12년 동안이나 계속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제 글은, 호소력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 마음이 뒤죽박죽이었기 때문에,
제가 쓰는 글도 뒤죽박죽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순간, 저 자신의 미련함을 깨닫게 됐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미련하게 고집하고 있는지를 찾아내야 한다"
는 사실을 깨닫게 됐던 것입니다.
제가 사건해결의 정곡을 깨닫게 된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저의 잘못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일을 계속했었습니다.

등에 업고있는 아이를 12년 동안이나 찾아다닌 꼴이지만,
그러나 뒤늦게라도 찾았으니 된 것입니다.
이후로는, 12년씩이나 미련을 떠는 일을
절대로 없을 것이니 말씀입니다.

서기 2002년 3월 12일  삼가 김경란 올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