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승려도 하늘이 낸 백성이다.-불교의 삶속에 살다 가신 선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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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재문 작성일13-06-13 23:25 조회2,07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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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법문화의 국제경쟁력 향상을 위한 한국전통법문화의 강좌
조선왕조의 종교법문화에 관한 법이론과 법의 정신(106);조선왕조의 백성은 다같은 하늘이 낸 백성이다(천민.天民:천부인권평등사상)-승려도 하늘이 낸 백성이다.-불교의 삶속에 살다 가신 선현들 .
동국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김 재 문.
사법행정 2008.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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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서설
그동안 우리나라는 기독교 불교등 모든 종교를 자유롭게 인정하고 화목하여 전국종교연합회같은 단체도 있는데...
어찌하여 불교의 스님들을 그토록 화나시게 한 정치가나 공직자.공무원들이 있는지...
때문에 이번호에서는 조선왕조의 종교법문화중에 불교법문화에 관한 기록들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다만 지금의 우리 헌법에서는 국교가 인정되지 않으므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나, 조선왕조에서는 유교가 국교였던 정책과 법 때문에 불교에 대한 종교의 자유가 제한되거나 없앨려고한 부정적인 부분들은 오늘의 현실에 맞지 않는 잘못된 부분이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또한 그 분량이 엄청나므로 그 일부만을 압축하여 불교의 긍정적인 기록이나 장점이나 불교를 선호하거나 생활하신 분들의 기록들만을 우선 소개하기로 한다.
특히 지면관계상 이번호에서는 일본이 해인사에 있는 팔만 대장경판을 달라고 조선왕조 개국시부터 임진왜란 전까지 약탈과 전쟁까지도 계획하며 협박과 회유로 집요하게 강요해온 점과,
그 대신 조선의 임금들이 지금의 일본불교문화에 적지 않는 영향을 준 불경과 대장경인본들을 하사했던 일본과의 외교법문화의 기록들은 시간이나는 데로 다음에 소개하기로 한다.
第二.최고 통치자인 임금의 천민(天民:천부인권 평등사상).
천민(天民)이란;하늘이 낸 다 같은 백성(天之生民 ...無貴賤之別哉).하늘이 백성을 만들어 낼때 귀천의 구별을 두지 않았으며,임금의 하늘같은 다 같은 평등한 인간다운 권리를 가진 백성이라는 의미이다.
1.보우(普雨)도 역시 하늘이 낸 백성인데, 어찌 큰 죄를 줄 수 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명종 10권, 5년(1550 경술 / 명 가정(嘉靖) 29년) 성균관 유생 안사준이 보우를 죽일 것 등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다.
성균관 생원 안사준(安士俊) 등이 상소를 올려 요승(妖僧)인 보우(普雨) 를 죽이고 정업원(淨業院) 을 수리하지 말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 인수궁(仁壽宮) 의 일에 대해서는 조정이 다 나의 뜻을 알고 있는데, 어찌 너희들의 말이 필요있겠는가.
자전(慈殿)께서 조종(祖宗)을 봉공(奉供)하는 일에 있어서 옛 관례를 따라 하였지 무엇을 더 보탠 것이 있는가?
그리고 보우 도 역시 하늘이 낸 백성인데, 어찌 큰 죄를 줄 수 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뒤에 한 달이 넘게 상소를 올렸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2).저 승도(僧徒)들도 역시 천민(天民)인데- 어찌 부모를 섬기고 자녀를 기르며 그 삶을 편안히 하고 -그 업을 즐기려 하지 않으랴. -군정(軍政)도 허소하지 않고- 백성도 남은 인력이 있어 생업에 안정할 수 있는지-의논하여 아뢰라;
연산 12권, 2년(1496 병진 / 명 홍치(弘治) 9년) .병조(兵曹)에 전교하기를,
“내가 민정을 살펴보건대, 안정된 생활을 하려 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위에 있는 사람이 혹시 잘 어루만지지 못하고 중하게 부려서 곤욕을 주면 백성이 그 역사를 도피하여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생각하면 저 승도(僧徒)들도 역시 천민(天民)인데 어찌 부모를 섬기고 자녀를 기르며 그 삶을 편안히 하고 그 업을 즐기려 하지 않으랴.
그러나 국가가 군국(軍國)의 정사를 중히 여겨서 졸오(卒伍)의 법을 엄하게 하여 인정(人丁)을 수색하되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으므로, 한 집에 3부자가 있으되 아비는 정군(正軍)이 되고 아들은 보인(保人)이 되어, 부자가 함께 군역(軍役)에 고달프니, 어느 겨를에 치산(治産)하여 삶을 윤택하게 하랴.
이미 생업을 잃었으니, 부모에게서 떠나고 처자를 버리고 나가서 승려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형세이다.
승도가 불어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군정(軍政)도 허소하게 되지 않고 백성도 남은 인력이 있어 생업에 안정할 수 있는가? 이것을 의논하여 아뢰라.”하였다.
3).승군(僧軍)들도 -천민(天民)으로서 농사는 지을 수가 없고 -양식을 구걸하여 살아가는 자들이으로-일이 있을 적마다 역사(役事)를 시킨다면 억울하므로-유위군으로 정해서 보내도록 명함:
명종 6권, 2년(1547 정미 / 명 가정(嘉靖) 26년) .
“공조(工曹)가 홍제원(弘濟院) 앞 개울을 수축할 때에 승군(僧軍)을 더 증가하자고 청하였는데, 그들도 천민(天民)으로서 농사는 지을 수가 없고 양식을 구걸하여 살아가는 자들이다.
만약 나라에 일이 있을 적마다 역사(役事)를 시킨다면 억울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앞서 정했던 승군도 모두 역사시키지 말고 유위군(留衛軍)으로 정해서 보내라.”
4).전하께서 매양 천민(天民)을 말씀하시면서 -무고한 자를 억울하게 죽였다고 하시는데,- 백성이란 힘써서 일하여 그 윗사람을 섬기는 자인데- 저 승려들은 과연 무엇을 하는 자들입니까?-
임금왈:“도오(道悟) 가 비록 승려이지만- 또한 죄 없는 백성이고- 응규 가 비록 명색이 유생이나 -이미 사람을 잔인하게 두들겨 상처를 입혔으니-, 만약 미치광이라 하여 버려두고 죄를 묻지 않는다면 -후일의 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이므로 윤허할 수 없다”;
명종 12권, 6년(1551 신해 / 명 가정(嘉靖) 30년) 성균 생원 4백여 명이 상소하여 조응규를 처벌하지 말기를 청했으나 불허하다.
성균관 생원 안사준(安士俊) 등【4백여 인이었다.】이 상소하기를, “신들은 모두 지극히 어리석은 자들로서 다행히 승평한 때를 만났으니, 시정(時政)의 득실(得失)과 임금 처사의 시비(是非)에 대하여 진실로 소견(所見)이 있다면 심상히 보고만 넘길 수는 없습니다.
이제 조응규 가 완악한 한 승려를 구타한 것이 비록 미치광이 무뢰배(無賴輩)의 일이라 하더라도 조응규 는 명색이 유생이고 도오(道悟) 는 무부 무군(無父無君)의 죄를 진 자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일개 행이 바르지 못한 승려를 비호하려고 이미 중사(中使)를 보내어 그 죄를 엄중히 다스리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심지어 금부에 잡아들여 국문까지 하라 하시니, 전하의 용법(用法)이 너무 혹독하지 않습니까?
길에서 보고 듣는 자 누가 놀라지 않겠습니까.
아, 후세에서 전하를 어떠한 임금이라고 하겠습니까?대간이 중관(中官)이 응규 에게 곤장을 친 일을 아뢰면 거짓말이라 하고, 응규 가 곤장 맞은 것을 징험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법에 의하여 친 것이라 하셨습니다. 아, 임금의 말씀이 과연 이러한 것입니까?
처음 전하께서 금부에 잡아들여 추국하라고 분부하셨을 때 어리석은 백성들은 전하께서 승려를 이와 같이 비호하신다 하고 유식한 선비들은 그 진위(眞僞)를 살펴 공명 정대(公明正大)한 정사를 보일 것이라 여겼는데, 이제 드디어 조응규 의 죄를 가중(加重)시키셨으니,
아, 성인의 정사는 아마도 이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일개 완악한 승려의 일 때문에 내시가 정사에 간여하는 폐단을 만드시니, 우리 유도와 이단(異端) 어느 쪽이 흥성하고 쇠퇴하느냐 하는 계기(契機)가 판가름났습니다.
위로 삼공·육경으로부터 아래로 시종·대간에 이르기까지 여러날을 두고 논계하여 온갖 말로 극력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못 들은 체하시고는 또 인하여 변명하시니, 이는 대신의 말도 들을 것이 못되고 대간의 말도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아, 수행이 낮은 승려와 내시가 대신과 대간보다 소중하다면 전하께서는 장차 이런 무리들과 더불어 나라를 다스리려는 것입니까?.전하께서 매양 천민(天民)을 말씀하시면서 무고한 자를 억울하게 죽였다고 하시는데, 이른바 백성이란 힘써서 일하여 그 윗사람을 섬기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승려들은 과연 무엇을 하는 자들입니까?
옛사람의 말에 ‘군자의 허물은 일식(日蝕)·월식(月蝕)과 같아서 그 허물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보고 허물을 고치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본다.’고 했으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하니,
답하기를, “당초에 대관이 응규 에게 곤장 백여 대를 쳤다고 들었으므로 그 상처를 징험하기 위하여 잡아다 보니, 곤장을 맞은 흔적이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도오(道悟) 가 비록 승려라고는 하나 또한 죄 없는 백성이고 응규 가 비록 명색이 유생이나 이미 사람을 잔인하게 두들겨 상처를 입혔으니, 만약 미치광이라 하여 버려두고 죄를 묻지 않는다면 후일의 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이므로 윤허할 수 없다.”하였다.
5).백성은 모두가 천민(天民)이요- 유독 도오(道悟) 만이 천민은 아니며 -온 나라 안에 살인한 자와 상해(傷害)한 자가 부지기수인데- 장차 모두 중사(中使)를 보내어 담당하게 하고 모두 금부에 잡아들여 국문하겠습니까?-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음:
명종 12권, 6년(1551 신해 / 명 가정(嘉靖) 30년)
동지성균관사 주세붕(周世鵬) 등이 상소하기를,
“ 조응규 는 궁벽한 시골의 한 미치광이 유생으로서 승려를 구타한 것은 길에서 서로 만나 그 무례함을 미워해서 그렇게 된 것일 뿐, 처음부터 심한 상처를 입힌 것이 아니었으며 지금도 또한 죽음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죄를 다스리는 데에 담당 관원이 있고 거기에 해당하는 죄과가 있는 것인데 금부에서 죄를 평의(評議)하여 율문 밖의 형벌을 시행하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미 납부한 속전(贖錢)을 도로 돌려주고 이 혹독한 추위에 반드시 곤장을 치려고 하는 것은 제왕으로서 무슨 정사입니까?
백성은 모두가 천민(天民)이요 유독 도오(道悟) 만이 천민은 아니며 온 나라 안에 살인한 자와 상해(傷害)한 자가 부지기수인데 장차 모두 중사(中使)를 보내어 담당하게 하고 모두 금부에 잡아들여 국문하겠습니까?
성상의 은택을 널리 온 백성에게 미치게 하지 못하면서 유독 한 승려에게만 후하게 하니 신들은 성상의 마음이 반드시 편벽하게 매인 데가 있지 않은가 염려됩니다.
생각이 매인 데가 있으면 그 발단(發端)은 비록 은미해도 정사에 방해가 되어 위망(危亡)이 따르는 법인데, 하물며 겉에 드러난 것이겠습니까.
이리하여 조정 신하들이 전하를 위하여 황급히 서둘러 누누이 아뢰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일월 같은 밝음을 넓히고 우레 같은 위엄을 가라앉히어 성명(成命)을 거두어 여러 사람의 여망(輿望)을 위로하소서.”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도적을 숨겨준 수진을 죄주지 않는다면- 장차 형벌이 문란하고 기강이 어지러워져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나라 꼴이 말이 아니게 될 것이니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답하기를, “승려도 천민(天民)이니 어찌 애매한 죄를 주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라고 함:.
명종 14권, 8년(1553 계축 / 명 가정(嘉靖) 32년) 홍문관 부제학 정유(鄭裕) 등이 상차하기를,
“엎드려 살피건대 전하께서 체원 거정(體元居正)하신 이후로 법을 씀이 강하고 과감하여 죄가 있으면 누구나 그 죄에 알맞은 벌을 내리어 비록 재상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라도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는데,
승려들의 죄는 극진히 옹호하여 죄에서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니, 전하께서 법을 씀이 어쩌면 그리도 한결같지 않으십니까.
하루에 세 사람을 죽인 막중한 죄를 범한 불각 을 승려의 영수라는 수진 이 숨겨주었는데도 전하께서 수진 의 죄는 묻지 않고 불각 을 잡지 못한다고 수령들만 나무라시니 신들의 의심이 더욱 심해집니다.
도적을 숨겨준 수진 을 죄주지 않는다면 장차 형벌이 문란하고 기강이 어지러워져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나라 꼴이 말이 아니게 될 것이니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신들은 전하의 법이 일개 승려에게서 무너지는 것을 보고 감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어서 거듭 신청(宸聽)을 번거롭힙니다.”하니,
답하기를, “승려도 천민(天民)이니 어찌 애매한 죄를 주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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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결어
第一.최고 통치자인 임금의 천민(天民:천부인권 평등사상).
천민(天民)이란;하늘이 낸 다 같은 백성(天之生民 ...無貴賤之別哉).하늘이 백성을 만들어 낼때 귀천의 구별을 두지 않았으며,임금의 하늘같은 다 같은 평등한 인간다운 권리를 가진 백성이라는 의미이다.
1.보우(普雨)도 역시 하늘이 낸 백성인데, 어찌 큰 죄를 줄 수 있겠는가?라며 윤허하지 않는다;명종 10권, 5년(1550 )
2).저 승도(僧徒)들도 역시 천민(天民)인데- 어찌 부모를 섬기고 자녀를 기르며 그 삶을 편안히 하고 -그 업을 즐기려 하지 않으랴. -군정(軍政)도 허소하지 않고- 백성도 남은 인력이 있어 생업에 안정할 수 있는지-의논하여 아뢰라;
연산 12권, 2년(14963).
3).승군(僧軍)들도 -천민(天民)으로서 농사는 지을 수가 없고 -양식을 구걸하여 살아가는 자들이으로-일이 있을 적마다 역사(役事)를 시킨다면 억울하므로-유위군으로 정해서 보내도록 명한다:명종 6권, 2년(1547),
4).전하께서 매양 천민(天民)을 말씀하시면서 -무고한 자를 억울하게 죽였다고 하시는데,- 백성이란 힘써서 일하여 그 윗사람을 섬기는 자인데- 저 승려들은 과연 무엇을 하는 자들입니까?-
임금이 말하기를:“도오(道悟) 가 비록 승려이지만- 또한 죄 없는 백성이고- 응규 가 비록 명색이 유생이나 -이미 사람을 잔인하게 두들겨 상처를 입혔으니-, 만약 미치광이라 하여 버려두고 죄를 묻지 않는다면 -후일의 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이므로 윤허할 수 없다”;명종 12권, 6년(1551),
5).백성은 모두가 천민(天民)이요- 유독 도오(道悟) 만이 천민은 아니며 -온 나라 안에 살인한 자와 상해(傷害)한 자가 부지기수인데- 장차 모두 중사(中使)를 보내어 담당하게 하고 모두 금부에 잡아들여 국문하겠습니까?-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명종 12권, 6년(1551 신해),
6).도적을 숨겨준 수진을 죄주지 않는다면- 장차 형벌이 문란하고 기강이 어지러워져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나라 꼴이 말이 아니게 될 것이니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라는 항의에 -
명종임금이 답하기를, “승려도 천민(天民)이니 어찌 애매한 죄를 주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라고 한다:.명종 14권, 8년(1553 계축).
1).태종이 생각한 불교와 교지:불법(佛法)은 그 마음 쓰는 것을 캐어보면- 자비(慈悲)가 종지(宗旨)가 되고, -또 이미 도첩(度牒)을 주어 출가(出家)하여 입산(入山)하였으니, 국가의 일에 관계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승도(僧徒)를 징용하여 이름은 ‘청중(請衆)이라고 하나 실상은 역사(役使)시키는 것이어서 도리어 평민보다 심한 것이 있으니, 매우 불쌍하다.-
침요(侵擾)하여 고역(苦役)시키기를 평민과 다름이 없으니 승도 또한 백성이다.
이미 모두 부모를 하직하고 애정을 끊고 승려가 되었으니, 이렇게 역사시키는 것은 실로 미편하다. 태종 34권, 17년(1417 정유 ),
2).태조 가 부처를 좋아하여 일찍이 개경사(開慶寺) 를 세웠기에- 또 《대장경》 을 인출하여 이 절에 안치하기 위해-불경찍는 닥종이를 해인사로 옮겨 대장경을 찍는 것이 옳으며-관련자와 2백명의 승려들에도 모두 급료를 주도록 임금이 왕명을 내린다:태종 25권, 13년(1413 계사 ),
3).태조(太祖) 의 명복(冥福)을 베풀기 위해-해인사에서 찍어낸 《대장경》을 개경사에 수송한다:태종 25권, 13년(1413 계사),
4). 이색(李穡) 이 불교를 신봉하여 술과 고기를 끊었으므로-
태조임금이 이색에게 말하기를 이미 늙었으니 다시 술과 고기를 먹고 건강을 유지하게 하라고 명한다:태조 8권, 4년(1395 을해),
5).지공스님을 존경;불씨(佛氏)의 그 도(道)를 다하는 사람이면 나는 마땅히 존경하여 섬기겠다-
지공(指空)과 같은 승려(僧)이면 어찌 존경하며 섬기지 않을까?”라는 말에 -군신(群臣)들이 모두 “옳습니다.”라고 찬동을 한다:태종 27권, 14년(1414 갑오),
二).후비.왕후.대비.대왕대비등의 불교관.
1).대비가 언문의 글로서 말하기를“내게 있어서는 선왕을 위하여 마음에 비록 날마다 불사(佛事)를 하더라도 마음에 만족하지 않다.- 자고로 후비(后妃)가 부처를 좋아하지 않은 자가 몇이나 있었는가?”; 성종 117권, 11년(1480 경자),
2).인수 왕대비와 인혜 왕대비가 내린 언문에서-“별다른 큰 폐단도 없으면서 선왕의 원하는 뜻을 무너뜨리는 것이 옳겠습니까? -한(漢) · 당(唐) 이후로 유교와 불교가 아울러 행하였고
도승(度僧) 의 법이 또 《대전(大典)》 에 실렸는데-역대 제왕(帝王)이 어찌 불교를 배척하려고 하면서도- 이제까지 근절시키지 아니함은- 반드시 인심의 요동을 중히 여겨 각각 그 삶을 편히 하도록 한 것인데-
우리는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며-또 듣건대 중국[中原]에는 절(사찰) 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의 집에도 모두 불당(佛堂)이 있어- 그 불교를 숭상함이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오랑캐를 막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같이 작은 무리를 두려워하여 법을 바꾸는 것이 옳겠습니까?-절을 수호(守護)하여 선왕(先王)·선후(先后)의 수륙재 시식(施食) 때에 정결하게 음식을 갖추어 공판(供辦)하도록 한 것과 같이 하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라고하자-
신하들간에 찬반의 논의가 있었다: 성종 271권, 23년(1492 임자),
三).신하
1).이색(李穡) 은 동방(東方)의 대유(大儒)이나,- 대장경(大藏經) 을 보기를 좋아하자 선비들이 비웃었으나-
지금 불사(佛事)를 행하지 않는 자는 오직 하윤(河崙) 일 뿐이요, -
그 나머지 유자(儒者)는 몰래 불사를 행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태종 5권, 3년(1403 계미),
2).정총이 .“전하께서 어찌 불사(佛事)에 정성껏 하십니까? 청하옵건대, 믿지 마옵소서”라고 하니,-
태조가“이색(李穡)은 유학(儒學)의 종사(宗師)가 되었는데도 불교를 믿었으니, -
만약 믿을 것이 못된다면 이색 이 어찌 이를 믿었겠는가?라며- 다시는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태조 2권, 1년(1392 임신),
3).병조 정랑(兵曹正郞) 김수온(金守溫) 은 승려[僧] 신미(信眉) 의 아우로 -과거(科擧)에 합격하였지만,-
천성이 불서(佛書)를 지독히 좋아하여-능엄경(楞嚴經)》은 《중용(中庸)》 보다 낫다.”고 하며-
국가에서 불교 행사의 자리를 베풀 때에는 김수온(金守溫) 이 반드시 참여한다:문종 1권, 즉위년(1450 경오),
4).법화경설행에 공녕군 이인을 대자암에 보내어 《법화》 법광을 설행하였다;세종 24권, 6년(1424 갑진),
四).불교행사와 호불행위.
1).불경의 서사(書寫)와 발원문 작성:대행왕을 위하여 불경을 쓰고 도승지 이사철이 발문을 쓰다; 문종 1권, 즉위년(1450 경오),
2).독경(讀經);
가).환왕의 기일이므로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고 -승려들에게 궐내에서 불경을 읽게 함;l태조 3권, 2년(1393 계유),
나).창덕궁에 경사 21인을 모아놓고 불경을 읽게 한다:태종 25권, 13년(1413 계사),
3).기우제:기우(祈雨)제를 지낸 주법승(主法僧)에게는 저포(苧布) 한 필을 주고, -나머지 승려 47명에게는 각각 정포(正布) 한 필씩을 내려 준다;태종 9권, 5년(1405 을유),
4).신문고:조계사(曹溪寺)의 승려 성민(省敏)등 수백명이 신문고(申聞鼓)를 친다: 태종 11권, 6년(1406 병술),
5)승려의 흥판을 인정함;승인(僧人)의 흥판(興販)이 매우 성하게 유행하니,- 금하는 것이 온당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이제 승도(僧徒)가 소나 말을 몰고 다니면서 물건을 팔지 못하게 하면- 소요(騷擾)가 일어나지 아니하겠는가?-
먹을 것이 넉넉한 연후에야 청정한 교(敎)를 닦을 수 있다.-
만약 그대의 말과 같다면 승려는 장차 먹지 아니하고 굶어 죽어야 하겠는가?-
또 승려는 우리 백성이 아닌가?-
승려가 만약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면 -이것도 우리 백성인데
어찌 굶어 죽게 할 수 있겠는가?”라며
생존을 위해 영리행위를 인정한다:성종 229권, 20년(1489 기유),
6).불교비방-왕이 노함:-
이첨.이색등과 중한 선비들도 불교를 신봉함: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 김초(金貂) 가 불교를 비방하는 소(疏)를 올리자 -왕이 노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명분(名分)이 없어 주저하였으며-
아태조(我太祖)이래 대대로 불법(佛法)을 숭신(崇信)함을 배척함은 선왕의 성전을 파괴한 행위이며-
이첨은 장원급제후-습속에 젖어 부처받들기를 독실히 하며-명망있는 중한 선비들도 모두 미혹되어 신봉하며-
이색(李穡) 은 일대(一代)의 문사(文士)로서 부처는 대성인(大聖人)이다라고 하였다.: 중종 48권, 18 년(1523 계미),
7).담선폐지를 허가 하지 않았다:태종 9권, 5년(1405 을유 ),
8).승려를 구타한 유생을 엄히 처벌함:
임금이 “승려를 구타한 유생을 처벌한 것이 불교를 숭상하기 때문이 아니며-나라의 임금은 사람의 범죄한 것을 들으면 -마땅히 시비(是非)를 분변해야 되고-유생의 도리는 마땅히 심성(心性)을 수양(修養)하여 사설(邪說)을 물리쳐야 되는데 -구타를 하였기에 추핵을 한다: 세종 98권, 24년(1442 임술),
第二.불교적인 삶을 실천한 선현들.
1).한산백 이색의 졸기;
늙어서 왕지(王旨)를 받들어 -지공 대사(指空大師)와 나옹 대사(懶翁大師)의 부도(浮圖)에 명(銘)을 지었기로,- 그 승려들이 문하에 내왕해서 불교를 좋아한다는 비평을 받았다.-
색 이 듣고 하는 말이,“저들이 임금과 어버이를 위해서 복을 기원해 주는데, 내가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태조 9권, 5년(1396 병자),
2).검교 정당 문학 조운흘의 졸기;
자은승(慈恩僧) 종림(宗林) 과 더불어 세속을 떠나 교제하여, 판교원(板橋院) 과 사평원(沙平院) 의 양 사원을 중창(重創)하여 스스로 원주(院主)라고 칭하였는데,
해진 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서 역도(役徒)와 더불어 그 노고를 같이하니, 지나가는 자가 그가 달관(達官)인지 알지 못하였으며-
조운흘은 치의(緇衣검은 옷. 승복 僧服) 에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문(門)까지 나와 길게 읍(揖)하고 맞이하여 모정(茅亭)에 이르러 좌정(坐定)하였다.-
조준이 풍악을 잡히고 술자리를 마련하니,- 조운흘은 짐짓 귀가 먹어 듣지 못하는 척하고, 눈을 감고 정좌(正坐)하여 -높은 소리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창(唱)한 것이 두 번이었는데, -
옆에 마치 아무도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니, -조준 이 사과하여 말하기를, 선생이 이를 싫어하는군 하고, 명하여 풍악을 중지시키고, 차(茶)를 마시고 돌아갔다.태종 8권, 4년(1404 갑신),
3).행 지중추부사 구종직의 졸기:세조 가 일찍이 그를 불러서 정자영(鄭子英) 과 더불어 역리(易理)를 논하게 하였는데,
구종직 이 말하기를, “태극(太極)의 위에 무극(無極)이 있는데, 불도(佛道)가 이것입니다.“라고 하였다;성종 85권, 8년(1477 정유),
4)공조 판서 김수온:면직상서.졸기.
가).면직을 청하는 상서를 올리다;저는 마땅히 영구히 산림(山林)에 가서 도업(道業)을 성취하여, -반드시 어머니의 소생(所生)한 곳을 볼 것이요, -어머니의 받은 바 괴로움을 구(救)할 것이니,- 원컨대 어머님은 안심하고 승화하소서.-라는 긴 사직서를 올리자 하자,
임금이 “도(道)는 세상을 구제하는 방편인데, 어찌 삭발(削髮)하고 승려가 되어야만 닦겠는가?라고 하나-
수온이 회암사(檜巖寺) 에 이르렀다가 얼마 안되어 되돌아왔다..-집안이 부처를 믿어 형(兄)은 신미(信眉) 로서 혜각 존자(慧覺尊者) 로 봉하였고, 어미도 또한 축발(祝髮)하고 여승[尼]이 되었는데, 어미의 유지(遺志)에 따라서 이 상서(上書)가 있었던 것이다.
집이 한소(寒素)하여 비록 대신(大臣)이 되었다 할지라도 납자(衲子)와 같이 쓸쓸하였다. 국가(國家)에 큰 불사(佛事)가 있으면 김수온 이 소어(疏語)를 지었는데 문장을 꾸민 것이 연일(演溢)하였다.
일찍이 ‘도(道)는 증명할 수 있고, 불(佛)은 본받을 만하다.’라고 하였다:세조 32권, 10년(1464 갑신 ),
5).효령 대군 이보의 졸기;
보(李補) 가 부처[佛]를 좋아하여 승려들을 많이 모아 불경(佛經)을 강(講)하였는데,- 세조(世祖) 의 돌보아 줌이 지극히 융숭하여서 상뢰(賞賚상을 줌) 함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며-원각사(圓覺寺)를 창건(創建)함에 미쳐서는 그 일을 맡아 보도록 명하였으며-.
이보(李補) 는 불교[釋敎]를 혹신(惑信)하여 머리 깎은 사람들[緇髡]의 집합 장소가 되었으며,-
무릇 중외(中外)의 사찰(寺刹)은 반드시 수창(首唱)하여 이를 영건(營建)하였다.- 세조(世祖) 가 불교(佛敎)를 숭신(崇信)하여 승려들로 하여금 거리낌없이 제멋대로 다닐 수 있도록 하였으니, -반드시 이보(李補) 의 권유가 아닌 것이 없었다...성종 191권, 17년(1486 병오),
6).김시습:
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아니지만, 또한 한 때의 문사이며- 출가(出家)하여 우리 나라 곳곳을 다니며 지은 시문(詩文)이 당시 제일이었고-
사인(士人) 김시습(金時習) 은 광묘조(光廟朝) 때부터 입선(入禪)하여 머리 깎고 세상을 피하였다가,- 중간에 환속(還俗)하여 아내를 얻었으나
자손(子孫)이 없으며-그의 문장(文章)과 절행(節行)이 우뚝하여 숭상할 만하니, 증직(贈職)시키고 사제(賜祭)하여야 하며-
처사(處士) 김시습(金時習) 의 홍산 사우(鴻山祠宇)를 청일(淸逸)로-사액하고-살아 있으면서 의리를 지킨 생육신으로-이이(李珥) 가 지은 김시습전(金時習傳)에는 문을 닫고 사흘 동안이나 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자기 책을 모두 태워버리고 절간에 자취를 의탁하고-혹은 방랑생활로 그 자취를 감추거나 혹은 은둔해 살면서 몸을 깨끗이 하였으니,-
그 충성과 그 절개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이론의 여지가 없으며-그들의 고심과 아름다운 절의는 -영원토록 사람들을 격려할 만 하다-김시습 은 5살에 신동이라 하여 세종 의 특별한 인정을 받았고 호는 매월당이라 하고,
단종이 손위한 뒤에는 절간에 의탁하여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기에-그 맑은 기풍과 굳은 지조는 백세를 격려할 만하므로-
이조 판서에 추증된 김시습(金時習) 에게는 청간(淸簡)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두 신하를 똑같이 창절사(彰節祠) 에 추가로 제향하라는 왕명을 내린다.
7).율곡선생 이이:
총명 민첩하였고 박학 강기(博學强記)하였으며 글도 잘 지어 명성이 있었고-한 해에 연이어 사마시(司馬試)와 문과(文科)의 두 시험에 장원으로 뽑히고 집에서 나가 산사(山寺)를 전전하며 붙여 살다가- 오랜 기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혹자는“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었다”고하며-: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비탄에 잠긴 나머지 -잘못 선학(禪學)에 물이 들어 19세에 금강산 에 들어가 불도(佛道)를 닦았는데,-
승려들 간에 생불(生佛)이 출현했다고 소문이 자자하였으며-스승의 지도를 없이 도의 큰 근본을 환하게 알고-정미하게 분석하여 철저한 신념으로 힘써 실행하고-타고난 기품이 매우 고상하며- 수양을 잘하여 더욱 높은 경지에 나아갔으며,-
청명한 기운에 온화한 분위기가 배어나오고 -활달하면서도 과감 하였다.:8).순회 세자빈 윤씨의 졸기세자의 영혼을 기원하는 뜻에서 -불공(佛供)을 자주 드렸으나 -상이 가엾게 여겨 금지시키지 않았는데, -
이때에 이르러 졸하고-빈이 생전에 불교를 숭상-왜변을 만나, 우연히 화장(火葬)하게 되자- 생전의 뜻에 부합된다고 하였다: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왕조는 비록 유교만이 유일한 국교이고 나머지 불교등은 사교.이교(異敎)로서 엄격하게 활동을 제한하고 없앨려는 기록이 수업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임금과 왕후와 왕족과 이름난 대 석학자들이나 유학자들과 일반 민간에서도 믿었음을 알 수 있었다.그리고 일본이 조선 초기부터 팔만대장경판을 얻어갈려고 온갖 회유와 협박과 강요를 해 왔으나 결국 주지 않고 잘 보관하여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다.
때문에 오늘날에도 세계적인 종교는 그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국교가 있어서는 않되는 대한민국에서 나라의 대통령이나 정치가가 공직자는 종교의 지도자가 아닌 전 국민의 지도자이자 전국민을 위한 공무를 집행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사랑과 자비도 비슷한 지고의 선을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과 다른것이 아니다.
유독 특정 종교만을 비하하거나 불교를 특별히 존중하는 것도 헌법에 어긋나듯이,기독교를 공직자들이 공무원의 직함으로 포교활동을 하는 것은 공무에 맞지 않으며,
예산도 온 국민을 위해 공정하게 집행되어야 하며,10원 한 장이라도 특정종교만을 위해 부당하게 집행된다면,그돈이 특정종교인들의 돈이 아닌한 잘못된 집행이 될 것이다.
정치가 공직자 공무원들이 선거나 시험으로 선발되어 공무를 맡고 있지만...모든 국민을 위한 봉사자이며 헌법에 정해진 내용을 받들고 하위법령으로 보완하여 세밀하게 나라살림살이를 잘하라고 투표하거나 시험을 선발한 것을 1초라도 잊으면 안될것이다.
특히 정치가들이 공무원들이 한 쪽에 지우쳐서 종교간에 갈등을 조장시킨다면 망국행위에 해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다시는 이런 실수를 범하지 말기를 온 국민들을 간절히 바랄것이다.불교신자가 대통령이나 공무원이 되어도 기독교를 폄하해서도 않되며,불교신도들 위주로 고위공직자를 선임하는 것도 헌법의 정신에 어긋난다.종교는 정치와 무관하다는 것이 헌법의 규정이다.
제발 혼동하지 말기를 바란다.존경스런 종교지도자들이 종교간에 갈등을 조장한 정치를 하면 종교정신은 없어지고 국론이 분렬되고 갈등이 증폭되어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을 것이다..
현행헌법에는 대통령은 취임에 앞서,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라고 하여,
나라 살림살이를 헌법의 내용에 맞게 성실히 해야할 의무가 있도록 요구하고 있다.그리고 공무원들도 대통령의 역할을 법률및 하위법등의 위임을 받아, 각자 한사람씩 나누어 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납세의무를 진 국민이 낸 세금으로, 봉급을 받아 생활해 나가므로,대통령이나 공무원의 언행은 전 국민을 위해 행동해야할 의무를 지게된다.
때문에 공무원이라는 신분을 밝히고,적어도 세금을 통해 월급을 받고 생활하는 공무원들이라면 공무를 집행중에는 공무원들의 언행은 헌법과 법률에 정해진 범위내에서만 보호되고 허용된다.
때문에 특정집단에 불법하게 유리하게 해서도 안되고, 특정집단에게 위법하게 불이익을 주어서도 않된다.
공무는 공평하고 공정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고 ,법률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인정되므로,공무를 수행하는 순간만은 법률이 이들의 언행을 방해하면 공무집행방해죄로 공무원들의 언행을 보호를 해 준다.
반면에 공무원들은 공무수행중에는 공직을 빙자하여 사적인 언행을 하거나,특정종교를 비하하거나 추켜세우는 언행도 해서는 안된다.
공무를 집행하는 그 순간순간만은 이나라의 주인들이 낸 세금이 지불된다.
때문에 그 세금속에는 특정종교단체나 특정종교인들의 세금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닌,이나라 주인인 모든 국민들이 낸 세금들로 구성되어 있다.나라의 재산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공무원들은 국가재산인 관청내에서 사적인 언행은 원칙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예를들면 특히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청화대나 관청안에서 특정종교인들만을 이익되게 하는 타종교인들을 배타적으로 제외하는 등의 방법으로, 시간을 할애하거나 공금을 집행하거나 해서도 않된다.
이나라 헌법에서는 대통령과 공무원들에게 그런 권한을 준 적이 없다.공평하게 국익을 위해 집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공무원들의 언행은 바로 헌법적이며,법률에 의한 공권력이 보장된 언행이므로 보호되고 제한되어 있음은 이나라의 주인들은 이정도의 간단한 셈법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공무원들이 모르거나,혹시 알고 실수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간 불교단체의 스님들이나 불교인들이나 일반 국민들이 이런 위헌적이거나 위법적인 공무집행 행위를 강하게 지적 하신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TV를 통해서 김진홍 목사님의 설교말씀이나 몇몇 목사님들의 설교말씀은 비 기독교인들에게도 공감을 주는 부분이 많기에
필자도 가끔씩 스님들의 설법도 경청하지만 ,이런 목사님들의 말씀도 들어보고 공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언제가부터 이분들이 말씀이 전처럼 TV를 통해서 이제는 순수하게 들리지 않게되어 삶의 즐거움의 하나가 사라진것 같아서 인생의 재미가 적어짐을 느꼈다..
왜냐하면 필자뿐 아니라 많은 국민들로부터 심지어는 기독교인들로 부터도 실망시키는 언행을 하신걸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리도 어느 목사님께서는 정치에 관여하셨다는 말씀에 순수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신 그런 목사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아서 필자도 서글프진다.
종교인과 정치인도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 헌법의 정신이다.
그리고 불교를 많이 믿는 국가중에 일본도 있고 대만도 있고 대한민국도 있다.물론 미국에도 불교인들이 수백만명이 있는 걸로 아는데...
불교를 믿는 이들 국가가 세계적으로 가난한 나라는 아닌걸로 안다.종교가 물질적으로 부자를 만들어 주는 것이 최종 목표는 아닐것인데...
제발 존경받는 목사님들의 모습이 오래 오래 필자나 많은 국민들의 삶의 희망이 되어 주시기를 빈다.
필자는 정치에 발은 들인 적인 없다.
필자의 후배가 대통령이 된 5년간에도 필자는 그 대통령과 정치적인 인연을 1초도 맺은 적이 없다.
그 많은 500명-600명에 가까운 대통령 자문기구같은 단체들의 흔한 교수명단 속에 필자는 이름도 없다.
필자는 아는 후배에게 정치는 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었기에.그런 단체에 들여주지도 않았다.
필자는 아예 순수한 학자로 남는 것이 자랑스럽고 보람을 갖는 사람중의 한 사람이다.
학자로 우리 전통법문화를 연구하여 체계를 세우고자 ,집을 잡히고 팔아서 ,연구하고 가르치며,경제적으로는 셋방살이와 빚갚기에 정신이 없는 사람이 무슨 정치가 탐이 나겠는지...
그래서 8권의 책을 낸것중에 문광부에서 대한민국학술원에서 우수학술 도서로 1권씩 총이 2권이 선정되었고,
인터넷상에서는 법학분야 추천도서 100선의 도서속에 한국전통법문화연구 시리즈 5권이 들어있어서 필자는 어떤 직업이나 어떤 감투보다도 더 보람을 느낀다.
대학강단에서는 여당의 선전꾼이나 야당의 선전꾼은 학자로서 당당하게 설수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정치와는 담을 쌓고 우리 전통법문화만을 30년 가까이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
봉급이외 외부에서 받은 연구비는 30여년가까이 140여편의 글을 발표하였지만 ,2천만원도 안된다.
부디 정치가 공직자 공무원님들께서도 나라의 주인인 백성들을 화나게 하시거나, 실망시켜주시는 일들은 정말 조심하시고 삼가시고 정성을 다해 열심히 국가의 경쟁력과 이땅의 주인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국제경쟁력있는 수준의 노력을 해 주시기를 이땅의 주인들이 여러분들을 기대하고 계신다는것을 1초도 방심하시지 않으시기를 전해드리며,
정치가 공직자.공무원들이 나라 주인들을 위해 일하라고 선발해준 의미는 나라 주인들을 분열시키고 이간시키고 싸움붙이라고 뽑아주고 선발해준 것은 결코 아님도 잊지 마시기를 간곡히 바란다.
조선왕조의 종교법문화에 관한 법이론과 법의 정신(106);조선왕조의 백성은 다같은 하늘이 낸 백성이다(천민.天民:천부인권평등사상)-승려도 하늘이 낸 백성이다.-불교의 삶속에 살다 가신 선현들 .
동국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김 재 문.
사법행정 2008.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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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서설
그동안 우리나라는 기독교 불교등 모든 종교를 자유롭게 인정하고 화목하여 전국종교연합회같은 단체도 있는데...
어찌하여 불교의 스님들을 그토록 화나시게 한 정치가나 공직자.공무원들이 있는지...
때문에 이번호에서는 조선왕조의 종교법문화중에 불교법문화에 관한 기록들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다만 지금의 우리 헌법에서는 국교가 인정되지 않으므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나, 조선왕조에서는 유교가 국교였던 정책과 법 때문에 불교에 대한 종교의 자유가 제한되거나 없앨려고한 부정적인 부분들은 오늘의 현실에 맞지 않는 잘못된 부분이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또한 그 분량이 엄청나므로 그 일부만을 압축하여 불교의 긍정적인 기록이나 장점이나 불교를 선호하거나 생활하신 분들의 기록들만을 우선 소개하기로 한다.
특히 지면관계상 이번호에서는 일본이 해인사에 있는 팔만 대장경판을 달라고 조선왕조 개국시부터 임진왜란 전까지 약탈과 전쟁까지도 계획하며 협박과 회유로 집요하게 강요해온 점과,
그 대신 조선의 임금들이 지금의 일본불교문화에 적지 않는 영향을 준 불경과 대장경인본들을 하사했던 일본과의 외교법문화의 기록들은 시간이나는 데로 다음에 소개하기로 한다.
第二.최고 통치자인 임금의 천민(天民:천부인권 평등사상).
천민(天民)이란;하늘이 낸 다 같은 백성(天之生民 ...無貴賤之別哉).하늘이 백성을 만들어 낼때 귀천의 구별을 두지 않았으며,임금의 하늘같은 다 같은 평등한 인간다운 권리를 가진 백성이라는 의미이다.
1.보우(普雨)도 역시 하늘이 낸 백성인데, 어찌 큰 죄를 줄 수 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명종 10권, 5년(1550 경술 / 명 가정(嘉靖) 29년) 성균관 유생 안사준이 보우를 죽일 것 등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다.
성균관 생원 안사준(安士俊) 등이 상소를 올려 요승(妖僧)인 보우(普雨) 를 죽이고 정업원(淨業院) 을 수리하지 말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 인수궁(仁壽宮) 의 일에 대해서는 조정이 다 나의 뜻을 알고 있는데, 어찌 너희들의 말이 필요있겠는가.
자전(慈殿)께서 조종(祖宗)을 봉공(奉供)하는 일에 있어서 옛 관례를 따라 하였지 무엇을 더 보탠 것이 있는가?
그리고 보우 도 역시 하늘이 낸 백성인데, 어찌 큰 죄를 줄 수 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뒤에 한 달이 넘게 상소를 올렸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2).저 승도(僧徒)들도 역시 천민(天民)인데- 어찌 부모를 섬기고 자녀를 기르며 그 삶을 편안히 하고 -그 업을 즐기려 하지 않으랴. -군정(軍政)도 허소하지 않고- 백성도 남은 인력이 있어 생업에 안정할 수 있는지-의논하여 아뢰라;
연산 12권, 2년(1496 병진 / 명 홍치(弘治) 9년) .병조(兵曹)에 전교하기를,
“내가 민정을 살펴보건대, 안정된 생활을 하려 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위에 있는 사람이 혹시 잘 어루만지지 못하고 중하게 부려서 곤욕을 주면 백성이 그 역사를 도피하여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생각하면 저 승도(僧徒)들도 역시 천민(天民)인데 어찌 부모를 섬기고 자녀를 기르며 그 삶을 편안히 하고 그 업을 즐기려 하지 않으랴.
그러나 국가가 군국(軍國)의 정사를 중히 여겨서 졸오(卒伍)의 법을 엄하게 하여 인정(人丁)을 수색하되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으므로, 한 집에 3부자가 있으되 아비는 정군(正軍)이 되고 아들은 보인(保人)이 되어, 부자가 함께 군역(軍役)에 고달프니, 어느 겨를에 치산(治産)하여 삶을 윤택하게 하랴.
이미 생업을 잃었으니, 부모에게서 떠나고 처자를 버리고 나가서 승려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형세이다.
승도가 불어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군정(軍政)도 허소하게 되지 않고 백성도 남은 인력이 있어 생업에 안정할 수 있는가? 이것을 의논하여 아뢰라.”하였다.
3).승군(僧軍)들도 -천민(天民)으로서 농사는 지을 수가 없고 -양식을 구걸하여 살아가는 자들이으로-일이 있을 적마다 역사(役事)를 시킨다면 억울하므로-유위군으로 정해서 보내도록 명함:
명종 6권, 2년(1547 정미 / 명 가정(嘉靖) 26년) .
“공조(工曹)가 홍제원(弘濟院) 앞 개울을 수축할 때에 승군(僧軍)을 더 증가하자고 청하였는데, 그들도 천민(天民)으로서 농사는 지을 수가 없고 양식을 구걸하여 살아가는 자들이다.
만약 나라에 일이 있을 적마다 역사(役事)를 시킨다면 억울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앞서 정했던 승군도 모두 역사시키지 말고 유위군(留衛軍)으로 정해서 보내라.”
4).전하께서 매양 천민(天民)을 말씀하시면서 -무고한 자를 억울하게 죽였다고 하시는데,- 백성이란 힘써서 일하여 그 윗사람을 섬기는 자인데- 저 승려들은 과연 무엇을 하는 자들입니까?-
임금왈:“도오(道悟) 가 비록 승려이지만- 또한 죄 없는 백성이고- 응규 가 비록 명색이 유생이나 -이미 사람을 잔인하게 두들겨 상처를 입혔으니-, 만약 미치광이라 하여 버려두고 죄를 묻지 않는다면 -후일의 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이므로 윤허할 수 없다”;
명종 12권, 6년(1551 신해 / 명 가정(嘉靖) 30년) 성균 생원 4백여 명이 상소하여 조응규를 처벌하지 말기를 청했으나 불허하다.
성균관 생원 안사준(安士俊) 등【4백여 인이었다.】이 상소하기를, “신들은 모두 지극히 어리석은 자들로서 다행히 승평한 때를 만났으니, 시정(時政)의 득실(得失)과 임금 처사의 시비(是非)에 대하여 진실로 소견(所見)이 있다면 심상히 보고만 넘길 수는 없습니다.
이제 조응규 가 완악한 한 승려를 구타한 것이 비록 미치광이 무뢰배(無賴輩)의 일이라 하더라도 조응규 는 명색이 유생이고 도오(道悟) 는 무부 무군(無父無君)의 죄를 진 자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일개 행이 바르지 못한 승려를 비호하려고 이미 중사(中使)를 보내어 그 죄를 엄중히 다스리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심지어 금부에 잡아들여 국문까지 하라 하시니, 전하의 용법(用法)이 너무 혹독하지 않습니까?
길에서 보고 듣는 자 누가 놀라지 않겠습니까.
아, 후세에서 전하를 어떠한 임금이라고 하겠습니까?대간이 중관(中官)이 응규 에게 곤장을 친 일을 아뢰면 거짓말이라 하고, 응규 가 곤장 맞은 것을 징험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법에 의하여 친 것이라 하셨습니다. 아, 임금의 말씀이 과연 이러한 것입니까?
처음 전하께서 금부에 잡아들여 추국하라고 분부하셨을 때 어리석은 백성들은 전하께서 승려를 이와 같이 비호하신다 하고 유식한 선비들은 그 진위(眞僞)를 살펴 공명 정대(公明正大)한 정사를 보일 것이라 여겼는데, 이제 드디어 조응규 의 죄를 가중(加重)시키셨으니,
아, 성인의 정사는 아마도 이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일개 완악한 승려의 일 때문에 내시가 정사에 간여하는 폐단을 만드시니, 우리 유도와 이단(異端) 어느 쪽이 흥성하고 쇠퇴하느냐 하는 계기(契機)가 판가름났습니다.
위로 삼공·육경으로부터 아래로 시종·대간에 이르기까지 여러날을 두고 논계하여 온갖 말로 극력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못 들은 체하시고는 또 인하여 변명하시니, 이는 대신의 말도 들을 것이 못되고 대간의 말도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아, 수행이 낮은 승려와 내시가 대신과 대간보다 소중하다면 전하께서는 장차 이런 무리들과 더불어 나라를 다스리려는 것입니까?.전하께서 매양 천민(天民)을 말씀하시면서 무고한 자를 억울하게 죽였다고 하시는데, 이른바 백성이란 힘써서 일하여 그 윗사람을 섬기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승려들은 과연 무엇을 하는 자들입니까?
옛사람의 말에 ‘군자의 허물은 일식(日蝕)·월식(月蝕)과 같아서 그 허물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보고 허물을 고치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본다.’고 했으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하니,
답하기를, “당초에 대관이 응규 에게 곤장 백여 대를 쳤다고 들었으므로 그 상처를 징험하기 위하여 잡아다 보니, 곤장을 맞은 흔적이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도오(道悟) 가 비록 승려라고는 하나 또한 죄 없는 백성이고 응규 가 비록 명색이 유생이나 이미 사람을 잔인하게 두들겨 상처를 입혔으니, 만약 미치광이라 하여 버려두고 죄를 묻지 않는다면 후일의 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이므로 윤허할 수 없다.”하였다.
5).백성은 모두가 천민(天民)이요- 유독 도오(道悟) 만이 천민은 아니며 -온 나라 안에 살인한 자와 상해(傷害)한 자가 부지기수인데- 장차 모두 중사(中使)를 보내어 담당하게 하고 모두 금부에 잡아들여 국문하겠습니까?-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음:
명종 12권, 6년(1551 신해 / 명 가정(嘉靖) 30년)
동지성균관사 주세붕(周世鵬) 등이 상소하기를,
“ 조응규 는 궁벽한 시골의 한 미치광이 유생으로서 승려를 구타한 것은 길에서 서로 만나 그 무례함을 미워해서 그렇게 된 것일 뿐, 처음부터 심한 상처를 입힌 것이 아니었으며 지금도 또한 죽음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죄를 다스리는 데에 담당 관원이 있고 거기에 해당하는 죄과가 있는 것인데 금부에서 죄를 평의(評議)하여 율문 밖의 형벌을 시행하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미 납부한 속전(贖錢)을 도로 돌려주고 이 혹독한 추위에 반드시 곤장을 치려고 하는 것은 제왕으로서 무슨 정사입니까?
백성은 모두가 천민(天民)이요 유독 도오(道悟) 만이 천민은 아니며 온 나라 안에 살인한 자와 상해(傷害)한 자가 부지기수인데 장차 모두 중사(中使)를 보내어 담당하게 하고 모두 금부에 잡아들여 국문하겠습니까?
성상의 은택을 널리 온 백성에게 미치게 하지 못하면서 유독 한 승려에게만 후하게 하니 신들은 성상의 마음이 반드시 편벽하게 매인 데가 있지 않은가 염려됩니다.
생각이 매인 데가 있으면 그 발단(發端)은 비록 은미해도 정사에 방해가 되어 위망(危亡)이 따르는 법인데, 하물며 겉에 드러난 것이겠습니까.
이리하여 조정 신하들이 전하를 위하여 황급히 서둘러 누누이 아뢰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일월 같은 밝음을 넓히고 우레 같은 위엄을 가라앉히어 성명(成命)을 거두어 여러 사람의 여망(輿望)을 위로하소서.”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도적을 숨겨준 수진을 죄주지 않는다면- 장차 형벌이 문란하고 기강이 어지러워져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나라 꼴이 말이 아니게 될 것이니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답하기를, “승려도 천민(天民)이니 어찌 애매한 죄를 주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라고 함:.
명종 14권, 8년(1553 계축 / 명 가정(嘉靖) 32년) 홍문관 부제학 정유(鄭裕) 등이 상차하기를,
“엎드려 살피건대 전하께서 체원 거정(體元居正)하신 이후로 법을 씀이 강하고 과감하여 죄가 있으면 누구나 그 죄에 알맞은 벌을 내리어 비록 재상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라도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는데,
승려들의 죄는 극진히 옹호하여 죄에서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니, 전하께서 법을 씀이 어쩌면 그리도 한결같지 않으십니까.
하루에 세 사람을 죽인 막중한 죄를 범한 불각 을 승려의 영수라는 수진 이 숨겨주었는데도 전하께서 수진 의 죄는 묻지 않고 불각 을 잡지 못한다고 수령들만 나무라시니 신들의 의심이 더욱 심해집니다.
도적을 숨겨준 수진 을 죄주지 않는다면 장차 형벌이 문란하고 기강이 어지러워져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나라 꼴이 말이 아니게 될 것이니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신들은 전하의 법이 일개 승려에게서 무너지는 것을 보고 감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어서 거듭 신청(宸聽)을 번거롭힙니다.”하니,
답하기를, “승려도 천민(天民)이니 어찌 애매한 죄를 주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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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결어
第一.최고 통치자인 임금의 천민(天民:천부인권 평등사상).
천민(天民)이란;하늘이 낸 다 같은 백성(天之生民 ...無貴賤之別哉).하늘이 백성을 만들어 낼때 귀천의 구별을 두지 않았으며,임금의 하늘같은 다 같은 평등한 인간다운 권리를 가진 백성이라는 의미이다.
1.보우(普雨)도 역시 하늘이 낸 백성인데, 어찌 큰 죄를 줄 수 있겠는가?라며 윤허하지 않는다;명종 10권, 5년(1550 )
2).저 승도(僧徒)들도 역시 천민(天民)인데- 어찌 부모를 섬기고 자녀를 기르며 그 삶을 편안히 하고 -그 업을 즐기려 하지 않으랴. -군정(軍政)도 허소하지 않고- 백성도 남은 인력이 있어 생업에 안정할 수 있는지-의논하여 아뢰라;
연산 12권, 2년(14963).
3).승군(僧軍)들도 -천민(天民)으로서 농사는 지을 수가 없고 -양식을 구걸하여 살아가는 자들이으로-일이 있을 적마다 역사(役事)를 시킨다면 억울하므로-유위군으로 정해서 보내도록 명한다:명종 6권, 2년(1547),
4).전하께서 매양 천민(天民)을 말씀하시면서 -무고한 자를 억울하게 죽였다고 하시는데,- 백성이란 힘써서 일하여 그 윗사람을 섬기는 자인데- 저 승려들은 과연 무엇을 하는 자들입니까?-
임금이 말하기를:“도오(道悟) 가 비록 승려이지만- 또한 죄 없는 백성이고- 응규 가 비록 명색이 유생이나 -이미 사람을 잔인하게 두들겨 상처를 입혔으니-, 만약 미치광이라 하여 버려두고 죄를 묻지 않는다면 -후일의 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이므로 윤허할 수 없다”;명종 12권, 6년(1551),
5).백성은 모두가 천민(天民)이요- 유독 도오(道悟) 만이 천민은 아니며 -온 나라 안에 살인한 자와 상해(傷害)한 자가 부지기수인데- 장차 모두 중사(中使)를 보내어 담당하게 하고 모두 금부에 잡아들여 국문하겠습니까?-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명종 12권, 6년(1551 신해),
6).도적을 숨겨준 수진을 죄주지 않는다면- 장차 형벌이 문란하고 기강이 어지러워져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나라 꼴이 말이 아니게 될 것이니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라는 항의에 -
명종임금이 답하기를, “승려도 천민(天民)이니 어찌 애매한 죄를 주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라고 한다:.명종 14권, 8년(1553 계축).
1).태종이 생각한 불교와 교지:불법(佛法)은 그 마음 쓰는 것을 캐어보면- 자비(慈悲)가 종지(宗旨)가 되고, -또 이미 도첩(度牒)을 주어 출가(出家)하여 입산(入山)하였으니, 국가의 일에 관계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승도(僧徒)를 징용하여 이름은 ‘청중(請衆)이라고 하나 실상은 역사(役使)시키는 것이어서 도리어 평민보다 심한 것이 있으니, 매우 불쌍하다.-
침요(侵擾)하여 고역(苦役)시키기를 평민과 다름이 없으니 승도 또한 백성이다.
이미 모두 부모를 하직하고 애정을 끊고 승려가 되었으니, 이렇게 역사시키는 것은 실로 미편하다. 태종 34권, 17년(1417 정유 ),
2).태조 가 부처를 좋아하여 일찍이 개경사(開慶寺) 를 세웠기에- 또 《대장경》 을 인출하여 이 절에 안치하기 위해-불경찍는 닥종이를 해인사로 옮겨 대장경을 찍는 것이 옳으며-관련자와 2백명의 승려들에도 모두 급료를 주도록 임금이 왕명을 내린다:태종 25권, 13년(1413 계사 ),
3).태조(太祖) 의 명복(冥福)을 베풀기 위해-해인사에서 찍어낸 《대장경》을 개경사에 수송한다:태종 25권, 13년(1413 계사),
4). 이색(李穡) 이 불교를 신봉하여 술과 고기를 끊었으므로-
태조임금이 이색에게 말하기를 이미 늙었으니 다시 술과 고기를 먹고 건강을 유지하게 하라고 명한다:태조 8권, 4년(1395 을해),
5).지공스님을 존경;불씨(佛氏)의 그 도(道)를 다하는 사람이면 나는 마땅히 존경하여 섬기겠다-
지공(指空)과 같은 승려(僧)이면 어찌 존경하며 섬기지 않을까?”라는 말에 -군신(群臣)들이 모두 “옳습니다.”라고 찬동을 한다:태종 27권, 14년(1414 갑오),
二).후비.왕후.대비.대왕대비등의 불교관.
1).대비가 언문의 글로서 말하기를“내게 있어서는 선왕을 위하여 마음에 비록 날마다 불사(佛事)를 하더라도 마음에 만족하지 않다.- 자고로 후비(后妃)가 부처를 좋아하지 않은 자가 몇이나 있었는가?”; 성종 117권, 11년(1480 경자),
2).인수 왕대비와 인혜 왕대비가 내린 언문에서-“별다른 큰 폐단도 없으면서 선왕의 원하는 뜻을 무너뜨리는 것이 옳겠습니까? -한(漢) · 당(唐) 이후로 유교와 불교가 아울러 행하였고
도승(度僧) 의 법이 또 《대전(大典)》 에 실렸는데-역대 제왕(帝王)이 어찌 불교를 배척하려고 하면서도- 이제까지 근절시키지 아니함은- 반드시 인심의 요동을 중히 여겨 각각 그 삶을 편히 하도록 한 것인데-
우리는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며-또 듣건대 중국[中原]에는 절(사찰) 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의 집에도 모두 불당(佛堂)이 있어- 그 불교를 숭상함이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오랑캐를 막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같이 작은 무리를 두려워하여 법을 바꾸는 것이 옳겠습니까?-절을 수호(守護)하여 선왕(先王)·선후(先后)의 수륙재 시식(施食) 때에 정결하게 음식을 갖추어 공판(供辦)하도록 한 것과 같이 하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라고하자-
신하들간에 찬반의 논의가 있었다: 성종 271권, 23년(1492 임자),
三).신하
1).이색(李穡) 은 동방(東方)의 대유(大儒)이나,- 대장경(大藏經) 을 보기를 좋아하자 선비들이 비웃었으나-
지금 불사(佛事)를 행하지 않는 자는 오직 하윤(河崙) 일 뿐이요, -
그 나머지 유자(儒者)는 몰래 불사를 행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태종 5권, 3년(1403 계미),
2).정총이 .“전하께서 어찌 불사(佛事)에 정성껏 하십니까? 청하옵건대, 믿지 마옵소서”라고 하니,-
태조가“이색(李穡)은 유학(儒學)의 종사(宗師)가 되었는데도 불교를 믿었으니, -
만약 믿을 것이 못된다면 이색 이 어찌 이를 믿었겠는가?라며- 다시는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태조 2권, 1년(1392 임신),
3).병조 정랑(兵曹正郞) 김수온(金守溫) 은 승려[僧] 신미(信眉) 의 아우로 -과거(科擧)에 합격하였지만,-
천성이 불서(佛書)를 지독히 좋아하여-능엄경(楞嚴經)》은 《중용(中庸)》 보다 낫다.”고 하며-
국가에서 불교 행사의 자리를 베풀 때에는 김수온(金守溫) 이 반드시 참여한다:문종 1권, 즉위년(1450 경오),
4).법화경설행에 공녕군 이인을 대자암에 보내어 《법화》 법광을 설행하였다;세종 24권, 6년(1424 갑진),
四).불교행사와 호불행위.
1).불경의 서사(書寫)와 발원문 작성:대행왕을 위하여 불경을 쓰고 도승지 이사철이 발문을 쓰다; 문종 1권, 즉위년(1450 경오),
2).독경(讀經);
가).환왕의 기일이므로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고 -승려들에게 궐내에서 불경을 읽게 함;l태조 3권, 2년(1393 계유),
나).창덕궁에 경사 21인을 모아놓고 불경을 읽게 한다:태종 25권, 13년(1413 계사),
3).기우제:기우(祈雨)제를 지낸 주법승(主法僧)에게는 저포(苧布) 한 필을 주고, -나머지 승려 47명에게는 각각 정포(正布) 한 필씩을 내려 준다;태종 9권, 5년(1405 을유),
4).신문고:조계사(曹溪寺)의 승려 성민(省敏)등 수백명이 신문고(申聞鼓)를 친다: 태종 11권, 6년(1406 병술),
5)승려의 흥판을 인정함;승인(僧人)의 흥판(興販)이 매우 성하게 유행하니,- 금하는 것이 온당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이제 승도(僧徒)가 소나 말을 몰고 다니면서 물건을 팔지 못하게 하면- 소요(騷擾)가 일어나지 아니하겠는가?-
먹을 것이 넉넉한 연후에야 청정한 교(敎)를 닦을 수 있다.-
만약 그대의 말과 같다면 승려는 장차 먹지 아니하고 굶어 죽어야 하겠는가?-
또 승려는 우리 백성이 아닌가?-
승려가 만약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면 -이것도 우리 백성인데
어찌 굶어 죽게 할 수 있겠는가?”라며
생존을 위해 영리행위를 인정한다:성종 229권, 20년(1489 기유),
6).불교비방-왕이 노함:-
이첨.이색등과 중한 선비들도 불교를 신봉함: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 김초(金貂) 가 불교를 비방하는 소(疏)를 올리자 -왕이 노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명분(名分)이 없어 주저하였으며-
아태조(我太祖)이래 대대로 불법(佛法)을 숭신(崇信)함을 배척함은 선왕의 성전을 파괴한 행위이며-
이첨은 장원급제후-습속에 젖어 부처받들기를 독실히 하며-명망있는 중한 선비들도 모두 미혹되어 신봉하며-
이색(李穡) 은 일대(一代)의 문사(文士)로서 부처는 대성인(大聖人)이다라고 하였다.: 중종 48권, 18 년(1523 계미),
7).담선폐지를 허가 하지 않았다:태종 9권, 5년(1405 을유 ),
8).승려를 구타한 유생을 엄히 처벌함:
임금이 “승려를 구타한 유생을 처벌한 것이 불교를 숭상하기 때문이 아니며-나라의 임금은 사람의 범죄한 것을 들으면 -마땅히 시비(是非)를 분변해야 되고-유생의 도리는 마땅히 심성(心性)을 수양(修養)하여 사설(邪說)을 물리쳐야 되는데 -구타를 하였기에 추핵을 한다: 세종 98권, 24년(1442 임술),
第二.불교적인 삶을 실천한 선현들.
1).한산백 이색의 졸기;
늙어서 왕지(王旨)를 받들어 -지공 대사(指空大師)와 나옹 대사(懶翁大師)의 부도(浮圖)에 명(銘)을 지었기로,- 그 승려들이 문하에 내왕해서 불교를 좋아한다는 비평을 받았다.-
색 이 듣고 하는 말이,“저들이 임금과 어버이를 위해서 복을 기원해 주는데, 내가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태조 9권, 5년(1396 병자),
2).검교 정당 문학 조운흘의 졸기;
자은승(慈恩僧) 종림(宗林) 과 더불어 세속을 떠나 교제하여, 판교원(板橋院) 과 사평원(沙平院) 의 양 사원을 중창(重創)하여 스스로 원주(院主)라고 칭하였는데,
해진 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서 역도(役徒)와 더불어 그 노고를 같이하니, 지나가는 자가 그가 달관(達官)인지 알지 못하였으며-
조운흘은 치의(緇衣검은 옷. 승복 僧服) 에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문(門)까지 나와 길게 읍(揖)하고 맞이하여 모정(茅亭)에 이르러 좌정(坐定)하였다.-
조준이 풍악을 잡히고 술자리를 마련하니,- 조운흘은 짐짓 귀가 먹어 듣지 못하는 척하고, 눈을 감고 정좌(正坐)하여 -높은 소리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창(唱)한 것이 두 번이었는데, -
옆에 마치 아무도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니, -조준 이 사과하여 말하기를, 선생이 이를 싫어하는군 하고, 명하여 풍악을 중지시키고, 차(茶)를 마시고 돌아갔다.태종 8권, 4년(1404 갑신),
3).행 지중추부사 구종직의 졸기:세조 가 일찍이 그를 불러서 정자영(鄭子英) 과 더불어 역리(易理)를 논하게 하였는데,
구종직 이 말하기를, “태극(太極)의 위에 무극(無極)이 있는데, 불도(佛道)가 이것입니다.“라고 하였다;성종 85권, 8년(1477 정유),
4)공조 판서 김수온:면직상서.졸기.
가).면직을 청하는 상서를 올리다;저는 마땅히 영구히 산림(山林)에 가서 도업(道業)을 성취하여, -반드시 어머니의 소생(所生)한 곳을 볼 것이요, -어머니의 받은 바 괴로움을 구(救)할 것이니,- 원컨대 어머님은 안심하고 승화하소서.-라는 긴 사직서를 올리자 하자,
임금이 “도(道)는 세상을 구제하는 방편인데, 어찌 삭발(削髮)하고 승려가 되어야만 닦겠는가?라고 하나-
수온이 회암사(檜巖寺) 에 이르렀다가 얼마 안되어 되돌아왔다..-집안이 부처를 믿어 형(兄)은 신미(信眉) 로서 혜각 존자(慧覺尊者) 로 봉하였고, 어미도 또한 축발(祝髮)하고 여승[尼]이 되었는데, 어미의 유지(遺志)에 따라서 이 상서(上書)가 있었던 것이다.
집이 한소(寒素)하여 비록 대신(大臣)이 되었다 할지라도 납자(衲子)와 같이 쓸쓸하였다. 국가(國家)에 큰 불사(佛事)가 있으면 김수온 이 소어(疏語)를 지었는데 문장을 꾸민 것이 연일(演溢)하였다.
일찍이 ‘도(道)는 증명할 수 있고, 불(佛)은 본받을 만하다.’라고 하였다:세조 32권, 10년(1464 갑신 ),
5).효령 대군 이보의 졸기;
보(李補) 가 부처[佛]를 좋아하여 승려들을 많이 모아 불경(佛經)을 강(講)하였는데,- 세조(世祖) 의 돌보아 줌이 지극히 융숭하여서 상뢰(賞賚상을 줌) 함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며-원각사(圓覺寺)를 창건(創建)함에 미쳐서는 그 일을 맡아 보도록 명하였으며-.
이보(李補) 는 불교[釋敎]를 혹신(惑信)하여 머리 깎은 사람들[緇髡]의 집합 장소가 되었으며,-
무릇 중외(中外)의 사찰(寺刹)은 반드시 수창(首唱)하여 이를 영건(營建)하였다.- 세조(世祖) 가 불교(佛敎)를 숭신(崇信)하여 승려들로 하여금 거리낌없이 제멋대로 다닐 수 있도록 하였으니, -반드시 이보(李補) 의 권유가 아닌 것이 없었다...성종 191권, 17년(1486 병오),
6).김시습:
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아니지만, 또한 한 때의 문사이며- 출가(出家)하여 우리 나라 곳곳을 다니며 지은 시문(詩文)이 당시 제일이었고-
사인(士人) 김시습(金時習) 은 광묘조(光廟朝) 때부터 입선(入禪)하여 머리 깎고 세상을 피하였다가,- 중간에 환속(還俗)하여 아내를 얻었으나
자손(子孫)이 없으며-그의 문장(文章)과 절행(節行)이 우뚝하여 숭상할 만하니, 증직(贈職)시키고 사제(賜祭)하여야 하며-
처사(處士) 김시습(金時習) 의 홍산 사우(鴻山祠宇)를 청일(淸逸)로-사액하고-살아 있으면서 의리를 지킨 생육신으로-이이(李珥) 가 지은 김시습전(金時習傳)에는 문을 닫고 사흘 동안이나 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자기 책을 모두 태워버리고 절간에 자취를 의탁하고-혹은 방랑생활로 그 자취를 감추거나 혹은 은둔해 살면서 몸을 깨끗이 하였으니,-
그 충성과 그 절개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이론의 여지가 없으며-그들의 고심과 아름다운 절의는 -영원토록 사람들을 격려할 만 하다-김시습 은 5살에 신동이라 하여 세종 의 특별한 인정을 받았고 호는 매월당이라 하고,
단종이 손위한 뒤에는 절간에 의탁하여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기에-그 맑은 기풍과 굳은 지조는 백세를 격려할 만하므로-
이조 판서에 추증된 김시습(金時習) 에게는 청간(淸簡)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두 신하를 똑같이 창절사(彰節祠) 에 추가로 제향하라는 왕명을 내린다.
7).율곡선생 이이:
총명 민첩하였고 박학 강기(博學强記)하였으며 글도 잘 지어 명성이 있었고-한 해에 연이어 사마시(司馬試)와 문과(文科)의 두 시험에 장원으로 뽑히고 집에서 나가 산사(山寺)를 전전하며 붙여 살다가- 오랜 기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혹자는“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었다”고하며-: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비탄에 잠긴 나머지 -잘못 선학(禪學)에 물이 들어 19세에 금강산 에 들어가 불도(佛道)를 닦았는데,-
승려들 간에 생불(生佛)이 출현했다고 소문이 자자하였으며-스승의 지도를 없이 도의 큰 근본을 환하게 알고-정미하게 분석하여 철저한 신념으로 힘써 실행하고-타고난 기품이 매우 고상하며- 수양을 잘하여 더욱 높은 경지에 나아갔으며,-
청명한 기운에 온화한 분위기가 배어나오고 -활달하면서도 과감 하였다.:8).순회 세자빈 윤씨의 졸기세자의 영혼을 기원하는 뜻에서 -불공(佛供)을 자주 드렸으나 -상이 가엾게 여겨 금지시키지 않았는데, -
이때에 이르러 졸하고-빈이 생전에 불교를 숭상-왜변을 만나, 우연히 화장(火葬)하게 되자- 생전의 뜻에 부합된다고 하였다: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왕조는 비록 유교만이 유일한 국교이고 나머지 불교등은 사교.이교(異敎)로서 엄격하게 활동을 제한하고 없앨려는 기록이 수업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임금과 왕후와 왕족과 이름난 대 석학자들이나 유학자들과 일반 민간에서도 믿었음을 알 수 있었다.그리고 일본이 조선 초기부터 팔만대장경판을 얻어갈려고 온갖 회유와 협박과 강요를 해 왔으나 결국 주지 않고 잘 보관하여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다.
때문에 오늘날에도 세계적인 종교는 그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국교가 있어서는 않되는 대한민국에서 나라의 대통령이나 정치가가 공직자는 종교의 지도자가 아닌 전 국민의 지도자이자 전국민을 위한 공무를 집행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사랑과 자비도 비슷한 지고의 선을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과 다른것이 아니다.
유독 특정 종교만을 비하하거나 불교를 특별히 존중하는 것도 헌법에 어긋나듯이,기독교를 공직자들이 공무원의 직함으로 포교활동을 하는 것은 공무에 맞지 않으며,
예산도 온 국민을 위해 공정하게 집행되어야 하며,10원 한 장이라도 특정종교만을 위해 부당하게 집행된다면,그돈이 특정종교인들의 돈이 아닌한 잘못된 집행이 될 것이다.
정치가 공직자 공무원들이 선거나 시험으로 선발되어 공무를 맡고 있지만...모든 국민을 위한 봉사자이며 헌법에 정해진 내용을 받들고 하위법령으로 보완하여 세밀하게 나라살림살이를 잘하라고 투표하거나 시험을 선발한 것을 1초라도 잊으면 안될것이다.
특히 정치가들이 공무원들이 한 쪽에 지우쳐서 종교간에 갈등을 조장시킨다면 망국행위에 해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다시는 이런 실수를 범하지 말기를 온 국민들을 간절히 바랄것이다.불교신자가 대통령이나 공무원이 되어도 기독교를 폄하해서도 않되며,불교신도들 위주로 고위공직자를 선임하는 것도 헌법의 정신에 어긋난다.종교는 정치와 무관하다는 것이 헌법의 규정이다.
제발 혼동하지 말기를 바란다.존경스런 종교지도자들이 종교간에 갈등을 조장한 정치를 하면 종교정신은 없어지고 국론이 분렬되고 갈등이 증폭되어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을 것이다..
현행헌법에는 대통령은 취임에 앞서,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라고 하여,
나라 살림살이를 헌법의 내용에 맞게 성실히 해야할 의무가 있도록 요구하고 있다.그리고 공무원들도 대통령의 역할을 법률및 하위법등의 위임을 받아, 각자 한사람씩 나누어 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납세의무를 진 국민이 낸 세금으로, 봉급을 받아 생활해 나가므로,대통령이나 공무원의 언행은 전 국민을 위해 행동해야할 의무를 지게된다.
때문에 공무원이라는 신분을 밝히고,적어도 세금을 통해 월급을 받고 생활하는 공무원들이라면 공무를 집행중에는 공무원들의 언행은 헌법과 법률에 정해진 범위내에서만 보호되고 허용된다.
때문에 특정집단에 불법하게 유리하게 해서도 안되고, 특정집단에게 위법하게 불이익을 주어서도 않된다.
공무는 공평하고 공정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고 ,법률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인정되므로,공무를 수행하는 순간만은 법률이 이들의 언행을 방해하면 공무집행방해죄로 공무원들의 언행을 보호를 해 준다.
반면에 공무원들은 공무수행중에는 공직을 빙자하여 사적인 언행을 하거나,특정종교를 비하하거나 추켜세우는 언행도 해서는 안된다.
공무를 집행하는 그 순간순간만은 이나라의 주인들이 낸 세금이 지불된다.
때문에 그 세금속에는 특정종교단체나 특정종교인들의 세금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닌,이나라 주인인 모든 국민들이 낸 세금들로 구성되어 있다.나라의 재산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공무원들은 국가재산인 관청내에서 사적인 언행은 원칙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예를들면 특히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청화대나 관청안에서 특정종교인들만을 이익되게 하는 타종교인들을 배타적으로 제외하는 등의 방법으로, 시간을 할애하거나 공금을 집행하거나 해서도 않된다.
이나라 헌법에서는 대통령과 공무원들에게 그런 권한을 준 적이 없다.공평하게 국익을 위해 집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공무원들의 언행은 바로 헌법적이며,법률에 의한 공권력이 보장된 언행이므로 보호되고 제한되어 있음은 이나라의 주인들은 이정도의 간단한 셈법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공무원들이 모르거나,혹시 알고 실수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간 불교단체의 스님들이나 불교인들이나 일반 국민들이 이런 위헌적이거나 위법적인 공무집행 행위를 강하게 지적 하신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TV를 통해서 김진홍 목사님의 설교말씀이나 몇몇 목사님들의 설교말씀은 비 기독교인들에게도 공감을 주는 부분이 많기에
필자도 가끔씩 스님들의 설법도 경청하지만 ,이런 목사님들의 말씀도 들어보고 공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언제가부터 이분들이 말씀이 전처럼 TV를 통해서 이제는 순수하게 들리지 않게되어 삶의 즐거움의 하나가 사라진것 같아서 인생의 재미가 적어짐을 느꼈다..
왜냐하면 필자뿐 아니라 많은 국민들로부터 심지어는 기독교인들로 부터도 실망시키는 언행을 하신걸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리도 어느 목사님께서는 정치에 관여하셨다는 말씀에 순수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신 그런 목사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아서 필자도 서글프진다.
종교인과 정치인도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 헌법의 정신이다.
그리고 불교를 많이 믿는 국가중에 일본도 있고 대만도 있고 대한민국도 있다.물론 미국에도 불교인들이 수백만명이 있는 걸로 아는데...
불교를 믿는 이들 국가가 세계적으로 가난한 나라는 아닌걸로 안다.종교가 물질적으로 부자를 만들어 주는 것이 최종 목표는 아닐것인데...
제발 존경받는 목사님들의 모습이 오래 오래 필자나 많은 국민들의 삶의 희망이 되어 주시기를 빈다.
필자는 정치에 발은 들인 적인 없다.
필자의 후배가 대통령이 된 5년간에도 필자는 그 대통령과 정치적인 인연을 1초도 맺은 적이 없다.
그 많은 500명-600명에 가까운 대통령 자문기구같은 단체들의 흔한 교수명단 속에 필자는 이름도 없다.
필자는 아는 후배에게 정치는 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었기에.그런 단체에 들여주지도 않았다.
필자는 아예 순수한 학자로 남는 것이 자랑스럽고 보람을 갖는 사람중의 한 사람이다.
학자로 우리 전통법문화를 연구하여 체계를 세우고자 ,집을 잡히고 팔아서 ,연구하고 가르치며,경제적으로는 셋방살이와 빚갚기에 정신이 없는 사람이 무슨 정치가 탐이 나겠는지...
그래서 8권의 책을 낸것중에 문광부에서 대한민국학술원에서 우수학술 도서로 1권씩 총이 2권이 선정되었고,
인터넷상에서는 법학분야 추천도서 100선의 도서속에 한국전통법문화연구 시리즈 5권이 들어있어서 필자는 어떤 직업이나 어떤 감투보다도 더 보람을 느낀다.
대학강단에서는 여당의 선전꾼이나 야당의 선전꾼은 학자로서 당당하게 설수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정치와는 담을 쌓고 우리 전통법문화만을 30년 가까이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
봉급이외 외부에서 받은 연구비는 30여년가까이 140여편의 글을 발표하였지만 ,2천만원도 안된다.
부디 정치가 공직자 공무원님들께서도 나라의 주인인 백성들을 화나게 하시거나, 실망시켜주시는 일들은 정말 조심하시고 삼가시고 정성을 다해 열심히 국가의 경쟁력과 이땅의 주인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국제경쟁력있는 수준의 노력을 해 주시기를 이땅의 주인들이 여러분들을 기대하고 계신다는것을 1초도 방심하시지 않으시기를 전해드리며,
정치가 공직자.공무원들이 나라 주인들을 위해 일하라고 선발해준 의미는 나라 주인들을 분열시키고 이간시키고 싸움붙이라고 뽑아주고 선발해준 것은 결코 아님도 잊지 마시기를 간곡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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