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사법사상.재판이론;재판이란(2)-백성이 원통하고 억울함이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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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재문 작성일13-06-13 11:00 조회1,84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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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법문화의 국제경쟁력 향상을 위한
한국전통법문화의 강좌
한국전통법의 정신과 법체계(22)
-사법사상.재판이론;재판이란(2)-백성이 원통하고 억울함이 없도록.
동국대학교경 주캠퍼스 법정대 법학과 교수 김 재 문 (http://wwwk.dongguk.ac.kr/~kj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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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재판이 오래 적체되면 원통하고 억울하게 됨
가)임금
성종임금은 (1)대전(헌법)의 재판기한을 준수하여 원통하고 억울함을 방지하며.(2)겨울의 천둥번개와 비가내림은 재판이 지체되어 백성에게 원망이 있는 것이고,연산군도 (3)잘못된 판결과 오래밀린 재판으로 원통하고 억울하여 -겨울에 천둥.번개 일어난다고 한다.
(1)대전(헌법)의 재판기한을 준수하여 원통하고 억울함을 방지할것:성종 9년(1478)에 팔도 관찰사에게 결송은 《대전》의 기한을 준수하고 어기는 자를 규찰하게 하기위해 8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글을 내려주기(下書)를, 《대전(大典)》에 결옥 일한(決獄日限;재판기한)이 실려 있는데,..
.감사(監司) 또한 체포(檢擧)하지 아니하여서 그러한 것인가? 경은 그것을 거듭 엄하게 고찰하여 모든 결송(決訟)은 일체 《대전》의 기한을 준수하되, 어기는 자는 일일이 적발하여 자세히 살펴서(糾察), 원통하고 억울함을 품고 어지럽게 와서 호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하였다.
위와같이 성종 9년(1478)에 팔도 관찰사에게 헌법상의 재판기한을 준수하고 어기는 자를 규찰하게 하기위해 8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명령을 문서로 주면서, 모든 결송(決訟)은 일체 《대전》의 기한을 준수하되, 어기는 자는 일일이 적발하여 자세히 살펴서(糾察), 원통하고 억울함을 품고 어지럽게 와서 호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성종 25년(1494)에는 크게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비가 내리는 자연의 이변(災變)에 대해,임금이 심히 두려워(驚懼)한다면서, 어찌 그 까닭을 알지는 못하나,아마도 형사재판인 옥송(獄訟)이 지체되어 백성에게 원망이 있음기 때문이며, 법관(官吏)이 심리를(聽訟)하면서 공평하고 바른 도리(公道)를 잃었기 때문D이므로,재판업무에 힘을 다 바쳐서(奉公) 죄수를 너그럽게 판결(疏決)하고, 원통하고 잘못됨이 없도록 하여 하늘의 구짖음(天譴천견)에 보답하게 하라고 하였고,연산 4년(1497)에는 의정부에 왕명을 내리기를,형사재판의(刑獄)의 잘못된 판결과 민사소송(詞訟)이 오래 밀리게 되면,백성들은 억울하고 원한이 되기에 하늘을 감동시켜 이상기후의 변화를 부른 것이니, 빨리 전국에 알려 판결을 바루고 신속하게 처리하도록 하라는 왕명을 내리게 됨을 알 수 있다.
앞에서도 살펴 보았지만.오늘날의 우리는 과학이 발달된 덕분(?)인지,자연의 변화나 이상기후의 변동정도는 물론이고,태풍이 불고 홍수가 나거나, 가령 법원의 지붕이 다 날라 가더라도 전혀 재판이 혹시나 잘못되거나 지연되어 국민들이 원통하고 억울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털끝 만큼도 생각한다면..아마도 정신이 나간사람의 생각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비 과학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리라
그러나 과연 오늘날의 우리의 재판문화는 조금도 국민들에게 억울하거나 원망이 없는 사법문화를 가지고 있기만 한 것인지...그리고 비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이상기후가 될 때마다,억울하고 원통한 재판문화가 있는지 살핀다면 비민주적인 것이라고 할 것인지...다만 최근에 법원에서 그동안 7-8회의 공판이나 재판심리를 2-3회로 줄인다는 발표와, 판결문도 국민들이 이해하기 쉬운 표현을 한글로 작성할려는 보도기사를 보니, 우리 사법부의 재판문화도 점진적으로 보다 국민들을 위하는 방향으로 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조상들을 뵐 면목이 점차 서 가는 것 같다.
나)신하
(1)사송이 적체되면 백성이 원망하고 (2)천재지변은 소송이 침체되고 백성에게 원망이 있기에 생긴다
위와 같이 연산5년(1498)에는나라에 재판(詞訟)이 번잡하고 많아서,재판을 적체시키고 석방을 아니하면 백성들이 원망을 많이 하고, 지금 무식한 백성들이 혹은 형제간에, 혹은 친척간에 서로 송사를 하여,여러해 동안 판결이 나지 않으면 매우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으며, 중종 16년(1521)에는,재변이 생기게 되는 것은, 반드시 조정에 잘못된 점이 있고 옥송에 침체된 것이 있거나, 백성에게 원망이 있는 재판문화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한다.
이렇듯이 조선왕조의 재판은 백성들에게 원망이 생기면 재판문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이,즉 조선왕조의 재판의 이상은 백성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양에서,외국에서 수입해 들여온 오늘날 우리들이 쓰고 있는 재판법문화는 지구상에서 가장 이상적이며 근대화 되었고,이성적이자,합리적이며,가장 민주적이라 하겠지만...
과연 수 백년전의 우리 조상들의 재판문화는 전 근대적이고, 캐캐 먹어서 오늘날의 수입된 민주적인 재판문화에 비해서는 왕권독재주의 봉건주의 시대의 문화로, 오늘날 외국에서 수입해 쓰는 민주적 재판문화와는 절대로 비교조차 할 수 없거니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캐캐먹은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메스컴등을 통해서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라 면서 알지도 못하면서,배운적도 없으면서,전혀 정확히 잘 모르면서,
사법시험과목에서 배우지 않았다고 해서,조상들의 전통법문화를 깡그리 한 마디로 무시하고 천시하고 경시하고 쓰레기 같은 문화로 취급해도 되는 것인지...못배우고 모르면 알려고 노력해야 하고,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야만 배우는 사람들앞에서 목에 힘주고 정책을 결정하는 지도자들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른지...
7)신속해야 원한이 풀림
가)임금
중종임금은 (1)가벼운 사건은 모두 속히 재판하면 백성들의 원한이 조금이라도 풀리고(2)재판은 신속하게 죄수에게 억울함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와같이 중종임금은 9년(1514)에 이르기를,감옥의 죄수(獄囚)는 진실로 속히 결정하여 처리해야 하지만, 중대한 옥사가 아니라면, 경미한 사건은 모두 속히 판결하도록 힘쓴다면 오래된 원한이 조금이라도 풀릴 것이다.라고 하며,
16년(1521)에는지난번 재변 때문에 각사(各司) 관리(官吏)들을 열심히 출근하게 하는 법을 밝혔고, 형사재판은 속히 결단하여 지체됨이 없도록 하되 죄수로 하여금 억울함이 없게 해야 한다.그러므로 법관(刑官)도 자주 바꾸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오늘날에도 가벼운 사건은 신속하게 수사.기소.재판하는 걸로 알고 있지만...그리고 법관이나 사법부의 공무원이나 검사들까지도 열심히 공무에 임하며,출근시간도 잘 지키며,특히 형사사건은 신속하게 수사.기소.재판을 하여 구금된 피의자나 피고인들이 억울하지 않도록 해 주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그리고 법관의 업무의 중요성과 전문성을 생각해서 함부로 교체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간혹 보도를 보면,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는 걸로 기억하는데...만약 이런 경우라면, 조선의 우리 조상들은 오늘의 우리들을 보시고 뭐라고나 하실른지...거의 500여년 전에도 백성을 위한 신속하고, 출퇴근 시간을 잘 지키며,억울함이 없도록 재판을 하고 법관의 전문성을 인정하였던 지혜에 못미치는 경우가 있기난 한다면...우리는 이게 과연 500여년이 지난 지금의 재판문화가 가장 이상적이라고만 할 수 있을른지...
나)신하
1609년에 사헌부에서는 (1)재판을 지연시키지 말고 빨리 결단해서 먼 시골의 하소연할 데 없는 가난한 백성으로 하여금 억울한 죄를 뒤집어 쓰는 원통함이 없도록 건의하며,1620년에는 승정원에서는 (2)죄 없는 사람을 형틀에 묶어 원통하고 억울하다고 울부짖고 있는 소리가 자자하니, 보고 듣기에 불쌍하고 측은하므로 신속히 해결해 주기 바랍니다 라고 주장하였다.
위와 같이 광해 1년(1609)에는 신속한 재판을 위해서는 모든 감옥의 죄수(獄囚)는 죄가 있으면 형률을 상고하여 다스리며 죄가 없으면 명쾌하게 결단하여,옥사가 지체되어 원통함을 품음으로써 화목한 분위기(和氣)를 손상시키고 재앙을 이루는 근심이 거의 없도록 해야 하므로,형사사건은 시일을 지연시키지 말고 빨리 결단해서 먼 시골의 하소연할 데 없는 가난한 백성으로 하여금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는 원통함이 없도록 하소서.하니 임금도 동의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광해 12년(1620)에는 승정원이 아뢰기를, 억울한 양민을 감옥에 가두고 나라의 곡식을 축내게 하는 것에 대해서옥사의 대체는 마땅히 무고한 자를 처벌하고 양민들을 방면하는 것인데 어언 4, 5개월이 지났는데도 죄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형틀에 묶여 있게 하여 원통하고 억울하다고 울부짖고 있는 소리가 자자하니, 보고 듣기에 불쌍하고 측은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흉년에 60- 70명의 사람을 감옥에 가두고 먹여 살리는 것도 바로 국고의 곡식을 축내는 한가지 폐단이라고 한다. 그래서 <국가에 이익이 없고 임금의 정치(王政)에 해가 있는 것중에 가장 큰 것이라고도 하며, 한두 달 안에 속히 처치하도록 하소서.라고 건의를 하니 임금도 이에 따르는 것을 보았다.
오늘날에도 우리들에게는 신속한 재판이 인권을 보장하고 억울함을 없애고,비용이 적게들며,민주적이라는 것을 알고 이에 맞는 관계법령도 여러 가지 만들어서 운용을 하고 있다.그러나 가끔 보도를 보면,억울한 재판이나 신속하지 못한 불법감금등이나 억울한 재판이 없지도 않다.그리고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을 교도소에 많이 가두는 것도 국력낭비의 하나라는 견해도 음미해볼 가치가 있지는 않는지...
위와 같이 1568년에 선조 임금은 사화등으로 인해 귀양간 사람들과 연좌되어 관청의 종이 된 죄인의 처자를 풀어주기 위해 “옛날에는 원통한 큰범죄 사건(獄事)이 많으면 흰무지개가 해를 꿴다고 하였는데, 요즈음 옥사는 없으나 과거에 원통해 하던 사람들이 아직도 신원되지 못하였으니 천심을 돌리고 물정을 위로할 길이 없다”라고 하였다.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혹시나 잘못된 원통한 큰 범죄사건이 많지는 않는지... 가끔 하늘의 흰무지게가 해를 꿰는지...한 번색 하늘의 태양도 쳐다볼 필요가 있을 것도 같은데...
다행히 공해로 인해 그런 자연의 이변이 생기지 않겠기에,흼무지게가 생기지 않는한 오늘의 우리들의 사법문화에서는 전혀 억울하고 원통한 사건이 없으며, 백성들의 민심을 위로해 줄 필요가 절대로 없을 민주주의 국가의 사법제도라고 하겠지만...아직도 자연사가 아닌 의문의 죽음으로 유가족들의 억울함을 해결해 달라는 70여건의 사건들이 겨우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한시적으로 증거도 많이 없어져 버린 지금에야 일시적으로 조사가 되는 걸로 보도된 것을 보면...
450여년전인 옛날보다 훨씬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록 더 과학적이고 민주적이라는 후손인 우리들이,수사장비와 민주주의 의식과 첨단과학의 문화가 발달된 지금도 합리적인 수사와 재판도 해 보지 못하고,해결하지 못하는 60-70여건에 달하는 의문사 사건이 조선왕조보다도 더 많이 있다면...과연 우리는 조선왕조보다 더 발달된 민주적이고 세계인들에게 자랑할 만한 사법제도를 가졌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인지...
선조 36년(1603)에 형조 판서 홍여순(洪汝諄)이 아뢰기를,살인에 관한 옥사는 관계되는 바가 대단히 중요하니 잘 살펴서 일의 실상을 조사해 낸 다음 법에 의해 처치하여 한때의 원통함을 풀어주고 뒷날의 폐단을 막아야 한다면 실체적 진실발견을 중요시 하고 있다.
오늘날도 증거가 불충분하거나 억울한 재판이 있지는 않는지...가끔 조사한 증거나 증인의 진술이 수사기관에서의 발표와 국회증인선서후의 진술에서와 재판에서 다른경우에는 억울한 형사재판이 생길 수 있다고 본다면 인심의 울분을 풀어주어야 하는 것이 대법원장이나 통치자들이 해야 조심해야 하는 일 중에 제일 큰일이라는 의미가 아닌지...
2.공정한 재판.
재판은 공평해야 하고 불공평하거나 불공정한 재판을 하면 처벌을 한다.
1)공평
위와 같이 중종 임금은 5년(1510)에 국가발전을 위한 건의를,민의를(進言) 청취하려는 왕명(傳旨)을 내리기를... 일의 징조는 사람의 선악에서 생기고, 죄수가 발목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자물쇠를 채우거나 수갑을 차서(桎梏) 원통하고 억울하여 화기(和氣)가 사라졌는가?
사송(詞訟)에 개인적인 관계(私)가 있어서, 곧은 것이 굽혀지고 굽은 것이 펴졌는가?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건만 관이 진휼하지 않는가? 라며,교도행정상에 원통하고 억울함이 없는지...재판에 사사로운 감정이나 선입관이나 청탁등으로 사법의 정의가 세워지지 않거나 흉년에 백성들이 굶주리는 경우 공무원들이 국민들을 위로하고 돕지 않는지를 걱정하고 있다.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호랑이 담배먹는 시대의 이야기로만 들리는 것인지...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전혀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인지...재판에 전혀 문제가 없으며,교도행정에 가장 이상적이고 민주적이어서 원통하고 억울함이 없는 시대인지...환란이후의 어려운 국민들에게 얼마나 신속하고 적정한 위로와 도움을 주고 있는지...
혹시라도 늑장행정이나 자의적인 비합리적인 처분이나 문제점이 없는 이상적이고 세계인들에게 자랑할 만한 민주적인 문화를 가지고만 있는 것인지...
임금의 입장에서는 정조 14년(1790)에 전교하기를,. 본조의 참판 김아무게가 부탁을 받고 송사를 처리하며 하인을 놓아 백성을 괴롭힌 율문을 적용하게 하게 명령을 내리고,더없이 엄격한 것이 송사인데 이처럼 편을 들고 있으니, 너무도 해괴한 일이다. 경은 파직시키겠다고 고급공직자도 처벌하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국민들을 괴롭히거나, 고위공직자들이 만약 직.간접적으로 재판에 편파적이거나 국민들을 괴롭히거나 영향을 미쳤다면, 이는 너무도 해괴한 일로 차관급은 물론이고 고위 공직자라도 처벌하여야 한다는 의미가 아닌지...과연 우리도 이렇게 철저하게 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인지...
3)불공정-처벌
결송(決訟)이 불공정해도 처벌하지도 않고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음:중종 33년(1538)에 만백성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데에는 각기 소원(訴願)하는 길이 있다. ...
송사(訟事)를 청리하는 관리가 결송(決訟)을 공정히 하지 않아서 더러운 이름(汚名)을 얻게 되더라도 이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각사의 관리가 폐단을 일으키는 일이 더욱 심하니, 폐단을 일으킨 간사한 관리는 원악 향리(元惡鄕吏)의 예에 의하여 통렬히 치죄한다는 법이 이미 엄중하건만 아직 치죄한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지금부터 460여년전에 중종임금이 말하기를 재판에 관여하는 공무원(법관.검사등)이 재판을 공정하게 하지 않아서 더러운 이름을 들어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기존에 처벌하는 하급관청의 공무원에 대한 규정이 엄하고 무겁지만 이를 다스리지 않는다고 한다.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이런 규정이 있어야 할 것이며,과연 그 규정되로 처벌을 엄하고 무겁게 하고 있는지...그리고 오늘날도 공정한 재판을 하지 못한 법관이나 검사들도 역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지..아니면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지...
위와같이 중종 6년(1511)에 삼공(三公)이 문서로 임금에게 보고하기를,청송(聽訟)하는 관리들이 대전에 규정된 송사 처리기한을 개인적인 사정이나 원한을 두려워해서, 짐짓 오래 두고 미루면서 곧 판결하지 않고, 사송(詞訟)이 해를 지나도 해결되지 않으므로 송사가 시작된 연월(年月)과 미결된 원인을 자세히 기록하여 아뢰게 하고,더욱 심한 자는 계문(啓聞)하여 파면(罷黜)함이 마땅하겠습니다라고 한다.
중종 12년(1516)에는 정병(正兵) 최숙징(崔淑澄)이 상소하기를,전국의 재판관(訟官)의 판결이 분명하지 못한 이유로서,올해에는 아무 재판관이 원고(元告)에게 유리하게 판결해 놓으며,명년에는 어느 재판관이 그 판결을 번복하여 척인(隻人)에게 유리하게 판결하고, 또 그 다음 해에는 어느 재판관이 도로 원고에게 유리하게 판결합니다.
그러므로 1~2년 동안에 판결이 번복되고 되풀이되어 이를 기화로 하여 간사한 무리들이 분분하게 고소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중종임금에게 요청하기를 대전(헌법전) 에 의하여 잘못을 알고도 그릇 판결한 관리나 원고나 척인 중에서 간사한 짓을 한 것이 뚜렷한 자는 모두 처벌한다면 재판이 저절로 적어질 것이라고 한다.
오늘날도 법규정은 제처두고 법관이나 검사등의 개인사정으로,혹은 원한이나 보복이 두려워 재판을 미루어 해를 넘기거나 하는 경우에는 심한 경우라면 파면해라는 의미가 아닌지...또한 법관마다 특정인에게 유리한 편파적인 판결을 하여 판결이 계속 번복되고 되풀이 된다면,소송이 늘어나고 간사한 사람들이 고소를 많이 하게 되므로,규정을 어기고 잘못 판결한 법관이나,검사(수사.기소)들이나 원피고중에서 간사한 짓을 뚜렷하게 한 경우에는 모두 처벌한다면 재판업무의 숫자가 줄어든다는 말이 아닌지...
나)청탁-신하
위와같이 중종 28(1533))년에 동지사(同知事) 심언광(沈彦光)이 임금에게 아뢰기를,법관(검사)들이 사정을 써서 잘못 판결한 경우 현저하게 드러난 자는 용서하지 말고 반드시 그 죄로 처벌한다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며,우물쭈물하여 결단을 하지 않는 것이 주로 이런 까닭이라고 한다. 그리고 소송을 제기하는 자들도 자기가 불리하게 되면 반드시 허물을 관리에게 돌려서 다른 사(司)로 옮기기를 도모하고 있으며. 왕족이나 재상의(宗宰)의 반열에 끼어 있는 자들까지도 이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각별히 치죄(治罪)하고 소송하는 물건은 현재의 점유자(소유자)에게 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며,재판과정에 개인적인 사정을 두면 반드시 처벌을 하고 당사자들 중에도 자신에게 불리하면 법관이 잘못했다며 다른 법원으로 옳기는 경우와,임금의 친척으로 고위직의 공직자에게도 특별히 처벌하기를 건의한다.
숙종 1년(1675)에는 장령(掌令) 남천한(南天漢)․정언(正言) 이수경(李壽慶)이 합계(合啓)하기를,재판(詞訟)의 승패소(立落)가 다 친소(親疎)에 따라 정해지니, 감사(監司)․수령(守令)이 조금도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였습니다라며 처벌을 주장한다.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적용해 본다면...법관이나 검사들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서 잘못 판결을 하며, 그 중에서도 크게 잘못 수사.기소. 판결한 경우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아니 권력자의 친인척을 막론하고 엄하게 처벌하자는 견해를 통치자나 대법원장에게 건의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재판의 승소나 패소가 법관이나 검사나 아니면 법원직원이나 검사실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의 개인적인 친소여부에 따라 수사와 기소와 재판에 크게 불공평하게 영향을 받게 되는 경우라면 처벌하기를 주장하자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어느 시대 사회에나 인간적인 친소관계가 없을 수는 없지만...아주 사소한 정도는 정말 인간적이고 고마운 것이 되지만, 그것이 정도를 넘쳐서 국민들의 비난과 원성의 대상이 될 정도의 중대한 사건이라면,아니 심히 불공평한 처리라면...
오늘날도 처벌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법부나 검찰에 대한 비난이나 의심이 여론으로,민심으로 나타날 것이 아닌지...
특히 정치적인 사건의 경우라든지...권력층이나 이들과 관련된 가까운 사람들에 관한 사건의 경우에, 가끔씩 메스컴이나 신문 방송을 통해,불공정함과, 기존의 법관이나 특히 검찰을 두고 새로운 특별검사제가 강하게 대두되는 경우라면...조선왕조의 선현들의 주장과 비교해서 크게 차이가 없는 경우와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 없지 않겠는지...
위와같이 중종 20년(1527)에 홍문관 부제학 김수성(金遂性) 등의 상소에 의하면, 공평하게 하여야 하는 것이 옥송(獄訟)인데,뇌물이 오가는 데 따라 옥송이 뒤집혀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하며,중종 36년(1541)에 대사간 이윤경(李潤慶) 등이 상소하기를,옥송(獄訟)에 뇌물을 주지 않는 일이 없으므로 탐오하고 간사한 것이 끝없이 성해지니, 이것은 실로 혼란과 멸망(亂亡)의 조짐입니다. 백성이 편히 살지 못하여 패가(敗家)하고 유리하여 길에서 억울함을 외치고 산골짜기에 숨는 자가 이루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선조 33년(1600)에 사헌부가 아뢰기를,난리를 겪은 뒤로 인심이 퇴미하여져서 뇌물을 쓸 줄 만 알 뿐 국법이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습니다. 옥송(獄訟)에 이르러서는 더욱 차마 말 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선조 38년(1605)에 행 대사헌 박승종(朴承宗), 집의 이덕형(李德泂), 장령 이덕온(李德溫), 지평 민덕남(閔德男) 등이 아뢰기를 옥송(獄訟)을 하는 곳에는 뇌물이 범람한다고 하며,숙종 38년(1702)에 지평 김상옥(金相玉)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형조(刑曹)와 한성부(漢城府)는 사송(詞訟)을 맡는 자리인데도 공공연하게 뇌물이 오가고 있고...
법사(法司)는 속죄하려고 내는 물건(贖物)을 받을 적에 남의 물건을 몰래 가져가는(染指) 의심을 받아도 돌아다 보지 않습니다. 서울의 관청(京司)이 이러하니 지방(外方)도 알 만합니다.라고 한다.
오늘의 우리들의 재판문화에도 만약 뇌물이 오고 간다면...법보다 뇌물의 힘이 더 크다면...조선의 우리 조상들은 틀림없이 혼란과 멸망의 조짐이라고 할 것이다.만약 서울에서 이런일이 일어난다면,지방은 말할 필요도 없다고 할 것이다.다행이 우리의 사법부의 법문화가 그렇게 우려할 정도로 되지는 않았다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만약 일부 국민들의 견해라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법감정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된다면...이것은 누구의 잘못일른지...
정조 7년(1783)에는 임금이 재판(詞訟)의 승패소(立落)를 뇌물에 따라 하여 결단이 잘못 되어지고 있다. 대소(大小)를 막론하고 오래 지체하게 되는 수와 원통하게 되어 한결같이 모두 마음 먹고서 조사 탄핵하여 처결해야 한다고 함은 재판에 뇌물이 따르면 지체하거나 원통하게 되므로 조사 탄핵하여 처벌하기를 바란다.오늘의 우리의 재판문화도 뇌물이 오고간다면...조사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겠는지...
조선왕조의 공직자들 중에서 선조 38년(1605)에 대사간 유철, 사간 민광훈(閔光勳)등은 ,제왕의 법(王法)이 외척에게는 시행되지 않고 옥송(獄訟)이 뇌물과 권세에 많이 좌우되는 것과,
숙종 37년(1711)에는 비변사에서큰 소송(訴訟)과 중대한 옥사에 뇌물을 받고 잘못 결송(決訟)하거나 사사로운 생각(私意)을 가지고 법을 벗어난(法外) 가혹한 형벌(酷刑)을 가하여 인명을 함부로 죽이며, 위 항목 여러 조목의 죄상이 드러나서 두드러진(現著) 자는 하늘이 주는 벌을 함께 논하여 파직하는 일로 시행세칙(定式)을 만들어 시행해야 합니다.라고 하며 처벌과 파면을 건의한다.
그리고 숙종42년(1716)에 간원(諫院)에서 논핵(論劾)하기를, 예산 현감(禮山縣監) 정00은 사송(詞訟)을 듣고 판단 함(聽斷)에 뇌물을 받는 길이 크게 열렸으니,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영조 12년(1736)에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강동 현감(江東縣監) 안 아무게는 사송(詞訟)에 오직 뇌물(賂物)을 보아 가며 하였으며, 청컨대 파직하소서.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그러나 법관이 재판업무를 위임하여 뇌물을 받게 하거나,뇌물의 많고 적음에 다라 재판을 하거나 부당한 판결을 하거나 밑에 있는 하위직 공무원들이 뇌물을 좋아하는 경우에 법관을 파직시킨 경우를 보면,경종 4년(1724)에 사헌부(司憲府)에서 논하기를,광양 현감(光陽縣監) 구 아무게는 크고 작은 관청의 일과 사송(詞訟)을 일체 이성(李姓)의 좌수(座首)에게 물어서 결정하므로, 그 좌수가 하나같이 뇌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가부(可否)를 결정하는 등, 권세에 기대어 농간함이 끝이 없다고 합니다....청컨대 구oo은 파직하고 좌수는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엄형에 처하여 징계토록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영조 18년(1742)에 집의 김종태(金宗台)가 상소하였는데, 판결사(判決事) 김0은 무릇 청송(聽訟)에 관계되는 일이면 일의 도리(事理)가 맞는지 맞지 않는지(曲直) 묻지 않고 오로지 뇌물의 많고 적음만을 보고 있으니, 파직해야 마땅합니다...하니,답하기를,...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영조 51년(1759)에 장령 윤밀(尹謐)이 상소하여 논핵하기를,남포 현감(藍浦縣監) 김00은 첨액(簽額)과 청송(聽訟)에 있어서 정당하지 못하게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운봉 현감(雲峰縣監) 전00이 ...백성의 소송을 출납할 적에는 교활한 종들이 뇌물만 찾습니다. 모두 파직하소서.하니, 영조임금이 파직하기로 한다.
위와같이 조선왕조에서는 법관이나 검사가 스스로 뇌물을 좋아하거나,자기 부하가 뇌물을 좋아하도록 방치하거나,재판업무를 부하에게 위임하거나 ,이로 인해 뇌물이 성행하고 도리에 맞지 않는 부당한 재판문화에 대해 결국 임금은 당해 법관등을 파면시키고 엄하게 처벌함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조선왕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민주주의를 가지고 있다.민주주의는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선언이며,그러므로 나라의 주인인 백성이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도록,뇌물이 성행하거나,권력에 기대어 농간이 끝이 없으면 파직시키고 엄하게 처벌하였다.오늘날의 우리는 수백년전의 왕권시대의 억울하고 원통한 백성을 위한 재판문화보다도 더 민주적이므로,오늘의 우리들의 사법문화는 조선왕조의 우리 조상들보다 200년 300년이 더 발달된 민주주의를 가지고 있다면...
조선왕조의 경우보다 더욱 철저하게 백성의 억울함과 원통함이 없도록 법관과 그 주위의 공직자들이 잘못을 하면,돈과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 공정하지 못한 재판업무가 진행되면,조선왕조의 우리 조상들보다 더 민주적으로 책임감을 지워서 파면까지도 해야 하는 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더 민주적이며,백성들을 위한 사법문화의 실현이며,조상들에게 자랑스런 당당한 후손이 아니겠는지...
한국전통법문화의 강좌
한국전통법의 정신과 법체계(22)
-사법사상.재판이론;재판이란(2)-백성이 원통하고 억울함이 없도록.
동국대학교경 주캠퍼스 법정대 법학과 교수 김 재 문 (http://wwwk.dongguk.ac.kr/~kj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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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재판이 오래 적체되면 원통하고 억울하게 됨
가)임금
성종임금은 (1)대전(헌법)의 재판기한을 준수하여 원통하고 억울함을 방지하며.(2)겨울의 천둥번개와 비가내림은 재판이 지체되어 백성에게 원망이 있는 것이고,연산군도 (3)잘못된 판결과 오래밀린 재판으로 원통하고 억울하여 -겨울에 천둥.번개 일어난다고 한다.
(1)대전(헌법)의 재판기한을 준수하여 원통하고 억울함을 방지할것:성종 9년(1478)에 팔도 관찰사에게 결송은 《대전》의 기한을 준수하고 어기는 자를 규찰하게 하기위해 8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글을 내려주기(下書)를, 《대전(大典)》에 결옥 일한(決獄日限;재판기한)이 실려 있는데,..
.감사(監司) 또한 체포(檢擧)하지 아니하여서 그러한 것인가? 경은 그것을 거듭 엄하게 고찰하여 모든 결송(決訟)은 일체 《대전》의 기한을 준수하되, 어기는 자는 일일이 적발하여 자세히 살펴서(糾察), 원통하고 억울함을 품고 어지럽게 와서 호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하였다.
위와같이 성종 9년(1478)에 팔도 관찰사에게 헌법상의 재판기한을 준수하고 어기는 자를 규찰하게 하기위해 8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명령을 문서로 주면서, 모든 결송(決訟)은 일체 《대전》의 기한을 준수하되, 어기는 자는 일일이 적발하여 자세히 살펴서(糾察), 원통하고 억울함을 품고 어지럽게 와서 호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성종 25년(1494)에는 크게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비가 내리는 자연의 이변(災變)에 대해,임금이 심히 두려워(驚懼)한다면서, 어찌 그 까닭을 알지는 못하나,아마도 형사재판인 옥송(獄訟)이 지체되어 백성에게 원망이 있음기 때문이며, 법관(官吏)이 심리를(聽訟)하면서 공평하고 바른 도리(公道)를 잃었기 때문D이므로,재판업무에 힘을 다 바쳐서(奉公) 죄수를 너그럽게 판결(疏決)하고, 원통하고 잘못됨이 없도록 하여 하늘의 구짖음(天譴천견)에 보답하게 하라고 하였고,연산 4년(1497)에는 의정부에 왕명을 내리기를,형사재판의(刑獄)의 잘못된 판결과 민사소송(詞訟)이 오래 밀리게 되면,백성들은 억울하고 원한이 되기에 하늘을 감동시켜 이상기후의 변화를 부른 것이니, 빨리 전국에 알려 판결을 바루고 신속하게 처리하도록 하라는 왕명을 내리게 됨을 알 수 있다.
앞에서도 살펴 보았지만.오늘날의 우리는 과학이 발달된 덕분(?)인지,자연의 변화나 이상기후의 변동정도는 물론이고,태풍이 불고 홍수가 나거나, 가령 법원의 지붕이 다 날라 가더라도 전혀 재판이 혹시나 잘못되거나 지연되어 국민들이 원통하고 억울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털끝 만큼도 생각한다면..아마도 정신이 나간사람의 생각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비 과학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리라
그러나 과연 오늘날의 우리의 재판문화는 조금도 국민들에게 억울하거나 원망이 없는 사법문화를 가지고 있기만 한 것인지...그리고 비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이상기후가 될 때마다,억울하고 원통한 재판문화가 있는지 살핀다면 비민주적인 것이라고 할 것인지...다만 최근에 법원에서 그동안 7-8회의 공판이나 재판심리를 2-3회로 줄인다는 발표와, 판결문도 국민들이 이해하기 쉬운 표현을 한글로 작성할려는 보도기사를 보니, 우리 사법부의 재판문화도 점진적으로 보다 국민들을 위하는 방향으로 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조상들을 뵐 면목이 점차 서 가는 것 같다.
나)신하
(1)사송이 적체되면 백성이 원망하고 (2)천재지변은 소송이 침체되고 백성에게 원망이 있기에 생긴다
위와 같이 연산5년(1498)에는나라에 재판(詞訟)이 번잡하고 많아서,재판을 적체시키고 석방을 아니하면 백성들이 원망을 많이 하고, 지금 무식한 백성들이 혹은 형제간에, 혹은 친척간에 서로 송사를 하여,여러해 동안 판결이 나지 않으면 매우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으며, 중종 16년(1521)에는,재변이 생기게 되는 것은, 반드시 조정에 잘못된 점이 있고 옥송에 침체된 것이 있거나, 백성에게 원망이 있는 재판문화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한다.
이렇듯이 조선왕조의 재판은 백성들에게 원망이 생기면 재판문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이,즉 조선왕조의 재판의 이상은 백성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양에서,외국에서 수입해 들여온 오늘날 우리들이 쓰고 있는 재판법문화는 지구상에서 가장 이상적이며 근대화 되었고,이성적이자,합리적이며,가장 민주적이라 하겠지만...
과연 수 백년전의 우리 조상들의 재판문화는 전 근대적이고, 캐캐 먹어서 오늘날의 수입된 민주적인 재판문화에 비해서는 왕권독재주의 봉건주의 시대의 문화로, 오늘날 외국에서 수입해 쓰는 민주적 재판문화와는 절대로 비교조차 할 수 없거니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캐캐먹은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메스컴등을 통해서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라 면서 알지도 못하면서,배운적도 없으면서,전혀 정확히 잘 모르면서,
사법시험과목에서 배우지 않았다고 해서,조상들의 전통법문화를 깡그리 한 마디로 무시하고 천시하고 경시하고 쓰레기 같은 문화로 취급해도 되는 것인지...못배우고 모르면 알려고 노력해야 하고,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야만 배우는 사람들앞에서 목에 힘주고 정책을 결정하는 지도자들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른지...
7)신속해야 원한이 풀림
가)임금
중종임금은 (1)가벼운 사건은 모두 속히 재판하면 백성들의 원한이 조금이라도 풀리고(2)재판은 신속하게 죄수에게 억울함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와같이 중종임금은 9년(1514)에 이르기를,감옥의 죄수(獄囚)는 진실로 속히 결정하여 처리해야 하지만, 중대한 옥사가 아니라면, 경미한 사건은 모두 속히 판결하도록 힘쓴다면 오래된 원한이 조금이라도 풀릴 것이다.라고 하며,
16년(1521)에는지난번 재변 때문에 각사(各司) 관리(官吏)들을 열심히 출근하게 하는 법을 밝혔고, 형사재판은 속히 결단하여 지체됨이 없도록 하되 죄수로 하여금 억울함이 없게 해야 한다.그러므로 법관(刑官)도 자주 바꾸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오늘날에도 가벼운 사건은 신속하게 수사.기소.재판하는 걸로 알고 있지만...그리고 법관이나 사법부의 공무원이나 검사들까지도 열심히 공무에 임하며,출근시간도 잘 지키며,특히 형사사건은 신속하게 수사.기소.재판을 하여 구금된 피의자나 피고인들이 억울하지 않도록 해 주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그리고 법관의 업무의 중요성과 전문성을 생각해서 함부로 교체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간혹 보도를 보면,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는 걸로 기억하는데...만약 이런 경우라면, 조선의 우리 조상들은 오늘의 우리들을 보시고 뭐라고나 하실른지...거의 500여년 전에도 백성을 위한 신속하고, 출퇴근 시간을 잘 지키며,억울함이 없도록 재판을 하고 법관의 전문성을 인정하였던 지혜에 못미치는 경우가 있기난 한다면...우리는 이게 과연 500여년이 지난 지금의 재판문화가 가장 이상적이라고만 할 수 있을른지...
나)신하
1609년에 사헌부에서는 (1)재판을 지연시키지 말고 빨리 결단해서 먼 시골의 하소연할 데 없는 가난한 백성으로 하여금 억울한 죄를 뒤집어 쓰는 원통함이 없도록 건의하며,1620년에는 승정원에서는 (2)죄 없는 사람을 형틀에 묶어 원통하고 억울하다고 울부짖고 있는 소리가 자자하니, 보고 듣기에 불쌍하고 측은하므로 신속히 해결해 주기 바랍니다 라고 주장하였다.
위와 같이 광해 1년(1609)에는 신속한 재판을 위해서는 모든 감옥의 죄수(獄囚)는 죄가 있으면 형률을 상고하여 다스리며 죄가 없으면 명쾌하게 결단하여,옥사가 지체되어 원통함을 품음으로써 화목한 분위기(和氣)를 손상시키고 재앙을 이루는 근심이 거의 없도록 해야 하므로,형사사건은 시일을 지연시키지 말고 빨리 결단해서 먼 시골의 하소연할 데 없는 가난한 백성으로 하여금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는 원통함이 없도록 하소서.하니 임금도 동의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광해 12년(1620)에는 승정원이 아뢰기를, 억울한 양민을 감옥에 가두고 나라의 곡식을 축내게 하는 것에 대해서옥사의 대체는 마땅히 무고한 자를 처벌하고 양민들을 방면하는 것인데 어언 4, 5개월이 지났는데도 죄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형틀에 묶여 있게 하여 원통하고 억울하다고 울부짖고 있는 소리가 자자하니, 보고 듣기에 불쌍하고 측은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흉년에 60- 70명의 사람을 감옥에 가두고 먹여 살리는 것도 바로 국고의 곡식을 축내는 한가지 폐단이라고 한다. 그래서 <국가에 이익이 없고 임금의 정치(王政)에 해가 있는 것중에 가장 큰 것이라고도 하며, 한두 달 안에 속히 처치하도록 하소서.라고 건의를 하니 임금도 이에 따르는 것을 보았다.
오늘날에도 우리들에게는 신속한 재판이 인권을 보장하고 억울함을 없애고,비용이 적게들며,민주적이라는 것을 알고 이에 맞는 관계법령도 여러 가지 만들어서 운용을 하고 있다.그러나 가끔 보도를 보면,억울한 재판이나 신속하지 못한 불법감금등이나 억울한 재판이 없지도 않다.그리고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을 교도소에 많이 가두는 것도 국력낭비의 하나라는 견해도 음미해볼 가치가 있지는 않는지...
위와 같이 1568년에 선조 임금은 사화등으로 인해 귀양간 사람들과 연좌되어 관청의 종이 된 죄인의 처자를 풀어주기 위해 “옛날에는 원통한 큰범죄 사건(獄事)이 많으면 흰무지개가 해를 꿴다고 하였는데, 요즈음 옥사는 없으나 과거에 원통해 하던 사람들이 아직도 신원되지 못하였으니 천심을 돌리고 물정을 위로할 길이 없다”라고 하였다.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혹시나 잘못된 원통한 큰 범죄사건이 많지는 않는지... 가끔 하늘의 흰무지게가 해를 꿰는지...한 번색 하늘의 태양도 쳐다볼 필요가 있을 것도 같은데...
다행히 공해로 인해 그런 자연의 이변이 생기지 않겠기에,흼무지게가 생기지 않는한 오늘의 우리들의 사법문화에서는 전혀 억울하고 원통한 사건이 없으며, 백성들의 민심을 위로해 줄 필요가 절대로 없을 민주주의 국가의 사법제도라고 하겠지만...아직도 자연사가 아닌 의문의 죽음으로 유가족들의 억울함을 해결해 달라는 70여건의 사건들이 겨우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한시적으로 증거도 많이 없어져 버린 지금에야 일시적으로 조사가 되는 걸로 보도된 것을 보면...
450여년전인 옛날보다 훨씬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록 더 과학적이고 민주적이라는 후손인 우리들이,수사장비와 민주주의 의식과 첨단과학의 문화가 발달된 지금도 합리적인 수사와 재판도 해 보지 못하고,해결하지 못하는 60-70여건에 달하는 의문사 사건이 조선왕조보다도 더 많이 있다면...과연 우리는 조선왕조보다 더 발달된 민주적이고 세계인들에게 자랑할 만한 사법제도를 가졌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인지...
선조 36년(1603)에 형조 판서 홍여순(洪汝諄)이 아뢰기를,살인에 관한 옥사는 관계되는 바가 대단히 중요하니 잘 살펴서 일의 실상을 조사해 낸 다음 법에 의해 처치하여 한때의 원통함을 풀어주고 뒷날의 폐단을 막아야 한다면 실체적 진실발견을 중요시 하고 있다.
오늘날도 증거가 불충분하거나 억울한 재판이 있지는 않는지...가끔 조사한 증거나 증인의 진술이 수사기관에서의 발표와 국회증인선서후의 진술에서와 재판에서 다른경우에는 억울한 형사재판이 생길 수 있다고 본다면 인심의 울분을 풀어주어야 하는 것이 대법원장이나 통치자들이 해야 조심해야 하는 일 중에 제일 큰일이라는 의미가 아닌지...
2.공정한 재판.
재판은 공평해야 하고 불공평하거나 불공정한 재판을 하면 처벌을 한다.
1)공평
위와 같이 중종 임금은 5년(1510)에 국가발전을 위한 건의를,민의를(進言) 청취하려는 왕명(傳旨)을 내리기를... 일의 징조는 사람의 선악에서 생기고, 죄수가 발목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자물쇠를 채우거나 수갑을 차서(桎梏) 원통하고 억울하여 화기(和氣)가 사라졌는가?
사송(詞訟)에 개인적인 관계(私)가 있어서, 곧은 것이 굽혀지고 굽은 것이 펴졌는가?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건만 관이 진휼하지 않는가? 라며,교도행정상에 원통하고 억울함이 없는지...재판에 사사로운 감정이나 선입관이나 청탁등으로 사법의 정의가 세워지지 않거나 흉년에 백성들이 굶주리는 경우 공무원들이 국민들을 위로하고 돕지 않는지를 걱정하고 있다.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호랑이 담배먹는 시대의 이야기로만 들리는 것인지...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전혀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인지...재판에 전혀 문제가 없으며,교도행정에 가장 이상적이고 민주적이어서 원통하고 억울함이 없는 시대인지...환란이후의 어려운 국민들에게 얼마나 신속하고 적정한 위로와 도움을 주고 있는지...
혹시라도 늑장행정이나 자의적인 비합리적인 처분이나 문제점이 없는 이상적이고 세계인들에게 자랑할 만한 민주적인 문화를 가지고만 있는 것인지...
임금의 입장에서는 정조 14년(1790)에 전교하기를,. 본조의 참판 김아무게가 부탁을 받고 송사를 처리하며 하인을 놓아 백성을 괴롭힌 율문을 적용하게 하게 명령을 내리고,더없이 엄격한 것이 송사인데 이처럼 편을 들고 있으니, 너무도 해괴한 일이다. 경은 파직시키겠다고 고급공직자도 처벌하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국민들을 괴롭히거나, 고위공직자들이 만약 직.간접적으로 재판에 편파적이거나 국민들을 괴롭히거나 영향을 미쳤다면, 이는 너무도 해괴한 일로 차관급은 물론이고 고위 공직자라도 처벌하여야 한다는 의미가 아닌지...과연 우리도 이렇게 철저하게 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인지...
3)불공정-처벌
결송(決訟)이 불공정해도 처벌하지도 않고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음:중종 33년(1538)에 만백성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데에는 각기 소원(訴願)하는 길이 있다. ...
송사(訟事)를 청리하는 관리가 결송(決訟)을 공정히 하지 않아서 더러운 이름(汚名)을 얻게 되더라도 이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각사의 관리가 폐단을 일으키는 일이 더욱 심하니, 폐단을 일으킨 간사한 관리는 원악 향리(元惡鄕吏)의 예에 의하여 통렬히 치죄한다는 법이 이미 엄중하건만 아직 치죄한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지금부터 460여년전에 중종임금이 말하기를 재판에 관여하는 공무원(법관.검사등)이 재판을 공정하게 하지 않아서 더러운 이름을 들어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기존에 처벌하는 하급관청의 공무원에 대한 규정이 엄하고 무겁지만 이를 다스리지 않는다고 한다.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이런 규정이 있어야 할 것이며,과연 그 규정되로 처벌을 엄하고 무겁게 하고 있는지...그리고 오늘날도 공정한 재판을 하지 못한 법관이나 검사들도 역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지..아니면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지...
위와같이 중종 6년(1511)에 삼공(三公)이 문서로 임금에게 보고하기를,청송(聽訟)하는 관리들이 대전에 규정된 송사 처리기한을 개인적인 사정이나 원한을 두려워해서, 짐짓 오래 두고 미루면서 곧 판결하지 않고, 사송(詞訟)이 해를 지나도 해결되지 않으므로 송사가 시작된 연월(年月)과 미결된 원인을 자세히 기록하여 아뢰게 하고,더욱 심한 자는 계문(啓聞)하여 파면(罷黜)함이 마땅하겠습니다라고 한다.
중종 12년(1516)에는 정병(正兵) 최숙징(崔淑澄)이 상소하기를,전국의 재판관(訟官)의 판결이 분명하지 못한 이유로서,올해에는 아무 재판관이 원고(元告)에게 유리하게 판결해 놓으며,명년에는 어느 재판관이 그 판결을 번복하여 척인(隻人)에게 유리하게 판결하고, 또 그 다음 해에는 어느 재판관이 도로 원고에게 유리하게 판결합니다.
그러므로 1~2년 동안에 판결이 번복되고 되풀이되어 이를 기화로 하여 간사한 무리들이 분분하게 고소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중종임금에게 요청하기를 대전(헌법전) 에 의하여 잘못을 알고도 그릇 판결한 관리나 원고나 척인 중에서 간사한 짓을 한 것이 뚜렷한 자는 모두 처벌한다면 재판이 저절로 적어질 것이라고 한다.
오늘날도 법규정은 제처두고 법관이나 검사등의 개인사정으로,혹은 원한이나 보복이 두려워 재판을 미루어 해를 넘기거나 하는 경우에는 심한 경우라면 파면해라는 의미가 아닌지...또한 법관마다 특정인에게 유리한 편파적인 판결을 하여 판결이 계속 번복되고 되풀이 된다면,소송이 늘어나고 간사한 사람들이 고소를 많이 하게 되므로,규정을 어기고 잘못 판결한 법관이나,검사(수사.기소)들이나 원피고중에서 간사한 짓을 뚜렷하게 한 경우에는 모두 처벌한다면 재판업무의 숫자가 줄어든다는 말이 아닌지...
나)청탁-신하
위와같이 중종 28(1533))년에 동지사(同知事) 심언광(沈彦光)이 임금에게 아뢰기를,법관(검사)들이 사정을 써서 잘못 판결한 경우 현저하게 드러난 자는 용서하지 말고 반드시 그 죄로 처벌한다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며,우물쭈물하여 결단을 하지 않는 것이 주로 이런 까닭이라고 한다. 그리고 소송을 제기하는 자들도 자기가 불리하게 되면 반드시 허물을 관리에게 돌려서 다른 사(司)로 옮기기를 도모하고 있으며. 왕족이나 재상의(宗宰)의 반열에 끼어 있는 자들까지도 이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각별히 치죄(治罪)하고 소송하는 물건은 현재의 점유자(소유자)에게 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며,재판과정에 개인적인 사정을 두면 반드시 처벌을 하고 당사자들 중에도 자신에게 불리하면 법관이 잘못했다며 다른 법원으로 옳기는 경우와,임금의 친척으로 고위직의 공직자에게도 특별히 처벌하기를 건의한다.
숙종 1년(1675)에는 장령(掌令) 남천한(南天漢)․정언(正言) 이수경(李壽慶)이 합계(合啓)하기를,재판(詞訟)의 승패소(立落)가 다 친소(親疎)에 따라 정해지니, 감사(監司)․수령(守令)이 조금도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였습니다라며 처벌을 주장한다.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적용해 본다면...법관이나 검사들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서 잘못 판결을 하며, 그 중에서도 크게 잘못 수사.기소. 판결한 경우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아니 권력자의 친인척을 막론하고 엄하게 처벌하자는 견해를 통치자나 대법원장에게 건의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재판의 승소나 패소가 법관이나 검사나 아니면 법원직원이나 검사실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의 개인적인 친소여부에 따라 수사와 기소와 재판에 크게 불공평하게 영향을 받게 되는 경우라면 처벌하기를 주장하자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어느 시대 사회에나 인간적인 친소관계가 없을 수는 없지만...아주 사소한 정도는 정말 인간적이고 고마운 것이 되지만, 그것이 정도를 넘쳐서 국민들의 비난과 원성의 대상이 될 정도의 중대한 사건이라면,아니 심히 불공평한 처리라면...
오늘날도 처벌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법부나 검찰에 대한 비난이나 의심이 여론으로,민심으로 나타날 것이 아닌지...
특히 정치적인 사건의 경우라든지...권력층이나 이들과 관련된 가까운 사람들에 관한 사건의 경우에, 가끔씩 메스컴이나 신문 방송을 통해,불공정함과, 기존의 법관이나 특히 검찰을 두고 새로운 특별검사제가 강하게 대두되는 경우라면...조선왕조의 선현들의 주장과 비교해서 크게 차이가 없는 경우와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 없지 않겠는지...
위와같이 중종 20년(1527)에 홍문관 부제학 김수성(金遂性) 등의 상소에 의하면, 공평하게 하여야 하는 것이 옥송(獄訟)인데,뇌물이 오가는 데 따라 옥송이 뒤집혀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하며,중종 36년(1541)에 대사간 이윤경(李潤慶) 등이 상소하기를,옥송(獄訟)에 뇌물을 주지 않는 일이 없으므로 탐오하고 간사한 것이 끝없이 성해지니, 이것은 실로 혼란과 멸망(亂亡)의 조짐입니다. 백성이 편히 살지 못하여 패가(敗家)하고 유리하여 길에서 억울함을 외치고 산골짜기에 숨는 자가 이루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선조 33년(1600)에 사헌부가 아뢰기를,난리를 겪은 뒤로 인심이 퇴미하여져서 뇌물을 쓸 줄 만 알 뿐 국법이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습니다. 옥송(獄訟)에 이르러서는 더욱 차마 말 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선조 38년(1605)에 행 대사헌 박승종(朴承宗), 집의 이덕형(李德泂), 장령 이덕온(李德溫), 지평 민덕남(閔德男) 등이 아뢰기를 옥송(獄訟)을 하는 곳에는 뇌물이 범람한다고 하며,숙종 38년(1702)에 지평 김상옥(金相玉)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형조(刑曹)와 한성부(漢城府)는 사송(詞訟)을 맡는 자리인데도 공공연하게 뇌물이 오가고 있고...
법사(法司)는 속죄하려고 내는 물건(贖物)을 받을 적에 남의 물건을 몰래 가져가는(染指) 의심을 받아도 돌아다 보지 않습니다. 서울의 관청(京司)이 이러하니 지방(外方)도 알 만합니다.라고 한다.
오늘의 우리들의 재판문화에도 만약 뇌물이 오고 간다면...법보다 뇌물의 힘이 더 크다면...조선의 우리 조상들은 틀림없이 혼란과 멸망의 조짐이라고 할 것이다.만약 서울에서 이런일이 일어난다면,지방은 말할 필요도 없다고 할 것이다.다행이 우리의 사법부의 법문화가 그렇게 우려할 정도로 되지는 않았다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만약 일부 국민들의 견해라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법감정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된다면...이것은 누구의 잘못일른지...
정조 7년(1783)에는 임금이 재판(詞訟)의 승패소(立落)를 뇌물에 따라 하여 결단이 잘못 되어지고 있다. 대소(大小)를 막론하고 오래 지체하게 되는 수와 원통하게 되어 한결같이 모두 마음 먹고서 조사 탄핵하여 처결해야 한다고 함은 재판에 뇌물이 따르면 지체하거나 원통하게 되므로 조사 탄핵하여 처벌하기를 바란다.오늘의 우리의 재판문화도 뇌물이 오고간다면...조사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겠는지...
조선왕조의 공직자들 중에서 선조 38년(1605)에 대사간 유철, 사간 민광훈(閔光勳)등은 ,제왕의 법(王法)이 외척에게는 시행되지 않고 옥송(獄訟)이 뇌물과 권세에 많이 좌우되는 것과,
숙종 37년(1711)에는 비변사에서큰 소송(訴訟)과 중대한 옥사에 뇌물을 받고 잘못 결송(決訟)하거나 사사로운 생각(私意)을 가지고 법을 벗어난(法外) 가혹한 형벌(酷刑)을 가하여 인명을 함부로 죽이며, 위 항목 여러 조목의 죄상이 드러나서 두드러진(現著) 자는 하늘이 주는 벌을 함께 논하여 파직하는 일로 시행세칙(定式)을 만들어 시행해야 합니다.라고 하며 처벌과 파면을 건의한다.
그리고 숙종42년(1716)에 간원(諫院)에서 논핵(論劾)하기를, 예산 현감(禮山縣監) 정00은 사송(詞訟)을 듣고 판단 함(聽斷)에 뇌물을 받는 길이 크게 열렸으니,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영조 12년(1736)에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강동 현감(江東縣監) 안 아무게는 사송(詞訟)에 오직 뇌물(賂物)을 보아 가며 하였으며, 청컨대 파직하소서.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그러나 법관이 재판업무를 위임하여 뇌물을 받게 하거나,뇌물의 많고 적음에 다라 재판을 하거나 부당한 판결을 하거나 밑에 있는 하위직 공무원들이 뇌물을 좋아하는 경우에 법관을 파직시킨 경우를 보면,경종 4년(1724)에 사헌부(司憲府)에서 논하기를,광양 현감(光陽縣監) 구 아무게는 크고 작은 관청의 일과 사송(詞訟)을 일체 이성(李姓)의 좌수(座首)에게 물어서 결정하므로, 그 좌수가 하나같이 뇌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가부(可否)를 결정하는 등, 권세에 기대어 농간함이 끝이 없다고 합니다....청컨대 구oo은 파직하고 좌수는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엄형에 처하여 징계토록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영조 18년(1742)에 집의 김종태(金宗台)가 상소하였는데, 판결사(判決事) 김0은 무릇 청송(聽訟)에 관계되는 일이면 일의 도리(事理)가 맞는지 맞지 않는지(曲直) 묻지 않고 오로지 뇌물의 많고 적음만을 보고 있으니, 파직해야 마땅합니다...하니,답하기를,...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영조 51년(1759)에 장령 윤밀(尹謐)이 상소하여 논핵하기를,남포 현감(藍浦縣監) 김00은 첨액(簽額)과 청송(聽訟)에 있어서 정당하지 못하게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운봉 현감(雲峰縣監) 전00이 ...백성의 소송을 출납할 적에는 교활한 종들이 뇌물만 찾습니다. 모두 파직하소서.하니, 영조임금이 파직하기로 한다.
위와같이 조선왕조에서는 법관이나 검사가 스스로 뇌물을 좋아하거나,자기 부하가 뇌물을 좋아하도록 방치하거나,재판업무를 부하에게 위임하거나 ,이로 인해 뇌물이 성행하고 도리에 맞지 않는 부당한 재판문화에 대해 결국 임금은 당해 법관등을 파면시키고 엄하게 처벌함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조선왕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민주주의를 가지고 있다.민주주의는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선언이며,그러므로 나라의 주인인 백성이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도록,뇌물이 성행하거나,권력에 기대어 농간이 끝이 없으면 파직시키고 엄하게 처벌하였다.오늘날의 우리는 수백년전의 왕권시대의 억울하고 원통한 백성을 위한 재판문화보다도 더 민주적이므로,오늘의 우리들의 사법문화는 조선왕조의 우리 조상들보다 200년 300년이 더 발달된 민주주의를 가지고 있다면...
조선왕조의 경우보다 더욱 철저하게 백성의 억울함과 원통함이 없도록 법관과 그 주위의 공직자들이 잘못을 하면,돈과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 공정하지 못한 재판업무가 진행되면,조선왕조의 우리 조상들보다 더 민주적으로 책임감을 지워서 파면까지도 해야 하는 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더 민주적이며,백성들을 위한 사법문화의 실현이며,조상들에게 자랑스런 당당한 후손이 아니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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