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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사법사상.재판이론;서설:조선왕조의 재판절차와 이상(理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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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재문 작성일13-06-13 11:02 조회5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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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법문화의 강좌
한국전통법의 정신과 법체계(26)
-사법사상.재판이론;서설:조선왕조의 재판절차와 이상(理想)-
동국대학교경 주캠퍼스 법정대 법학과 교수 김  재  문 (http://wwwk.dongguk.ac.kr/~kj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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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재판절차와 이상(理想)
그동안 조선왕조 500여년간의 방대한 재판이론과 재판정신의 본론을 소개 하기에 앞서서 그 서설로서 재판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그동안 5회 동안 발표한 내용에 이어서 이번호에서는 서설중의 후반부로서 조선왕조 500여년간의 사법이론.사법정신중 재판의 성립.그 절차 및 재판을 심리하는 이론과 그 이상(理想)을 본론에 앞서서 간단하게 개괄적인 소개를 먼저 해 보기로 한다.그리고 시간이 부족하연 이번호에서도 실록의 원문을 소개 하지 못하게 되어서 독자들의 양해를 바란다.

조선시대의 재판의 성립과 그 절차 및  이상(理想)으로서 그 이론과 그 정신을 몇가지만 간단히 순서대로 열거해 본다면, 一)재판의 성립과 절차(1)재판의 성립.증거문서.단서.공초.(2)송사절차 (3)판결문.(4)송사업무.보고  二)재판의 이상.(1)신중.공정.(2)신속.무원망.(3)실체적진실발견..등을 소개하기로 한다.

一)재판의 성립과 절차

1)재판의 성립.단서.공초

가)재판의 성립
먼저 재판이 성립되는 경우의 사례를 몇가지 보면,(1)장물이 나타난 자와 한 패이거나 와주(窩主두목)가 명백한 경우와 (2)증거가 명백하고 진술을 자복후 도망한 자는 옥사를 성립시키고,(3)처음에 실인(實因;살해한 원인)을 기록하며,(4)왕옥(국왕재판)의 사체(사리와 체면)는 반드시 간증(범죄에 관한 증인)이 갖추어지고 안사(案辭)가 귀일된 뒤에야 범인이 범죄 사실을 남김없이 고백하면서 수긍을 하여 옥사가 성립된다고 한다.

이와같이 진술을 받아 진실을 밝혀라고 명을 하면,판검사들은 억지로 서류를 꾸면서 함정에 몰아넣듯이 하므로,강도.절도죄로서 장물과 장물애비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구금인 이외는 재판을 하지 말고,즉시 석방하라는 왕명을 내려서 그 숫자를 보고하게 한다.

해방이후에도 우리는 가끔,본인에게 자백을 얻기위한 불법한 고문을 하기도 하여 나라가 다 흔들리고 그 후유증으로 정권이 타격을 받은 경우도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이미 거의 500여년 전에 함부로 재판을 하지 말도록하며 증거와 피의자의 진술이 명백하거나 진술서에 자백한 것만으로 재판을 할 수는 없고 도망한 경우에만 재판을 하여야 한다는 인권을 보장하는 신중한 재판정신이 아닌지...

재판이 성립될려면 범인의 범죄사실의 자백이외에 범죄사실에 관련된 증인이 있어야만 형사재판이 성립되고,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석방을 함을 알 수 있다.물론 위의 기록을 보면 이런 이유를 대고 있지만 실제는 자세히 위세에 의해 의도적으로 이런 상황을 이끌어 내어 정당화 시키는 것이라는 사관의 날카로운 지적도 있지만...우리는 그동안 알기로는 조선시대에는 자백만 있으면 형사재판이 이루어 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결코 그렇지 않았음을 실록기사를 보고 알 수 있음은 전통재판문화에 대한 다행한 일이  아닌지...

나)단서(일의 첫머리)
(1)익명서는 행적이 의심스럽고 하인을 심문하는 것은 뒷날에 폐단이 발생하므로 재판을 중지하여야 하며,(2)단서가 없으므로 다루기 극히 어려우며 살인사건의 형사재판은 사건관련인을 먼저 신문한다,그리고 (3)조금도 단서가 없다면 형사재판을 다루기가 극히 어렵습니다라고 임금에게 건의를 하고,(4)단서가 없는 경우 피의자들을 모두 석방한다.

명종 2년(1546)에 명분없는 큰 형사재판은 인심을 불안하고 공명정대한 재판과 통치에 방해가 된다는 신하의 건의에 명종임금은 작성인의 이름을 속인 문서는 의심스러우므로 이것을 가지고 피의자의 머슴을 심문하여 범죄사실의 꼬리를 잡아내려고 하였으나.먼 훗날 이로 인한 백성들의 피해(원통하고 억울함)가 생길 것 같아서 중지하였다고 한다.

이런 익명의 문서사건이 몇해전까지만 해도 아니 언제쯤인지... 우리사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심심치 않게 메스컴을 장식하기도 하고 나라안의 민심이 떠들석한 경우가 가끔 있은 것 같다.그러나 450여년전의 임금(국왕재판의 재판장)도 이런 애매한 문서로는 억울한 일이 생길우려가 있으므로 없던 것으로 포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명확한 문서를 익명서라고 하여 오히려 흐지 부지 할려고 한 사건은 없었던지...

(3)단서가 없어 모두 석방;광해 9년(1616)  한효순․한찬남 등이 무명장에 관해 상의 결단을 청하였다. 【이 옥사는 여러 날 동안 추국하였으나 끝내 단서가 없었다. 김해정 등 6인은 모두 풀려났다.】

광해 9년(1616)에도 형사사건을 몇일동안 심문하였으나 단서가 끝내 없으므로 6명을 모두 석방함을 알 수 있다.우리는 일제시대 만든 소설이나 왜곡된 이야기나 불법적인 재판사례가 우리 조상들의 모든 재판문화인줄 알고 있었지나 않았는지...아무런 혐의점이 없는데에도 조작하여 덮어씌우는 ,당하는 재판은 원칙적으로 할 수 없던 재판문화를 엿볼 수 있지 않는지...괘심죄로 잡아넣는 문화는 아니지 않는지...

2)송사절차.
조선왕조의 재판절차는 사건마다 관할마다 다 다르지만,일차 몇가지 사건만을 통해서 간단히 알아보기로 한다.
(1)지방의 사형죄수 재판심리 절차(2)정범부터 구속한 후에 사간을 심문을 하고(3)강상죄(가장 기존인 삼강오륜의 기본도덕율을 위반한 범죄)의 발생은 임금의 잘못이며 죄가되며 이런 사건은 합의제로서 심리가 된다 그리고
(5)강상 죄인(綱常罪人)은 해당도에서 심문한 보고서를 제출한 후에는 별차관(특별임시파견법조인)을 파견한 후에 단서를 얻어 보고하고, 체포한 하여 이송한 뒤에 처벌한다.또한 이런(7)가장 부도덕한 강상옥사는 중지해서는 않된다고 한다.

(4)그릇된 재판절차는 시정되어야 하며,(6)소송진행절차를 보면,원정(原情;소장)의 문기(文記.문서)를 직접 제출(現納)한 뒤에 양쪽편 당사자들의 상반되는 점을 모두 세밀히 따져서 물은(推詰) 뒤에 관청의 시행규정(官式)에 의거하여 결급(決給;판결문을 발급)하고, 소송의 당사자인 갑(甲)과 을(乙)이 모두 미진한 점이 없다고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판결문을 발급하는 것을 의미한다.

(8)역적사건의 재판의 끝에는 반드시 상강오륜을 위반한 죄인을 심문하는 삼성국문을 하며,.(9)삼성.궐정추국의 절차와,(10)의심스럽거나 원한이 개입된 사건은 임금이 직접 보고를 받아서 심리하도록 건의를 하고 있다.

3)판결문
판결문에 성명과 서압을 함:태종 15년(1414)  형조에서 아뢴 대로 결송한 문서에 성명을 쓰고 수결하는 법을 세우다 》 판결(決訟)한 문서에 성명을 쓰고 수결(sign)하는 법을 세웠다. 형조(刑曹)에서 아뢰기를, 󰡒무릇 결송하는 관리가 증거문서(文憑)에 성명은 쓰지 않고, 다만 자신을 나타내는 자신만이 아는 표시(署押)만을 하니 후일에 자세히 참고하기가 어렵고, 관리가 또한 이것으로 인하여 마음을 쓰려고 하지 않아서 혹 착오를 가져 오게 됩니다. 이제부터 당해 관리가 곧 성명을 쓰고 서압하여 영구히 지킬 법규정(恒式)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선왕조가 성립된 후 22년뒤에 태종 15년(1414)부터 이미 판결문에 법관이 수결(sign)만 하고 자신의 성명을 기재하지 않으므로 문제가 발생함을 지적하고 법관이 자필로 자신의 성명을 쓰고 나서 동시에 수결(sign)도 함께하는 규정을 영구히 정하도록 건의를 하여 왕이 그대로 따르게 됨을 알 수 있다.



4)송사업무보고

(1)노비의 맞고소사건등 소송사건의 처리횟수를 보고하고,(2)노비를 판결(決訟)한 숫자에 대해 임금이 질문을 하며(3)판결회수를 보고하되 적게 처리하면 1계급 강등 처벌하도록 건의를 하고,(4)보름마다 재판횟수를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하며,(5)재판을 지체하지 않도록(6)판결기한을 준수하여야 하며,(7)전국의 형사재판 사건의 지체사실을 임금에게 보고한다.

이상과 같이  조선왕조에서는 태종 6년(1405)에는 재판에 관한 소송업무와 잡송등의 재판 건수를  임금에게 보고 하도록 하고, 태종13년(1412)에는 임금이 직접 해당공무원을 불러서 재판업무의 건수를 물어보기도 한다.그리고  성종 20년(1488)에는 재판업무의 처리건수가 적으면 1계급 강등하라고 건의를 하며,

성종 30년(1498)에는 보름마다 한 번씩임금에게 처리건수를 보고하며,6, 7년 동안이나 정체시키면서 판결하지 않는 일도 있으니 매우 놀라운 현실에 이를 임금에게 보고를 하여 지체하지 않도록 한다.그리하여 현종 4년(1837)과 영조 6년(1729)에는 경국대전등에 규정된 판결기한을 준수하여 전국의 형사재판사건이 지체되는 사실을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하여 소송사건을 나태하게 처리하거나 적게 처리하거나 신속하게 처리하지 않도록 법으로 강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토록 조선왕조에서는 국익은 물론이고,백성들의 생명과 신체와 재산과 기본권에 관계되는 중요한 공무가 소송업무이었다고 생각했기에 임금에게 이토록 세밀하고 잦은 보고를 하고 임금도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런것만이라도 조선왕조가 왕권전제국가라고 말할 수 없는 민주적인 정치철학과 정신과 사법정신과 제도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지...

물론 사법연감에 해마다 다 통계가 잡히고 있기는 하지만,지금의 우리들의 대표자나 통치자나 정치가들도 조선왕조의 정치가나 통치자나 공직자나 지도자들 처럼 국민들의 인권과 공직자들의 나태한 행위등에 대해서도 우리조상들 이상으로 더 자랑스런 제도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인지... 

二)재판의 이상(理想)
조선왕조의 재판의 이상은 공정한 재판.신중한 재판,신속한 재판,실체적진실을 발견과 인권보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게 서양에서 수입한 근대의 발달된 선진국의 민.형사재판의 이념의 요소가 아닌 우리 조상들이 조선왕조 500여년간 재판문화를 유지한 기본이상이다.

이번호에서는 이런 내용이 조선왕조의 재판의 이상이라고 하며 맛보기라도 보여야 할 것 같아서

재판은 1)신중하고 공정하여야 하며,2)신속하고 원망이 없어야 하며,3)실체적진실발견하기 위하 가)일반이론과 나)증거나 문서를 중요시하는 재판법이론과 정신에 관한 실록기록을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이렇듯이 조선왕조에서는 우리 조상들은 재판을 신중하게 공정한 재판을 할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도 우리들의 해방이후 50여년간의 재판문화도 600여년이나 330여년이전의 우리조상들의 재판문화는 상상도 할 수 없이 인지가 발달되고 깨어있고 개방되어 있는 사회이므로 후손인 우리들은 더  신중하고 공정한 재판을 하여야 하며,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다.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소위말하는 캐캐먹은 시대의 조상들의 정신과 이론에 뒤지는 재판문화가 있다면 우리 조상들이 우리들을 보고 뭐라고 하실른지..

이상과 같이 조선왕조에서는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일반이론으로 세종 13년(1430)에는 임금이  아 슬 도다,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고, 형벌로 수족이 끊어진 자는 다시 이을 수 없으니, 진실로 한번 실수하면 후회한들 미칠 수 있으랴며 한번의 재판의 실수도 죽은 생명과 끊어진 수족이 다시 회복되지 못하며 후회한들 되돌리수 없는 것이라며 실체적 진실을 밝혀 후회하는 재판을 방지하기 위한 설명을 한다.

그래서 법관이나 검사등 법조인들에게 재판에 임하는 자제로서 “옛 일을 거울로 삼아 지금 일을 경계하여 정밀하고 명백하며 마음을 공평하게 하여, 자기의 의견에 구애됨이 없고, 선입(先入)된 말에 위주함이 없으며, 줏대없이 남의 의견에 덩달아 같은 행동(附和雷同)으로 따르는 것을 본받지 말고, 구차하게 머뭇거리지(因循) 말며,

죄수가 쉽게 자복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형사재판의 판결문(獄辭)이 빨리 이루어지기를 요하지 말며 , 여러 방면으로 힐문하고 되풀이해 찾아서, 죽는 자로 하여금 저승(九泉)에서 원한을 품지 않게 하고, 산 자로 하여금 마음 속에 한탄을 품음이 없게 하며, 모든 사람의 심정이 서로 기뻐하여 교도소(囹圄)에 죄수가 없게 하고, 화한 기운이 널리 펴져서 비오고 볕나는 것이 시기에 순조롭게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라며 오늘날도 잊어서는 않되는 금과옥조같은 명언을 하고 있다.

중종 34년(1539)에는 미진한 곳이 많아 의심스러운 옥사라 미진한 점을 상세히 분간(分揀)하고 선조 29년(1595)에는 옥사를 처리하는 법은 그 죄의 유무를 논해야 할 뿐 다른 것은 고려하면 안된다고 하고,선조 36년(1602)에는 살인옥사는 필히 시체검안서와 검시도에 기록된 살인원인으로 단안한다.그리고 선조 40년(1606)에는 억울한 형사재판사건을 법관이 사실과 법률을 조사(審理)하는 것이 가장 시급함을 강조하고,광해 6년(1613)에는 형사재판은 반드시 명백하게 밝힌 연후에야 죄 없는 사람이 원통한 일을 풀어 버릴(伸寃)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이므로 실체적진실을 명백하게 밝혀야 인권이 보장된다고 한다.광해 10년(1617)년에는 중대한 옥사는 더욱더 상세히 하여서 조금도 미진한 점이 없게 하라는 왕명이 있다.


오늘날도 우리는 억울한 사건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무색투명한 마음으로 재판에 임하여 한다고 하는 말들도 이미 세종임금이 “정밀하고 명백하며 마음을 공평하게 하여, 자기의 의견에 구애됨이 없고, 선입(先入)된 말에 위주함이 없어야 한다”라는 왕명에서 이미 알려진 법관의 마음자세이다.


오늘의 우리 판검사나 법조인들에게 다시 한번 세종임금이 주는 명언을 되새겨서,판사나 검사나 변호사는 결코 줏대없이 남의 의견에 덩달아 같은 행동(附和雷同)으로 따르는 것을 본받지 말고, 구차하게 머뭇거리지(因循) 말며, 죄수가 쉽게 자복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형사재판의 판결문(獄辭)이 빨리 이루어지기를 요하지 말며, 여러 방면으로 힐문하고 되풀이해 찾아서, 죽는 자로 하여금 저승(九泉)에서 원한을 품지 않게 하고, 산 자로 하여금 마음 속에 한탄을 품음이 없게 하며, 모든 사람의 심정이 서로 기뻐하여 교도소(囹圄)에 죄수가 없게 하고, 화한 기운이 널리 펴져서 비오고 볕나는 것이 시기에 순조롭게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라는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야 하지 않겠는지...




이와같이 우리 조상들은 실체적진실을 밝히기 위하여 증거재판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그런데 춘향전이나 일인들이 만들어낸 기록이나 수집한 기록이나 말에 의해 우리는 조선왕조는 고문재판으로 시작하여 끝을 맺은 부끄러운 재판문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거나 말을 한다면,그게 말이나 되는지...조상들의 뭐라고 하실른지...

오히려 오늘날도 우리공동체에서 500여년의 재판문화를 가졌던 조상들의 지혜를 알고 배우고 활용해야만 더욱 잘살고 경쟁력있는 문화를 창달하는 공동체가 될 것이 아닌지...

내것을 조상의 것을 알지도 알려고도 하지도 않으면서,남의 것만 좋은 것이라거나,수입한 문화만 이상적이라는 지도자가 있다면...조상들이 이들을 보고 뭐라고 하실른지...

이제 서양에서도 대형 변호사 회사가 막 밀려오고 있다는데 이에 대항해서 살아남을 국내 변호사회사가 드물다는 기사를 보고,우리 조상들이 뭐라고 하실른지...그 많은 감투쓴 대단한 천재들이 해방 50여년동안 무엇을 생각해 왔는지...무엇을 위해 그 위대한 권위적인 자릴들을 오랫동안 지키고 있었는지...우물안의 개구리들의 권위보다는 더 걱정스런 것은, 이나라의 장래가 권위주의나 이기주의나 물질만능만으로 흘러간다면...그렇지 않는 깨어있는 선진국의 사람들이 당당하게 우리들의 약점을  밀고 들어온다면...우리는 단순한 몇과목의 법조문 해석만으로 언제까지나 국제경쟁력을 이겨낼 준비가 충분하다고 할 수가 있을른지...

늦었다고 생각할 때 확실하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제발 교과서에 적인 우물안의 지식만으로 최고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들이 사라지고,겸허한 마음으로 우리공동체의 진정한 사법문화의 경쟁력을 높힐 정신과 생각과 이론과 무기를 조상들의 말씀과 이론들도 경청하면서 하루빨리 준비해 놓는 성숙한 모습이 하루 빨리 나타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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